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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6-2 / 05.5.27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고린도전서

6-2 / 05.5.27

정인순 2010. 10. 11. 13:23

광주 강의 6-2  이근호 목사
녹취:서경수

 

http://media.woorich.net/~woorich/study/gwangju/gwangju050527b.mp3


 두 번째 시간 시작해 봅시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이냐, 영에 속한 사람이냐?’ 고 묻는데, 이렇게 물으면 좀 곤란합니다.  영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이 있는데 그러면 육신에 속한 사람은 이 둘 중에 어디에 속하느냐? 할 때,  보통 신학 책에 보면 육신에 속한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인데 여전히 옛사람, 즉 육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고 분류합니다.  그러니까 육신에 속한 사람은 지옥은 안 가지만 하는 행세가 육적인 행세를 하기 때문에 구원은 받지만 영적인 폼을 내지 못하는 그런 사람으로 말하고 있어요.  

이렇게 되면 굉장히 많은 문제점이 드러납니다.
어떤 문제점인가 하면, 어느 정도 단계가 되어야 육신에서 영으로 승급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40일 금식 기도했으니까 영적이다.’ 라고 했을 때, 100일 금식 기도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40일 정도는 육신에 속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기껏 40일이야.  그 정도로 영적인 사람이라고?” 이렇게 될 수가 있지요.

100일 동안 단식하고 산 사람이 있잖아요.  도롱뇽을 지키겠다고 금정산에서 뛰어내려온 스님.  그런 사기가 어디 있어요.  100일 굶고 살아요?  황우석 박사가 배아줄기세포 연구하지 말고 그 여승 연구해봐야 해요.  

육신에 속한 사람은 비록 육신의 모양을 드러내지만 영에 속한 사람이고 구원을 받는다고 이렇게 주장하면, 이것은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복음적 관점하고 다른 관점이에요.  이것은 개인적인 구원에 욕심이 나서 분류시킨 인위적인 분류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분류한 것이 잘못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너는 육에 속하고 나는 영에 속했다.”고 한다면 듣는 육은 기분 나쁘지요.  “내가 보기엔 네가 육이야.”하고 서로 싸울 수 있단 말이지요.

제가 전에도 얘기 했지요.  인간이 기준이 되어 분류시키면 자기가 기준이 되기 때문에 안 됩니다.  결국 해석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육에 속한 사람은 이런 식의 모습을 보인다.’ 라고 말을 해야지, “이런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당신은 육에 속한 사람이야.” 라고 규정짓지 말자는 것입니다.

광야에 있었던 사람들 전부가 홍해 갈라지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해서 망해버렸어요.  그럴 때 이들은 지옥을 가기 원해서 원망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도 모르게 불쑥 뛰어나온 성깔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이게 도대체 뭐야, 물이 없다니.  양식이 없다니.  우리보고 죽으란 말인가?” 이렇게 불평하다 광야에서 죽었어요.

그렇다면 숨어있는 내가 모르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모릅니다.  “나는 5x6이 뭔지 모른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아는 사람이지요?  5x6은 24는 아니고 25도 아니란 사실을 알잖아요.  그럼 언젠가는 29도 아니야.  28도 아니야.  31도 아니야.  30 그래 맞아.  결국 이 사람은 알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 아닙니까?  

5x6이 30인줄 모르는 사람은 이 정도 돼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5가 뭔데?  곱하기가 뭔데?” 아예 숫자나 기호조차 모르는 정도가 되어야 이게 진짜 모른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뭐가 육적인 사람인가 하면, ‘영, 육, 육신 그것 왜 분류하는데?’ 라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에 한해서 그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이 육에 속한 사람이냐, 영에 속한 사람이냐? 지옥 가느냐, 천당 가느냐?” 이것을 규정짓지 말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육신에 속했습니다.” 라고 하고, 그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당신은 육에 속했으니까 지옥 가잖아.” 라고 단정 짓지 말자는 것입니다.  

