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예레미야 32:6-7 / 영원한 부동산 본문
영원한 부동산
이근호
2025년 1월 2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2:6-7
(32:6) 예레미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느니라 이르시기를
(32:7)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시더니
구약 성경의 무대는 땅입니다. 약속의 땅이란 지상에 새겨진 하늘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예언에 의하면 그 약속의 땅은 사그리 비워져야 한다는 겁니다. 아무도 살아서도 아니되고 살 수도 없는 땅이어야 하는 겁니다. 곧 이스라엘의 전면적인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아예 희망은 없는 것일까요? 땅의 멸망으로 끝일까요? 아닙니다. 세상은 다 무너져도 말씀은 지속됩니다.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그 말씀의 지속성을 위하여 도리어 약속의 땅은 비워져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전한 말씀 안에는, 이스라엘의 멸망과 더불어 70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말씀이 정확하다면 약속의 땅의 일부를 미리 예레미야가 사놓는다는 것은 자신의 말씀을 따르는 자들이 결국 이 땅을 차지하게 된다는 점을 말해주는 바가 됩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예레미야의 집안이라고 할 수 있는 조카가 예레미야에 와서 자신의 땅을 사두어라고 부탁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사람은 같은 사람을 의지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가졌을 때는 자신만만하게 홀로 살 생각도 해보지만 막상 옆에 아무도 없을 때의 상실감은 큽니다. 이처럼 주위에 ‘사람 없음’은 사람을 더욱 그리워하게 만듭니다. 이처럼 지독하게 사람을 찾게 되는 그 순간에서는 말씀은 한곁같이 자체적인 계획을 수정없이 밀어붙이게 됩니다.
즉 사람은 사람을 찾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인간의 행위에 일체 그 어떤 동정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 안에는 이 땅에 어떤 분이 오셨다가 떠난 그 행적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사람을 끌어당기되 이미 확정된 그 내용을 그대로 지상에 퍼뜨리게 됩니다.
이점을 염두에 두고 히브리서 11장을 보게 되면 거기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자꾸만 이 세상을 떠나려고 합니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히 11:27)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3-16)
그렇다면 예레미야처럼 다시 돌아올 부동산은 어디있지요? 히브리서 13:14에 보면,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부동산은 이 땅에서 오셔서 모든 말씀을 다 이루신 예수님이 계신 바로 그곳입니다. 온전하게 말씀이 완성이 되어야 비로소 영원한 도성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을 찾을 것이 아니라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영원한 부동산을 함유하고 있는 그 말씀이 우리 마음 속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 말씀의 자체적인 힘에 의해서 우리 마음은 이 땅에서 영원히 기거할 마음을 품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 안에서 영원하고 안정적인 중심처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실패로 끝납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 모든 곳이 하나님의 불의 심판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노아 홍수 때 노아에게 방주가 없었으면 노아도 물 속에서 멸망당하게 됩니다. 따로 방주라는 만들어 물의 심판성 위를 떠다니게 했습니다. 세상의 그 어느 곳에 부러워할 곳이 아닙니다.
오늘날은 불로서 다 당합니다. 피할 곳이 없습니다.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계 6:14-17)
따라서 성도는 그 안에 들어 있는 말씀에 의해서 늘 붕 뜬 삶이 됩니다. 그런데 그 힘이 어떤 일에서 나올걸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예레미야가 조카 땅을 사면서 ‘무른다’는 형식으로 사게 됩니다. ‘무른다’는 말은 피해입은 자에게 가해자가 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 정신과 결부되면 가해자도 아닌데 피해입은 자를 물러주게 됩니다.
룻기 4:6에 보면,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가장의 잘못으로 하나님께 물러받은 전 재산을 말아먹은 가정에게 가해자도 아니면서 가까운 친척이 나서서 대신 상속을 땅을 사서 도로 땅을 잃어버린 자의 몫이 되게 하는 겁니다.
이 원칙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관련있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요 2:25) 또한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신 것도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가담될 수 없었습니다.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요 8:17-18) 하지만 이런 상태가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물러주시는 분이 되신다면 그때부터 성도는 하나님의 일에 가담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 증인의 내부는 더는 자신을 위한 삶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마치 헬륨가스가 차 있는 풍선처럼 지상에서 발을 뗍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 구원을 시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절로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의 전달체가 됩니다.
수시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의지하려 할 때마다 말씀이 작동하면서 주님쪽으로 기울게 하십니다. 마치 기름이 들어있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가 신랑 만나기 전에 벌써 함께 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마 25:4) 기도합시다.
『 하나님, 혼자 살지 말게 하옵소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게 하시고 주님께서 이끄시는대로 움직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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