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열왕기상 8:12-13 / 빛과 어두움 본문
빛과 어두움
이근호
2025년 2월 19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8:12-13
(8:12) 그때에 솔로몬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캄캄한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
(8:13)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로소이다 하고
‘여호와께서 깜깜한데 계신다’는 것은 레위기 16:2에 나오는 상황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따라서 솔로몬은 이 ‘깜깜함’을 지워버릴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의식은 사무엘하 7:2에 나오는 다윗의 의식과 같습니다.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여기서 다윗은 백향목에 있는 다윗과 휘장에 계신 하나님을 비교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다윗 자신에 비해서 초라하다 는 겁니다.
다윗이나 솔로몬이 하나님을 자기 곁에 나란히 하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빈약한 공간에 자리잡은 하나님 위상이 하나님의 가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하지만 다윗과 솔로몬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언약의 진위입니다.
백향목이나 솔로몬의 화려한 성전은 모든 자재가 자연에서 얻어진 겁니다. 이는 인간 자체가 자연 안에 살아가는 방식에 둘러싸여 사는 것이 외연의 한계인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삶의 공간 경계 밖에 뭐가 있는지를 모릅니다. 인간 삶의 공간 밖에 계신 분이 인간들이 삶에 나란히 현존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엘리사에게 있어 하나님은 삶의 공간 밖에 계시는 분입니다.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저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왕하 2:14) 엘리야 선지자는 불수레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따라서 엘리사의 삶의 외연은 자연세계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합류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어두움에 둘러싸여’ 오시는 겁니다. 그 이유는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알려집니다.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출 12:42)
하나님께서 애굽나라 전체를 ‘어두움’으로 표현하십니다. 이는 곧 낮과 밤이라는 자연세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겁니다. 이 ‘보편적 어두움’을 봅아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둘러싸면서 이동시킵니다. 그것이 바로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는 이유입니다.
이 ‘이동하는 어두움’이 약속의 땅에 도달하면서 ‘정착하는 어두움’이 됩니다. 그런데 다윗과 솔로몬에 와서 이 ‘어두움 속의 언약궤’를 양성화시키겠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자연적 자재로 지은 집 안에 둘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다윗이나 솔로몬이나 모두 하나님을 바로 곁에 두는 바가 된다고 여깁니다.
하늘의 복이 내려오는 하나님과 같은 공간에 나란히 한다는 것은 곧 자신도 하나님의 혜택을 입는 존재로 자부할 수 있다고 여긴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자연세계의 외연으로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언약을 인간 존재와 병행해서 같이 적용할 수 있는 식으로 해석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하 7:14에 보면, “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영원히 계시는 집은 ‘하나님의 아들’의 발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 안에서만 계시려는 겁니다. 이것은 자연에서 나오는 건축 자재로 세운 건물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기존의 자연세계에서 밝다/어두움의 인식 자체가 수정되어야 합니다. 곧 다윗언약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져야 합니다. 외연을 자연세계를 초과해서 넓혀져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어둡다’는 것은 어떤 건물 안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세계 전체로 확대되도록 보편화되어야 합니다.
신약 성경에 들어오게 되면 다윗언약은 그 완성의 절정을 맞이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5에 보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3:19-21에서는,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자연 세계 안에 낮/밤으로 빛/어두움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빛이 되시어 오시므로서 이 세상은 전체 어두움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빛되신 예수님을 못 알아보니까요. 못 알아보는 이유는 이사야 45:15는 나옵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 주님을 어떻게 사람이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어두움의 극한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면 자기 백성은 주님은 빛과 어두움의 창조주로 알아보게 됩니다. 사도행전 9:3에서는 사울이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행 9:3)
이로 인해 사울은 장님이 됩니다. 즉 인간 육신에 달고 있는 눈은 자연세계를 초월하는 빛을 수용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20:28에서는 도마라는 제자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때까지 도마 및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님,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들과 나란히 현존이 가능한 위대한 진리를 가르치는 스승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불신앙이 주님에 의해서 지적받고 난 뒤에 비로소 자신들의 그동안 모든 행적과 불신앙마저 ‘어두움’이 되며, 이 ‘어두움’은 다윗언약의 완성으로서 빛 그 자체로 나타나기 위해 연류된 현상으로 알게 됩니다. 즉 자연에 빛과 어두움을 만드신 분이 이제는 자연을 초월한 ‘빛 자체’가 되신 분이었던 겁니다.
따라서 어두움은 이 빛과 함께 할 수 없기에 보편적으로 어두움이 되는 겁니다. 그 빛 자체가 인간의 육신의 방해를 뚫고 마음 속까지 오게 되면 성도는 비로소 자신의 어두움의 모든 행위마저 빛이 빛되기 위해 끌려들어간 대상자임을 알게 됩니다. 이미 빛 안에 있고 그리고 모든 것이 빛만 드러나는 세계 안에 놓여 있게 된 겁니다.
지옥이란 예수님이 없는 곳입니다. 천국이란 인간의 만족하고 행복한 곳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계신 곳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어떻게 되든 예수님만 계신다는 그것만으로 충분한 자가 천국백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어두움을 통해서 주님이 주님답게 드러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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