단정 짓지 말자는 말은, 그 사람의 운명이 아직 결정되지 않아 유보적이란 뜻이 아니고, 이미 결정 되었지만 우리가 시건방지게 판단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 지옥 가는 것 연구할 필요 없단 말입니다.  다만 조용기 목사 하는 모든 것은 육적이고 육신적인 것이라고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가 반드시 지옥 가느냐 하는 그 문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조치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은 자는 지옥 간다.” 이렇게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관점이 어떤 관점이다?  영적인 관점이란 말입니다.  조용기 목사의 운명까지 하나님께 일임하는 그 관점이 ‘바사르’ 관점이란 것입니다.

이제 두 째 시간이 되니까 이 부분에 대해 조금 이해가 됩니까?    

그렇다면, “육신에 속한 사람이 이렇다.” 고 했을 때, 이렇게 정의 내리는 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나는 영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육신에 속한 것은 알 필요 없어.” 라고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육신이 튀어 나오고, 영이 튀어 나오고, 육이 튀어나올 수가 있습니다.  튀어 나올 때, 육신이 튀어나왔다고 “나는 영적이 아니었구나.” 라고 낙담한다든지, 육신이 튀어나올 때 “맞아 나는 아직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야” 라고 낙담하는 그 자체가 영이 되고 싶어 환장한 육신에 속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주님이 어떻게 하든 나는 내 구원만 챙기면 된다.’는 그러한 개인적인 이득관계에다 예수님을 끌어당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지난 시간에 한 것을 정리하고 진도를 나가 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제일 먼저 뭘 했는가 하면, 사도 바울은 우주적 원리까지 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우주 안에서의 나란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주적 원리에서 중요한 것이 뭡니까?  송판에 대못이 박힌 거예요.  그래서 얼핏 보면 못의 철 재료와 송판의 목재 자질과 섞인 것 같지만 사실은 안 섞이지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육과 영과 육신을 나누는 이유가 진정 하나님께서 박아놓은 못이라면, 여기에서 뭔가 증거되는 것이 있어요.  뭘 증거하느냐 하면 ‘저게 육이고, 저게 영이고, 저게 육신이구나.’ 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증거물을 남기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은 ‘저게 육이고, 저게 영이고, 저게 육신이구나.’하는 것을 분류시킬 수 있는 증거물을 남기지요.  그기에 비해 진짜 육적인 사람은 어떤 증거물을 남기는 것이 아니고, 내가 기꺼이 구원되려는 자기 생각에 몰두하지요.  하나님이 주신 것을 퍼트리고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 끌어 모아 ‘이것은 내 것이고, 저것은 네 것이야.’ 이런 식으로 자기 것을 모으려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진정 너희들이 영적인 교회라면 지금부터 내가 영과 육과 육신을 분류할 때, 여기에 동의해라.’는 말입니다.  ‘이런 것이 어린아이 같은 육신적인 것이고, 이런 것이 육적이고, 이런 것이 영적이다.’ 라고 이야기 한 것에 대해 같이 동감하고 나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고린도교회의 내용은 무엇인가?
‘고린도교회는 일단 교회다.  1장을 봐라.  은혜로 되었잖아.  그런데 그곳에 문제성이 있는 자들이 있더라.  그러니까 우리는 그런 나쁜 것은 본받지 말고 제대로 된 교회를 만들어 보자.’ 라는 자아 중심, 자기 교회 중심, 괜찮은 교회, 멋진 교회를 만들어보겠다는 지침서로 고린도 전,후서를 이용하는 거예요.  

