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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야고보서 3:6-12 / 출발점과 도착점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야고보서

야고보서 3:6-12 / 출발점과 도착점

정인순 2026. 6. 21. 17:56

음성 동영상 Youtube

 

출발점과 도착점

 

이근호
2026년 6월 21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3:6-12

(3: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3: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3: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3: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3:10)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3: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3: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인간에게 있어 출발점은 필요없습니다. 그냥 내가 여기 있음으로 충분합니다. 항상 ‘나’로부터 출발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굳이 세상 전부를 다 할 필요가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출발점에 대한 무지가 결국 도착점의 무지로 이어져야 그동안 애써 세상을 살아왔던 모든 것들이 아무 소용없게 되어 버립니다.

죽음이라는 바로 이런 ‘소멸의 시스템’입니다. 모든 것이 다 사라지는 그날,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존재로 드러나게 됩니다. 자기에게 열심과 충성을 다했건만 돌아오는 것은 ‘내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음’입니다. 이런 현상은 출발점과 도착점을 미리 알리 못한데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세상의 출발과 그리고 최후의 도착을 알려주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을 가진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민족마저 율법으로 인해 도리어 멸망을 당합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흩어진 12지파’입니다. 이들 마지막 때의 새로 나타난 이스라엘 지파를 통해서 율법과 복음은 출발점과 도착점을 알려줍니다.

맨 먼저, 인간보다 먼저 언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악마도 인간을 향하여 말합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
자, 오늘날 인간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과 악마의 말 중에 어느 것을 선호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를 인간보다 우선적으로 챙기십니다. 반면에 악마는 인간은 우선시하는 제안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악마의 말을 따르게 됩니다.

이는 인간의 성격과 본질이 악마의 말로 인하여 이미 결정지어졌다는 겁니다. 악마의 말을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는 본성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는 ‘지옥의 불’을 언급합니다. (약 3:6) 즉 죽기 전에 이미 인간들은 지옥에서 나오는 언어들을 자신들이 구사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배제하고 자신들의 연대를 하고 단결을 하고 결집을 하는 식으로 얼마든지 자신의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겁니다. 출발점과 도착점을 부여받아서 그것을 알리는 기능을 부여받은 이스라엘마저 중도에 이런 인간적인 언어라인으로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그러한 사례가 민수가 16장에 나옵니다. 민수기 16:3,18-21, 32-35에 보면, “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
 
너희는 각기 향로를 잡고 그 위에 향을 두고 각 사람이 그 향로를 여호와 앞으로 가져오라 향로는 모두 이백오십 이라 너와 아론도 각각 향로를 가지고 올지니라 그들이 각기 향로를 취하여 불을 담고 향을 그 위에 두고 모세와 아론으로 더불어 회막문에 서니라 고라가 온 회중을 회막문에 모아 놓고 그 두 사람을 대적하려 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회중에게 나타나시니라…

만일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으로 입을 열어 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속을 삼켜 산채로 음부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것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속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그 주위에 있는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도망하며 가로되 땅이 우리도 삼킬까 두렵다 하였고 여호와께로서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오십 인을 소멸하였더라”

즉 지옥은 이미 율법 안에 담겨져 있어서 그것이 수시로 현실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이 결국 율법을 버리게 되는데 그로 인하여 다음과 같은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즉 율법은 보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강제성으로 작용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 해석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개인적 처신은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새로운 보편성이 등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완성태로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사랑’입니다. 이방인이든 이스라엘이든 모두다 망하게 된 시대인 신약 시대에서 천국을 위해 보편성이 등장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원래 지옥이란 감옥입니다. 빚을 갚지 못한 자들은 지옥에 갑니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5-26) 천국 간다는 것은 모든 빚이 다 갚아졌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용서요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간다는 것은 그동안 제때에 하나님의 용서를 멈추지 않고 투입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천국 간다는 것은 그동안 인간들로부터 그 어떤 공격을 받더라도 자신의 의로움과 자기 변명과 자신의 윤리와 도덕으로 방어힐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내용이 세상과 단절된 그 벽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벽이 무너지고 그래서 말씀 자체로 덮히고 깔린다면 바로 이것이 성령님이 벌리시는 무조건적 작업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소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에게 넘어오면 성도는 ‘주님의 앰프’가 됩니다. 더는 자신이 자기를 해석하지 않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세상에 할 일이 있음을 감사합니다. 시작과 끝을 전하는데 조금도 주저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9강-야고보서 3장 6-12절(출발점과 도착점) 260621-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3장 6-12절입니다.

야고보서 3:6-12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일관성에 관한 이야기, 그 일관성이 인간에게서 계속 나와야 하는데, 다른 건 통제가 다 되는데 인간의 말이 나오는 혀는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혀로 나오는 말이 지옥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말은 죽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이미 살아있으면서 지옥 불의 파이프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 파이프가 말이라는 것, 신체로 말하는 혀라는 겁니다.

