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8:12-13 / 두 언약의 차이 본문
두 언약의 차이
이근호
2024년 12월 1월
본문 말씀: 히브리서 8:12-13
(8:12)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8: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망상에 가까운 소위 신앙이라는 것은 항상 명백한 현실에 밀립니다. 그것은 사람이란 돈 없이는 못산다는 사실과 그 돈을 오직 자신의 노동에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이 소중하다고 말할 때마다 돈과 재력의 끌림을 애써 가리고 싶어서 내뱉은 소리입니다. 딸하서 오늘 본문에 말하는 ‘첫 언약’이란 사실 관심밖의 일입니다.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노력에 근거해서 살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도와줄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들을 파괴했습니다. 멸망시켰습니다.
순수한 이스라엘 집단을 괴멸되지 오래며 순수함을 찾기가 민망할 지경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파괴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첫 번째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때 다른 민족으로 자신의 노동을 대가로 잘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파괴시키시면서 하필 율법을 모르는 이방민족을 동원시켰습니다.
이는 모든 인간은 본성상 똑같다는 겁니다. 하지만 똑같이 않고 하직 이스라엘이 해야 할 중대한 일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악마의 본성을 똑똑하게 드러내는 일입니다. 곧 사람이 하나님을 죽이는 일입니다. 이 세상의 최고자는 둘 이 될 수 없습니다. 악마는 예수님의 흔적으로 걷어내려 했습니다.
악마의 사주를 받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좋게 하시는 일로 확신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옛언약의 완성단계에 도달했다는 신호입니다. 특히 유대민족이 종교적이라는 점에 유념해야 합니다. 즉 자신이 내린 일상의 모든 결정과 선택을 철두철미하게 하나님과 관련시켰던 자들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정립된 천국, 지옥, 부활, 의로움, 자비, 이웃사랑, 제사, 예배, 찬양, 전도, 기도, 구제, 금식, 안식일 준수 및 할례, 성전, 영생 등등의 개념을 모두 ‘자기를 위하여’와 관련시켜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이점을 지적하는 예수님의 발언을 듣고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하나님을 죽였습니다. 실은 배후에 악마가 유대민족으로 앞잡이 삼아서 그렇게 한 겁니다. 종교마저 악마는 자기 세계의 박스 안에 담았고 덮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박스 안에 갇히지 않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런 일련의 절차가 새언약의 내용을 형성합니다. 옛언약에서 죽으신 분이시기 비로서 ‘새 언약’을 언급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일방적으로 천국갈 자가 지옥갈 자를 전적인 자기만의 결정으로 확정지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 누구의 간섭이나 의견을 들을 필요조차 없고 그 어느 인간의 개입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마지막 심판 분류에서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는 순전히 예수님 혼자서 결정하신 겁니다.(아버지와 사전에 약속하신 대로)
이렇게 되므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받지 않으십니다. 이같은 취지는 일찍 율법 안에 들어 있었던 내용입니다. 레위기 1:9에 보면,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하나님께서 기쁘게 원하시는 것은 불 속에서 다 태워지야 마땅한 존재의 정당성입니다. 저주받아 죽어야 할 자이기에 마땅히 죽어야 하는 겁니다. 인간을 대신해서 희생제물이 불판 위에서 다 태워지기에 사실상 인간이 다 태워지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공되는 믿음과 은혜와 긍휼은 그 다음 차례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도는 예수님께서 가신 절차대로 편승됩니다. 이것이 새언약의 작용입니다. 하지만 옛언약 속, 곧 악마의 장악력 속에서 사는 인간들은 율법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절차를 밟습니다. ‘성경을 보다→죄를 알다→반성하고 통회하다→그래서 보다 착하고 의롭고 거룩한 생활을 한다’입니다. 이것이 옛언약 안에서 악마가 원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그 어떤 개념이나 용어가 나오더라도 옛 인간들은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참조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그 많고 많은 죄가 있지만 오직 단 하나의 죄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위하여’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반대로 말합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두 언약의 등장은 갈라디아서 3:23-24에 의하면 한 가정에서 태어난 두 자식의 아내로부터 출발합니다.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즉 옛언약을 거쳐야 새언약에 도달될 수 있기에 옛언약, 즉 율법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데리고 가십니다. 그렇다면 되면 다음과 같은 절차를 겪게 됩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 3:23-25)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철저하게 예수님에 의해서 추수물 내지는 열매로만 얻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그들을 죽이시되 율법에 의해서만 죽게 하십니다. 율법 안에서 인간은 육신상 오로지 ‘자기를 위해서 사는 ’죄를 발산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육신은 자아를 모욕하게 되어 있습니다.
복받겠다고 나서지만 주어지는 것은 저주뿐입니다. 한 아들에게는 복의 모자를 씌우고 다른 아이에게는 저주의 모자를 씌울 때, 나타난 현상은 무엇이겠습니다. 천국 구원은 본인들이 노력 여하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주님에 의해서 이미 결정났음에 대해 천국의 모자를 쓴 자식은 이런 사실을 두고 감격합니다.
반대에 저주의 모자를 쓴 자식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결정 소식에 알 수 없는 반발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이용당하는 존재는 되기 싫다는 노골적인 표정을 얼굴에 나타내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이렇게 됩니다.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8:12)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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