결국 남은 것이 뭔가 하면, 주님이 아니고 ‘이렇게 해서 우리는 괜찮은 교회 되었다.’고 하는 [자기 의]를 증거하는 결과를 남긴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증거를 남기느냐’가 아니라, ‘나는 어디에 속하면 안심할 수 있을까’에 치중하면서 고린도서를 보면 전혀 엉뚱한 해석이 나오게 됩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교회 안에서 서로 소송을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럴 때, 영과 육과 육신을 나눈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천사도 재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너희가 어떻게 해서 너희 형제들끼리 서로 송사하고 하느냐?  차라리 속는 것이 낳지 아니하냐?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렇다면 왜 고린도교회에서 서로 소송하는 일이 벌어졌는가?  그것이 바로 육에 속한 것이고 육신에 속한 것이고 영은 아님을 주님께서 고린도교회를 통해 증거하는 것이란 말이지요.  이렇게 바울이 설명을 했을 때, 우리는 박수를 치면서 동감하면 됩니다.  “맞습니다.  교회는 내 구원이 용도가 아니고 이미 구원 받은 자들을 통해서 영, 육, 육신을 드러내는 그러한 것으로 영적인 몸으로 다루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기존 신학이 고린도교회는 구원받았다.  우리도 잘 해보자는 식이라면, 바울은 “이러한 것이 증거되어야 참된 교회입니다.” 라고 할 때, 공감하는 자들이 일부 있을 것이고, 반대하는 자들이 있을 것인데, 결국은 자기 백성 찾기의 일환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1년 6개월 있었습니다.  2차 전도여행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서 천막 만드는 일을 해 가면서 섬겼던 교회가 고린도교회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어떻게 부흥시킬까, 발전시킬까 이런 것은 의미 없습니다.  고린도교회를 통해서 주께서는 어떤 증거를 남길 것인가 하는 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이게 바로 영적인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미 구원 받았는데 무엇 때문이 구원 받으려고 애를 쓰겠습니까?  다만 이러 이러한 것을 증거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영적인 사람은 육적인 것이나 육신적인 것은 안 나타납니까?  왜 안 나타나요.  나타나지요.  영적인 사람도 육과 육신적인 것이 나타날 때, 그것이 바로 나를 통해서 주께서 이런 것을 드러내셨다고 믿어질 때 그것이 바로 영적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적인 사람은 육과 육신이 안 나타나지요.

방금 나타난다고 해놓고 안 나타난다고 하니까 좀 이상한데, 설명을 다시 합시다.  영적인 사람은 육신과 육의 요소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해석과 이해를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의미에서 영적이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은 절대로 육신과 육적인 것이 안 나타나게 되지요.

영적이라고 해 놓고 육적인 것이 나타나니까 ‘나 지옥 갈 거야.’ 하고 나자빠질 때, 그 사람은 예초부터 영적인 사람이 아니고 다만 영적인 사람 되려고 애쓴 사람에 불과한데 이런 사람은 처음부터 영적인 사람이 아니었어요.

자기 구원받을 욕심으로 육신과 육을 버리고 금욕과 절제를 통해 영적인 사람으로 나아가려고 애쓴 사람에 불과하지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극히 육적이고 육신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육적인 사람은 영적인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계속 육신과 육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 말씀이 맞잖아요.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이.  제가 해석을 교묘하게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맞아요.

그러니까 육적인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없고, 육신적인 사람도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없고, 영적인 사람도 육적인 사람도 될 수 없고 그런 것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이 육에 속하냐 영에 속하냐 라고 이렇게 분류시키기가 고란해요.  다만   육이라는 것은 영의 일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육신이란 것은 어린아이 같은 어리석음을 보일 때 이것을 육신적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분명히 육과 영을 나눴잖아요.  육에 속한 사람은 영의 일을 분별할 수 없다고 육과 영을 나눴다구요.  육과 영을 나눴으면, 여기에 3장에 들어가서 이런 자는 육신에 속한 어린아이 같다는 이야기를 왜 했을까요?  