4절, 5, 6절을 보게 되면, 그 혀에서 불이 나오고 나오는 그 불이 지옥 불이기 때문에, 6절에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라고 되어 있어요. ‘생의 바퀴’라고 하는 것은, 인생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시스템인데 죽을 땐 모든 시스템이 꺼지죠. 파괴됩니다. 그러면 살아 있으면서 그 시스템이 남기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추억입니다. 인간 자기가 말하면서 살아왔던 추억.

그 추억이 좋고, 그립지만 결국 그것은 우리 스스로 자신의 생, 삶이라는 시스템을 망가뜨림으로써 죽게 되면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한다는 거예요. 여기서는 ‘불사른다’고 되어 있는데 사라지는 것도 좋게 사라지면 좋겠습니다만 ‘불사른다.’ 뭐가 덮쳐서 불사르느냐? 지옥의 불이 우리의 아름다웠던 삶, 자식 키우면서 행복했던 가정생활, 승진하고 출세하면서 남한테 인정받은 것, 월드컵 한 골 넣은 것, 참 아름다운 추억인데 지옥 불이 와서 몽땅 다 태워버립니다.

‘너의 시스템은 죽는다. 말로 형성된 시스템은 지옥에서 올라온 말로 인하여 다 파괴된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 ‘인간은 왜 죽는가?’ 자기 말발 때문에 죽는다, 그런 이야기죠. 왜 이 말발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죽을 수밖에 없느냐? 여기 ‘형제들아’라는 말이 나와요, 10절에, “내 형제들아.”

야고보서의 편지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는 편지가 아니고, 흩어진 열두 지파만 알아듣게 되는 편지입니다. 이 흩어진 열두 지파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진 게 율법인데, 율법의 기능과 지옥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율법은 인간의 출발 지점과 도착 지점을 알리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이 어디서부터 출발했고, 나중에 꺼질 때 어떻게 최후를 맞이하는가?’ 이것이 율법안에 다 소개되어 있는 겁니다.

인간의 출발 지점은 바로 약속에서 나왔다. “유월절 피를 발라라. 그러면 산다.” 유월절 피, 약속이거든요. 언약이거든요, 그 약속을 만약에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가? “거부하면 죽는다” 이렇게 되거든요. 인간이 죽게 되면 어떤 기능을 못 하느냐 하면, 도착 지점을 알 수가 없어요. 일단 출발해야 도착 지점을 아울러 알릴 수가 있거든요.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 ‘인간이 어디서부터 시작했고 어떻게 끝나는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인간은 태어났다’라는 것이 율법이 주어진 흩어진 이스라엘에만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성도의 사명입니다. ‘내가 누구냐’가 사명이 아니고, ‘내가 얼마나 잘났느냐’가 사명이 아니라 ‘도대체 이 세상 전체와 그 안에 있는 인간이 어디서부터 출발했는가?’ 그리고 출발했으면 마감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디로 마감이 되고 끝나는지?’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 기능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스라엘은 흩어지지 않았어요. 왜? 처음에는 제대로 잘 흘러갔어요. 그런데 이 이스라엘이 율법을 버렸습니다. 율법을 버렸을 때 그들의 마지막은 저주의 불로 성전이 불타버리죠. 이스라엘의 시스템 자체가 망가져 버려요. 없어요.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최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걸 분명히 언급했어요. ‘말씀이 이루어질 때 너희 모든 민족과 이 성전은 불타고 황폐하게 된다. 너희가 지금 나 예수를 동정하는데 날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신을 위해서 울고 너희 딸들을 위해서 울어라.’ 지금 누가 누구 걱정하고 있느냐는 말이죠.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율법을 줬는데, 출발 지점과 도착 지점을 알릴 그 기능이, 사명이 있는데 그들은 왜 중도에 파괴되어 하나로 뭉쳐 살지 못하고 흩어진 열두 지파가 되었느냐? 그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말씀 외에 다른 말이 그들에게 연대를 이루었고 통합을 이뤘던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냐? 바벨탑의 그 처음 인간들의 언어와 거기에 담긴 생각들이 이스라엘 속에 개입된 겁니다.

바벨탑을 인간이 지을 때 하나님께서 “이것들이 뭐하노?” 해서 찾아봤어요. 탑 짓는다고 아주 유난을 떨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11장 5절에,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강림하시고 하나님께서 특히 주목하는 게 있었어요. 땅에 강림해서 “바벨탑 이거 그냥 부술까?” 여기에 주목한 게 아니고 하나 주목한 게 있어요.

6-8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동일한 언어가 사용됐을 때는 그 동일한 언어가 결집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취지와 대적하게 된다는 것을 언급하는 거예요. 쉽게 말씀드려서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될 것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외의 다른 말을 듣게 된 겁니다. 이 두 가지 언어의 출발점이 창세기 2장과 3장에 보면 나옵니다.

