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462강, 463강), 운명 , 패배 240305 본문
녹취:이하림
462강-YouTube강의(운명 에스더 7:9)20240305-이 근호 목사
제462강, ‘운명’. ‘운명은 정해져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철학에서도 이야기하고 종교에서도 특히 이야기하고 그리고 일반인들도 ‘운명이라는 것은 정해져있어서 인간은 그 운명의 틀 안에서 한계 있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아주 겸손하게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운명을 언급하는 것은 나의 장래에 대해서 모르겠다는 거예요. 모르기 때문에 그냥 나보다 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신에게 다 맡기겠다는 거죠. 이슬람 사람들이 뭐 조금해도 뭐라고 합니까? 신께서 하셨다. 인샬라, 인샬라 하죠. 신께서 그렇게 하셨다, 신께서 그렇게 하셨다. 그걸 알라라는 말 대신에 운명이라는 말로 바꾸면 돼요. 모든 것이, 우리는 모르는데 운명이 알아서 착착 진행한다.
이게 무슨 취지를 갖고 있느냐 하면, 이러나저러나 우리 일은 우리한테 유리하게 잘 진행될 것이라는, 억지로 낙관적인 생각을 가져볼 때 운명을 거론하는 겁니다. 인생에 대해서 좌절하거나 낙담할 때 자기가 자기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어떤 개념, 그러한 사상, 그게 바로 운명사상이죠.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이 운명은 믿습니다. 심지어 화투칠 때도 운명을 믿고요. 주식투자할 때도 믿고.
과연 인간이 생각하는 운명이 있느냐? 그런 운명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운명을 논할 자격이 못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운명이라 하는 것은, 잘 될 것인가 못 될 것인가, 아직까지 미확정될 경우에는 운명에 맡긴다하면 되는데 이미 인간은 악마한테 맡긴바 되기 때문에 운명을 언급할 입장이 못돼요.
마귀의 팔자는 끝장났습니다, 지옥불로. 그러면 그 마귀한테 누가 지배당합니까? 인간이죠. 그럼 인간은 마귀와 더불어서 저주받고 심판받고 지옥 가는 이건 뭐 당연한 건데 뭐 자기한테 기대를 하고 자기에게 은근히 행복한 미래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억지를 부리면 안돼요.
성경은 인간의 운명론에 초를 치는 것이 성경의 내용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 빼내가지고 그걸 운명이라는 단어에 딱 붙여서 마치 내 운명을 성경에서 알아낸 것처럼 스스로 자기 일에 대해서 불확실성을 없애고 안심하면서 정서적으로 안정을 취할 생각을 하는 것은 다 헛수고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 인간이 말하는 운명이 아니라면 성경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은 어떻게 진척되는가? 그것은 언약이 언약대로 움직입니다. 약속이 약속대로 움직이게 되어있어요. 운명 아니죠. 언약입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물어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지상에 툭 던진 거예요.
레펠 탄다하죠. 공수부대원들이 헬리콥터타고 지상에 내려올 때 헬리콥터에서 무엇을 탁 떨어뜨리냐 하면 밧줄부터 딱 던져놓고, 밧줄이 이제 땅에 닿이잖아요, 그러면 헬리콥터에서 완전무장한 공수부대원들이 그 밧줄타고 내려오는 거예요. 아주 높은 데서 말고 어느 정도 낮은데서. 언약을 먼저 던져놓고 그 언약을 주신 하나님이 자신이 던진 언약을 타고 이 땅에 내려오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죠. 하나님의 이름이 언약대로 움직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아는 바도 없는 이 지상의 인간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 하면 자기가 잘되는 쪽으로 운명시스템을 자기가 만들어요. 잘되는 쪽으로. 운명, 운명하지만 운명이 운명대로 자기 뜻대로 잘 굴러가기 위해서는 지상에서 힘을 도모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안정적인 보다 확고한 힘을 강화하기 위해서 권력이란 권력은 다 수집하면서 자기가 생각하는 운명이 단단해지기를 도모하게 되는 겁니다. 시도하게 되어 있어요.
