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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466강, 467강) 계산, 절제 240402 본문

유튜브 강의(이근호)/유튜브 강의

(466강, 467강) 계산, 절제 240402

정인순 2024. 5. 29. 10:35

466강 음성
동영상

467강 
음성
동영상

 

녹취:이하림

466강-YouTube강의(계산 마태복음 25:3)20240402-이 근호 목사


제466강, ‘계산’. 자기 이익을 위해서 요모조모 따져보는 거죠. 특히 계산이라는 하것은 자기 소유가 또는 그 소유에 의해서 자기 자신이 미래에 내 신세가 달라질 것인가, 내가 잘 될 것인가 못 될 것인가를 늘 생각하는 것이 계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인간의 행동은 이 계산을 빼놓고는 행동하지 않아요. 모든 생각은 자기한테 이익이 되는 쪽으로 활발하게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계산하는 식으로 자기 자신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살아간다면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도 인간이 계산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전제로 해서 말씀을 주시겠죠. 그럼 여기서 하나님의 계산법과 인간의 계산법이 당연히 차이 납니다. 인간의 계산법은 자기를 위해서 하는 계산이고 하나님의 계산법은 자기를 위한 계산 자체가 악하다는 것을 규정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가지고 그 허점을 다 들추어내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성경 말씀은 딱 두 종류죠. 하나님 앞에서 계산하는 자와 하나님 앞에서 아예 계산을 그만둔 자가 나누어집니다. 계산을 그만둔 자, 그 사람은 이제 천국 가고 하나님 앞에서도 계속 계산을 하는 자는 지옥 가고.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분류를 하셨습니다.

그 예가 마태복음 25장에 나옵니다.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신랑은 하나인데 처녀는 열 명입니다. 맞으러 나갔는데, 우리 생각에는 ‘열 명 다 신랑을 맞으러 나갔기 때문에 무사히 나중에 혼인잔치에 열 명의 처녀가 다 신랑과 함께 혼인생활을 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천국에 대해 설명하면서 탈락, 천국에 대해 탈락된 자를 거론하면서 천국을 설명해요.

아, 이거 상당히 무서운 이야기죠. ‘이런 자는 천국 간다’ 이렇게 설명해도 되는데 ‘이런 자니까 천국에서 탈락하지’라고 하는 거예요. 천국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데 인간은 그냥 받아들이지 않고 계산을 하거든요. 계산을 하면서 뭐로 발각되느냐 하면, 천국은 원하지만 내가 천국에 부합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들통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신랑이 온다는 소리를 들을 때 열 명의 처녀가 다 반기면서 신랑을 기다립니다. 과연 열 명 다 신랑과 혼인잔치에 들어설 수 있느냐? 예수님께선 아니라는 겁니다. 2절에 보면 “그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아예 5대 5로 구분 지었죠. 슬기 있는 처녀와 미련한 처녀.

그럼 여기서 그다음 이야기 나오기 전에 궁금한 것은 어떤 처녀가 슬기 있고 어떤 처녀가 미련했을까? 그다음 이야기 3절에 보니까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했다 했어요.

그런데 가만히 따지고 보면 미련한 게 아니고 오히려 이 사람들이 요령 있는 사람이 아닌가. 왜냐하면 아직까지 신랑이 오지 않았다 이 말이죠. 그러면 밤에 신랑이 올 때 분명히 신랑 오기 전에 신랑 왔다는 소리가 있을 테니까 그때 기름을 준비해도 늦지 않다.

이게 무슨 뜻이냐? ‘나를 위해서 시간을 아끼자. 신랑한테 소모될 시간도 아깝다. 신랑 올 때 그때 시간 할당하면 되고 나머지 시간에 기름 준비하는 그런 귀찮은 짓을 하게 되면 내가 그만큼 손해가 아니냐. 아직 오지도 않은 신랑을 위해 기름 준비하는 것이 미련한 짓이지, 이건 지혜롭지 않다.’라는 처녀가 다섯 명이었어요.