창세기 2장 17절의 하나님의 말씀부터 먼저 말씀드릴게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자, 제가 하나님 말씀부터 먼저 드렸습니다. 그다음에 악마의 말을 들려드릴 테니까 여러분들이 생각하세요. 둘 중에 어느 것이 마음에 확 당기는지 보세요. 어느 것이 말발이 먹히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창세기 3장 4-5절에,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게 뱀의 말입니다. 어느 게 마음에 듭니까? 이건 뭐 물어보나 마나일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 위주가 아니고 자기 선악과 챙기는 데 급급해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따먹지 말라 했지? 따먹지 마!” 하나님은 인간보다 선악과부터 먼저 챙깁니다. 그런데 뱀은, 마귀는 누굴 챙겨주느냐 하면 세상에, 인간을 챙겨줘요.

“너 먹고 싶지? 먹어. 따먹고 싶지? 따먹어. 탐내고 싶지? 탐내. 거기에 구애받을 필요 없어. 왜? 내가 널 신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그래서 바벨탑의 취지는 뭐냐? ‘하나님의 그 지시를 의식할 필요 없이 우리가 우리 이름을 하나님까지 하늘까지 대등하게 그냥 쳐들어가자.’ 그 말이지요. 탑을 쌓아서 ‘우리도 엔간히 높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는데 우리도 높아요. 우리도 이 정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 없어도 우리끼리 연대해서, 생각을 모아서, 힘을 합쳐서 이 땅에서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담의 후손, 그것도 범죄 한 아담의 후손인 점을 감안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좋습니까, 인간에게 통용되는, 인간을 하나로 연대하는 그 말이 좋습니까?” 하고 물으면 백 퍼센트 사람의 말이 좋아요.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이게 연대 아닙니까? ‘☆(꿈)은 이뤄진다.’ 이게 연대잖아요. 인간을 부정합니까? 인간의 시스템을 허뭅니까?

아닙니다. 잘해보자는 거예요, 잘해보자는 것. 발전할 대로 발전해 보자는 겁니다. 우리가 힘을 합쳐서 한번 키워보자는 거예요. 서로가 서로를 격려해서 키워보자는 거예요. ‘인간의 지혜와 의지를 합쳐서,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만으로 얼마든지 이 땅에 살 수 있다’는 것을 보란 듯이 하나님 앞에 보이자는 거예요.

이걸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모든 교육이 그렇고, 우리의 모든 속성이 거기에 따라가는데요. 연합하자, 연대하자, 결집하자, 힘을 모으자, 인간의 내면에 있는 모든 바벨의 단어는 바로 방금 이야기한 것들 결집하자, 연대하자, 힘 모으자, 하나님 말씀 없이도 우리가 협력하면 살 수 있다, 그쪽으로 통용되는 언어, 그 언어가 바로 인간의 보편적 언어가 된 겁니다. 우리는 그 속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인간도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죠.

특히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이 말씀, 율법을 줬잖아요? 율법을 주신 이유를 다시 한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율법을 줌으로써 ‘너희가 처음 어디서부터 출발했고 어디로 마감되느냐?’ 이것은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에게만 있는 독특한 거예요. 다른 민족에게는 없습니다. 다른 민족은 해당되지 않아요.

그러면 율법을 받지 않은 다른 민족은 ‘우리끼리 힘을 합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대로 살자’, 이것은 하나님 말씀이 빠져있는 나라의 보편성이고, 공동 연대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고 처음부터 이스라엘에게 살 땅을 그냥 주지 않았어요. 이스라엘이 가서 살 땅은 이미 이방 민족이 떡 하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땅을 주시되 ‘율법이 없는 자들이 떡 하니 터를 잡고 사는 그 땅을 빼앗는 식으로, 전쟁하는 식으로 차지하게 되면 그것이 너희 땅이 된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인도했습니다. 자, 땅을 뺏는다는 것, 전쟁을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의 일관된 취지와 어떤 관계가 있겠죠?

이방 민족이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에 이미 주인이 있습니다. 원래 토착민, 주인이 있어요. 그런데 율법 하나 믿고 그 땅에 들어간다는 것은, 율법의 기능은 정죄하는 기능, ‘너희들은 살아도 살 가치가 없어. 왜? 우리가 전쟁에서 이길 권한이 있는 이유는 우리에겐 율법, 하나님의 말씀이 있거든.’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말씀 없이 인간들의 연대, 말로만 하는 민족에 대해 하나님의 정죄할 목표가 있었던 거예요. 정죄하려는 겁니다.

오늘 본문 흩어진 열두 지파에게 6절에서,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라고 하는데 이 지옥 불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침공해서 땅을 차지하는 거기에 이 지옥 불을 한번 집어넣어 봅시다.

