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8:5-6 / 십자가의 그림자 본문
십자가의 그림자
이근호
2024년 11월 17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8:5-6
(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8:6)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그림자란, 폭이나 두께가 없고 이리저리 늘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잡을려고 해서 손에 잡히지가 않습니다. 즉 인간이 그림자를 다루려고 해도 다룰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림자가 실체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존재가 천사입니다. 창세기 32:1-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이 만남이 있고 난 뒤 야곱은 얍복강에서 본인도 ‘이스라엘의 그림자’가 된 야곱이 됩니다. 즉그냥 그림자가 아니라 하늘의 할 일을 반영하는 그림자입니다.
그 하늘의 할 일이란 같은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악마와 그 귀신들과 싸우는 전쟁터 상황으로 강제 징집당한 형편으로 사는 겁니다. 이러한 그림자로서의 규정은 인간은 자체적으로 실체 노릇을 할 수 없음을 언급하는 겁니다. ‘∼의 그림자’로서 사는 겁니다. 자기를 위한 계획이 용납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하나님 아버지의 그림자+실체로서 이 지상의 생애를 보내셨습니다. 반면에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누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없습니다. 악마가 인간에게 자신의 심성을 불어넣어 폭과 두께로 부풀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서는 자신이 타고 다니는 마차로 부러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타난 현상이 이러합니다. “결국 불확실하고 모호한 하나님 때문에 멀쩡한 내가 손해 볼 상 싶냐?” 즉 인간에게는 자기를 위한 기억들이 누적되어 있어 복음 때문에 자신이 죽을 까닭이 없다고 여깁니다. 세상 교회에서는 설교단에서 다음과 같은 외침을 쏟아냅니다.
“성도라면 성도에 합당한 행위를 보여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닙니다. “네가 버리지 못하는 너를 내가 버려주겠다”입니다. 바로 이 일을 일으키는 곳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 ‘성막’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목숨이 더러운 목숨인 것을 ‘피’로 표현하십니다.
땅에서 피흘림의 사태가 벌어지면 이는 거룩한 곳을 더럽게 만드는 저주받을 짓이라고 규정하는 하시는 겁니다. 가인이 죽인 아벨의 피 흘림이 바로 그런 예입니다. 땅이 더러운 피가 발생했다고 하나님에게 고자질을 해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찾아오신 겁니다. 레위기 17장에서 약속의 땅에 결코 인간 피가 쏟아져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피는 오직 성막을 통해서 받아지는 거룩한 희생제물의 피입니다. 바로 이런 이야기가 ‘예수님의 기억’입니다. 인간들의 자기 기억으로 사는 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영원한 지옥불입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2-15)
인간들은 말하기를, “이번 생애에서 하는 것은 영원토록 남을 것이다”고 합니다.
즉 지금 이 생애에서 한 것으로 인해 우리들의 장래가 결정짓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악마의 거짓말입니다. 사람들은 누가복음 16장 성경 말씀을 통해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 두 사이의 운명을 나란히 평행된다고 여깁니다. 결코 만날 일이 없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그 어떤 것도 만나지 않는 평행선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평면이 아니라 하나의 중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은 바로 예수님의 기억. 예수님의 행하심입니다. 인간들의 자기 기억에 의해서 각 개인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억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그 예가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나다나엘이란 사람이 빌립을 통해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 이때 예수님에게 나다나엘에게 오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
그러자 나다나엘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반문합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창세전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나다나엘의 기억이 예수님의 기억과 충돌을 일으키는 장면입니다. 성막에서 진행되는 모든 일은 더러운 피를 깨끗한 피로 교제하는 작업입니다.
천국의 생산은 이처럼 분류로부터 시작됩니다. 마태복음 13:47-50에 보면, “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있는 자가 곧 예수님의 기억으로 교체된 자이기에 좋은 고기요 예수님의 기억이 없고 자기 기억으로 사는 자는 나쁜 고기가 됩니다. 바둑두는 자들이 돌을 판에 놓을 때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수들은 전체를 보는 안목이 떨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어느 인간이든 전체를 다 알고 난 뒤에 선택하거나 결정에 나서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전체는 베드로후서 3:7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전체를 다 아시니까 기 불 속에 간수된 자 중에서 자기 백성을 자신의 깨끗한 피로 인양하려 하십니다.
이것은 곧 환경 교체를 뜻합니다. 그 환경 안에서 그 어떤 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성도에게 일어난 모든 것은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의 이미지요 현상입니다. 도피성 안에서의 삶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기억을 매일같이 삭제하시고 그것마저 주님의 기억에서 나온 현상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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