그런데 4절에 보면,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 갔”다 이 말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슬기 있는 처녀의 특징은 계산을 해보니까 아직까지 신랑 올 때가 남아 있어요. 그런데 그 계산을 스스로 철회하는 겁니다. 지금 신랑이 왔다고 하는 거예요. 지금.

그러면 아까 미련한 처녀는 신랑이 올 때 신랑을 반기게 되면 그 이전의 시간은 계속해서 자기를 위하여 쓸 수 있는 시간이 되겠죠. 그런데 이 슬기로운 처녀는 아직 신랑이 오지도 않았는데 바짝 쫄아서 긴장해가지고 신랑이 왔다고 치고 기름을 이미 준비한 거예요. 그러니 신랑한테는 슬기로울지 모르지만 자기한테는 어때요? 미련한 거죠.

왜 그 귀한 시간을… 자기 위해서 쓸 걸, 신랑 오는 그때 반기면 되는데 왜 그렇게 하느냐? 똑같은 이야기가 마태복음 25장 달란트 비유라는 데에 나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세 명의 직원이 나와요. 종업원 세 명이 있는데 한 사람은 다섯 달란트, 한 사람은 두 달란트, 한 사람은 한 달란트.

그러나 이 달란트가 세 명 다 본인 게 아니에요. 주인이 달란트를 줬잖아요. 그러면 그 세 명의 종업원들에게 주인이 재산을 맡길 때는, 주인 생각은 이거에요. ‘내가 비록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다 할지라도 먼 타국에 간다 할지라도 내가 준 달란트가 네 안에 있어, 없어? 있지? 있으면 그거는 내가 떠나도 나는 너와 함께 있는 거야.’라는 증표로서 달란트를 준 겁니다.

그러니까 직원들이 일할 동안에 주인이 준 것이 함께 있다는 말은 주인이 같이 있다는 뜻이고, 같이 있는 이상 나를 위해 필요한 시간이라는 것은 일체 용납이 안 된다는 것을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자는 인정해요. 주인이 있든 없든 주인이 주신 그것을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한결 같이 주인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나중에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심판받은 이 종은 ‘주인 멀리 갔지? 이제부턴 내 시간이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 시간이다.

그러니까 천국을 언급하면서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께서 두 가지 예를 들었는데 두 가지 예에서 천국을 언급하지만 천국에 어떤 자가 탈락하는지도 아울러 이야기했죠. 어떤 자가 탈락하는가? 자기를 위해서 계산하는 사람이에요.

평소에 얼마나 자기를 위해 사는 생활을 갈급했겠어요? 신랑 있을 때는 신랑 기다리는 척을 했죠. 그리고 주인이 함께 있을 때는 주인을 위해서 일하는 척을 했죠. 그러나 주인이 부재하고 신랑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랑이 부재하죠. 신랑이 안 보이죠. 눈에 안 보인다 이 말입니다.

그럴 때, 둘 다 천국가고 싶어서 환장을 해도 자기의 본색은 본인이 속일 수가 없었던 겁니다. ‘천국 가면 좋긴 좋지만 나는 변하지 않으리. 나를 위한 내 삶에 모든 것을 거기다 다 몰두하는 이 나를 위한 삶은 천국에 있든 주인이 오든 나는 변하지 않겠다.’ 그걸 하나님이 모르겠어요? 그걸 들통내는 타이밍 맞춰서 주님께서 오신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도 자기를 위해서 계산하지만, 인간이 계산한다는 걸 염두에 두고 주님도 계산하는 겁니다. 인간 계산, 주님 계산이 이렇게 차이나는 거예요.