그러면 이방 민족들이 정죄 받고 자기가 살던 땅에서 쫓겨나야 할 그 이유가 뭐냐? 율법에서 지옥 불이 나오거든요. 율법에서 지옥 불이 나온다는 것은 “너희들은 지옥 가야 돼”라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정녕 죽으리라’ 하는 그 취지가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너는 지옥 가야 돼.” 그러면 “너희는 뭔데?” “너희를 지옥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는 천국 가야 돼. 왜?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여기서 설교를 처음부터 다시 해보겠습니다. 인간에게는 두 종류의 언어를 대하게 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담과 하와에게 먼저 주었어요.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 하와 위주로 한 게 아니고 선악과와 생명나무 위주로 그 말씀을 준 거예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생명나무 따먹지 마!”하고 추방한 거잖아요.

누가 봐도 하나님의 관심사는 인간 우선이 아니고 선악과, 생명나무 우선이에요. 왜? 그게 출발점이 되기 때문에. 이게 출발점이에요. 그리고 선악과 따먹은 인간의 마지막 도착점은 뭐냐? “생명에서 나가!” 나가리 됐죠. 생명에서 나가버리면 기다리고 있던 그 땅은 저주가 범람하는 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게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땀 흘려 죽는 이유입니다. 거기서 저주가 올라오거든요.

모든 인간은 생명이 없이 저주 속에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이라는 새로운 인간형을 내세워서 여자의 후손으로 하여금 뱀의 후손이 된 그들 뒤를 따라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따라가서 그들 가운데서 하늘나라에 살 백성을 모집하는 작업을 언약을 통해서 계속 실시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노아한테 찾아온 노아 언약, 모세 때 찾아온 모세 언약, 다윗 때 찾아온 다윗 언약, 예수님한테 오는 모든 언약의 마감, 그리고 새 언약, 최종 언약 내 살과 내 피를 먹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주시는 겁니다.

자, 지금까지 이야기했는데 여러분들은 하나만 생각하면 돼요. 하나님의 말씀이든 인간의 말이든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보편성’이라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어떻게 사느냐는 일체 인간 세계에서도 안 통하고 하나님 나라 말씀에도 물론 안 통해요, 안 통한다고요.

‘율법이 있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이방 나라로 갔다. 완전히 이방 나라로 넘어서서 나라 꼴이 엉망이다’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되면 그때 나타나는 현상이 사사기 제일 마지막에 나옵니다. 사사기 21장 25절에 보면, 그 보편성이 깨져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게 무슨 뜻이냐면요, 이미 있는 원칙, 인간의 말이든 하나님의 말씀이든 그 원칙을 버리고 ‘원칙은 내가 새로 세운다.’ 이런 식으로 인간들은 살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왜? 이미 인간들은 마귀의 소원대로 자기가 신이니까요. 내가 원칙을 만들고 내가 언어를 만들어내면 되잖아요. ‘하나님 말씀의 보편성에 구애받을 필요 없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러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그 인간에게 뭐가 빠졌느냐? 이렇게 물어봅시다. “너 어디서 나왔어?” “부모님에게서 나왔지요. 몰라서 물어요?” “부모님은 어디서 나왔는데?” “당신이 지금 계속 말꼬리 잡으면서 이야기하는데 ‘그 부모는 어디서 나오는 부모냐, 또 그 부모는 어디서 나왔느냐…’ 그 이야기 하려고요?” 그런데 답변은 결국 뭐냐? ‘모르겠다’에요.

“그러면 한 번 물어봅시다. 당신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데?” “안 가봤으니 모르죠.” 결국 처음 우리의 출발 지점과 도착 지점에 대해서 인간은 할 말이 없어요. 할 말이 없다고요. 세상은 보편성으로 돌아가는 그것을 성경에서는 ‘말’이라고 하지 않고 ‘소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소리.

시편 19편 1-4절까지 보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온 천지가 뭔가 왕왕 울리는 방, ‘echo chamber’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안에 하나님이 창조했던 그 말씀이 나타난 피조세계에서는 앰프같이 왕왕 울리는 소리로서 가득 차게 되어 있다, 이 말입니다. 그걸 누가 실시하고 있느냐? 해와 달과 대자연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소리로 지금 표현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 너희들은 뭣하냐? 뭐하지 지금? 뭐 하고 있어?”

창조는 충실하고 착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취지를 그대로 유지하고 전수하고 있어요. 그런데 인간 속에 악마의 말이 들어왔습니다. 그 악마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지옥이라는 걸 만들어놨어요. 아까 인간에게 도착 지점을 물었습니다. “당신 지금 잘 먹고 잘사는데, ‘나는 너무 좋아. 행복하고 성공한 인간이야’라고 하는 데, 그런데 죽으면 어디로 가죠?” “그건 모르지. 분위기 깨지게 왜 그러냐? 죽으면 그 뒤는 몰라. 그냥 죽으면 그것은 몰라도 돼.”