그중의 예로 에스더 3장 10절부터 보게 되면, “왕이 반지를 손에서 빼어 유다인의 대적 곧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에게 주며” 왕이 자기의 반지를 빼서 자기가 제일 신임하는 하만이라는 사람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 반지에는 인장, 도장 찍는 옥쇄 같은 기능이 있어서 이것만 도장 팍팍 찍으면 이건 곧 왕의 말이 돼요. 그 인장에 왕의 권력이 실리는 겁니다. 그럼 반지를 받은 하만은 제2의 통치자가 되는 겁니다. 바사나라의 통치자가 되죠.
이랬던 그 하만이 에스더 8장 2절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렇게 되었어요. “왕이 하만에게 거둔 반지를 빼어 모르드개에게 준지라 에스더가 모르드개로 하만의 집을 주관하게 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어찌어찌 어떻게 어떻게 스토리가 이상하게 꼬여서 흘러갔는데 왕이 갖고 있던 그 절대적 반지가 모르드개라는 유대인에게 넘어가게 되었어요.
그럼 유대인은 무엇과 함께 있느냐 하면 언약과 함께 있습니다. 언약. 지상에는 언약이 없는데 하늘에서 언약을 주게 되면 지상에 있는 모든 형편과 일어나는 일들에 모든 배치들이 언약이 언약대로 그대로 실천하는데 있어서 고리역할을 하는 거예요. 전부다 매듭역할을 하고 하나하나 연결고리로 작용하는 거예요.
어떻습니까? 언약을 믿으니 로마서 8장의 말씀 생각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싱가폴에 가든 말레시아 가든 내 입장에서 일어났던 모든 것이 나는 내 운명 잘되라고 너무나 인간적으로 생각을 했는데 말씀과 복음과 다 겪어보니까 이것은 나 좋으라고 있는 게 아니고 오히려 나는 언약이 부리는, 언약이 스스로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일을 실천에 옮기는 데에 동원되는 부역자, 하나의 일꾼으로 우리가 초대받은 거예요. 강제소환 당한 겁니다. 우리가. 성도가.
그러니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나의 운명이라는 것은 있다, 없다? 우리는 운명이라는 것을 거론할 자격조차 안돼요. 끝났어요,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저주받는 게 마땅한데 그 절대권력, 이 세상의 절대권력으로 있는 그 반지가 모르드개한테 넘어왔거든요. 언약과 함께 사는 모르드개에게 넘어왔단 말이죠.
그럼 모르드개가 하만같이 그렇게 행세하겠습니까? 왕처럼 그렇게 행세하겠어요? 왕이나 하만은 세상권력이 전부에요. 이게 곧 자기 운명을 받쳐주는 절대 힘이라 여겨서 이걸 놓칠 수가 없는 겁니다. 하지만 모르드개는 이 반지가 그냥 굴러들어온 거예요. 누가 굴렸겠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이리저리 굴러서 굴러서 굴러서 모르드개한테 온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보면 하만이 에스더 5장 14절에 아내와 친구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 아내 세레스와 모든 친구가 이르되 오십 규빗(약 25m)이나 높은 나무를 세우고 내일 왕에게 모르드개를 그 나무에 달기를 구하고 왕과 함께 즐거이 잔치에 나아가소서 하만이 그 말을 선히 여기고 명하여 나무를 세우니라” 자기 집에다 높은 나무를 세우고 나한테 밉상이 되는, 그냥 미워요, 모르드개를 거기다 꽂아서 죽이고자 한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데 있어서 언약과 함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언약이 없는, 자기 운명에 꽂혀있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는 현상이 일어나요.
그랬던 하만의 집에 세운 장대가 7장 9절에 보면 “왕을 모신 내시 중에 하르보나가 왕에게 아뢰되 왕을 위하여 충성된 말로 고발한 모르드개를 달고자 하여 하만이 고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준비하였는데 이제 그 나무가 하만의 집에 섰나이다 왕이 가로되 하만을 그 나무에 달라 하매”
그러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하만은 하나님의 언약 진행과정에 사적인 운명이 끌려들어간 거예요. 부정적으로. 이게 바로 성도에게 세상을 보는 관점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들은 사적인 자기 잘되게 하는 운명을 궁금해 하고 운명을 믿지만 성도는 언약에 휩쓸리고 언약대로 움직이고 파도치는 언약의 사람 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463강-YouTube강의(패배 사사기 20:28)20240305-이 근호 목사
제463강, ‘패배’. 패배에 대해서 기분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남은 패배해도 자기는 상대적으로 성공하고 싶죠. 도리어 남 패배하게 되면 그렇게 기분이 좋아요. 자기는 그만큼 패배 안 했으니까 상대적으로 성공한 느낌이 확 오거든요. 사는 재미, 쏠쏠한 재미가 거기서 오는 겁니다.
