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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2016년 겨울 요한계시록 강의 교재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계시록

2016년 겨울 요한계시록 강의 교재

정인순 2015. 11. 23. 10:07

 

 

이근호

 

2016년 겨울 요한계시록 강의 교재

 

생명의 신호

 

Ⅰ 서론

 

힘껏 뒤틀려져 있는 광경들로 한데 뭉쳐 이어가는 꼬여버린 줄거리, 이것이 진정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세상이란 말인가. 요한계시록의 현실을 가지고 다른 현실을 말해준다. 두 세계가 한데 엉켜있다. 따로 풀어낼 수가 없다. 평평한 정돈된 세계를 가지겠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야심이다.

 

누워있는 조직이 수직적으로 서 있는 입체 조직이 된다면, 이는 냉혹하고 차분한 현실이 미처 보지 못하는 영적 이미지들로 충만한 현실임을 알게 된다. 하늘과 관련된 모든 원소들이 변덕스럽게 날뛰면서 역사로부터 해방된 본성을 보인다. 어항 속에서 분출되는 산소방울처럼 계시록의 공간에서 반짝이는 인광(燐光)들을 보자. 방향도 없고 목적도 없이 그냥 떠다니다가 사라진다.

 

이런 인광들은 욕망의 조정을 받고 있는데 나름대로 가능세계를 휘저으면서 각자가 기대하는 ‘위대한 건강한 세계’를 추구한다. 흔히 ‘고향’이라고 여기는 것도 사적 기억을 걷어내면 그냥 물질더미다. 산등성이의 화강암 또는 흙과 살랑살랑 부는 바람, 그리고 건조한 들풀과 흩어진 채 누워있는 빛깔들이다. 우리의 몽상은 그 물질 하나하나에 소중한 추억을 붓질 한다.

 

인간들이 이 세상 안에서 만들어낸 생산 체제와 설비나 법률이나 갖가지 공직이나 종교나 후생 복지 시설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다. 결국 그것들은 나를 위한 질서로 통합된다. 궁극적 의미는 이미 확정되었다는 말이다. 남들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공모자로 뭉쳐 산다. 현세의 분신들이면서 똑같은 대지(大地)의 복제물들이다. 각자 불편해 하지 않으며 경쟁적으로 저 너머의 구원 세계를 넘본다. 마치 아이들이 저 산 너머 미지의 세계를 흠모하듯 이 세상은 천국을 고대한다.

 

예수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져다 줄 본인들의 이상향을 사모한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공간은 어지럽다. 여전히 그리스도는 요한계시록에서 사람들의 소망과 다투신다. 하늘에서 도착된 성전의 빛이 어두운 세상을 비추게 되면 성전 안에서 활동하시는 분의 피사체가 세상의 영적 깊이를 형성한다. 그 깊이를 따라 천사들이 투입된다. 그리고 전에 예수님에게 일어난 십자가라는 불상사를 근거로 세상의 불순한 근원을 조사하고 심판한다. 교회도 예외 없이 조사대상이다.

 

보이는 세상 구조는 영적 원근법에 의한 투영도로 작성된다. 반듯한 직선으로 그려진 것은 볼록하게 보이고, 곡선으로 그려진 것은 직선으로 보이는 착오를 유발하는 것처럼 고요한 천상이 도리어 요란하고, 요란한 어두운 세상의 형편이 의외로 평화롭다. 주님이 늘 활동하시지만 잠시 지나가는 바람 탓으로만 돌리는 우둔한 인간들에게는 무심한 세월마저 초조하다.

 

1. 인간의 실천성과 주체성

 

(1) 자원의 희소성

각 인간에게 적절한 배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 자원의 ‘희소성’은 근원적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인간의 부정’ 혹은 ‘반(反)인간’의 존재 여건을 구성한다. 그것은 유령처럼 인간에게 생존의 위협이나 죽음의 위협으로 작용하며 부족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인간과 인간, 그리고 국가와 국가 간의 사력을 다하는 투쟁을 야기하다. 인류의 역사 내내 번져 나오는 실천은 바로 이 희소성에 직면한 인간의 욕구로부터 비롯된다. 희소성이 인간에 대한 부정의 조건을 부여하는데 있어 인간은 의도적으로 반발하고 싶어 한다.

