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464강, 465강) 순종, 절망 240319 본문

유튜브 강의(이근호)/유튜브 강의

(464강, 465강) 순종, 절망 240319

정인순 2024. 5. 29. 10:34

464강 음성
동영상

465강 
음성
동영상

 

녹취:이하림

464강-YouTube강의(순종 출애굽기 16:20)20240319-이 근호 목사


제464강, ‘순종’. 하나님께서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은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시간 공간의 환경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시간 공간과의 대비 또는 차이, 차이 남, 다름 이런 목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순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동안 자기가 살아왔던 환경 속에서 노하우라는 게 있어요. 자기가 이렇게 하면 처신이 잘되고 이렇게 하면 내 생존에 불리하지 않고 유리하다. 오로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살게 만드는가 거기에 모든 초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추방되고 난 뒤에 생긴 성질이죠. 본성입니다. 낙원에서는 특징이 순종이란 게 없어요. 왜 순종이라는 게 낙원에선 성립이 안 되느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게 그걸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그 말씀이 유지되는 조건이 낙원이고 생명나무입니다.

선악과나무, 생명나무 그 두 나무를 옹호하고 보필하고 그걸 지켜내기 위해서 에덴동산이라는 환경이 조성되었어요. 굳이 인간에게 주목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목하는 것은 생명나무와 ‘선악과 따먹지 마라’ 그거였습니다. 선악과는 너희 인간들, 피조물이 따먹을 과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을 위한 낙원이 아니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어떻게 인간에게 잘해주려는 생각이 전혀 없고 제일 급한 마음에 생명나무 그거 지키기 위해서 아주 가차 없이 인간보고 나가라고 이야기한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던 것은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그 취지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데에 의도가 있었고요. 그 취지를 살리는데 필요한 환경이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인간보고 여기서 천년만년 잘 먹고 잘 살라고 준 게 에덴동산이 아니에요.

이 점이 왜 중요하냐 하면 천국도 마찬가지에요. 천국은 인간이 행복하게 살라고 만드신 천국이 아닙니다.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 두 취지를 완성하신 분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하늘나라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아들의 나라라 하죠. 네 나라 아니란 말이죠. 너 좋으라고 만든 나라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좋아하고 내가 좋아하는 나라, 그런 나라는 애시당초 계획도 없고 그걸 만들 생각도 없는데 괜히 인간들이 악마하고 한통속이 되어가지고 종교라는 걸 교회라는 걸 만들어놓고 천국 간다, 천국 간다, 계속 천국 간다고 부추긴 거죠. 인간이 생각하는 천국은 없는데.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어떤 방안도 하나님께는 없습니다.

이러한 에덴동산의 정신, 에덴동산의 취지가 애굽에서 나오는 히브리인들 이스라엘 나라에서도 그대로 그게 유지돼요. 왜 유지가 되어야 되느냐 하면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그 뜻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뱀의 후손과 싸울 어떤 분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분이 여자의 후손이죠. 그럼 뱀의 후손과 싸워야 될 여자의 후손은 신약에선 물론 예수님이지만 구약에서는 그 정신이 이스라엘 내부에 들어서게 돼요. 이스라엘 내부에. 예수님의 일하시는 이유가 그 안에 담겨있습니다.

그러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스라엘의 환경이라는 것은 인간 좋으라고 있는 게 아니죠.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행복하라고 하나님께서 율법을 준 게 아니에요. 행복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게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보고 ‘내 율법에 순종하라’ 하는 그 취지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상관없고 관계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그 순종하는 취지는 인간들이 ‘순종하면 뭐 줄 건데요? 순종하면 복 줄 겁니까?’하는 그러한 거래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율법을 주신 이유가 뭐냐?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은 안 된다는 거예요. 인간은 순종이 안 된다는 것. 율법을 줘도 순종 못하는 그 여정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계속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 예가 출애굽기 16장 20절에 나옵니다. 19절, 20절을 보면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만나 이야기입니다.

