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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440강/441강) 짐 / 세상 230718 본문

유튜브 강의(이근호)/유튜브 강의

(440강/441강) 짐 / 세상 230718

정인순 2024. 5. 29. 06:56

440강 음성
동영상

441강 음성

동영상

 

녹취:이하림

440강-YouTube강의(짐 마태복음 11:28)20230718-이 근호 목사


제440강, ‘짐’. 짐이라면 성경말씀 중에 딱 떠오르는 게 있어요.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이 말씀은 나한테 올 때는 ‘나한테 이렇게 무거운 짐이 있는데 이 짐을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주님한테 오라는 거예요.

그러면 오는 사람들이 뭘 생각하느냐 하면, 그동안 자기 무거운 짐을 본인들이 해결하려고 아등바등 애를 썼다는 것, 그걸 자인해야 돼요. 그걸 스스로 인정해줘야 됩니다. 내 문제는 내가 해결 안하면 해결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철떡 같이 그동안 믿고 살아온 거예요.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얼마나 많은 시험을 했겠습니까. 테스트를 했겠습니까. 내게 있는 이 문제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내놓을 때 하나님이 얼마나 벼락 같이 기적적으로 예상 못할 행운으로 내 문제를 깔끔하게 해소하는지를 은근히 고대하면서 하나님 믿는 척을 한 거죠. 그걸 간 본다 하죠.

내가 어느 정도까지 헌신하고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께 충성을 했을 때 하나님 쪽에서 나한테 어느 정도까지 문제해결을 할 것인가를 줄다리기한 거예요. 흥정을 하고 딜을 하고 밀당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식으로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 그것은 주께 오는 태도가 수상하죠. 잘못된 거예요. 주님께 온다는 것은, 자기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그대로 있어야 돼요. 그리고 자기 쪽에서 그걸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자체가, 내가 짊어진 짐이 내 수고와 희생으로 해결되지 않는 짐이란 사실을 인정해줘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짐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어떤 짐도 우리 스스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오늘 마태복음 11장 28절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온 거예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그동안 너희들이 이걸 벗어보려고 얼마나 아등바등 애를 썼느냐? 그러나 너희가 편히 쉬게 할 짐이 아니고 주님이 해결해야 될, 그래서 너희들이 ‘아 주님이 해소했구나. 해결했구나.’ 그럴 때 비로소 편히 쉼이 되는 거예요.

이 말씀을 표구사에 가면 액자로 해서 기독교 표구사에 많이 붙여놨죠. 집 현관이나 거실에 떡 붙여놓고 어떤 희망 같은 것을 거는 겁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짐을 진 우리와 예수님 자신과 일대일로 만나서 문제를 해결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돼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죄 짐을 가지고 온 인간과 예수님 본인 사이에 무엇이 중간에 끼어드느냐 하면 아버지의 지시와 명령이 끼어들어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야, 이리 와. 우리끼리 해결하자.’ 그렇게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무슨 혜택을 주기 전에 먼저 경유해야 될 곳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 짐을 지고 아버지에게 그 짐을 감당 못했다는 그러한 상태, 짐을 감당 못하면 그 짐에 눌려서 깔려서 돌아가시겠죠, 그게 바로 저주의 압박이죠, 주님께서 저주를 받아야 되는 겁니다.

이 비슷한 이야기가 마태복음 8장에 나와요. 문둥병자가 왔을 때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문둥병자는 내막도 모르고 룰루랄라 신나라 했죠. ‘예수님 솜씨가 괜찮구나. 병 고치는 솜씨가 유대인보다 낫네.’ 이러고 갔는데 예수님은 그 뒤에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 하면 그의 죄를 내가 대신 짊어진다고 되어 있어요.

이사야 53장의 말씀을 인간들은 이루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만 그 말씀을 이룰 수가 있어요. 방금 했던 것이 마태복음 8장 17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그러니까 사람들이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할 때 편히 쉬게 된다는 그 결과가 어떻게 해서 편히 쉬느냐 하면, 내 문제가 해결돼서 쉬는 게 아니고 내게 있던 짐마저도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편히 쉬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나라는 인생, 세월을 살았고 남들의 시선 앞에서 내 인생이 그럴싸해야 된다는 그런 심적인 압박감을 받지 않을 수 없죠. 길에서 누구 만나면, ‘요새 잘 지내나? 요새 너 뭐하는데? 요새 한 달에 수입 얼마 버는데?’ 이 자체가 우리에게 얼마나 압박감이 되겠어요. 부담되겠어요. 그러니까 빨리 성공해서 남 앞에 ‘나 얼마 못 벌어. 한 달에 뭐 이번 달은 천 오백밖에 못 벌고… 지난 달엔 이천 벌었는데 이번 달은 천 오백밖에 못 벌었어.’ 그럼 친구가 ‘와~ 너 성공했네.’ 그러면 ‘천 오백원. 지난 달엔 이천원.’ 만(萬) 하나 떼나 안 떼나 상대방이 잘못 해석하면 그건 자기 마음대로고.

