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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예레미야 31:31-34 / 새 언약의 차이점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예레미야 31:31-34 / 새 언약의 차이점

정인순 2025. 1. 5. 16:39

음성 동영상

 

새 언약의 차이점

 

이근호
2025년 1월 5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1:31-34

(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1: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쪽에서 전에 먼저 주신 언약과 차이나는 언약을 새롭게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한결 같으심’에 기대를 걸던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주체측에서 바뀌면 따라야 하는 자들은 거기에 맞추어 자신도 달라짐을 요구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바뀔려면 전의 언약과 새로운 언약, 모두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전의 언약과 새로운 언약, 모두를 알지 못합니다. 옛 언약을 통해서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문제점이 있음을 알아야 하는데 인간들에게 이러한 자정능력이 없습니다. 외부가 바뀌고 타인이 바뀌기를 요구할 뿐이지 자신이 바뀌는 경우는 없습니다. 문제는 바뀌지 아니하면 새로운 언약에 의해서 제거 대상으로 전락한다는 점입니다.

전의 기준과는 다른 새로운 기준에 준해서 세상을 구성하겠다는 계획에 옛 언약에 미련갖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에 대해 방해꾼이 될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두 개인의 차이나는 언약을 준비하신 취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있다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점은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에게 마찬가지로 적용된 문제 상황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처나, 자식이나 육신적으로 버릴 수 있는 것은 다 버린 자들입니다. 예수님만 한결 같다면 그들은 선택을 성공작처럼 여기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이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 자신이 바뀐다면 그들의 예수님 따르기는 다 헛수고가 될 공산이 큽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선입견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요구에 부응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전폭적으로 자신들의 황금 기간을 예수님께서 앞서 가게 해줄 것을 소망했습니다. 하지만 동행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선입견에 호응해주실 마음이 전혀 없으십니다.                      

제자들 앞에서 제자들이 예상하는 그런 메시야가 아닌 다른 모습의 메시야상을 전달하십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도저히 함께 하실 수 없는 분임을 점차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에ㅐ 대해서 회의를 갖게 되었고 심지어 그 중 한 제사 가룟 유다는 내부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하나님께서 기획하시는 새 언약을 받아줄 마음 자체가 성립되어 있지 않았던 겁니다. 도대체 제자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 걸까요? 그것은 인간들은 자체적으로 예수님께서 가시고자 하는 ‘고난의 길’을 나설 위인들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혜택을 받아 원래 본인들이 고대하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집중했던 겁니다.

이스라엘에 있어 그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 길의 들어서자 그들 내부에 불만이 터져왔습니다. “이럴려고 했으면 우리는 애굽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그만큼 외부 환경이 고생스럽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나 오늘날 우리들에게 자기네 인생은 자신들의 예측에 의해서 꾸려나가고 싶었던 겁니다.

즉 인간에게는 ‘외부의 언약’이라는 요소는 없고 스스로 자체적으로 자기를 지켜내는 언약을 만들어내고 간직하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새언약은, 이처럼 인간들이 자생적으로 조작해내는 언약을 겨냥하는 식으로 주어진 것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눅 12:4-7)

그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들을 때, 얼마나 심적으로 불안감에 휩싸이겠습니까. “두려워 말라”는 말씀은 실제로 도저히 안 두려워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는 말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절망적인 상황을 하나님께서 만들어내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인간은 미래를 뚫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미래에서 오게 되어 있습니다. 미래에서 바라볼 때,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뚫어낼 수 없는 세계에 하나님께서 미리 와 계신 겁니다. 인간들의 그 어떤 가능성으로도 하나님과 합류할 수 없는 그런 세계입니다. 바로 이 노선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들을 이끌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하신 바가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 시대인 이 신약 시대 관점으로 구약의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가 히브리서 11:24-26에 나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우리가 보기에 모세는 어떤 선택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구약적 관점에서 보면 모세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모세는 강제조치를 당해서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해 온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하는 일로 인간은 망해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선택은 새 언약 관점이 장착되지 못하고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려는 시도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결과로 현재에서 예측한 천국은 천국이 아니며 소망은 소망이 아닌 것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환란을 통과하지 못할 때, 혹은 환란을 거부했을 때 나타나는 소망은 진정한 소망이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선택이나 결정 짓기 앞에서 미래에서 미리 주어진 능력 같은 것을 제공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서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삽입시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새 언약’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하나님이 하신 미래의 결정을 현재에 운반하는 전달체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의 전달체’입니다. 이 안에서 “다 이루심”이 있기에 그 어떤 난관이나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말씀이 이 환란 속에서 기어이 “다 이루심”을 구현해내게 됩니다. ‘새 언약의 위력’이 이런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