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6:13-15 / 맹세의 발포산 본문
맹세의 발포산
이근호
2024년 8월 18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6:13-15
(6: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6:14)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6:15)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의 모든 맹세는 사람에게 맡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에게 맡기십니다. 이런 맹세가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을 때, 아브라함은 자신의 본색을 유감없이 드러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육신을 어떻게 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육신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지 ‘나’가 아닙니다.
‘나’는 악마로 인해 나중에 발생된 겁니다. 인간의 육신은 직접 하나님께서 다루십니다. 인간의 자아에 맡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악마로 인해 생겨난 자아가 이 육신을 자기 육신처럼 다루려고 했습니다. 반칙이지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맹세에서 인간을ㅇ 배제합니다.
그런데 그 배제하는 방식이 맹세를 주시므로서 밝혀집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아비집에 있을 때 만약에 아브라함에게 맹세가 주어졌다면 아브라함은 여유롭게 맹세를 지키려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맹세의 성취 현장을 본토 아비집이 아니라 낯선 곳에 데리다 놓고 주시게 되면 인간의 근본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생존에 있음을 발각시키십니다.
그냥 살아야겠다는 겁니다. 그냥 사는 것이 우선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은 ‘죽이시려는 목적으로 살려두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왜 하나님의 맹세에 대해서 인간이 관여될 수 없는가를 밝혀내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자꾸만 자아를 전면에 내세우기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자기 생존에 유리하고 자신의 미래를 본인이 확정지을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인간들은 죄를 짓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을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인간은 자신이 죄지었다고 인식하는 것만 벌받는다고 여기게 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이 이미 날 때부터 이단입니다. 죄 가운데서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인생을 살면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전부 다가 죄입니다.
이는 인간이 자기 인생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에게 맹세를 하시고 언약을 내리시는 겁니까? 이사야 55:8-11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과 전혀 다릅니다. 이렇듯 전혀 다른 하나님의 생각이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습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맹세의 연장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에 흥미를 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다급한 일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느냐’입니다. 하나님 말씀지키기는 그 뒷전입니다. 이런 인간들에게 약속의 땅을 약속하니 인간들이 얼마나 오해했을까요? 그들은 율법 제사법에 들어있는 내용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제사는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가 있습니다.
번제란 제사드리는 자가 물로서 가슴과 다리를 씻으면 제사장은 벌건 제단 위에서 다 태우는 제사입니다. 소제, 즉 곡식제사는 고기드릴 정도로 여유있지 못한 가난한 자들이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들은 곡식을 바치면서 필히 누룩과 꿀을 넣어서는 아니됩니다. 이것은 제물의 식량으로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식량을 통한 하나님의 고통을 담으라는 겁니다.
속죄제는 하나님에게 직접 잘못한 죄에 대한 제사입니다. 수컷이 아닌 암컷 제물도 바칩니다. 속건제는 다른 사람에 대한 잘못을 속제하는 제사입니다. 이때 제물은 암컷이 아니라 수컷으로 드립니다. 화목제는 제사 제일 마지막에 드린 제사로서 피와 기름은 하나님께서 잡수시고 가슴살과 다리살은 제사장이 먹고 나머지 고기들은 예배자와 그 일행이 먹는 제사입니다.
즉 화목제란 하나님 앞에서 먹고 사는 삶을 말씀하시는 제사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율법의 취지가 인간이 제일 우선적으로 여기는 ‘나 살기’도 아니요 ‘더불어 살기’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기’입니다. 이 방식을 위해 처음 유월절 그날 밤에 사람만 죽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기르던 가축들의 맏배도 같이 죽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거할 약속의 땅에서는 그저 살기 위한 땅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을 보여주기 위한 땅이라는 겁니다. 레위기 17:3-4에 보면, “무릇 이스라엘 집의 누구든지 소나 어린 양이나 염소를 진 안에서 잡든지 진 밖에서 잡든지 먼저 희막문으로 끌어다가 여호와의 장막 앞에서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피흘린 자로 여길 것이라 그가 피를 흘렸은즉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제사장이 일하시는 그 회막 장소를 경유하지 않고 고기로 자기를 살찌우려는 자는 결코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살 수 없다는 겁니다. 이는 제사장이 사는 삶이 곧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겁니다. 제사장의 ‘하나님의 맞재비’인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자신이 미리 생각한 약속의 땅은 자신의 풍족한 삶을 염두에 둔 땅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러한 오류가 그대로 드러난 경우가 바로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위장 항복을 한 기브온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물어보거나 진멸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인 경우로 나타납니다. “ 기브온 거민들이 여호수아의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듣고 꾀를 내어 사신의 모양을 꾸미되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수 9:3-4)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수 9:14-15) 왜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에게 묻지를 않았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본색이 자신들의 안정된 삶 터저 찾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안정적인 생활을 복으로 여긴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맹세란 바로 이런 것들에 의해서 방해받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결코 자신의 죽음을 전제로 하고 오히려 잘 살기 위해 하나님의 맹세를 이용하고 있었던 겁니다. 성도란 이런 인간들의 모든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모든 삶이 죄 짓는 뿐임을 흔쾌히 인정하는 삶을 말합니다.
왜 세상이 저주받아 마땅함을 이미 자아로 벗어나 그 자아가 엷어지면서 하나님의 맹세와 말씀이 발포산처럼 보글보글 올라오는 삶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위주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맹세가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히브리서 6:13-15 맹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에게 하신 맹세를 아브라함을 통해서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아브라함은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그 시대에 미리 오신 바가 됩니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하나님 관계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가 미리 수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주십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다른 이들이 복을 받는 것은 나중 문제입니다.
복이라는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만한 조건이 충족되었다고 여기시고 그 존재성을 확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번성’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창 1:22)
이로서 아브라함은 선택받지 못한 일반인들과 상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로만 아브라함의 가치를 드러냅니다.
그 관계 안에서 복의 실내용과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인생을 주도적으로 이끄십니다. 여기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너무나도 육신적이고 인간적인 면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겁니다. 갖은 삶의 여건과 환경 속에서 아브라함은 생존하기 위해 온갖 요령과 수단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 선에서 기껏 할 수 있는 바의 전부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실생활에 있어서는 전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움직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쪽에서 제시될 수 있는 바의 전부는 매사에 자기 자신을 못 믿을 사람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믿음’이란 인간적인 면에서 절대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거나 복받을 하등의 자질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남과의 경쟁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육신과 싸워야 했습니다. 바로 이 모습이 장차 예수님에게 일어나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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