만나 이야기를 할 때, 모세가 다른 이야기 안했어요. 19절에 보면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만 이야기했어요.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 남겨두면 뭐 썩는다, 냄새난다, 벌레 생긴다, 일체 그 이야기가 없어요. 그냥 아침까지 그걸 남겨두지 말라고만 이야기해요.

모세가 다른 이야기 안하고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남겨두지 말라는 이 말씀을 주신 이유는 인간이 뭘 먹는다는 것, 인간이 살려면 뭘 먹어야 되지 않습니까, 먹으려면 일을 해야 되죠, 인간이 일을 해서 먹을 것을 생산하고 그것을 온가족이 같이 먹는 때에 어느 인간도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다 내일을 위하여 저축하고 비축해둔다는 거예요. 이러한 인간의 행위가 인간들 보기에는 전혀 생소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지혜로운 것이고 마땅한 거죠. 욕심내서 다 먹어버리면 그럼 내일은 대책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만나라는 계명을, 만나 자체가 계명이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만나를 계명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음식물로 생각한 거예요. 음식물. ‘우리가 먹을 게 없으니까 주셨다’가 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실 때는 만나는 말씀이에요. 내가 네 본색 드러낼 거야. 네가 현재 가야될 약속의 땅의 원리와 네가 나왔던 애굽 원리와의 차이를 벌려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동일하면 안 되죠. 벌려야 되죠.

‘네가 만약에 그것을 아침까지 남겨두면 벌레 생기고 냄새 난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선지자니까, 벌레 생기고 냄새 나면 이건 뭐 우리가 비축하면 안 되지. 이건 또 주실 거니까 남는 건 버리자.’ 이렇게 나오겠죠. 그런데 일체 그런 말이 없고 그냥 아침까지 두지 말라고 한 거예요.

벌칙을 미리 주시면 우리가 판단을 해서 ‘아, 이게 이래선 안 되는구나. 우리한테 손해구나. 이 만나를 잘못 관리하면 우리에게 불행이 오는구나.’ 그렇게 되면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게 아니고, 자기한테 해가 되고 자기가 불행해지는 이것이 말씀보다 우선되는 그런 식으로 애굽에서 이 땅에서 아담의 후손들은 살아온 거예요.

말씀을 지켜도 자기 손해 볼 짓은 안하겠다는 것이 인간이 하나님 뜻에 절대로 순종 못하는 이유입니다. ‘네가 말씀에 순종하면’ 그럼 요즘 교인들 그 뒤에 나오는 게 뭡니까? ‘그러면 천국 보내줍니까?’ 이렇게 나오죠.

천국은 그런 천국이 아니에요. 순종하면 들어가는 천국이 아닙니다. ‘너 예수 십자가 믿는데 순종할래?’ ‘순종하면 천국 보내줍니까?’ 벌써 ‘천국 보내줍니까’가 뒤에 남아있는 상태에서 예수 믿는 것은 그건 전혀 예수 믿는 거 아니에요. 그건 순종 안함이죠. 순종 안함.

그래서 출애굽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줘놓고 그들로 하여금 그들에게는 음식물로 여겨지는 그것이 실은 하나님의 율법이고 말씀인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알려줍니다. 알려줘서 무엇을 지금 하나님께서는 요구하느냐 하면 순종이란 차원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말씀이 말씀대로 된다는 것이라는 것, 말씀을 주신 만나를 주신 오로지 그 뜻 외에는 하나님께 다른 뜻이 없는 거예요.

‘이거 하면 뭐 줄게’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께 주어진 그 말씀이, 네 속에도 말씀이 말씀답게 살아있을 수 있는가를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지고 계속 테스트해 나가시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신약에 누가 순종했어요? 예수님만이 순종했죠. 결론은 뭐냐? 우리 인간은 순종이 없다는 말씀을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을 주신 겁니다.