 

(2) 수동적 질서 속에서 피어나는 전체성 구성

인간의 삶은 자연에 대해서 늘 굴욕적이다.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소극적으로 대응한다. 위대하고 강한 자연의 횡포에 숨죽이며 매사에 조심한다. 하지만 이러한 실천 속에서도 자신만의 목표를 버리지는 않는다. 자기 목표를 위한 전체화 작업을 변모시킨다. 목표를 향하여 물질적 조건들을 극복하고 수시로 실천 방식을 수정하고 개선해나간다. 이것이 인간의 주체성이며 그 내용은 ‘나를 위한 스토리’ 전개다.

 

(3) 주체성

인간의 주체성은 늘 자기를 초월하는 방식을 통해서 나타난다. 살아가면서 스스로 드러내는 식이다. 인간은 곧 초월적이다. 의식이 자기를 넘어서 자기 외의 것이 되고자 열망한다. 그러므로 자기 이외의 존재를 끌어들임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는 의식이기에, 인간의 본질을 의식을 통해서 구축하고자 할 때도 역시 인간은 무엇인가 대상을 향하여 행할 수밖에 없다. 그 대상을 나의 것으로 소유하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세상 속에서 존재하게 되며 그 대상과의 지속적인 연결을 시도하므로 상호 연관되는 피동적 상황 속에서 본래의 자기 자율성을 확보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이타성을 띤 이기주의’다. 소통과 협동이라는 이름으로 양보하고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 같지만 결국 노리는 것은 세상을 ‘나를 위한 전체성’으로 재구성하는데 있다.

 

이 세계관 구성은 유일한 주체로서 세상에 존재하고자 하는 인간이 실존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인 동시에 자신의 유아론(唯我論)적 욕망에 위협을 가하는 타인을 상대로 벌이는 존재론적 투쟁이 형상화된 것이다. 무정(無情)한 자연 아래서 수동적인 형편에 놓인 인간으로서는 일평생을 자아를 꾸미고 연기(演技)하듯이 살아간다. 내면으로는 ‘절대적 주체성’을 외치고 싶지만 실제로는 상대성 속에서 움직인다. 절대라는 명분은 실천에 있어 얼마든지 굴욕적으로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는 보이지 않는 남는 힘에 의존하므로 초월자로 행세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욕망은 한시도 자신을 구체화하는 실천 작업을 멈춘 적이 없다.

 

2. ‘몸의 죽음’과 ‘죽음을 담은 몸’

 

(1) 없는 장소에 대한 묘사

원인과 결과가 연결되지 아니하면 인간 세계는 정신적으로 혼란에 빠진다. 원인과 결과가 각기 보장되는 한 사회는 안정을 지탱하게 된다. 요한계시록은 이 안정적인 인간 세계에 통할 수 없는 언어적 혼란성을 지니고 세상에 말한다. 이게 바로 ‘은유성’이다.

 

이 계시적 언어는 지상에서 통용되는 은유성과 이어질 수가 없다. 각자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에다 자신의 위치를 박아 넣으셨다. 그렇게 되면 사건을 말하게 되는 은유는 정적인 구조 위에서 피어난다. 반면에 인간들이 사용하는 은유는 계속 바뀌고 이동하면서 구조를 구성한다. 따라서 두 은유는 일치된 개념을 상호 교환할 수 없다. 낯설지 않으면서 극단적으로 낯선 개념이 통용된다. 일찍이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사건들을 경험하게 된다.

 

그동안 익숙함은 혈연관계에서 습득되고 반복적으로 대대로 학습된 개념들이 동원되어 표현되어졌다. 그런데 인간의 혈연관계가 어두움에 포위되어 있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에서 알려진다. 이 어두움은 몸을 가지고 표현된다. 즉 어두움이 인간을 창조해 왔는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은유의 세계 안에서 은유적 언어로 공격하시는 것이다. 이게 환유가 은유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우월한 이유다. 곧 없음을 근거로 한 표현이 있음을 근거로 한 표현보다 우월한 것이다. 언어놀이에 의한 창조는 곧 가짜며 따라서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은 가짜다. 인간은 스스로 은유의 굴레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이다.