어쨌든 간에 이 세상에서 아는 사람이 있다는 자체가 짐이에요. 쳐다보니까. 그러니까 얼마나 힘들겠어요. 예수님께서 쉬게 해주겠는데 조건은 뭐냐 하면 그 쉬게 할 때 네 짐만 없어지는 게 아니고 너 자신도 예수님 앞에서 마치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 시작하는 인생이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매일같이 새로 시작하는 겁니다. ‘나 얼마 벌었어’가 아니라 ‘주께서 얼마 주셨어’가 되는 거예요. ‘나 몸이 여기저기 아파’가 아니라 ‘주께서 여기저기 아프게 하셨어’. 항상 주도권을 주님 쪽에서 쥐고 있을 때 그 관계, 그 관계가 바로 아버지와 아들 관계 노선에 같이 합류하게 되는 그런 공간입니다.

예수님께서 편히 쉬게 해준다는 말은 ‘쉬게 해줄 테니까 너 혼자 따로 살아라’ 가 아니라 쉬게 해주는데 그 조건은 아버지와 예수님과 그 사람이 함께 사는 조건 하에 편히 쉬게 해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환난 많은 빌립보 교회에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네가 환난을 당하나 항상 기뻐하라. ‘나 짐이 없다’라는 그런 소극적인 태도 말고 ‘나 기뻐’라는 적극적 태도를 이야기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동안 수고하고 무거운 짐 때문에 주님도 몰랐죠. 하나님도 몰랐죠. 심지어 나도 몰라요. ‘그저 이 문제만 해결한다면 나는 어떤 신이든 믿겠습니다’는 식으로 자기중심으로 살았는데, 주께서 우리의 짐을 다 해결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애초부터 내 짐은 따로 없었고 주께서 나를 자기 사람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기 위한 전략이었다는 거예요.

나에게 이런 인생의 힘들고 무겁고 어려움을 준 것은, ‘우리 새로 시작하자. 네가 아는 너 말고 내가 오늘 새롭게 만든 나로 새로 시작하자. 그래서 우리 함께 살자.’ 그러한 취지로 주께서 편히 쉬게 해주시는 겁니다.


441강-YouTube강의(세상 마태복음 16:13)20230718-이 근호 목사


제441강, ‘세상’.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모른다 하는 것은 말도 안 되죠. 왜냐하면 세상에서 태어났고 세상에서 양육 받았고 세상에서 현재도 살고 있기 때문에, 나는 누군지 몰라도 세상은 무엇인지 안다고 아주 자신만만해 하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사람들이 자신만만하게 안다는 세상, 그런데 그 세상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죠. ‘네가 이 세상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아느냐?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아느냐?’ 그 질문을 주님께선 이런 식으로 질문을 던졌어요. ‘너희는 이곳에 살아라. 너희들이 좋아하는 이 세상에 살아라. 나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갈게.’

벌써 이별이죠.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 살고 싶은데 예수님은 세상 버리고 제자 버리고 따로 어디에 가겠대요. 걱정이 된 자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걸 버리고… 베드로가 한 말이죠, 모든 걸 버리고 주님께 몰빵했죠. 다 걸었던 거예요.

도박판도 그런 도박판이 없습니다. 예수님께 희망 걸고 어떤 가능성을 걸었던 거예요. 구원의 가능성, 메시아일 것이라는 가능성. 가능성을 잡았기 때문에 그들은 주저할 것 없이 모든 걸 다 걸었습니다.

모든 걸 걸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오해했어요. 어떤 오해냐 하면 자기가 새 사람 된 줄 알고 있어요, 모든 걸 예수님께 걸었기 때문에. 그런데 그것은 인간들이 괜찮은 영웅을 만나면 이용하고 싶은 심보에 지나지 않습니다. 괜찮은 분 만났다. 와보라. 나 메시아 만났다. 와보라.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그럴 때 그들은 기다렸던 나한테 이익이 되는 사람, 나한테 도움 되는 사람, 내가 생각했던 꿈과 이상을 실현시켜 줄 사람을 내가 만났으니까 내 소박한 소망은 이루어지겠다는 자기가 전에 설정해놓은 계획이 철회될 이유 없죠. 완성을 보게 되는 겁니다. 철회는 무슨 철회. 드디어 내가 한 계획이 그다지 실수가 아니었구나. 자기 결심에 대한 어떤 보상 같은 것, 자기 판단이 옳았다는 사실에서 돌아오는 어떤 희열, 환희, 인생 승리감 이런 것을 제공해줄 메시아라고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들은 여기 있어라. 내가 나 혼자 아버지께로 간다.’ 요한복음 12장에 나온 말씀입니다. 그럴 때 그들은 그 말씀을 납득할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같이 잡수시고 같이 길을 걸었고 같이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능력 행했고 잠도 같이 자고. 그들 열두 제자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거처할 집이 필요치 않았어요. 주께서 마련해주실 거니까. 이끌어주실 거니까. 헤어진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죠.