그러나 성경은 도착 지점을 이야기합니다.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시편 16편 10절에 보면,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인간이 죽어서 가는 특정 장소가 있다는 겁니다. 베드로의 설교 가운데서도 사도행전 2장 27-28절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까 이야기한 시편 16편을 인용해서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어디를 거치고, 그리고 다시 주님께 소환된다는 거예요. 자, ‘지옥’이라는 것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도 마찬가지로 지옥을 주님께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지옥이라는 것은 뭐로 꽉 차 있는데 뭐로 가득 찼느냐 하면 하나님의 소리,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가 퍼부어지는 공간이 지옥입니다. 그곳에 어떤 자만 집합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는 그 지옥으로 다 집합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계획에 빈틈이 없어요. 이게 인간이 가는 도착 지점이에요.

마가복음 9장 47-48절에서는 지옥을 아주 처절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아까 제가 말씀드렸죠. 하나님의 율법이 없고 말씀이 없는 이방인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거기서 젖과 꿀이 흐르는 혜택을 입고 있었어요. 그들이 자기 땅이라고 여기죠, 자기 땅, 자기 인생, 자기 삶. ‘여호와 하나님은 모르고,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도 모르고, 창세기 몰라도 우리는 이렇게 풍족하게 살 수 있다’라고 했던 그 약속의 땅에 누가 쳐들어와요.

그렇게 쳐들어왔을 때 위기를 느낀 사람이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기생 라합이었고요, 이스라엘이 쳐들어가면서 율법의 이름으로, 모세의 이름으로 그들을 저주해 버려요. 여호수아 11장 20절,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잘 들어보세요.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인간은 통합되어 있는데 그 통합된 인간을 주께서 둘로 쪼개려고 하는 거예요. 인간의 언어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연대감을 느끼는 세상에 주의 말씀이 딱 끼어드니까 주의 말씀 쪽과, ‘우리가 신 되고자 하는 본심으로 그냥 살래’ 하는 쪽, 두 조각이 나는 거예요. 한 조각은 지옥이고, 한 조각은 뭐가 되겠어요? 천국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시작점과 부합되는 도착 지점이에요.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시작점과 도착 지점을 알리기 위해서 중간에…, 여러분 주민등록에 다 있죠? 천구백몇 년도에 태어났잖아요. 왜 태어났습니까? 출발 지점과 도착 지점을 알리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다른 괜한 인생 고민하지 마세요.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게 삶의 목표가 아니고, 도대체 ‘나는 어디서부터 시작했고 어디로 가느냐? 지옥 가느냐, 천국 가느냐?’ 그걸 말할 수 있는 기능이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이처럼 온 우주가 하나님의 일관된 계획대로 소리를 발하고 있는데 도대체 인간들은 뭐 하고 있죠? 인간은 말을 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이제 그 말을 하지 말고 그 말을 뭐로 바꿔야 해요?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하고 있는 자연물에 우리가 같이 동조하고 그 파동을 같이 느끼려면 우리가 말을 하는 대신, 우리를 지옥 불로 보내는, 우리의 시스템을 완전히 망가뜨리고 불태우는 그 혀로 말을 하지 말고 뭘 해야 한단 말입니까?

소리를 내면 되겠죠. 그 소리가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세례요한이 ‘천국이 가까웠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인간 세계 연대성의 우두머리, 오야붕들이 와서 “너 뭐야? 너 어디 신학교 나왔어? 누구 허락 받고 이렇게 전도해? 너 제사장이야?” “아니야.” “선지자야?” “아니야.” “메시아야?” “아니야.” “그러면 뭐야 넌?” “소리(앰프)야.”

이스라엘 내에 율법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율법은 어디서부터 왔느냐? 모세로부터 주어진 거예요. 지금부터 약간 어려워집니다. 많이는 아니고 약간 어려워져요. 모세가 율법을 줬을 때 인간들의 육신 자체가 이미 아담에서 물려받은 육신이기 때문에 자기 위주로 자기가 언어를 만들고 자기 생각으로 연대해서, 연합해서 사는 게 일반화되었어요. 이게 이스라엘 내에도 보편화가 되었다고요.

그런데 모세는 율법을 줬잖아요? 율법을 줬을 때 민수기 16장에서 고라 자손이 아론과 모세에게 반발해요. “우리는 애굽에서 구원받은 다 같은 백성인데 네가 돛대인가? 네가 뭔데 우리에게 이래라저래라 지시하느냐?”(민 16:1-2). 모세가 율법만 받은 게 아닙니다. 그 율법에 대한 해석도 하나님께 계속해서 부여받고 있었던 거예요. 율법 줘도 압니까? 모르잖아요.

율법을 해석하는데 자기 행복 위주와 이 세상의 성공 위주로 보니까 이 율법이 해석될 리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율법 해석을 모세를 통해 계속 줬단 말이죠. 주는데 그게 잔소리로 들려서 짜증을 부리는 거예요. 민수기 16장 17-18절에 하나님이 개입합니다. 율법의 해석자가 개입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향로를 가져오게 해요.

