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7:26-28 / 단번에 쓰레기 본문
단번에 쓰레기
이근호
2024년 10월 27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7:26-28
(7: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7: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7: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근원적으로 문제 있음을 못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본인들이 제작한 신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작자가 따로 있기에 그 원리 원칙도 외부에서 주어져야 합니다. 그 원리 원칙이 바로 율법입니다. 이방민족은 이 율법이 없기에 그들은 각자 자신의 인생을 자기 역량껏 살아갑니다.
즉 자신의 수고와 자기 것을 지킬 수 있다고 하는 믿음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다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으로 인해 자신의 것을 지켜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1-2)
그동안 인간들은 헛된 노력을 해왔습니다. 자기 것을 건사하고 유지시키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면서 생을 살아갑니다. 과연 그런 식으로 인간은 자기 인생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인간들이 타인을 감당 못한다는 말은 자신도 자기가 감당 못한다는 말입니다. 산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죽는다는 것은 더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선택의 기회가 다 상실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제한 시간이 다 된 겁니다. 왜 사는지, 왜 죽은지, 그 이유조차 모르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니 더는 자아의 자율성을 지킬 수 없는 형편에 대해서 대단한 공포심을 갖게 됩니다.
이렇듯 인간들의 삶은 국소(局所)적입니다. 인생이란 자아 형성과정입니다. 살아가면서 오로지 ‘내가 누구며 어떤 존재로 구성할 수 있느냐’에 집중하는 기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각자 개별적으로 자기만 챙기는 것을 평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율법은 ‘약점 가진’존재가 인간인 것들을 들추어줍니다.
애초부터 인간은 약점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단번에’라는 말에 대해서 ‘자기 구원적 입장에서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내포되는 있는 약점으로 인해 이 생각은 엉터리입니다. ‘단번에’는 예수님 중심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면 이런 내용이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약점가진 모든 인간을 단번에 죽이고 없앤다”라고 말입니다. 구약의 욥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싸우는 모든 날 동안을 참고 놓이기를 기다렸겠나이다”(욥 14:14)
난데 없는 고난을 자신의 약점과 연결시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욥을 조롱합니다. “네가 제일 처음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욥 15:7) 그렇습니다. 여기에 제일 처음이 된 분, 혹은 산들이 있기 전에 산을 도리어 만드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숱하게 죽어나간 대제사장들과 이 예수님을 비교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준 율법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이방민족과는 특이함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바로 제사입니다. 이 제사는 수많은 제물들이 제단 위에서 죽어나갔습니다. 제사 작업 속에서 그 제물들이 어떤 식으로 다루어지는 지는 레위기 9:7-11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단에 나아가 네 속죄제와 네 번제를 드려서 너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속하고 또 백성의 예물을 드려서 그들을 위하여 속하되 무릇 여호와의 명대로 하라
이에 아론이 단에 나아가 자기를 위한 속죄제 송아지를 잡으매 아론의 아들들이 그 피를 아론에게 받들어 주니 아론이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는 단 밑에 쏟고 그 속죄제 희생의 기름과 콩팥과 간 꺼풀을 단 위에 불사르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고 그 고기와 가죽은 진 밖에서 불사르니라”
약점이 없는 제물들이 인간들의 죄를 실어나서 제단 위로 올라가는 과정이 제사입니다. 그 제물들의 육체는 결코 ‘진밖으로 불사르니라’로 마감됩니다. 재물 안에 인간의 약점이 스며든 결과입니다. 히브리서 13:11-13에 이 과정이 예수님의 최후 과정이 됩니다. “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즉 제사지낼 때마다 쓰레기가 양산됩니다. 그리고 그 버려진 쓰게 더미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도저히 인간이 예상 못한 메시야입니다. 진정으로 천국에 합격된 자들은, 자신이 요구한 메시야가 아니라 자신이 거부하고픈 메시야가 참진짜 메시야를 아는 자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그 메시야께서 율법을 자신에게 가져와서 새로운 공간을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새 성전’입니다. 그 새로운 성전을 통해서 쓰레기가 양산됩니다. 그것이 자아 구성에 나선 우리들의 육신입니다. 그 쓰레기도 서로 사랑하고 서로 미워해왔던 겁니다. 자신도 감당못하고 남도 감당못한 주제에 말입니다.
새로운 성전은 사람의 손이나 능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만들어진 성전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국소적이고 개인적으로 살던 자가 평균적으로 일관되게 성령이 하시는 일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이 단번에 일어내신 새로운 단번의 공간인 새성전입니다. 옛성전과는 달리 새성전이 생명수가 감당 못할 정도로 쏟어져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성전은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초막절을 그냥 물 붓는 이벤트를 벌릴 뿐입니다. 하지만 성령이 오게 되면 새성전은 다음과 같은 신기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7-39)
단번에 이루어진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반복적으로 우리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쓰레기인 것을 되풀이 되어 알게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과 함께 있음은 예수님 터진 배에서 흘러나온 피로 범벅 안에서 함께 있는 상황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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