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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예레미야 23:9-12 / 기적은 재앙이다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예레미야 23:9-12 / 기적은 재앙이다

정인순 2024. 6. 24. 12:03

음성 동영상 Youtube

 

기적은 재앙이다

이근호
2024년 6월 2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3:9-12

(23:9) 선지자들에 대한 말씀이라 내 중심이 상하며 내 모든 뼈가 떨리며 내가 취한 사람 같으며 포도주에 잡힌 사람 같으니 이는 여호와와 그 거룩한 말씀을 인함이라

(23:10) 이 땅에 행음하는 자가 가득하도다 저주로 인하여 땅이 슬퍼하며 광야의 초장들이 마르나니 그들의 행위가 악하고 힘쓰는 것이 정직하지 못함이로다

(23: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특한지라 내가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노라

(23:12) 그러므로 그들의 길이 그들에게 흑암 중에 미끄러운 곳과 같이 되고 그들이 밀침을 받아 그 길에 엎드러질 것이라 그들을 벌하는 해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굳이 술 취한 사람과 같이 아니하면 예언을 전할 수 있는 걸까요? 하나님의 영이 임한 자는 자신의 견해가 일체 스며들지 않는 상태로 돌입되어야 합니다. 그만큼 선지자 개인의 사견도 일반인의 점치는 방식의 일부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나름대로 점을 칩니다.

점을 치는 이유는 일상 생활에서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쉴새없이 목표 세우고 기대를 하고 소원을 갖습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내다보면서 살려고 합니다. 그래야 보람을 느낍니다. 이렇게 사는 이유는 현재의 삶이 늘 자기 내부의 욕망이 쫓기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이만하면 됐다’고 자족하고 싶어도 나의 욕망은 어느새 커져 있습니다. 빈 공간이 생긴 겁니다. 마저 채우라고 독촉합니다. 자기가 자신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새로운 계획이라도 수립해 놔야 다소 위로가 됩니다. 문제는 계획은 세워놓았지만 과연 소원대로 이루어질까요? 실패했을 때는 감안하면 중압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래서 미래를 미리 앞당겨 알고 싶어합니다. 점을 쳐보는 겁니다. 징조술, 제비뽑기, 복점, 즉흥적 점술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징조술은 ‘∼되면 그러면  ∼ 되는 징조다’라는 식입니다.  예를 들면 “만약 성읍이 언덕 위에 있다면 그것은 그 성읍에 거주하는 이들에게 좋지 않을 것이다”는 식입니다. 철저하게 수동적입니다. 다.

제비뽑기는 능동적입니다. 이것은 ‘예, 아니오’로 판가름 납니다. 대나무 젓가락이나 나뭇잎 뜯기 같은 것이 있습니다. 복점은 말없는 신들에게서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예견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무릎 위에 놓인 물그릇에 기름을 부으며, 기름이 수면이나 그릇 가장자리와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며 평화나 번영, 건강이나 질병에 관한 신의 뜻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기름의 특정한 모양과 근접성은 신들이 결정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점술자가 일방적으로 해석하는 식이 됩니다. 기름에 국한되지 않고, 점술가의 무릎에 놓인 향로의 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의 움직임이나 물 위에 떨어뜨린 뜨거운 촛농의 모양, 무심코 만들어지는 점들의 모양, 재가 만드는 모양들이나 모형들, 그리고 동물 희생 제물들도 쓰였습니다.

즉흥적 점술은 예를 들면, 막연하게 관심거리를 생각하여 거닐다가 갑자기 이어져 있는 방바닥에 시선을 던진다고 칩시다. 바닥에 끝이 몇가닥으로 갈라져 있는 한 개의 전선이 있습니다. 이 모양을 보면서 나의 문젯거리를 여러 가지 상이하고 분명하지 않는 증거를 한데 묶으려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식입니다. 

따라서 술먹는 자들이 술에 취하므로서 현행 고민거리를 신의 뜻을 도입하여 해결된 것처럼 여기는 것과 같이 현재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자신의 기대성을 철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취함’에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신약 성경에 나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18-20) 즉 성령에 취한 모습은 ‘범사에 예수님의 이름 하에 하나님께서 감사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바로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런 식으로 술취하듯이 성신에 취하여 예언했습니다.

그 선지자 중의 모세의 경우를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선지자의 대표라고 할 수 ᅟᅵᆻ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신 34:10-12)

여기서 우리는 이적과 기사와 권능이라는 표현을 주목해 봅시다. 즉 선지자 모세는 단순히 말만 한 자가 아니라 그 말과 더불어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와 권능이 함께 나타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들이 기대하는 기적과 다르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내려주시는 기적은 곧 ‘재앙’입니다.

출애굽기 4:21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즉 기적을 베훌었지만 바로왕은 그것을 기적으로 여기지 않고 재앙으로 느꼈다는 겁니다.

이는 바로왕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표와 목적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자신의 계획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하나님과 인간의 건해 차이가 인간에게는 재앙으로 떨어지는 겁니다. 인간들이 자기 만사 뜻대로 되기를 소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은 안중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왕 뿐만 아니라 모세의 동족인 히브리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주어진 기적이 자신들에게 자신들의 사정이 더욱더 참담하게 되어지는 재앙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선 것을 만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출 5:20-21)

모세와 아론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갈수록 자신들이 사정이 악화되어 망해가게 있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이처럼 인간들에게 환영받지 못합니다. 인간들은 이처럼 그저 자신의 계획과 소망이 달성되는 것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기적을 이해합니다. 신약에 오면 인간들의 이러한 견해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12:3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따라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참다운 기적과 권능은 다음과 같은 원칙 하에 일관되게 주어집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즉 인간 홀로 신기한 행운을 거머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관된 일하심에 자기를 잃어버리는 신나는 경우가 기적 속에서 피어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책하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