“너희는 각기 향로를 잡고 그 위에 향을 두고 각 사람이 그 향로를 여호와 앞으로 가져오라 향로는 모두 이백 오십이라 너와 아론도 각각 향로를 가지고 올찌니라 그들이 각기 향로를 취하여 불을 담고 향을 그 위에 두고 모세와 아론으로 더불어 회막문에 서니라.”

250명이 반발했거든요? 반발한 그 250명이 향로 다 갖고 나오고, 모세와 아론도 각각 향로를 들고나오고, 그래서 252개의 향로가 딱 모였어요. 모인 뒤에 하나님이 딱 개입하니까 그 향로에서 불이 나와요. 16장 30-33절을 보면, “만일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으로 입을 열어 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속을 삼켜 산채로 음부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것인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인간의 말로 연대하겠다는 그들은 땅이 갈라져서 삼켰고 또 35절에, “여호와께로서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 오십인을 소멸하였더라.” 250명이 향로를 들고 있는데 모세 아론의 불이 나와서 들고 있는 채로 그들이 다 타 버렸어요. 타 죽었습니다. 율법에서 불이 나온다? 그것도 무슨 불? 지옥 불이 나온다? 왜? ‘지옥 갈 인간들은 지옥 간다’라는 것을 율법안에 담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율법 해석 함부로 하면 안 돼요. 율법 해석에서 지옥도 나오고 천국도 나오고, 둘 다가 나와야 해요, 둘 다가. 고라 자손, 죽은 그 250명도 겁나죠. 하지만 모세와 아론도 정말 겁이 났어요. 우리에게 주어진 율법을 시시한 하나의 언어로 봤는데 언어가 아니고, 출발과 도착 지점의 내용을 품어서 모든 것이 생명나무와 선악과 위주고, 그다음에 인간을 만들었던, 곧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고 그다음에 인간을 만들었던 그 취지가 율법을 통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들은 그 율법을 받았던 거예요. 그리고 그 취지대로 고라 자손이 모세에게 대들 때 그야말로 지옥 불, 저주의 불이 그들에게 퍼부어진 겁니다. 그 말씀이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 말씀이에요. 또 이 지옥 불을 받고는 모세와 아론 보고 여호와 백성들 죽였다고 원망하고 대들다가 1만 4천 700명이 또 죽어요. “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에 죽은 자가 일만 사천 칠백명이었더라”(민 16:49). 왜 또 애꿎은 사람을 죽이냐고 하다가, 일반 백성들은 뭘 모르니까 까불다가 또 죽었어요.

그러면 이 고라 자손, 그리고 오늘날 일반 사람들은 월드컵 좋아하고 선거 재투표 이런 것이나 외치면서 말씀은 안 보려고 하는 그 이유가 뭐냐? 제가 잘 안 하는 짓인데 여러분 잠도 오고 하니까 이걸 준비했습니다. 여기 어떤 벽(A4용지) 있어요. 여기 사람(오려낸 사람 모양)이 있죠? 사람은 자기 위주입니다. 자기 행복과 성공 위주에요.

이 세상에 사람들의 언어가 있잖아요. “내가 너 지난 여름밤에 한 걸 다 안다.” 이런 식이지요. 사람들은 “선거위원장이 돼서 세상에 선거 당일에 휴가 내는 게 어디 있냐?” 이런 식으로 또 이야기하고요. “출장 가면서 마누라는 왜 같이 가는데?” 온갖 이야기, 온갖 소리를 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런 소리 듣는 사람이 어떻게 합니까? 인간들의 말, 언어입니다, 인간들의 그 언어를 피해서 도망치죠.

‘다 이유가 있다고. 그러면 너희는 내가 자살해서 죽으면 좋겠냐?’ 이런 식으로 피하고 피하다가 이 벽에 부딪혀요. 이 벽까지 밀립니다. 벽까지 밀리면서 어? 더 이상 갈 데가 없네요? 여기 이게 앞면이거든요? 남들의 눈을 보면서 남들이 나를 평가하는 것에서 혼신을 다하여 변명과 변명으로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자기의 윤리성과 도덕성, 의를 바깥쪽에서 계속 외치고 있어요. “너희는 잘났나?” 이런 식으로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귀찮은 걸 들고 온 이유가, 인간은 가봤자 이 육이라는 벽에 부딪혀서 더 이상 갈 데가 없다는 것, 인간의 언어의 저주, 바벨탑이 흩어지면 납작한 바벨탑, 평평한 바벨탑 돼요. 바벨탑이 없어지지 않았어요, 인간에게 언어가 있는 한 없어지지 않았고 평평한 바벨탑이에요.