 

(2) 혈연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공격

어두운 터널 속으로 돌진하는 열차의 불빛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행해 밀고 들어오신다. 이는 인간 세계가 혈연관계로 뭉쳐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의미는 혈연관계에 기초하고 거기서 진리를 생산한다. 이 진리에 대해서 하나님은 인간과 경쟁하신다. 인간이 생산하는 의미나 진리는 인간들이 상상한 것이며 착각이라는 것이다. 이 착각은 충만한 의미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충만으로 간주해버리고 싶은 충동에서 나온 착각이다. 하지만 현재는 늘 충만치 못하고 곧장 사라지는 모습을 보인다. 인간들은 이런 현실에 대해서 두 가지 태도를 보인다. 하나는 이 세상은 완결되지 않기 때문에 곧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하는 태도와 다른 하나는 세상은 그대로 이지만 자신이 무한한 이 세상에 맞춰 살아야 할 것을 강요받는다는 태도이다. 즉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늘 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태도 모두 현실과 자신이 차이나고 결여됨을 느끼는 것이다. 그 대가로 늘 불안하다. 그래서 아무 것도 없는 자리에 무엇이든 채우고 만들어 나갈 수밖에 없다. 정답을 억지로 청하는 것이다. 그 정답과 진리는 근본적인 혈연적 본능의 힘에서 발휘된다. ‘전에 어머니(부모)와 함께 있었던 그것이 지금은 없어졌다’는 느낌이기에 그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서 완전한 혈연관계를 구성하려 한다.

 

그래서 혈연은 인간들에게 ‘떠날 수 없는 환경’이 된다. 이 ‘떠날 수 없는 환경’에서 밀려서 떠나버린 분이 계신다. ‘강제 떠남’이 그분으로 인하여 처음 발생된다. 그 떠난 빈 터를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중심 자리로 삼으신다. 이로써 세상은 예수님의 ‘떠나심’ 앞에서 ‘아무도 떠날 수 없는 환경’이 된다. 모든 환경은 ‘떠나신 분’의 내부 환경이 된다. 인간들이 활동하는 역사 무대는 가장자리로 밀리게 되고 거기서 아무리 대단한 사건들이 줄지어 일어난다 하더라도 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꿈도 희망도 소용없다.

 

‘떠나심’을 묘사할 수 있는 전체는 없기 때문이다. 전체는 중앙을 비워야 한다. 확인되지 않는 이질성을 맞이해야 한다. 설명할 수 없는 중심을 모셔야 한다. 요란한 정숙 상태다. 세상은 스스로 자기 증명은 허락되지 못하고 달리 증명당할 일만 남아 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Ⅱ. 본론

 

1. 안목의 나열

 

안목에 맞추어 계시가 전개 되어 있다. 따라서 해석을 통해서 안목의 이동이 요구된다.

 

현실 속에서 인간이 형성한 안목(교회의 안목)

현실 속에서 배척받은 사도의 안목(해석에 있어 경계선)

천사의 안목(묵시적 활동성)

예수님의 안목(언약적 원천)

 

2. 묵시와 역사의 차이

 

인간 역사란 자체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자꾸 만들면서 진행하다가 종점에는 인간은 드디어 사물이 된다. 자신이 스스로 부여하는 최종 동질성(=진리)은 없다는 말이다. 고유성은 증발되고 남은 것은 충동뿐이다. 이는 곧 자기 이름이 역사 한계 속에서 삭제되고 영적 환경에 편입되면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게 되는데 이 이름이 합한 동질성(=주체성)은 개인적으로 감당하거나 저지할 수 없다. 역사는 묵시의 입장에서 보면, ‘움직이지 않는 운동’일 뿐이다. 그 안에 역사를 묶어놓은 ‘약속된 능력’이 작용한다. 역사 속에서 묵시는 허구적으로 검출된다.

 

인간이 예상 못하는 영원(=진리)은 시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 안에서 터져 나오면서 묵시는 역사 안에서 시간과 투쟁하게 된다. 묵시라는 말은 항상 역사에서 영글어진 의미에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고 오히려 부정하는 형식으로 역사에 나타난다.