다시 생각해 봅시다.
3장 1절 읽어봅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같이 대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요?  육신에 속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이 아니고, 그런데 육신에 있다는 말이 그리스도 밖에 있다는 말도 아니에요.  그래서 이게 어려워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내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어린아이 같은 너희에게’ 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에게’라는 말도 아니에요.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할 때는 그 사람의 육신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이 아니고, 육과 영에 대해서는 이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 안, 그리스도 밖이라고 하지만, 육신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는 그리스도 안이냐 밖이냐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어린아이 같으냐 어른 같으냐를 가지고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해도 뭔가 확 뚫리는 느낌이 아니라 뭔가 미진한 느낌이 있지요?  그것이 뭔가 하면, ‘그래서 육신에 속한 사람은 영이란 말입니까 육이란 말입니까?’ 이렇게 또 묻고 싶은 거예요.

얼마 전에 제 아내와 같이 조조할인 영화를 봤습니다.  둘이 4,500원 내고 봤어요.  이게 [십자군 운동]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의 풍물, 경제 상황, 십자군 운동의 동기 이런 것들이 나온다구요.      

제같이 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대사 하나하나가 중요하고 역사적 상황들에 다 관심을 갖게 되는데, 제 아내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니까, ‘재미있었나?’고 물으니까 ‘별로 재미없다.’고 해요.  

제가 “그 영화가 재미있더냐?”고 물은 것은, 그 영화를 본 사람에게 해당되는 질문이지요.  남자한테 묻느냐 여자한테 묻느냐는 관점이 아닙니다.  그 영화를 본 사람에 한해서 ‘그 영화 재미있더냐’는 물음이 성립되는 거예요.

어찌했던 간에 사도 바울은 손해 볼 것이 없는 거예요.  ‘저사람 있지.  어린아이 같아.’ 이 소리를 본인이 들었어요.  ‘뭐! 내가 어린아이 같다고.  내 나이가 80인데.’ 이렇게 나오면 육의 사람이고, ‘내가 어린아이 같다구요.  그럼 어떻게 하면 어른이 될까요?’ 이렇게 나오면 영적인 사람이에요.

영적이냐 육적이냐는 것은 유보적이에요.  육신이란 것을 이야기함으로서 어느 쪽에 속하는지는 그 사람의 반응으로 아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육신이란 개념입니다.  이제 좀 잡히십니까?

육신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육적이냐 영적이냐 하는 것이 아니라, ‘왜 어른답지 못하고  어린이이 같으냐.’ 하는 것이 육신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서의 내용은 교회 밖의 사람에게 한 것이 아니고 교회 안의 사람에게 이야기한 것이기 때문에 육신적인 관점에서 해석을 하면 다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육신적 관점이 한 마디로 뭐냐?  그것은 어른과 어린 아이의 차이점을 보면 되지요.

어린아이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아를 떠나지 않습니다.  자기 집착이지요.
만약 이런 아이 같으면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자기 반에 모든 아이가 휴대폰을 갖고 있는데, 한 아이가 ‘애들아 휴대폰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어?  아무 필요 없는거야’ 이렇게 말했다면 이는 학부모지 어린아이가 아니잖아요.  이렇게 나왔을 때, 그 순간 말한 아이는 어른이 되고 나머지 전부는 어린아이가 되겠지요.

바로 이 어른이 사도 바울입니다.  물론 고린도교회에 사도바울의 말에 동감하는 사람이 있겠지요.  그런 사람은 어른입니다.  다만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어린아이 같다는 말을 한 것은 본인은 어린 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자기는 어른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린 아이야’ 라는 것을 말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린 아이의 특징은 자기 집착에서 헤어나지 못한 자입니다.  이런 자를 육체에 속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집착에서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그 결과가 제 2의 자아상을 여기에 둡니다.  어른들은 행동을 하게 되면 자아가 없어지고 자기보다 더 큰 세계가 보이지요.  그런데 어린 아이는 행동을 하면 그 행동 안에 더 멋있는 자아상을 상상하게 됩니다.  이게 어린 아이의 특징입니다.