이 패배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한 민족이 있었어요. 그게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그 자체가 이스라엘에 심적인 중압감, 압박감으로 작용하게 된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래요.
“너희 언약궤 있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지? 그렇다면 내가 너희들에게 주변 나라와 싸움을 붙여볼게. 붙이게 되면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있다는 그 증거를, 적들은 패배하고 너희들은 승리함으로써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하나님께서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같으면 언뜻 상식적으로 봐서 ‘이제 우리는 걱정 없다. 하나님이 뭘 해도 승리케 해준다는데 우리는 패배할 리가 없다.’라고 안심을 하겠습니까, 아니면 과연 그런지 조바심을 내겠습니까? 그런 약속을 받으면.
이스라엘 사람들도 죄인이잖아요. 아담의 자손이에요. 그래서 약속은 약속대로 받았는데 그 약속이 자기의 마음과 화합하질 않아요. 인간의 마음이 그래요. 약속은 하나님이 했지만 그 약속이 약속대로 인간 마음대로 호락호락 약속과 합치되질 않습니다. 합치되지 않으니까 오히려 주의 약속이 불안감을 조성하는 거예요.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똑같은 마음 상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얼마나 믿음이 없고 얼마나 마음이 불안했으면 기도할 때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러겠어요? ‘저는 사람의 약속 안 믿고 하나님의 약속만 믿습니다.’ 이 말은 약속이 자기 마음속에 지금 이렇게 딱 결합이 안 되었다는 티를 다 내버린 거예요. ‘하나님께서 지켜주옵소서.’ 이 말은 달리 이야기해서 ‘하나님 못 믿겠습니다.’란 말을 이렇게 안 들키고 하나님께 아부하듯이 조작해서 위장해서 그런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 믿습니다, 도저히 못 믿겠다는 말을 달리 이야기한 거예요.
차라리 하나님을 몰랐으면 자기 속편한대로 살면 될 텐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천국 보내주고 이렇게 하면 복주고 이렇게 나오니까 이게 믿기지는 않고 이걸 안 믿으면 또 벌 받을 거 같고 또 믿으려고 하니까 내키지를 않는 거예요. 마음속에.
이럴 때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들, 불신자들을 천국 가는 성도, 백성으로 어떻게 전환하는가? 그 전환하는 방식이 구약성경에 나옵니다. 방법은 뭐냐? 하나님 믿고 성공하기를 기대했는데 결과가 실패로 돌아오는 일을 반복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진짜 하나님의 말씀의 성공, 이스라엘 성공이 뭐냐를 알려줘요.
그래서 제목이 ‘패배’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자체적으로 자기 나라가 그럴싸하게 하나님 다 잘 믿는 열두 지파로 운영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아마 그렇게 될 거라고 그렇게 예단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 20장에 들어가면 그것이 바로 실패로 끝납니다.
사사기 20장에 베냐민 지파가 어느 레위 가정의 첩을 욕보여서 죽였어요. 죽이니까 그 범죄에 대해 너무나 충격을 받은 레위인이 자기 죽은 첩의 시체를 열두 덩어리로 칼로 취하여 찍어서, 찍어야 됐어요, 사사기 19장 29절에 “칼을 취하여 첩의 시체를 붙들어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냈다 했어요.
자, 이 열두 덩이 가운데서 베냐민 지파도 있었겠습니까, 없었겠습니까? 베냐민 지파도 있었겠죠. 열두 덩이니까. 열두 지파니까. 레위인은 땅이 없고 땅이 있는 열두 지파에 열두 덩어리를 다 보냈죠.