사람이 상대가 그다지 미덥지 않고 같이 있고 싶지 않을 때, 상대가 먼저 ‘우리 찢어지자. 오늘 여기서 끝내라.’하면 그럼 이쪽도 ‘내가 기다렸던 바다.’ 이러면 뭐 마음 상처 둘게 없죠. ‘난 아예 너한테 기대조차 안 했어. 착각하지 마. 난 네 입에서 헤어지잔 소리 나올 줄 알았어.’ 해놓고 집에 가서 엉엉 또 울고 뭐. 앞에선 대범한 척하지만 집에선 또 엉엉 울면서 그동안 저 인간한테 쏟아부은 데이트 비용 계산한다고 저 혼자 계산하고 그렇게 나올 거예요. 그동안 들인 시간과 공간들이 아깝죠. 아까우니까 빨리 자기 방어태세에 들어가요. 손해 더 보기 전에 뭘 또 조치해야 되나, 이렇게 하겠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신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리 가까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열두 제자를 통해서 대변해서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왜 모르냐 하면,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 자기가 투자한 여러 가지의 수고와 결단과 결심에 대해서 계속 거기다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악착같이 예수님 따랐다. 예수님과 더불어서 권능을 행했다.’ 이것이 예수님도 하셨지만 나도 했다는 것을 계속 같이 견지하려 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네 것이 있는 한 내 나라에 못 간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갈 때 그냥 구름타고 올라간 게 아니에요. 십자가에 들어가서 올라갔어요. 다른 길은 없어요.

사도 바울 말대로 십자가 능력 외에 다른 구원의 능력은 없습니다. 그 십자가가 뭐냐 하면 내가 그동안 공들였던 모든 것이 무의미함을, 하나님 앞에서 작살나는 그 길입니다. 된통 얻어맞는 그 길입니다. 의미 없었다는 거예요. 내가 신앙생활하고 교회 다니고 성경 공부한 이 모든 게 의미 없다는 겁니다.

그럼 제자들은 그걸 눈치 채야죠. 내가 주님 따라다니고 열심히 주님 따라 하늘나라가고 또는 메시아 왕국을 가겠다는 데 있어서 나는 내가 하는 모든 수고와 주에게 협력한다고 하는 모든 애씀이 의미 없음을 본인이 몰랐던 거예요. 제자들이 그걸 받아들이기가 곤란했던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언급하면서 제자들에게 하나의 낌새를 줘요. 결국 너희들은 나와 헤어질 수밖에 없다. 그 낌새가 마태복음 16장에 나옵니다. 16장 13절,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사람들, 세상 사람들이죠. 세상이죠, 곧. 예수님을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있지도 않는 세상 사람들의 의견을 왜 묻습니까? 제자들보고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바로 훅 치고 들어가시면 되는데 왜 세상 사람들을 거론하는 그런 우회를 거치느냐 이 말이죠. 세상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과 너희와 분명히 차이나는 게 있어야 되는데 그 차이를 너희들의 목소리로 듣고 싶다 이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는 것하고 제자들이 보는 것하고의 차이. 그 차이남이 된다면 제자들은 세상에서 탈출하지 않더라도 이미 세상과 어울릴 수 없고 합류할 수 없는 세상 바깥의 공간에 놓여있는 자들입니다. 제자들이.

여러분들이 성도입니까? 성도라면 이런 인식이 있어야 돼요. 성도라면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마태복음 16장 13절과 똑같이 매일같이 질문하게 돼요. ‘너 나 믿나?’ 이런 질문하기 이전에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을 매일같이 하게 돼요.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라고 제자들이 이야기했죠. 이건 정답이다 아니다? 정답이 아니다. 엘리야, 세례 요한, 예레미야 이쪽 노선에 속하지 않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절에 이야기하기를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여기서 아주 재밌는 일은요. 베드로가 정답 같아 보이는 정답을 이야기했죠. 그러나 그 내용은 누가 채우느냐 하면 17절에 예수님이 채워줘요.

맨날 이런 식이에요. 제자들은 들은 풍월로 이야기하는데 그 실내용은 제자들이 감을 못 잡고 있어요. 하지만 주께서 감잡히도록 제자들을 그 내용까지 이끌어주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래서 아버지가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하실 몫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다 하는 데에서 그들 본인이 철회해야 될 거부해야 될 이유가, 아버지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할 일이 계속 제자들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제자들은 알아야 되고 그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아는 것과 제자들이 오늘날 성도들이 예수님을 아는 것과의 차이입니다.

시작하시는 분이 주님이기에 마무리도 주께서 지어주신다는 것을 아는 자가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