특히 어린 아이들은 유혹받기 쉬워요.  예를 들어, 서랍에서 돈을 훔쳤잖아요.  그런데 돈 훔친 것이 나쁜 짓 인줄 몰라요.  뭐에 신경 쓰는가 하면 ‘엄마가 화내면 내가 매를 몇 대 맞아야 하는가?  그 때 내가 얼마나 아프겠는가?’ 하는 것만 생각해요.  돈 훔친 것이 한국 경제에 왜 나쁜지 몰라요.

어른과 어린아이는 정도문제지요.  내가 빚이 많아서 빚을 좀 갚으려고 은행원하면서 불의한 방법으로 고객을 확보해서 보너스를 많이 받아 빚을 청산했을 때, 아내는 돈 많이 벌어온 남편이 너무 고맙고 좋기만 해요.  다음 달에도 많은 보너스 챙겨오기만을 기다리지요.  그러나 그로 인해 서로 은행간 과다 경쟁으로 다음부터는 몇 배 더 열심히 일해야 과거 정도의 고객을 확보하게 된다는 사실을 아내는 모르지요. 상대적으로 그 아내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지요.  타인을 생각할 줄 몰라요.  

애들이 시험을 치는데, 아무 생각 없이 되는대로 문제를 풀고, 평균 62점 받아서 35명 중 34등 해도 전혀 아랑곳 않고 재미있게 뛰놀고 그러는데, 어머니가 성적표를 보면서 화를 내고 회초리를 들고 야단을 치니까 그제야 아이가 시험 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을 알지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를 아는 것이 아니라, 시험 못 치면 엄마가 화내고 내가 회초리 맞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이것이 뭐냐 하면, 어린 아이는 계속해서 내가 유리하냐 불리하냐 이것에만 신경을 씁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아린아이가 가장 인간다워요.  이게 육신다워요.  여기서 육신은 짐승이거든요.  

짐승들의 특징은 예의범절이 없습니다.  짐승은 자연조건에 속하고 본성대로 살아갈 뿐 인습이나 문화, 예절 이런 것과는 무관하게 살아갑니다.  무슨 본성?  생존 본성.  이 생존 본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프로이드는 ‘정신병’이라고 했어요.  

잠 오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육신이 원하는 대로 그냥 다 하는 거예요.  이것은 정신병 이예요.  그래서 인간은 뭐냐, 이런 짐승에서 탈피해서 인간이 되는데 여기에서 철학자들이 하는 말은,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어서 이것으로 말미암아 짐승으로부터 구원한다고 본 것입니다.

이성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훈련과 훈계를 통해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예요.  이렇게 가르치지 않으면 짐승적인 본능이 나오기 때문에.  

교육학에서 가르친다는 말이 뭘 뜻하느냐 하면, 사람 보는 앞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교육이 아니에요.  교육의 목적은 ‘네 속에 이미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이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페스탈로찌의 이론입니다.  독일의 모든 교육, 그리고 근대 교육의 중심은 이 페스탈로찌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는 페스탈로찌 하면 운동장에 깨진 병조각을 줍는 것만 생각하는데, 이 사람은 인간이 갖고 있는 신이 주신 형상을 본인이 알아서 개발해 내도록 자극을 주는 것을 교육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나중에는 프뢰벨까지 나오지요.  유치원의 놀이기구 그것을 ‘은물’이라고 하는데, 장난감은 장난감인데 교육용 자재를 ‘은물’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독일 유치원 교육에서 처음 나온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부모가 돌볼 수 없으니까 본인이 갖고 있는 이성적인 잠재력을 개발하도록 자극을 주어서, 본인 스스로 ‘나에게도 이런 재능이 있었구나.’를 깨우쳐 주는 것이 교육이지요.  이것이 삐아제의 이론이고, 또 콜버그라는 사람의 [도덕 발전론]입니다.  이 사람은 인격, 품위, 도덕적 양심 이런 것들이 어릴 때부터 성장할 때까지 어떻게 발전되어 가는가를 연구한 사람입니다.  