 

과거 이스라엘에게 있어 역사가 부정당하는 경우는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에 위배했을 때 주어지는 당연한 귀결이다. 따라서 묵시적으로 묵시적 언어를 해석할 때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느냐 하는데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 흐르는 어떠한 원리가 하나님에게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원리인가를 밝혀내는 수단으로 쓰인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즉 ‘이번에 이런 사건이 있고 다음에 저런 사건이 일어나니까 대비하자’ 라고 여기는 것은 묵시를 오해한 소치이다. 묵시란 대비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성질의 사건을 나열하지 않고 있다. 세상을 그런 식으로 종결짓게 한 그 원인과 이유가 이미 역사 안에서 발생되었기에 묵시를 통해 그것을 파악해야 한다.

 

묵시 안에 있는 사건 하나하나가 그 이유와 원인을 찾도록 도와준다. 그 이유와 원인을 알게 되면 그 다음에 거기서 고정된 세계관이 나온다. 필연적이며 아무리 인간들이 몸부림치고 철회를 요구해도 어쩔 수 없는 하나님의 결정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묵시의 세계관은 二元的인 구성을 하고 있다. 하늘은 끊임없이 땅과 연관을 갖는다. 그리고 관여한다. 하늘의 판단에 의해 땅의 세상은 둘로 나뉘게 되고 한편은 하늘로부터 위로를 받는 반면 다른 한편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저주의 상대가 된다.

 

이러한 판단은 현재에 대한 미래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미래가 앞당겨 현재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는 현재를 파멸시킨다. 이미 이 일은 하늘의 계획 속에 들어 있어 취소나 수정이 되지 않는다. 하늘과 현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 하는 점은 묵시적 징조들의 발생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 징조들은 다방면으로 또는 여러 가지 자료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각종 징조들도 한 인격을 중심으로 하여 벌어진다. 다니엘에서는 그 분이 바로 ‘人子’요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 양’으로 나타난다. 그 인자가 활동하는 것에 대하여 세상의 악은 갖가지 방법으로 거부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거기에 대한 반응으로 확대된 징조들이 다시 주어진다. 그런 가운데 궁극적인 적이 지휘하는 세상의 참 모습이 드러나게 되고 이때쯤 되면 왜 하나님은 역사를 종결지을 수밖에 없었는가를 알 수 있다.

 

심판은 그 정당성이 주어진다. 그리고 묵시의 세계는 역사 세계의 모순을 극복한 형태가 될 것이다. 단순히 역사 안의 세상에서 악을 제거하고 세척한 다음의 모습이라는 말이 아니다. 외형이 문제가 아니라 그 묵시적 세계의 원리 안에서는 다시는 역사 속의 세상에서 일어난 그런 악의 원리들을 방지하고 남음이 있는 원리로 유지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역사의 세상이 없는 한 묵시의 세상도 없는 것이다. 묵시의 세상은 역사의 세상을 토대로 하여 주어지는 세계이다. 이러한 미래의 세계가 묵시문학에서는 역사의 언어로 묘사되고 있으므로 이점을 이해하기가 매우 난해한 것이다. 즉 묵시의 세계(미래의 세계)에서의 [이긴 자]는 현 역사의 세계 안에서는 역설적으로 [죽임을 당한 자]가 된다. 따라서 현 역사 안에서 승리자를 찾으려면 역사의 영원한 지속을 주창하며 번영을 외치는 자로부터 애매하고 억울한 죽임을 당한 자가 누구냐를 찾으면 된다.

 

이처럼 묵시와 역사는 역사 안에서 미리부터 대립된 모습을 띠고 등장된다. 이러한 이유는 구약 예언서에 의하여 최후의 남은 자가 되는 그리스도가 묵시의 신분을 지니고 이 역사 안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느냐로 결정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린 양이라는 순교자 모습으로 등장되는 것은 그 분 때문에 역사는 비로소 그 정체가 탄로 났기 때문이다. 그 분에 의해서 남은 역사는 봉인되었다가 이제는 개봉된다. 그 개봉된 내용은 역사와 묵시 세계간의 갈등이었다.

 

이러한 안목에서 요한계시록과 세상을 해석해야 될 때가 온 것이다. 어린 양이 뗀 묵시의 내용으로 인해 역사의 세계는 심층적으로 그 배후의 조종자가 등장할 때까지 그 정체의 두꺼운 껍질이 벗겨진다. 그 내용이 보다 구체화된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그러한 작업을 이 역사 세계에서 할 수 있게 하는 동기는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는 순교자들의 발생사건이다.