467강-YouTube강의(절제 갈라디아서 5:23)20240402-이 근호 목사


제467강, ‘절제’. 절제라는 그 태도는 모든 종교인들이 다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뭐냐?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절제하죠. 이 말은 절제해야 될 것이 올라온다, 안 온다는 것을 누가 판단하느냐? 본인이 판단해요. 본인이 판단해서 아까처럼 또 계산하는 거예요.

본인이 판단해서 내가 여기서 더 나빠지면 구원에서 탈락될 가능성이 있다 할 때는 조바심이 나죠. 이거 선 넘었네. 아, 이거 오버했다. ‘선이 넘었다, 오버했다, 아 이것은 과하다.’ 살짝 조절이 필요하다는 느낌이 확 들죠. 그런데 그게 문제가 돼요. 왜냐하면 선을 넘는 것도 내가 알아서 판단해서 선을 넘었고, ‘아, 선 넘었네? 이거 너무 넘으면 안 되는데. 이러면 내가 천국 탈락하고 지옥가는 수가 있겠다. 후딱 선 넘지 않는 쪽으로 다시 돌아와야 되겠다.’하고 결심하는 것도 본인이 판단하는 거잖아요. 본인이 결정하는 거예요.

그러면 구원이라는 것이 지금 누구 손에서 놀아나느냐 하면 구원받는 당사자 손에서 구원이 결정되어버린다는 그러한 모습을 보이죠. 성경을 좀 봐서 겉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천 번, 백 번을 외쳐도 막상 자기 마음속에 작동하는 것은 선과 악에 대해 내가 알아서 판단하고 악은 될 수 있는 대로 멀리하고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을 내가 판단하는 거예요. 일방적으로 내가 판단해놓고 이거 넘으면 악이고 이거 넘으면 선이니까 악한 쪽에서 후딱 발 빼서 선으로 옮기면 내가 구원받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진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이런 태도, 이런 행동을 어떻게 사람들은 정리하느냐 하면 특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거룩의 농도로 결정해요. 거룩함의 농도. 거룩함에 좀더 밀착되고 많아지면 거룩의 농도가 짙어지고, 마음이 해이해졌다 싶으면 세상에 나가서 너무 논다 싶으면 거룩이 희박해지겠죠. 거룩의 농도의 짙음과 희박함으로 본인이 본인 마음가짐을 조절해서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그 말씀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하나님 보고 계시니까 자신의 노력이 가상한 노력으로 늘 보일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절제는 지금 하나님하고 거래하는 게 됩니다. ‘하나님 보고 계시죠? 최선의 노력을 다 하고 있는 거 알고 계시죠? 제 양심에 비춰서 제가 알아서 잘 조절하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는 내가 지킬 말씀만 그때그때 주시면 제가 얼마나 착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인지 내가 한번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했던 사람이 바로 누가복음 18장에 나온 바리새인이에요. 그렇게 살아간다는 티를 숨기지 못하고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 옆에 있는 세리보고 하는 말이었죠. 세리를 딱 견주고 하는 말이 “하나님이여” 성전에 가서 기도했으니까 ‘하나님’이죠. “하나님이여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함을” 그다음에 “감사하나이다.” 이렇게 한 거예요.

‘저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구제하고 지금까지 간음한 적도 없습니다. 이 정도하면 하나님이 티 잡을 거 없죠? 하나님이라도 티 잡을 거 없죠?’ 그게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 어떤 판정을 내렸는지 여러분 잘 아시죠. 바리새인보고 “네가 바로 지옥 갈 사람이고 정죄 받을 사람이고, ‘내가 죄인입니다’하는 저 세리가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고 할 것이다.”라고 이야기했어요.

자, 절제가 뭐냐 하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5장 23절 보니까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금지할 법이 없다. 성령의 열매를 거론하면서 끝부분에 나온 두 개에요. “온유와 절제니” 끝부분, 제일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이 절제에요. 십계명 제일 마지막이 뭡니까? “탐내지 말라”죠. 십계명은 ‘탐내지 말라’로 끝이 났어요.

