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예레미야 32:1-5 / 외래인 본문
외래인
이근호
2025년 1월 19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2:1-5
(32:1)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십년 곧 느부갓네살의 제십팔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32:2) 때에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혔으니
(32:3) 이는 그가 예언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취할 것이며 유다 왕 시드기야는 갈대아 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운 바 되리니 입이 입을 대하여 말하고 눈이 서로 볼 것이며
(32:4) 그가 시드기야를 바벨론으로 끌어가리니 시드기야가 나의 권고할 때까지 거기 있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32:5) 너희가 갈대아 인과 싸울지라도 승리치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더니 유다 왕 시드기야가 가로되 네가 어찌 이같이 예언하였느뇨 하고 그를 가두었음이었더라
인간은 자신의 한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필요한 것들만 생각합니다. 이는 모든 것을 경험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마음자세를 갖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모든 것을 쉬지 않고 제공해주셨습니다. 이는 세상은 인간들의 경험한 것의 총합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제공하신 것은 극히 일부인에게만 전달됩니다. 선지자에게만 주어집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일관된 오해로 무장되어 살아갑니다. 본인들이 하나님을 찾으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지켜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편이 아닙니다. 그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편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로지 하나님편이라는 점을 기꺼이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려면 ‘하나님은 내편이다’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편’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지상에 전쟁을 일으키므로서 인간이 하나님의 적이라는 점을 드러내십니다.
우리는 인생도 여기에 속합니다.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적으로 살면서, 즉 자기 위주로 살면서 하나님편에 산다고 위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정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일으키신 전쟁을 통해서 밝혀집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의 편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납니다. 어떤 식으로 드러날까요?
이점을 드러내기 위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민족 중에서 유독 이스라엘 민족에 애틋한 사랑을 보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스라엘은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예레미야라는 선지자를 통해서 자신들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예언이라는 형식으로 수용받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예레미야에게서 나오는 예언은 ‘이스라엘 멸망’입니다. 더구나 이스라엘의 적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적으로 간주되는 바벨론 제국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다는 그 사실이 더 경악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 시드기야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예레미야를 궁전에 가두기를 명령했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틀렸고 자기네들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됨을 나중에 전쟁에 돌아와서 확인하고 싶었던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바로 그런 뜻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을 이방나라에 포로잡히게 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원대로 여전히 이스라엘이 다루어지고 있음을 증명하고 싶어하셨습니다.
즉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신 그 원칙을 이제는 이방나라 전체에 확대시키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서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자는 예레미야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하나님의 뜻이 자기 신세보다 더 선행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즉 내 인생이 어떻게 되든 그런 일조차도 하나님의 뜻과 예언에 의해서 차질없이 이루어지는 일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뜻의 증명체입니다. 예레미야는 결코 자신의 원대로 뜻대로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자기로부터 벗어나고 탈출한 상태에 놓인 겁니다. 이럴 경우에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말고 따로 외래 존재가 계셔서 그에게 일어난 일에 준해서 자신의 일생이 진행될 뿐인 겁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시드기야의 볼모로 잡히게 됩니다. 그런 조치를 한 시드기야 하나님께서는 볼모로 잡아 버립니다. 마치 악어를 잡아서 만든 악어가죽 가방을 가진 여자를 악어를 잡아먹는 식이 되는 겁니다. 그 어느 누구도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주인노릇하면 안됩니다.
모닝이라는 차에 벤츠의 로고를 붙인다고 해서 우리가 그 모닝 차를 벤츠라 불러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나 이방민족으로 ‘나’라는 기조에서 벗어날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마치 선불교에서 스승되는 스님이 제자에게 다음과 같이 문제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 회초리 있다고 한다면 너는 이 회초리로부터 맞는다.”
“만약에 이 회초리가 없다고 한다면 너는 이 회초리를 맞는다” “만약에 네가 이 회초리에 대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으면 너는 이 회초리에서 맞는다”고 했습니다. 이 제사 중이 스승 중에게 회초리를 맞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여기에 ‘없음’을 집어넣으면 됩니다. 즉 “여기에 회초리가 있거나 없는 게 아니라 회초리에 맞은 제자도 없고 회초리를 든 스승도 없다”고 말입니다.
이 ‘없음’의 원리가 출애굽 12:42에 나옵니다.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여호와의 밤’이란 언약 사람 야곱에게 찾아온 그 하나님의 세계를 말합니다.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창 32:22-25)
이러한 만남의 결과에 대해서 야곱은 이렇게 평합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창 32:30) 즉 그 여호와의 밤에 야곱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 없었던 ‘이스라엘’이 새롭게 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의 외래인으로서 홀로 물세례와 성령세례와 불세례(=아버지로부터 저주받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관계로 인해 이 인간세계는 캄캄한 어두움의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는 인간들은 자신들이 ‘여기 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여기 있는’ 자신을 도와줄 줄로 알았던 겁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복음이 말해주는 것은 고린도후서 4:4,6에 나옵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어두움을 낮이라고 오해하지 않고 도리어 이 세상이 캄캄한 밤, 곧 여호와께서 지배하시는 세상이기에 새로운 피조물이 외지분의 방금으로 생겨났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들어오심으로부터 비로소 참 이스라엘임을 인정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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