 

역사 세계의 심판은 언약의 법칙에 의해 심판받을 만한 잘못이 있을 때만 주어진다. 그 언약의 법칙이란 구약 예언서에 나와 있는 다윗 언약의 절차를 따른다. 그 절차를 여기 기재해 보면,

1) 이스라엘 죄악에 대한 경고

2) 그 경고에 합당한 심판으로 이방인을 막대기로 동원

3) 이방나라가 심판 과정에서 과도한 행동을 한 것에 대한 심판

4)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언약대로 남은 자만 회복

 

그런데 역사적 종말론에 있어서는 다윗언약에 의해서 옛 역사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 역사가 시작되지만 예수님이 세운 새 언약에 의하면 역사 자체가 사라지고 거기에 묵시의 세상이 전개된다. 이 점을 감안해서 앞의 순서를 다시 써 보면 다음과 같다.

1) 교회 중심의 현 역사의 모습 (1장-3장)

2) 역사에 대한 묵시세계의 침투 (7인의 계시 나열) (4장-7장)

3) 역사의 죄악에 대한 경고 (7나팔의 계시 나열) (8장-11장)

4) 남은 자(교회)의 등장과 순교 - 여기서 서서히 등장하는 본래 원수의 정체 (12장-14장)

5) 죄악 된 역사에 대한 저주 (7대접 계시 나열) (15장-19장)

6) 역사의 종결 - 언약대로 심판이 주어짐 (20장)

7) 묵시세계의 전개

이상의 7개 계시 모음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시가 중첩되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요한계시록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의 피 언약은 역사의 세계에서 묵시로 전환시키기 위한 언약이었으며 여기에 대한 언약적 정당성은 그분의 신분이 묵시적이기 때문이다(계1:13).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거의 모든 수치와 구절들이 구약 예언서에 이미 등장한 것을 보아 요한은 예수님이야말로 진정 구약의 완성자로서 구약에는 그것이 역사적 언어였지만 신약에서는 역사적 언어로 표현된 묵시 언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점을 유의해서 해석해보면 그 구절구절마다 언약적 내용을 담아두는 것으로 족해야 한다. 결코 묵시적 내용을 역사적 내용으로 분해해서 유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1,000년/ 144,000/ 용/ 짐승 같은 것은 묵시적 세계가 바로 지금 역사 속에서 언약적인 내용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등장된 말과 수치들이다.

 

3. 줄거리

 

요한계시록에서는 7교회에 관한 언급이 우선적으로 등장한다(2:1-3:22). 뿐만 아니라 그 교회가 교회다움을 지니는 것은 7교회 사자를 쥐고 계시는 人子의 의도에 일치될 때인데(1:20) 그 인자는 역사에 의해 고난 받는 자로 등단되고 있다. 그분의 피가 그 증거로 남아 있다(1:5). 사도 요한도 그분의 환난에 동참한 자로 등장된다.

 

바로 그 인자가 기준이 되어 교회가 역사 속에서 갖추어야 될 주체성이 확립된다. 성령은 바로 그 인자와 교회를 연결하는 7영의 모습으로 나타난다(1:4,10/2:7,11,17,29/3:1,6,13,22). 교회 사자는 성령에 종속되어 있는데, 만약 성령의 지시에 따라 인자의 모습 즉 고난의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는 그 교회는 교회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교회는 성령과 사자(천사)에 의해 이 마지막 때를 보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성령에 의한 역사 진행은, 구약에 의하면 마지막 때에나 일어날 유일한 현상으로서(욜 2:1,28-32) 이미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 보낼 만한 위치에 있음을 전제로 한 것인데 그 위치는 바로 역사에 대한 심판권을 이미 확보한 자리를 말한다(1:13-18). ‘사망과 음부의 열쇠’가 바로 그것을 나타낸다.

 

역사에 대한 정죄와 심판은 인자 되시는 분이 역사 속에 들어 왔을 때 그분을 배척하고 죽음에 넘긴 것에 대한 심판으로 진행되는데(1:7) 오늘날에는 인자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역사 속에서 인자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선택된 자(인 맞은 자 7:1-8)들을 향한 공격행위에 대하여 보복하는 형식도 병행하여 이루어진다(1:7/ 5:9/ 6:10/ 11:7/ 12:10/ 16:6/ 18:20/ 19).