인간의 육에서 더 갈 데가 없어요, 인간은! 변명 외에는 할 이야기가 없다고요, 변명 외에는요. 그게 일기가 되잖아요, Q.T가 되고요. “주님, 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습니다.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어요. 내가 신이 아니잖아요. 그럴 수 있잖아요.” 이런 구차한 변명들. “왜 하필이면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내가 벽을 이야기하는 것, 이 벽을 한 번 보세요, 이 벽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뭐냐? 벽 뒤의 말이 들리지 않아요. 인간의 말에 한계가 있어서 벽 뒤에서 들려오는 말은 아무리 지식으로 성경 공부를 하고 아무리 뭘 해도 이 벽 뒤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소리는 들리지 않아요. 이 안에서 망해버립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지옥은 무엇이냐? 사람들은 말합니다. 지옥 가면 고생이 많다, 못 빠져나온다, 구더기도 타지 않는 불에 태운다, 얼마나 뜨겁겠느냐, 후시딘연고도 없는데 그 상처가 얼마나 심하겠느냐, 잠도 못 잘 텐데 얼마나 괴로울 것이냐, 이렇게들 생각해요. 지옥을, 날 괴롭히는 곳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날 괴롭히는 것은 그 결과고요, 지옥이라는 것은 뭐냐? 마태복음 5장 25-26절에, 지옥에 대해서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사과하라는 뜻이에요.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한다. 마태복음 5장 26절의 말씀이잖아요? 그런데 이 마태복음 5장 26절의 말씀은 마태복음 5장 17-18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다 이룬다는 이 말이, ‘내가 감옥을 제대로 다 만들 거야.’ 그 일을 다 이룬다는 뜻이에요. 지옥이라 하는 것은, 빚을 졌기 때문에 지옥 가는 거예요, 빚을 졌기 때문에. 주님한테 빚졌기 때문에 지옥 가는 겁니다. 살아 있을 동안에 탕감받아야지요. 그러면 반대로 천국 갔다는 것은 뭐냐 하면, 그동안 하나님의 용서가 계속해서 원활하게 작용했다는 뜻이에요. 천국에 도착했다는 말은, 천국 오기 전에 내가 살았던 모든 곳에 하나님의 탕감, 용서하심이 계속해서 주어졌고 그 결과가 천국 가는 거예요.

그러면 지옥은요? 지옥은 하나님의 용서가 그동안 주어진 적이 없다는 뜻이에요. 이것이 바로 불신자들의 비극입니다. 뭐 ‘삼성에서는 보너스 8억 받았다는데 LG는 얼마 받고, SK는 얼만지 몰라?’ 성공했지요. 성공은 했는데 하나님의 용서가 없어요. 성공은 한 것이 맞아요. 하나님의 용서가 없습니다. 그 사람 갈 곳은 뻔해요. 가봐야 아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용서가 주어지는 거예요.

다시 이것을 써먹어야 하겠어요. 인간이 그동안 자기 잘남, 나 이렇게 훌륭하게 살았어, 바르게 살았어, 나 욕하지 마, 나 너 못지않게 훌륭했어, 윤리 도덕적으로 하자 없어, 도망치다 도망치다 이 벽에 걸린다고요, 이 벽에. 그러면 벽 뒤에서 나오는 말씀이 여러분, 궁금하지 않습니까? 벽 뒤에 말씀이 나오면 우리는 세례요한처럼 더 이상 내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엠프가 돼요. 그 소리가 들린다고요.

벽 뒤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에 대해서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이 벽, 벽뒤에서 뭐가 벽 앞으로 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에요.

이것은 방향이 달라고 해서 주는 것이 아니고 벽 뒤쪽에서 벽 앞쪽으로 방향이 그렇게 주어지는 거예요. 무슨 권세? 아무것도 아닌 자를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권세가 이렇게 흘러 들어오게 된다는 거예요, 벽 앞으로! 그렇게 되니까 이 사람은 더 이상 나 훌륭하게 살았다, 바르게 살았다, 나는 윤리 도덕적이다, 이런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을 이제부터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뭐 하면 되느냐? 증거하면 되지요, 증거, 말씀 증거하면 되잖아요. 말씀 증거가 뭔가? 소리라는 거예요, 소리! 여러분, 참 쉽죠 잉! 그냥 벽 뒤에서 이 성경 말씀 자체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하면 돼요. 내가 달라고 외치지 말고. 그 벽 뒤에서 나오는 것, 요한일서에서 그것을 가지고 ‘사랑’이라고 해요. 사랑인데 정확하게 ‘사랑의 보편성’이에요.

‘사랑의 보편성’이라 하는 것은 ‘무조건성’을 말합니다. ‘무조건성’이라 하는 것은 나를 그냥 덮치는 거예요. 나를 덮치는 것. 인간에 통용되는 언어가 인간을 덮치듯이 이제는 벽 뒤에서 울려오는 ‘이제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그 이야기가, 그냥 이야기가 아니고 힘이 있어요. 그래서 권세에요. 권세 있게 우리의 모든 변명과 의와 나의 윤리와 도덕의 자랑거리를 완전히 덮치는 거예요.