그럴 때 우리 인간적인 상식 같으면 베냐민 지파가 어떻게 나와야 돼요? “아, 우리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다 나쁜 건 아니고 어느 지파에나 다 그런 못된 자식들이 있듯이 부랑배가 참 그런 몹쓸 짓을 했네요. 죄송합니다. 하나님의 법이 있는데 하나님이 살아계신 이 정의로운 땅에서 이거는 이방인보다 더 못한 악한 짓이 나왔기 때문에 우리가 책임지고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자체적으로 처벌하고 바른 이스라엘 되는 데에 협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게 상식적이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베냐민 지파는 똘똘 자기들끼리 뭉쳤어요. 그러니까 나머지 열한 지파가 총궐기를 해서, 베냐민 지파가 자체적으로 처벌안하니까 잘못에 대해서 자체적으로 반성 안하고 있으니까, 이스라엘 전체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손 좀 봐야 되겠다 해서 군대를 모았습니다.
군대를 모았는데 너무나 독한 악행을 보고 사람들이 분개가 일어서 열한 지파의 엄청난 숫자와 베냐민 지파의 소수가 전쟁을 붙었는데 이 숫자 차이가 엄청나요. 사사기 20장 17절에 보면 “베냐민 자손 외에 이스라엘 사람의 칼을 빼는 자의 수는 사십만 명이니 다 전사라” 그런데 20장 15절에 “그때에 성읍들에서 나온 베냐민 자손의 수는 칼을 빼는 자가 모두 이만 육천이요” 이만 육천하고 사십만 명. 도대체 몇 대 몇이에요? 엄청나죠. 20 대 1까지는 안 돼도 15 대 1 정도는 넘죠.
그래서 이제 소위 자칭 정의롭다는 연합군이 마땅히 자기는 나쁜 짓 안하고 베냐민 지파는 나쁜 짓했으니까 하나님이 지켜보니까 나쁜 사람은 우리한테 망하고 우리가 승리한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겼던 겁니다. 그런데 막상 붙어보니까 누가 이겼어요? 소위 정의로운 연합파가 소수의 베냐민한테 첫 번째 전쟁에서 졌어요. 21절에 “이만 이천”명 죽었어요. 두 번째는 25절에 연합군들이 “일만 팔천”명 죽었습니다.
이게 뭘 의미하는 겁니까? 이스라엘 자체 내에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될 때에 인간이 정의감으로 뭉치면 하나님께서 정의로운 쪽으로 이스라엘을 재건해주고 다시 괜찮은 이스라엘로 만들어주는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은 패배를 해야 돼요. 패배.
다시 말해서 베냐민 지파에게 일어난 그 악에 대해서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는 책임이 베냐민 지파에게 있다고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사사시대에 베냐민 지파에게 일어난 악행은 사실은 사사시대 전체에 이스라엘에게 책임을 묻게 한 악행을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거예요. 허락하신 거예요.
나는 선한데 너는 악하다,라는 사고방식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하는 것과는 배치되는, 정반대가 되는 사고방식이라는 거예요. 이 말은 이스라엘 측에 일어나는 것은 열두 지파를 따로 나눠서 어느 특정 지파만 나쁜 게 아니고 그 당시 모든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고 엉망진창이라는 증상을 알리기 위해서 베냐민 지파에게 그러한 특출한 악행을 유발한 겁니다.
결국 세 번째 전쟁에서는 유인책으로 베냐민 지파가 패배하는데 그때 (27,) 2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 물으니라(그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셨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묻자오되 내가 다시 나가 나의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가 말리이까”
그전까지는 자기가 처벌자고 베냐민 지파는 처벌받아야 될 자라고 생각했던 그들이 이제는 우리가 과연 처벌할 수 있는 정의로운 자격이 있는가를 하나님께 물은 겁니다. 이 말은, 우리 손으로 우리가 처벌하지 말고 하나님의 손으로 처벌해주세요. 하나님께서 정의롭지, 우리는 남을 처벌할 수 있는 정의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 자체에 대한 패배를 의미하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들이 세상을 볼 때 저놈은 죽여야 되고 저놈은 지옥 가야 되고 하지만 그 문제는 주님 소관이지 우리 소관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런 우리가 날마다 주님 앞에 우리 뜻이 뭉개지고 주님 앞에 패배자가 되는 그 절차가 있어줄 때 주님이 승리해야 되지, 건방지게 내가 승리하는 일은 다시는 없도록 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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