 

그들이 올리는 기도(향) 또한 그들이 당한 환난 가운데 건짐 받음에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채워져 있다(5:8-14). 그런데 그들이 당하는 환난은 어린 양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선택받은 수가 차기까지 계속되는데 그것이 7인-7나팔-7대접의 7로 표현되는 제한된 기간들이다. 이 제한된 7의 기간은 비로소 안심을 낳는(14:13) 유일한 과정으로서 필수적인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에 누가 진정한 남은 자이며 누가 그 남은 자를 괴롭히고 역사를 파멸로 인도했는가는 그 배후세력이 비로소 정체를 드러내게 될 때 병행해서 알려진다(6:11/7:3).

 

그동안 고난에 참여한 자들은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이겨야 하는데, 이긴다는 말은 곧 이미 승리자로서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의 통치를 신뢰하고 그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을 말한다(14:12/2:7,11,17,26/3:5,12,21/21:7/13:10). 즉 역사 속에서도 묵시의 세계를 보는 눈이 믿음이요 인내이다.

역사 속의 교회는 묵시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성령과 천사에 의해 유지되는데 성령의 감동을 받은 요한의 입장에서(1:10) 제일 답답한 것은 남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묵시적 행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이었다. 즉 묵시가 역사를 인봉한 셈이다(5:1-4).

 

그 인봉된 남은 역사의 해체는 이미 역사를 묵시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분 만이 가능한데 그분이 바로 다윗언약의 성취자로서(5:5/ 겔37:25-28/ 창49:9/ 사11:1/10) 이 역사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다(5:6/ 렘11:18-19). 사도 요한이 계시록에서 그리스도의 표상을 ‘어린 양’ 하나로 고집하는 이유는 출애굽 때 이스라엘이 구원 받을 수 있었던 유일한 표상이 유월절의 어린 양이었던 것처럼(출12:1-14) 버림받은 역사에서 구출될 수 있는 유일한 표상도 언약의 틀에 맞춘 어린 양이다(15:2-4/11:8).

 

인봉의 공개에는 반드시 옛 언약의 형식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선지자의 내용이 다음과 같다.

ⓐ.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경고

ⓑ. 그 경고에 합당한 심판으로 이방인을 막대기로 동원

ⓒ. 언약 백성에 대한 이방나라의 과도한 행동에 대한 심판

ⓓ. 최후로 하나님의 언약대로 남은 자가 회복

 

이상의 네 가지가 신약 때는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이 등장되고 바로 이들이 역사 주변과 갖는 관계를 통해서 구약의 남은 예언은 다 역사 안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이것이 완성되지 않는 한 역사는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역사는 언약이 허락하는 범주까지만 진행 된다.

 

남은 역사가 개봉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예수님 승천 후에 개봉되어야 될 이유는 언약의 발전에 따라 새 언약의 내용을 공개할 역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언약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 인자를 거부한 이 시점에서 과연 누가 언약의 백성이겠는가? 그것은 어린 양과 같이 그들로부터 거절당한 무리일 것이다(6:9-11). 천사에 의해 역사에 심판을 시작한 것이 첫째 인을 뗄 때부터이다(1:1).

 

자연 질서의 무너짐은 노아언약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점차 옛 언약이 심판 받는 과정이 되며 옛 언약에 의해 선택받은 무리와 인간들은 같이 하나님께 부정을 당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 재림 때는 창조언약에 속하는 하늘과 땅마저 날아가 버리니 이는 곳 옛 언약에 의해 탄생된 인간 자체에 대한 심판이기도 하다(6:12-17).

 

창조와 같은 순서로 옛 창조는 자리를 떠난다. 이는 역사의 세계가 끝나고 묵시의 세계가 그 자리를 차지한 셈이다. 창조가 처음 생기기 전, 그 무질서의 모습으로 창조는 은퇴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된 새로운 인간 무리가 등장하는데 그들의 수가 144,000(12×12×1000)으로서 야곱의 복이 최대로 증폭된 것이다(7:1-9). 그런데 그들에게는 눈물이 있다(7:17). 왜냐하면 환난에서 나온 자들이기 때문이다(7:14). 마치 아벨과 같다(창4:10).

