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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예레미야 26:1-3 / 악의 상대성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예레미야 26:1-3 / 악의 상대성

정인순 2024. 8. 18. 22:47

음성 동영상

 

악의 상대성 

 

이근호
2024년 8월 1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6:1-3

(26:1)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의 즉위 초에 여호와께로서 이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26:2)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유다 모든 성읍에서 여호와의 집에 와서 경배하는 자에게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게 한 모든 말을 고하되 한 말도 감하지 말라

(26:3)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떠나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인하여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하나님의 집에서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집이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회막이었고 그 이후에는 성전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악에서 돌아서라”는 겁니다. 악이 뭔데요? 인간들이 악이 뭔지를 모르는 이유는 아직 자신들이 살만하기 때문에 자기 것을 지키는데 급급하다 보니 악을 자기 여건과 연관시켜 이해하게 됩니다.

즉 자신의 삶이 불편해지는 것을 악이라고 여기고 자기 삶이 여유가 생기고 만족스러므로 선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선악 인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한계라면 하나님께서 진정한 선과 악을 가르치기 위해 언약을 위한 자의 환경을 광야로 만들어 버립니다. 모세 때는 집단적으로 이스라엘이 전부 광야로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이미 약속의 땅에 들어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광야로 보내버립니다. “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 63:1)

왜 하나님께서 다윗을 광야로 보냅니까? 그것은 광야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기를 위한 삶’ 자체가 그 끝장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더는 나를 위한 삶’이라는 애초에 없었음을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바뀝니다. “하나님, 저 어떻게 하면 살아요?”에서 “하나님, 저를 아직 살려두십니까?”로 말입니다.

언약을 받게 되는 인물을 젖과 꿀이 흐르는 풍족한 환경이 아니라 다른 환경으로 바뀌는 것은 선과 악에 대해서 새로운 개념 기존을 잡아주기 위함입니다. 수학에서는 벡터와 스칼라라는 두 종류의 물리량이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좌표에 따라 변하는 것은 벡터이지만 좌표가 바꿔도 바뀌지 않는 물리량이 스칼라입니다.

곧 스칼라는 절대적이라는 겁니다. 환경 따라 바뀌는 약한 인간의 처신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 광야에서, 즉 인간이 스스로 살 형편에 못되는데서 절대적인 선과 악의 기준이 나타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이나 세례 요한도 광야에서 나가신 적이 있습니다. 수시로 변하고 날마다 변하는 인간을 상대하기 위한 일이 예수님의 일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바뀌지 않는 악마를 상대로 하시는 일이 예수님의 일이요 그 일의 완성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예수님 “다 이루었다”고 외쳤습니다.(요 19:30) 따라서 광야가 아니라 살만한 환경에서 인간들은 나름대로 선과 악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 이유는, 결코 하나님을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 살려내고자 하는 벡터적인 시도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러한 시도가 결국 예수님의 영원한 선, “다 이루었다‘를 가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공간 속에서의 이동속도와 시간 속에서의 이동속도의 합인 빛의 속도가 일정하므로 두 덧셈항의 한쪽이 커지면 다른 한쪽은 작아지게 된다. 가령 한 곳에 정지해 있는 물체는 ’공간 속에서의 이동속도‘가 0이므로 남은 ’시간 속에서의 이동속도‘가 빛의 속도와 같아집니다.

반면 움직이는 물체는 ’공간 속에서의 이동 속도‘가 0보다 이로 그만큼 ’시간 속에서의 이동 속도‘는 빛의 속도보다 느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정지 상태에 있는 우리가 보기에 움직이고 있는 시계는 정지해 있는 시계보다 느리게 됩니다. 더 나아가 ’공간 속에서의 물체의 이동속도‘기 빛의 속도와 같아지면, ’시간 속의 이동속도‘는 0이 되어 우리가 보기에 그 물체의 시간은 멈추게 됩니다.

이는 곧 자기가 자기를 살리겠다는 설쳐대는 그 행위들이 예수님 ”다 이루심“을 모독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그 일을 하는 이유는 뭘까요? 현대 과학은 과거 인류가 상상도 못했던 기묘하고 놀라운 것들을 우주에게 발견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블랙홀이다. 극단적인 중력붕괴의 과정을 거쳐 형성된 블랙홀은 기능이나 작용에서도 다른 천체들과 크게 다르다.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해 우주에서 가장 어두운 블랙홀은 역설적이게도 우주에서 가장 밝은 빛의 원인이 됩니다.

궤이사는 태양보다 1조 배 밝은 데 중심에 큰 블랙홀이 있기 때문입니다. 블랙홀의 강한 중력 때문에 주의 물질들이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소용돌이치면서 블랙홀로 흡수되어 마찰로 엄청나게 뜨거워져 격렬하게 빛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 속에서 인간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지옥으로 끌어당기는 악마의 힘이 있기에 여기서 인간들은 자신이 망가지지 않기 위한 불안과 걱정으로 더욱더 착하고 바르게 살아서 기어이 천국에 들어가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다 이루심“은 안전에도 없고 열심 내는 자신의 종교 성과에 전생을 겁니다.

이처럼 인간은 스스로 악에서 돌아설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근원적인 악이 있을 가리는 방식이 ’옷‘입니다. 창세기 27:15에 보면, “리브가가 집 안 자기 처소에 있는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취하여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즉 아버지 이삭이 복을 주는 자리에서 리브가는 옷을 가지고 아들의 변장시키면서 리브가 자신의 본심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요나 3:5-8,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옷이란 자기 속에의 자기를 힘들게 하는 괴물의 잡아 당김을 감추기 위한 용도로 입는 겁니다. 창세기 3:7의 그 취지가 요나서에 나오는 니느웨성 사람에게는 반대로 작용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이미 자신이 이미 심판받아 죽은 자임을 인정하는 옷으로 전 니느웨 성 사람들이 실시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내릴 재앙을 거두십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내용도 바로 그것입니다. ’악에서 돌리키면 재앙도 거두어 들이겠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은 간단합니다. “죽여버리겠다’입니다. 이로서 이들은 자신들이 살겠다는 것이 곧 악임이 밝혀집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지옥같은 세상에 살면서 더불어 살 생각말고 십자가 복음에 감사하고 즐거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