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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6:9-12 / 잔인한 사랑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브리서 6:9-12 / 잔인한 사랑

정인순 2024. 8. 11. 15:35

음성 동영상 Youtube

 

잔인한 사랑 

 

이근호
2024년 8월 11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6:9-12

(6: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6:10)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6: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6: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과연 우리 인간이 사랑을 언급한 자격이 될까요? 왜냐하면 요한일서 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미쳐서 홀로 살기로 작정하고 모든 마음 시스템을 그런 식으로 체제를 갖추어놓았습니다.

이것은 ‘시작’입니다. ‘나로부터의 시작’입니다. 여기에 비해서 멜기세덱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근원적 문제점은 ‘나를 시작점’으로 따로 채비를 차리고 살려고 활동에 나선다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다음과 같이 밝히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요 12:24)

우리는 나 자신이라는 시작한 밀알이 한알 그대로 있기에 소원하면서 야무지게 인생을 설계합니다. 그래서 남들이 “너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이런 사람이다”고 내세우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물음은 이것입니다. “너 누구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분노가 일어납니다.

타인과 가까운 가족에 대한 분노는 당연하고 하나님에게까지 분노를 보냅니다. 도무지 자신을 없애 방안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과 동일한 육신으로 사셔도 아버지를 사랑하는 방안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5:7에서 예수님은 기도를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 굳이 기도가 필요할까요?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능히 구원하실 수 있음을 본인이 이미 알고 있는 입장에서 왜 “도와달라”는 식으로 기도하지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냥 “죽여달라”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죽여달라”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기도는 “살려달라”가 아니라 “죽여달라”는 겁니다. 사는 것이 힘들어서 단순히 고통이 그만 당하겠다고 ‘살려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육신과 아버지의 뜻 사이에 건널 수 없는 틈이 있음을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 구원’은 애초의 하나님의 계획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 구원이 아니라 ‘죄인 구원’입니다. 문제는 어느 인간도 자신이 죄인으로 다루어지는 것에 내부적으로 거부감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예 구원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죄인된 것도 죄인이 알아서 주님께 돌아가는 경우는 없습니다.

누가 데려다 주어서 주님께 오는 겁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양이 또 도망갈까 봐 아예 어깨에 메고 같이 다니십니다. 누가복음 15장 그 뒤에 나오는 탕자 같은 경우에는 본인이 알아서 아버지집으로 오는 것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틈이 있습니다. 그는 ‘아들’이라는 인식으로서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아들됨’의 신분은 자기에게 전혀 해당되지 않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아들 아닌 자를 아들 되게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고유 권한입니다. ‘사랑’이라는 환경 안에서는 이러한 인식의 전도가 일어나야 합니다. 금붕어를 키우기 위해 어항 속에 물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물에 담긴 사랑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물 안에 금붕어를 키우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을 필요로 합니다. 인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은 어디서 생길까요? 인간에게서 생깁니다. 인간의 고집과 자기 주장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서 그것이 그 인간의 시작이나 끝이 아님을 보이기 위해 새로운 시작과 끝을 그 인간 속에 주입시키십니다.

예수님을 평소에 정성을 다하여 섬겼던 나사로,마르다,마리아 집안에 하나님깨서 오빠 나사로를 갑작스레 죽여버리는 일을 발생시킵니다. 남은 마르다, 마리아는 오빠 살려내라고 예수님을 대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눈물의 기도와 통곡이 이 인간들과의 틈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도라는 것은 본인이 본인을 고려하고 인생 설계해서 생산되는 결과가 아닙니다. 마치 아침이슬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노고와 고뇌와 갈등과 슬픔과 고통에서 발생된 ‘중간 생성물’입니다. 성도는 독자적인 자기 시작과 끝을 가질 자격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악마와 벌린 전쟁의 결실로 나타나는 것이 성도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2-3) 악마는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천국이 아닌 지옥 방향으로 그들을 돌리기 위한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3-15)

그 방법은 바로 자신의 시작점을 공고히 하고 살찌우게 되면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누가복음 17:12-19에 그 방식의 사례가 나옵니다.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궁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오히려 다시 돌아온 문둥병자가 참으로 신기합니다. 챙기 것 챙기면 다 된게 아닙니까? 아닙니다. “과연 나는 저주에게 구원받을 자격이 되느냐”를 문제삼는 이방인 문둥병자는 도로 예수님께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의 하실 일을 모독했다는 생각에서 돌아온 겁니다. 이처럼 구원되는 자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진멸되는 것이 마땅함을 아는 자입니다.

한 일의 밀은 스스로 죽지 못합니다. 하지만 자신 안에 죽은 밀알이 들어오면 그 성도는 자신이 십자가 사건화되어 그 안에 있는 주님이 구원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세리의 모습으로, 창기의 모습으로, 강도의 모습으로, 약한 소자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성도는 자신이 중간 생성물이기에 주님의 시작과 끝을 사랑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주님에 의해 잔인하게 처리되어도 마땅한 존재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