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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예레미야 23:3-6 / 메시야 지키기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예레미야 23:3-6 / 메시야 지키기

정인순 2024. 6. 16. 16:56

 

 음성 동영상

 

메시야 지키기 

 

이근호
2024년 6월 1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3:3-6

(23:3) 내가 내 양무리의 남은 자를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내어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23:4)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축이 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3: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23:6)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선지자가 제시하는 메시야 상은 그 당시 일반인들에게 낯설기 짝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자신들이 메시야를 고대하면서 퍼부은 모든 노력과 시도를 긍정적으로 인정해주는 그런 메시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3:4에 보면,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축이 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동안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축이 나는 경우를 당하는 목자들이 목자라고 행세해 왔던 겁니다.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축이 나지 않는 제대로 된 목자라는 말은 더욱 철두철미하게 제대로 목자 노릇을 하면 성사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도리어 기존의 목자상, 메시야상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줄곧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자신의 양이라고 규정하시고 기존 목자들에게 그 양을 맡기신 형식을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실패했습니다. 뭔가 미급함을 채우고 보충하면 제대로 된다는 희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면적으로 전혀 예상 못한 메시야나 목자가 등장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만약에 참으로 제대로 된 메시야나 목자가 오면 백성들이 금방 알아 볼까요? 아닙니다. 사람들은 어떤 경우를 우호적으로 받아들릴 경우는, 이미 자신들이 이런 메시야가 오리라는 것을 미리 짐작했다는 식으로 반길 준비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예상하는 메시야상을 거부하는 이유는, 인간 자체가 자신이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못 믿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어떤 모르는 자가 우리 자신을 향해 “이 사기꾼아!”라고 규정한다면 일단 거부하고 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에 대한 진화와 발전을 그 어떤 순간이라도 포기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부정하지 않더라도 진리를 더욱 축적이 가능한 단단한 바탕쌓기에 무심히 열중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요? “지혜자는 눈이 밝고 우매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이들의 당하는 일이 일반인 줄을 내가 깨닫고 심중에 이르기를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전 2:14-16)

뿐만 아니라 전도서 1:16-17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마음 가운데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였나니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사람들은 열심히 지혜를 끌어모으고 탐구를 하게 되면 그만큼 진리에 점점 접근해 갈 수 있다고 믿는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믿음을 포기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마음 자세로 인하여 인간들은 자신이 사기꾼에 불과한다는 것을 못 받아들이는 겁니다. 사기 치지 않고 순정하게 살려고 애쓴다고 해서 사기꾼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자신이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죽어도 인정 못하겠다는 다짐으로 무장되어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보내주신 메시야와 목자를 소개한다는 것은 당연히 거부당한 모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 자신이 사기꾼이라는 점은 ‘초대하지 않는 낯선 타인의 침투’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 예가 여호수아 2장에 나오는 여리고성에서의 이스라엘 정탐꾼과 기생 라합의 만남입니다.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수 2:8-11)

기생라합은 누가 자신을 찾아왔는지 압니다. 그것은 자신의 성을 파괴할 파괴자가 보내서 미리 자신에게 찾아온 겁니다. 그런데 기생라합은 자신의 민족을 파괴할 그들을 지켜주고 보호하고 숨겨줍니다. 즉 자기 안에 그동안 자신이 살던 모든 과거 삶을 거덜내는 자를 품어주고 있는 겁니다.

바로 이 방식이 자기 힘으로 자신의 사기꾼됨에서 벗어나는 방식입니다. 주님께서 오늘날 모든 성도에게 찾아오실 때, 이 원칙과 이 방식을 지키면서 찾아오십니다. “너를 사기꾼으로 밝혀줄 때니 너는 나를 귀하게 여기겠는가?”라고 물으시면서 찾아오시는 겁니다. 기생라합은 이스라엘 입장, 이스라엘 하나님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봅니다.

따라서 자기 민족과 자신은 마땅히 멸절당해야 마땅함을 인정합니다. 더 이상 자기를 지키기 위한 용도로 메시야를 이해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취지는 요한복음 2:25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요 2:24-25)

이런 차원에서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 혼인잔치에 행사하신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은 인간들의 모든 한계와 예상을 주님쪽에서 싹뚝 자르시는 기적입니다. 사람들은 약간은 어디둥절했지만 그들의 목숨과 그들의 배신과 무관하기에 그냥 예수님에 대해서 주최측을 고마움을 표하는 정도였을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목자는 장차 어떤 식으로 출현하고 양들은 또 어떤 식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지게 됩니까? 요한복음 21:15에,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의 자기 결정으로 인해 양을 버리고 간 그 목자의 심정이 바로 제대로 예수님의 양이 어떤 양인지를 아는 계기가 되게 하십니다. 즉 베드로 자신이 양을 주님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에게 일어난 목자 배신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인식하는 자에게만 주님은 양을 맡기십니다. 결코 양은 베드로 본인의 양이 될 수 없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전도한다는 식으로 전도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