 

그럼 누가 이들로 하여금 환난을 당하게 했는가? 마지막 일곱째 인 즉 미개봉 된 것을 펼칠 때 드러난다(8:1). 다섯째 인을 뗄 때에는 순교자의 무리가 등장했지만 다섯째 나팔을 불 때는 그들을 환난케 한 무리들이 보인다. 나팔의 의미는 바로 하나님의 최후 공격 목표가 누구인지를 알기에 그들을 향해 경고의 나팔을 분 것이다(9:1-13/ 암3:6).

 

그러나 아직도 그들을 전갈로만 표현하고 있는데 그들의 임금은 아바돈이다(9:11). 그들에게 경고의 나팔을 부는 것은 결국 주의 증인들이다(11:4). 그러나 그들이 자기 할 일을 다 했을 때 짐승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데(11:7) 그 장소가 주님이 십자가 달려 죽은 장소이다(11:8).

 

세상은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죽음을 기뻐한다(11:10). 드디어 이제는 그들에게 직접 심판과 저주를 퍼부을 차례이다(11:15,18). 그 진노는 하나님의 옛 언약에 기준하여 그렇게 합당하게 살지 못함에 대한 심판이다(11:19). 모든 인류가 다 그 기준에 의해 심판 받지만 새 언약에 의해 태어나는 여자의 후손(교회)만은 그 최후의 전쟁의 피해에서 제외된다(12:4-6, 13-17).

 

사단은 드디어 그 여자의 후손과 싸우기 위해 땅에 나타남으로 자기의 정체를 스스로 폭로하게 되었다. 그는 역사의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13장). 하지만 새 이스라엘은 시온 산에서 주님과 함께 있다(14:1-5). 마지막 진노가 시작될 때 성도들은 모세가 가르쳐 준 새 노래를 부르면서 하늘나라로 가는 홍해를 건너고 있다(15:2-4).

 

드디어 진노는 시작되었지만 이를 악물고 하나님께 도전하는데(16:10-11) 그 이유는 땅의 화려함과 사치에 이미 마음이 쏠려 있기 때문이다(17장-18장). 하늘에서는 혼인 잔치를 준비할 동안(19:1-10) 땅에서는 마지막 전쟁에서 사단(짐승)이 체포되고 만다(19:19-21). 여기서 성도들이 알아야 할 것은 왜 주님이 두 번 오셔야 되느냐 하는 점이다.

 

이 2중의 구속사건은 새 언약에 의한 새로운 이스라엘 창출에 있었던 것이다(20:5-6). 사망과 애통, 눈물 이 모든 것이 이제 사라져 버리고(21:3-4) 오직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생명나무와 생명수가 흐르는 새 예루살렘성이다(21:6,10/22:1). 이 모든 것은 옛 언약에서 멸망 받을 자기 백성을 자신의 피로(7:14) 그곳에서 건져 주시고 생명수를 값없이 주시는(22:17) 어린 양, 예수님 덕택이다. 오소서! 어린 양이여!

 

Ⅲ. 결론

 

‘생명’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기존의 아담의 몸으로 사는 것을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개념이다. 반면에 ‘예수 안’에서 사는 것을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묵시 세계에서 통용되는 개념이다. 생명이 없는 곳에서의 생명은 생명이 아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태들은 기존의 생명을 고수하겠다는 세력과 새 생명을 알리겠다는 주님과의 싸움이다.

 

이 싸움에 인간은 관여하거나 끼어들 수 없다. 단지 그 효과와 결과물로 생산될 뿐이다. 성령을 받은 자만이 더 이상 자신의 생명을 증거하거나 정당한 것으로 변명하지 않는다. 단지 예수님의 생명과 그 정당한 조치를 증거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살고자 하는가? 그럴 필요 없다. 이미 죽은 존재이니까. 따라서 죽고자 하는가? 그럴 필요도 없다. 죽은 존재는 죽음의 힘에 수동적일 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침투의 효과로 성도는 주님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의 능력을 부여받을 뿐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바로 이 사건 때문에 들썩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