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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6:3-8 / 성령님의 심판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브리서 6:3-8 / 성령님의 심판

정인순 2024. 8. 4. 15:52

음성 동영상 Youtube

성령님의 심판 


이근호
2024년 8월 4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6:3-8

(6: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6: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6: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6: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말씀의 초보에 실은 모든 것이 다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안다고 해서 장성한 자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초보에 해당되는 내용이 도리어 본격적으로 ‘초보에 들었다고 자부하는 그 인간’을 공격합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세상 보는 안목과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안목이 확연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의미를 못 놓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자기를 지켜내기 위한 용도로 여기고 다룰려고 합니다. 즉 자신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성경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이미 저주 아래에 놓여져 있습니다. 저주에서 벗어나고자 아무리 애써도 소용없습니다.

문제는 이 저주성의 끝이 하나님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는 성향을 지녔다는 겁니다. 인생을 힘들게 살게 하신 바로 그 하나님에 대해서 힘을 모아서 누구나 할 것없이 복수하게 됩니다. 이런 성향을 지닌 자들이 성경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성경 자체를 왜곡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말씀 자체를 가지고 자신의 의미를 지켜내는 용도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의미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미는 주님에게서 나온 의미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생명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인간이 애쓰고 힘써는 지옥불에 안 들어갈 가능성은 0%입니다.

모조리 다 들어갑니다. 그런 육신을 부모로부터 물러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육신값을 해야 합니다. 이사야 53:1-3에 보면,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치와 의미와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의 오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로 하여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내용으로 찾아드십니다. 따라서 성령의 비췸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가 죄인을 성도되게 하십니다. 성령의 내주가 되려면 성령께서 예수님에게 행하신 바 그대로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도록 내몰아세웠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의 ‘내부 쪼개짐’입니다. 출애굽기 17:6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내모신 일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실 물이 없다고 원망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한 방식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거기서 호렙 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출 17:6) 사람들 보기에 모세가 바위를 치는 것을 보일 겁니다. 하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원망에 맞아 쪼개지는 상황을 연출하십니다.

하나님 내부가 쪼개지는 것, 곧 하나님께서 죽으시지 아니하면 인간에게 줄 생명이 나오지 않는 겁니다. 이 원칙은 오늘날 성도에게도 동일합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포장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말씀을 뒤덮을려고 합니다. 결코 자신이 말씀에 의해서 쪼개질 생각을 안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의미가 소실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평생 살아온 자기 동영상을  귀하게 여겨 그 동영상 내용을 기어이 끌고 이어가려고 남은 세월을 보낼려고 합니다. 하지만 시편 39:5-6에서 하나님께서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즉 인간은 아무리 일생을 길게 끌어가봤자 허송세월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미는 예수님의 쪼개짐에서 나오며 그 나오는 것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이 세상을 두 노선으로 정리하십니다. 멜기세덱의 내용의 핵심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개입할 어떤 여지도 없다는 것을 뜻입니다. 두 노선이란 다음과 같은 인간인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 따먹고 타락했습니다. 범죄했습니다. 따라서 거기에 따른 인간은 저주 안에 갇혀 있습니다. 혐의도 모르고 그냥 갇힌 겁니다. 체포된 적도 모르는데 감옥생활하고 있는 겁니다.

아무리 탈옥하고 싶어도 탈옥할 방법이 없습니다. 탈옥은커녕 도리어 자기 의미를 지키기 위해 사정없이 단호하게 타인을 공격합니다. 또 하나의 노선은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 성과를 다 이루었음을 나타내는 노선입니다. 쉽게 말씀 드려서 큰 축구 국제 시합에서 경기의 공정성을 위해 VAR이라는 판독 기계를 두고 진행합니다.

인간 심판의 판독이 애매할 때에 본부석으로 달려가서 축구 경기가 담겨 있는 비디오를 확인합니다. 그동안 축구장에서 사람들은 뭘하지요? 그냥 뭘하던 무의미합니다. 회개를 하든 타락을 하든 다 무의미합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을 지옥같은 세상에서 천국가기 위해서 뭔가를 하지만 심판이 빠진 이상은 그 노력을 일체 인정받지 못합니다.

이미 인간에게 주어진 저주성은 인간의 어떠한 시도에도 벗겨내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지옥불에 들어가는 것이 너무나도 합당합니다. 천국에 간 성도들의 특징들은 바로 VAR 판독에 의해서 죄 사함을 받은 대상이다는 사실로 근거한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성과를 위해서라도 성령님께서 성도에게는 이 동영상을 아예 내부에 심습니다.

인간들이 결사적으로 노력하고 수고하는 모든 것들이 전혀 자신의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그 필름을 무한 반복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 히브리서 6:3-8를 무한반복시키는 겁니다. 이미 우리 자신이 지옥불에 들어가는 것이 합당하다는 사실을 순간순간 인식되게 하는 겁니다.

이 말씀이 우리 내부를 늘 쪼개시는 겁니다. 그것을 통해서 십자가의 공로만 나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을 상대로 농락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