지진이 일어나서 담벼락이 무너지면 거기에 완전히 덮쳐지잖아요. 그러면 끽소리도 못 하잖아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그 말씀의 권세에 아무 소리 못 하고 무너진 그 안에 완전히 끼어버리니까 그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거예요. 성도는 뭐냐? 이렇게 무너져 버린 거예요. 벽이 무너져서 이제는 우리가 세례요한처럼 “너 누구야?” 하면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소리다. 내가 무엇이냐고 나에게 묻지 마.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데 주님이 나를 뚫고 이야기해요, 나를 뚫고. 그 이야기가 마태복음 10장 19-20절에 나옵니다.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저는 이 대목을 보면서 북한에 선교하러 가는 사람, 참 제가 개인적으로 답답해요. 왜냐하면 북한 가서 말 하나 남한에서 말 하나 말하는 자는 네가 아니고 성령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이에요, 보편적. 굳이 북한 가서 말하지 말고 남한에서 말하다가 핍박받으면 되잖아요. 굳이 핍박받고 순교해서 천당 가려고 북한을 왜 고릅니까? 북한에 선교사로 가서 잡혀가지고 앵벌이 용도로 다시 남파간첩 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잖아요.

자기는 믿음이, 신앙이 있다는 것을 시험하기 위해서 갔지만 개코나 그 신앙이라는 것은 다 어두움의 권세, 마귀의 권세 앞에서는 맥도 못 추는 신앙이었어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그냥 자기 의지요. 자기의 오기고.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요한일서 안 찾아봐도 여러분이 아시겠지요? 이게 사랑의 말이거든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이것이 사랑이라고요. 아까 이야기한 죄 탕감, 용서, 이게 사랑이 덮쳐서 그래요. 사랑에 대해서는 사람들에게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말, Words.

Words don't come easy
말하고 싶은데 너무 어려워요

How can I find away to make you see I love you
뭔가 사랑을 말하고 싶은데 말하기가 쉽지 않아요

Words don't come easy
말하고 싶은데 못하겠어요
-----------------------
But my words are coming out wrong then I
자꾸 헛소리가 나와요.

이게 (F.R. David, 1982)라는 팝송의 가사에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을 해야 하는데 너무 어려워요.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것은 나를 남에게 넘겨주는 일이기 때문에. 그동안 내가 사랑했다는 말은 남을 내 것을 만들기 위해서 사용한 힘이잖아요. 언어. 그 언어는 나의 잘남과 나의 힘, 도덕적인 힘, 윤리적인 힘, ‘나 훌륭하니까 너는 내 편 들어’ 이 힘이 작용할 때 말이 그렇게 청산유수처럼 잘 나옵니다. 이번 선거 때 봤지요? 말들 얼마나 잘해요.

그런데 나를 잊어버리고, 내가 나를 해석하는 것을 포기하고 상대방에게 넘겨주는 그게 사랑이잖아요. 그 사랑을 할 때 기존의 내가 나 위주로 썼던 말은 전혀 먹히지 않는데요? “뭐, 뭐 말을 해.” “말을 못 하겠어.” 사랑하는 사람은 말을 못 해요. 더듬거리면서. “무슨 말을 하려는데?” “막상 하려니 말이 안 되네.”

주님한테는 ‘내가 나를 해석하는 것을 금지한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오늘 본문 끝에 보면 뭐가 나오느냐? 찬양입니다. 끝으로 이 찬양을, 말을 바꾸겠습니다. 어떻게 하나의 인물이 말씀 자체가 되는지 요한계시록 3장 14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아멘이시오.’ 아멘은 뭐냐? ‘반드시, 진실로 이미 이루어졌습니다’라는 뜻이에요. ‘이루어졌습니다’가 어떤 인물이에요. 누구? 예수님이에요. 그것이 요한계시록에 보면 1장부터 ‘아멘’, 아멘이 계속 나와요. 진실로 그렇습니다. ‘지금 나라는 존재, 주님의 말씀 사건의 열매가 접니다. 제가 그렇게 말씀이 됩니다’라는 것을 우리는 ‘소리’로만, 은혜를 받은 자, 사랑을 받은 자의 소리로만, 모든 죄를 꾸준히 탕감받고 있고, 용서받고 있는 자의 소리로만 이 땅에 주의 증인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그동안 말을 했습니다. 해봤자 변명이고, 해봤자 자기의 수치를 가리는 치사한 윤리적 도덕적 자랑거리고, 그것을 나를 지키는 힘으로 버텼습니다. 참 그것이 이방 나라적이고 지옥 갈 자의 모습인 것을 이제는 감사케 해주시고, 이제부터는 주께서 일으킨 사건의 소리로서 증거하는 즐거움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