465강-YouTube강의(절망 욥기 2:9)20240319-이 근호 목사


제465강, ‘절망’. 선지자, 욥도 선지자입니다, 이 선지자를 인간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뽑아서 그에게 선지자 기능을 부여하신 것은 그 특이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땅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어느 정도로 전혀 상관없이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선지자를 통해서 알리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욥기 1장부터 쭉 보게 되면, 욥의 1장은 굉장히 짧아요. 욥은 당대 최고의 재벌이었다, 그리고 가정적으로 문제가 없다, 다 하나님 섬기고 욥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가장 모범적인 가정이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욥 1장을 보면서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살면 하나님께서 욥처럼 모범적인 신앙인 가정을 만들어주시겠지.’ 이런 생각을 해요. 그런데 그게 굉장히 위험한 생각인데 왜 그러느냐 하면 욥이 가진 것, 욥이 건강한 것, 욥의 가정이 화목한 것, 그걸 모델로 삼아버린다는 거예요.

그걸 모델로 삼아서 ‘욥은 양이 몇 마리인데 나는 양이 몇 마리이다. 욥은 식구가 10명이 넘더라도 화목한데 우리 가정은 왜 싸우냐. 욥처럼 순종하면 복을 내렸을 것이다.’라고 그런 생각을 하는데, 욥이 부자 되고 신앙적으로 이웃을 많이 도와주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칭찬과 칭송이 떠날 일 없이 받는 이유는 절망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절망.

이게 선지자의 역할이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시편 22편에 나오는 그 구절을 말씀하시면서… 최고의 절망이죠. 물론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말씀을 예언하기 위해서 그런 거 다 압니다.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뭐 다 알지만 낙심이라는 것이 안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이 육신의 몸, 예수님도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어요. 로마서 8장 3절에 보면 나옵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몸은 어떤 속성을 갖고 있느냐 하면 말씀에 대해서 강력하게 저항하고 반항하고 반발하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욥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 중 하나가 하나님께서 사탄의 시험을 욥에게 허락할 때 한 번이 아니고 두 번을 했다는 사실이에요. 처음에는 뭐 날아갔냐 하면 재산 날아가죠. 자식들 다 날아가죠. 그런데 두 번째 시험은 뭐냐? 재산 날아가고 자식 죽어도 욥은 범죄치 아니했다 했어요. 욥기 1장 22절,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였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21절에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이렇게 되어 있죠. 벌거벗고 나왔기 때문에 벌거벗고 돌아간다는 겁니다. 이게 욥의 잘못이에요.

벌거벗고 나왔는데 욥에다가 장차 오실 예수님의 고난을 입혀서 돌려보내요. 그게 뭐냐 하면 절망이고 반발이고 반항입니다. 벌거벗은 몸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 대들고 반항하고 항의하고 항변하는 것을 실어서 욥을 하나님께로 보내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욥을 왜 이렇게 사용하시는가? 그것은 이 욥이 이방인이잖아요. 이방인에게는 아직 하나님의 언약이 그들에게 없어요. 언약이 없다는 말은 인간과 인간 자기들끼리 비교한다는 거예요. 자기들끼리. “목사님 왜 그리 미남입니까?” 이런 거 있잖아요. “목사님 왜 그렇게 운동을 잘해요?” 이런 거. “집사님 왜 키가 커요?” 이런 거. 그렇게 할 때 거기에 대해 여러분 답변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내 키 큰 것이 절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취지를 ctrl+V, 복사해서 붙여넣는 복제판으로 이 땅에 남겨둔 거예요. 누구든지 십자가 영,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신약 때 성도를 선지자라 해요. 왕 같은 제사장, 선지자라 해요.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선지자는 본인 인생이라는 것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교인들끼리 만나고 이야기할 때 다들 하나님 믿고 복음 알고하니까 편하게 이야기하는데,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은 누구하고도 편하게 이야기 못해요. 왜 그러느냐 하면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함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이. 주님의 역할과 기능이 그 사람과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상대가 함께 있는지 함께 안 있는지 어떻게 아느냐? 성령을 받은 성도의 특징은 자기에게 성령 온 이유를 알고 있어요. 그 이유는 방금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 철저하게 절망하기 위해서 성령이 온다. 그걸 마태복음 7장에서는 좁은 길이라 해요. 좁은 길.

