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예레미야 32:37-41 / 언약 교체 본문
언약 교체
이근호
2025년 2월 9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2:37-41
(32:37) 보라 내가 노와 분과 큰 분노로 그들을 쫓아 보내었던 모든 지방에서 그들을 모아내어 이곳으로 다시 인도하여 안전히 거하게 할 것이라
(32:38)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32:3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를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32:40)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32:41)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정녕히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면서 순탄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일단 작살내시고 그 다음 이어서 일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의 소망과 이익과 기대감을 갖고 하나님을 믿는 것을 허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인간이 원하는 바가 근원적으로 같지 않음을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전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에, 그들은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났다는 기쁨은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애굽에서 살 당시에도 그들은 자신의 행복 욕망에 마음두고 살았고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를 거치고 왔을 때도 한결같이 자기 행복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본성을 유지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막상 자기 행복을 포기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또 다시 약속의 땅에 들여다 보내준다고 해도 인간의 자기 내부가 바뀌지 않는 한 하나님의 연속적인 분노는 여전히 부여받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직접 인간 마음들 속에 주셔서, 하나님과 더불어 다른 백성들도 다같이 ‘한 마음’화 되게 하시고자 합니다. 이것을 ‘가족’이라고 합니다. 이는 인간들의 기존의 가족관으로서 하나님께서 함께 할 수 없음을 뜻입니다. 예수님과 한 가족을 형성한 요셉의 가정의 예를 들어보면 이러합니다.
예수님은 복잡한 명절 때에 부모만 헤어지게 되었고 부모는 자연스럽게 잃어버린 어린 예수님을 사흘이나 찾게 되었습니다. 이때 부모의 마음은 무겁기 한량없었을 겁니다. 어린 예수님을 만나면 단단히 나무랄 준비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은 예수님을 통해서 교체될 마음일 뿐입니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눅 2:46-50)
이 말씀에서 ‘양친은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에 유념해 보세요. 이게 인간 마음의 한계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들로 단단하게 가족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겁니다. 즉 비록 예수님을 키워낸 부모라 할지라도 자신들의 마음이 어떻게 달라지고 바뀌어야 하는지를 몰랐던 겁니다.
또 하나의 예를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8:20-22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계관이 여기에 나옵니다. 예수님의 거처할 곳은 인간들이 단결해 있는 이 세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신세는 이땅에서 떠돌이입니다. 여우와 공중의 새보다 못한 처지입니다. 이 세계관을 알지 못하고 어떤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시점에 자신의 아버지가 사망해서 장례를 치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따르는 것을 잠시 지체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제자를 나무랍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것조차도 주님의 세계관을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제자는 자신이 어떤 변화를 겪어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예수님의 변화는 사망에 관한 겁니다. 고린도전 15:26에 보면,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이며 그 이유는 사망과 결부되어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들이 끝까지 달라붙어있는 사망을 척결하기 위한 힘이 된다는 겁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로 하여금 자신이 이미 죽어 있음을 인정하라는 겁니다. 즉 죽음과 한 몸이 될 때만 예수님의 부활이 의미 있게 발산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새로운 언약으로 묶으시려고 합니다. 그 언약은 영원한 언약입니다. 다시는 인간들의 무관심이 망쳐버린 그런 언약이 아닙니다. “ 인간들아 이 언약을 지켜라”가 아니라 “친히 내가 너희 속에 들어가마”를 성사시키시는 언약입니다. 이미 인간들은 서로들 하나가 되려고 작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벨탑 건립’입니다. 기존 자기들의 생각들을 생각들로 하나로 뭉치게 되면 다시는 헤어짐을 없을 것이라고 여겼고 자신들의 생각에 하나님마저 포섭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서 거절당합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 새로운 하나됨에서 나온 나라를 만들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을 복있는 자라고 인정하는 자에게 복음이 임하게 되는 나라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3) 어떤 사람이 양봉 사업을 하기 위해 같은 양봉 하는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벌떼를 돈을 주고 분양 받았습니다. 그런데 벌을 분양받은 자가 자기에게 벌을 판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여왕 벌’이 없었다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여왕벌은 뭐지요? 바벨탑 대신 하늘에서 찾아온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이 성령으로 인하여 “누구든지 주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가 성립됩니다.(행 2:21) 여기서 중요한 점을 나 구원을 위해서 예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직접 찾아와 주신다는 점입니다. 즉 ‘나의 일’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일’인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부담에서 벗어나세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소지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에게 소지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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