그리면 콜버그 같은 사람이 완벽하게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교육학자가 인성과 품성을 스스로 개발한다고 했지요.  그러면 교육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지만, 경제학자가 보면 ‘놀고 있네!’ 라고 합니다.  백날 인성과 인품을 개발해도 사람이 배가 고프면 ‘언제 교육을 배웠냐?’하면서, 고급적인 아이디어를 이용해서 타인을 이용합니다.  그러니까 아담 스미스같은 경제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개인적인 인격이 고상해도 경제적으로 사회 정의를 이루지 못하면 말짱 도로묵이고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해서 나온 것이 존 롤스의 [정의론]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기회를 균등하게 주고 분배를 공평하게 하는 것이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법은 그 때 그 때 진화해야 되고 형편따라 달라져야 되지 도덕적 법을 고집하게 되면 경제 현황에 맞지 않다고 주장했어요.

사람들의 이론을 잘 들어보면, 경제학자의 이론으로는 그들만이 인류를 살릴 수 있을 것 같고, 교육학자의 주장을 들어보면 그들만이 인간을 바른 길로 인도할 것 같고 그렇지요.  그러나 그 모든 것의 문제점은 육신, 자아 중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바로보지 않기 때문에 나온 주장인데, 이것이 바로 어린아이 같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전체를 보지 못하고, 우주적 원리를 모르고 늘 자신의 일상적인 것만을 생각하고 고민하고 염려하면서 마땅히 자신에게 그런 권리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사는 사람이 육신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육신적인 사람이 아닌 자가 누구입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육신적인 사람이 아니었지요.  예수님은 이 땅에서 머리 둘 곳도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버지가 죽어서 장사를 치른 후에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하니까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했어요.  이게 얼마나 영적입니까?  아버지 장례식도 육신에 속한 것으로 대 자연의 원리로 보면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사람이 죽는 것이 별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것 회수해 가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옷 갈아입는 것이다.  “더러운 옷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그래서 죽는 것을 아까워하는 것은 마치 옷 벗기를 싫어하는 개구쟁이 같은 짓이고, 개구쟁이가 뭡니까?  어린아이 아닙니까.  자기 밖에 모르는.

어린아이가 “죽으면 안돼!  나 죽기 싫어!” 하면, 예수님은 “너 옷 안 벗을래.  이 녀석아.”

제발 자아라는 옷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일부라는 옷으로 갈아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이 하늘에 속한 형상처럼 우리도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옷은 흙에 속한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옷을 바꿔 입는 것이 그렇게 섭섭합니까?

이렇게 육신에 속한 사람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 육신이 뭐며, 육이 뭐며, 영이 뭔가를 보면서 이렇게 세상을 넓게 볼 수 있다는 자체가 영에 속한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계속 진도 나가 봅시다.
3장 10절을 봅시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하면, 3장 3절에 보면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이렇게 되어 있지요?

다시 설명합니다.  
제가 물을 테니 답변해 보세요.
육신에 속한 사람이 뭐가 돈독한 사람이라구요?
[자아]지요.
자아가 형성되면 뭐가 보이겠습니까?
[타인]이 보이지요.

사람이 강하면 남에게 피해를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무 강해서 모든 사람이 그분 앞에서 다 죄인 아닙니까.

자아는 아무리 해도 타인을 타라 잡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자아의 특징이에요.  상대방을 이해한다고 아무리 해도 상대방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 자아의 한계입니다.  이것을 네비나스라는 사람은 ‘초월’이라고 했습니다.  예전의 ‘초월’은 더러운 곳에서 성스러운 곳으로 뛰어넘는 것을 ‘초월’이라고 했는데, 네비나스는 그렇게 보지 않고 자아에 갇힌 자가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초월’에 해당되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단 것입니다.

그러면 신은 어디에 있는가?  타인의 얼굴로 온다는 것입니다.  이 얼굴은 내 자아로 말미암아 피해를 입은 양태로 자아에게 다가옵니다.