여기 성령의 열매는 뭐로 끝나는가? 절제로 끝나요. 온유함과 절제로. 그러면 온유, 절제, 사랑, 희락 이것은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이건 누가 와도 금지될 수 없는 법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 누가 와도. 그럼 이게 금지되지 않는다는 말은, 내가 지키든 안 지키든 간에 내 의견과 상관없이 나에게 덮쳐지고 쳐들어오는 게 이 금지 못할 법이에요.

절제할 때 절제되고 절제안하면 절제 안되는 게 절제 법이 아니고 이것은 절제 자체가 그냥 덮치는 거예요. 온유 자체가 덮치는 거예요. 그럼 이것이 성령의 법에 해당되는데, 성령의 법에 해당되지 않는, 금지될 법에 해당되는 그 내용은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19) 이렇게 되어 있어요.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쭉 나오잖아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런 육체의 열매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금지한 거예요. 법적으로 금지했다 이 말이죠. 법적으로 금지했다는 증거가 어디 나오는가? 바로 갈라디아서 5장 24절, “그리스도 에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그렇다면 방금 육체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를 언급한 것은 이걸 네가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누구한테 준 거냐면 정과 욕심이 이미 십자가에 박혀버린 성도에게나 해당될 내용이에요. 성도한테는 “육체의 열매는 이거다. 성령의 열매는 이거야. 육체의 열매를 나는 천국에서 금지하는 거야.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금지할 게 아니야. 이건 그냥 천국 갈 때 다 가지고 가는 거야.”라고, 그 이야기를 성도한테만 이야기하는데 성도의 특징이 뭐냐? 정과 욕심이 십자가에 못박혔다 이 말이에요.

여기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십자가에 못박힐 경우에 십자가에 못박힌 그 인간의 몸이 꿈틀거리고 움직이고 살아있는 거예요, 아니면 십자가의 의미와 취지가 살아있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방학숙제 매미 표본을 곤충채집해서 핀으로 꽂았다 이 말이죠. 이 곤충 매미는 핀에(십자가에) 매달렸죠. 그다음에 그 숙제가지고 곤충채집한 표본을 들고 다니고 하는 것은 매미가 알아서 날갯짓하는 게 아니고 그 주인이 통째로 그냥 선생님 앞에 ‘숙제 했습니다.’ 내놓겠죠.

뭐가 살아있는 것이 성령의 역사냐? 성령의 역사는, 너는 죽고 십자가만 살아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뭐냐? 성도의 육체에다가 성령이 함께 있게 되면 그 성도를 통해서 나는 이미 죽은 자고 주님의 품격과 품위만 살아있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나오는 게 온유와 절제다 이 말입니다. 온유와 절제.

그러니까 온유와 절제냐 아니냐 하는 것은 십자가에 대해서 고맙게 여기면 그게 뭐라도 온유와 절제가 되고, 십자가보다도 다시 ‘내가 어느 정도 착할까? 내가 이 정도까지 거룩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계속 자기 행함과 실적과 업적에 관심 있으면 그것이 바로 육체의 열매가 되는 겁니다.

상당히 복잡한 이야기지만 성도라면 이 복잡한 논리보다도 체험될 겁니다. 여러분들이 언제 온유와 절제가 안 되던가요? 그것은 감사함이 없을 때. 예수님의 죄 사함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고마움이 없을 때. 반드시 거룩을 빙자한 육체의 소욕이 튀어나옵니다. 네가 거룩하면 얼마나 거룩해. 나는 더 거룩해. 이게 바로 육체의 일, 시기와 질투잖아요.

남하고 비교하지 말고, 주님이 나를 곤충채집 철에 박아 넣고 우리는 그 나를 어디 가서 들어 쓰시면서 주님의 죄 사함과 사랑만 드러나게 사용할 때 그게 바로 온유와 절제인 천국 백성, 성령의 열매를 갖고 있는 성도의 참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