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예레미야 31:27-30 / 옛 언약의 한계 본문
옛 언약의 한계
이근호
2024년 12월 29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1:27-30
(31:2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31:28) 내가 경성하여 그들을 뽑으며 훼파하며 전복하며 멸하며 곤란케 하던 것 같이 경성하여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31:29) 그 때에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31:30)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 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
하나님의 계획에 인간들은 늘 말려들고 이용당할 뿐입니다. 그게 피조물의 마땅한 입장입니다. 하나님께서 단단한 각오로 스스로에게 다짐하시면서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때처럼 이스라엘을 다시 세울 작정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시할 수가 있습니다.
멸망시킬 때는 무슨 기준으로 멸망시키고 다시 회복하실 때는 무슨 기준에 의해서 회복하시는지 궁금할 수가 있습니다. 이는 멸망시킬 때의 기준과 회복하실 때의 기준이 동일하냐에 대한 의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기준을 알려주신다면 인간은 대비해서 그 기준으로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다짐은 해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놓치면 아니됩니다. 즉 이스라엘은 결코 이스라엘이 예측한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없던 나라가 하나님의 손으로 만들어졌기에 이스라엘을 망친다고 해서 이스라엘 입장에서 손해라고 간주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야무지게 망치고 다시 세우는 이유는 기준 자체에 대한 변경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에 의해서 제시된다는 사실입니다.
즉 인간들 입장에서 “왜 일방적으로 심판 기준을 변경하십니까”라고 요구한 권한이 인간에게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존의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는 이유는 멸망시키는 작업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불만이 터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즉 출애굽기 20:5에서 나온 기준을 자신들이 믿었다는 겁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즉 아비가 우상을 섬기면 그 저주가 삼 사대까지 이르게하시겠다고 하나님께서 다짐하신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이 기준에 준해서 자신들의 나라가 망한 것은 자기 탓이 아니라 조상탓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조상도 물론 잘못이지만 그 시대에 살던 자들의 잘못도 섞여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조상탓’이라는 당연한 전의 기준을 거론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옛언약에 대체할 새로운 언약을 벌써 준비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레미야 31:31에 나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렘 31:31-32)
그런데 이 새언약을 바쳐주는 원칙은 옛언약과는 다른 내용입니다. 그것은 예레미야 31:29-
30에 나와 있습니다. “ 그 때에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 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
즉 아비와 지식 사이를 새언약을 파고 들어가게 되면 ‘육신의 고리’는 기존의 층 위에 새로운 층이 생겨납니다. 모든 인간이 이 새언약에 준해서, 새 층에 의할 것같으면 모두 다 죄인이 됩니다. 기존의 옛언약 층에서 생각으로는 육신의 층 위에 있는 층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일이 야곱 시대에 있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그 꿈을 요셉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 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하리니 당신이 이왕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 손에 받들게 되리이다”(창 40:9-13)
여기서 요셉의 꿈은 인물과 시간 모두를 지배하는 내용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경험한 오늘은 미래로 나아가는 장벽같은 겁니다. 오늘을 살기에 그 어떤 경우라도 내일에 대해서는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주저없이 사흘 뒤를 말해줍니다. 요셉에게 왜 이런 능력이 있는 하며는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언약 의하면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익한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 하매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창 37:26-27) 아버지 야곱의 입장에서는 어쨌든 요셉이 채색옷 입고 다시 자기쪽으로 오지 않으니 죽은 자에 다름없습니다.
즉 요셉은 언약적으로 이미 죽은 자로 다루어지기에 꿈에 함유된 내용으로 움직여질 뿐입니다. 바로 이런 점이 인간 육신으로 움직이는 세상 위에 존재하는 말씀의 층에서 벌린 일입니다. 그만큼 ‘죽은 자’ 요셉 앞에서 땅의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서 무능합니다. 종속적입니다. 그들의 자신들의 앞을 알지 못하고 꿈의 함축된 내용으로 펼쳐질 뿐입니다.
이 하늘 층에서 새로운 기준이 내려옵니다. 이 기준은 인간이 통과할 수 없는 미래에서 이미 확정난 기준입니다. 어느 인간도 스스로 자신을 죽여서 하늘에다 옮겨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저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 기준을 최종 확정지으신 분은 ‘언약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그분 뿐입니다.
그분이 씹었던 신포도 안에서는 윗층의 세계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소위 살아 있다고 자부하는 모든 자들은 이로서 윗층으로 나아갈 자격은 애초부터 박탈당한 처지입니다. 이제 누가 구원되고 아니되고는 윗층 나라에서는 벌써 확정이 난 상태입니다. 따라서 구원되는 자들은 요셉처럼 꿈의 징후를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게 될 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구원되었습니까?” 여기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새언약 준한 피의 기준에서 구원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의 결정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 자신에 대한 그 어떤 기준도 주님의 기준에 비할 바가 못됨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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