나 때문에 피해를 입은 자가 여러 명이겠지요.  그러면 그들이 내게 피해를 호소합니다.  ‘너 때문에 내가 아프다. 너 때문에 내가 괴롭다.’ 할 때 비로소 자아는 ‘초월’과 접촉이 됩니다.  여기서 진정한 이웃 사랑이 나옵니다.  이것이 네비나스의 철학입니다.

신은 바로 우리 때문에 일그러진 모습으로 오는 거예요.  십자가의 아픔으로 나타나면 그 십자가의 아픔 속에 신의 얼굴이 들어있고, 그 얼굴은 우리 때문에 상처받은 아픔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이 네비나스의 주장에 대해 신학자들이 깜짝 놀랐어요.  철학으로 십자가의 신학을 풀어낼 줄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이 사람이 기독교 신자냐?  아닙니다.  유대인이에요.

마르틴 부버라는 사람은 유대인 신학자인데 이 사람은 ‘나와 사물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라고 보았습니다.  사물의 관계란 뭐냐, 나와 그것.  “그 자식이 말이야, 그 놈이”에서 그는 인간이 아니에요.  내 앞에서 물건에 지나지 않아요.  그래서 그 물건은 부서져도 그만 이예요.  그런데 마르틴 부버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주신 이웃 관계가 깨지니까 진정한 신의 관계는 뭐냐, 나와 너의 관계로서 그 안에 신이 존재한다고 본 것입니다.

유대인 수용소를 거쳐 가면서, ‘인간이 무엇인가? 인간이 어느 정도 지독하게 할 수 있는가?’ 이런 것을 연구하면서, 그러면서도 신을 부정하지 않고 신의 사랑은 바로 ‘신의 모든 죄는 나와 그것과의 관계에서 발생하고, 신의 모든 사랑은 나와 너의 관계에서 발생된다.’는 것이 마르틴 부버의 주장이라면, 이에 한 걸음 더 나가서 그런 ‘너’가 그냥 ‘너’가 아니라 내 때문에 피해보는 당사자의 입에서 나오는 ‘너’라는 것입니다.  이럴 때 진정한 윤리와 도덕은 피어난다고 본 것입니다.  

이 철학의 문제점이 뭡니까?  이것 하고 둘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문제점이 뭘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죄란 것은 예수님이 와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네비나스가 주장하는 죄는 뭔가, 내 때문에 피해를 입은 상대방이 있으면 그것이 나에게 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것은 뭡니까?  윤리, 도덕적 죄지요.  그렇다면 네비나스의 철학에 의하면 예수님은 필요치도 않고, 정신병자지요.  모든 사람을 죄인이라고 했으니까.  자기 빼놓고.  

반대로 이야기해서 복음을 안다는 것은 결국 뭐라고요?  윤리, 도덕이 아니고,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인 것을 깨닫는 것이 복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상하기 짝이 없는 철학도 다른 복음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다른 복음을 증거하는 오늘날 교회는 어떤 곳이냐?  감리교, 장신, 자유주의 신학 등등이지요.  이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와 모순을 교회가 나서서 해결함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아직도 이 사회에서 유용한 기관임을 알리는 것을 사명이라고 여깁니다.

이런 한신, 장신, 감리교, 천주교 등이 이런 신학을 펼 때, 무식한 기존 교단이 반박을 못해요.  기껏해야 ‘그렇게 해서 교회가 되느냐?’는 식의 주장만 하지요.  이렇게 반박하는 쪽도 복음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철학이나 교육학 등은 이웃에 대한 아픔에 관심을 가지면 그것이 사랑이라고 여깁니다.  옥에 갇힌 자를 돌아보고, 헐벗은 자를 도와줄 때 그것은 종교와 관계없이 이것이 곧 구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저도 교사 생활하면서 여름방학 때 연수를 받았는데, 강의하는 교육학자들이 저렇게 복음을 모르는가 하는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아직 신학을 공부하기 전이었고, 다만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책을 읽었는데 그래도 복음이 아닌 것이 구분이 되었습니다.

영과 육과 육신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2005년 6월 17일 8시 41분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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