물론 이 좁은 길이 구약의 욥은 자식 10명 다 죽고 재산 홀라당 다 날아가고 자기 몸 아프지만 신약에서의 절망이라 하는 것은 굳이 이렇게 비참하게 되는 삶을 두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세상의 부귀영화에 대해서 이상하게 재미가 없고 흥미가 없고 관심이 없는 걸 말하는 겁니다.

지금 욥은 구약 사람이기 때문에 분명 자기에게 있단 말이죠. 있는 게 없어졌잖아요. 있는 게 없어졌으니까 욥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신 분도 하나님이요. 내 게 아니니까 가져가겠다 하면 얼른 돌려드려야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게 첫 번째 시험이었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욥을 죽이는 게 아닙니다. 욥의 인생을 통해서 절망이 무엇인가 거기다 사진을 인화하는 것처럼 그 이미지를 실어버려요. 자, 여기서 욥기에서 제일 난해한 게 나와요. 어떻게 절망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구원할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

인간의 아이디어로는 도저히 상상 안 되죠. 신앙인이면 하나님을 찬미하고 영광 돌리고 뭐 이래야 누가 봐도 어? 천국 가겠네, 그게 되는데 욥기 1장부터 해서 2장 같은 경우에는 아예 아내까지 동원합니다. 2장 9절에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했거든요.

이 철딱서니 없는 아내가 이야기했다 하잖아요. 그 뒤에 보면 이 이야기를 이 마음을 욥 본인이 인수인계해요. 3장에, “차라리 죽여 주옵소서, 마마. 차라리 목을 치옵소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겠죠. “내가 왜 네 목을 쳐야 되는데?” “너무 아픕니다. 그리고 그동안 알고 있던 나에 대해서 너무 절망적인 이미지, 내가 이런 인간인 줄 몰랐는데 내가 생각하고 있는 괜찮은 이미지가 홀라당 다 긁혀나가고 진짜 내가 평소에 욕했던 사람들의 이미지가 나에게 덮쳤습니다.” 3장부터 해서 욥의 이런 고백이 40장까지 가는데요.

40장 4절에 보면 “나는 미천하오니” 이제 이야기해요. 그 가운데서 친구 4명이 보조를 맞춰줍니다. 친구 4명이. 욥으로 하여금 ‘절망적인데도 불구하고 복을 받았다.’ 이 말을 이렇게 할 수 있어요. “복 받았냐? 그러면 네가 생각하지 않는 네 자신에 대해서 ‘내가 이 정도밖에 안돼?’라고 절망해봤어?” 라고 묻는 문장과 똑같은 문장이에요. ‘내가 이 정도밖에 안돼’ 라는 생각을 경유해서 그걸 거쳐서 비로소 하늘나라에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야, 이게 은혜구나. 이게 내 쪽에서 거들, 내 구원에 대해 내가 거들 문제가 하나도 없구나.’ 여기에 욥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온갖 역경과 수모를 다 겪고 있습니다. 욥도 인간인지라 가만있지 않고 계속해서 반박하고 변론하고, ‘내가 뭐가 잘못되었는가. 내가 뭐 문제 있는데? 나 죄 없다.’

그러나 결론은 뭐냐? 죄 없다 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너는 지금 하나님의 복에 대해 왜곡되게 이해하는 하나의 이유가 된다는 거예요. ‘죄 없는데 왜 재앙이 오느냐?’ 그게 하나님의 복을 잘못되게 생각한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가? 거꾸로 생각해야 되죠. 그 거꾸로가 십자가 사건입니다. 강도도 구원받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