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예레미야 11:9-12 / 언약 파기(복음 폭탄) 본문
언약 파기
이근호
2023년 9월 1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1:9-12
(11:9)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 중에 반역이 있도다
(11:10) 그들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한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에 돌아가서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겼은즉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내가 그 열조와 맺은 언약을 파하였도다
(11:11)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 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
(11:12)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민이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을지라도 그 신들이 그 곤액 중에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치 못하리라
예루살렘이 곤란에 처해있습니다. 백성들이 잡혀가고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그 재앙이 닥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께 원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언약을 파기한 징벌로서 여전히 충분치 않다”입니다. 그 정도로 언약 속에서 엄청난 가치를 품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한 자로 규정받는 이유는, 언약의 가치와 비중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애쓰고 수고한 가치보다 더 큰 가치가 없다고 여기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 본능 같은 겁니다. 이 세상 삶이 인간으로 극한으로 몰아넣습니다.
이게 사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경계가 모호할 지경으로 가면서 기어이 살아남고자 하는 이유는, 여전히 놓치지 못할 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본인의 가치입니다. 본인이 본인을 지키는 것을 타고난 충동같은 겁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실 때에는 다음의 두 가치 원칙이 동반되고 있습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 19:4) 원칙 하나는, 독수리 날개로 업어 옮겼다는 겁니다. 아무리 애굽 사람들이 노예 생활하고 힘든 여행을 했더라도 구원은 하나님의 보내신 독수리 날래로만 성사되었다는 겁니다.
또 다른 원칙은 ‘내게로’ 곧 ‘하나님 자신에게로 자기 백성을 모집’하신다는 겁니다. 이는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 나름대의 목표나 노림수는 사그리 삭제시킨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멀쩡하게 천국가고 싶어합니다. 이 땅에서도 멀쩡하게 천국갈 때도 멀쩡하게 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기대한 자신의 이상향이 기다리는 쪽으로 가겠다는 의지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다치지 않고 온전한 바로 거기에 하나님께 같이 있어주었으면 하고 기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생각해서 나온 생각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성을 키우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겁니다.
첫째 원칙에서, ‘독수리 날개로 업어’ 구원하는 방식은 인간들이 각자 못놓고 있는 자기 가치에 대한 전면적인 묵살이요 거부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나도 일방적이어야 하기에 조금이라도 인간의 가치가 섞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평소에 인간은 한시도 자기 가치를 놓치고 살지를 않습니다.
예를 들면, 어려움에 처한 이웃에 대해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 상대의 상실을 자신의 도움으로 메울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결코 무가치하거나 무의미한 존재가 아님이 확인됩니다. 자신이 살만한 보람을 접하게 됩니다. 당연히 독수리 날개는 없어지고 날아가버리고 맙니다.
이처럼 우상숭배, 혹은 언약파기란, 결코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사투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고 고대하는 상황이란 독수리 날개의 투입과 일방적 조치를 이해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꾸만 자기에게 있는 것,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으로 내놓고 그 제시를 의미있는 받아달라는 식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내놓을 수 있는 것만 내놓을 수있다는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면 난감하고 자신이 내놓은 것을 하나님께서 거부하면 그다음 방안이 없어지는 겁니다. 평소에 대인관계에서도 이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살피고 살아온 겁니다.
자기 것을 내놓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 내놓을 때, 자신의 가치가 따로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 이처럼 구약은 절망적입니다. 하지만 신약에 오면 비로소 하나님의 언약의 취지가 더욱 명백해집니다. 그것은 신약시대에 와서 비로소 세상 사정이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악마가 세상을 어떤 식으로 장악하는지 그 방식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활동 방식은 악마가 인간을 장악하는 방식과 형식으로 그대로 사용하십니다. 악마는 인간 내부를 통제합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그 통제자가 악마가 아니라 본인이라고 여깁니다. 이는 곧 인간은 자신이 자신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로 간주한다는 겁니다.
신약에 와서 이 세상은 ‘악마’라는 종교적 개념은 옅어지고 사라지고 인간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인간들에 의해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이라고 믿게 되어 있습니다. 보육하고, 교육하고 훈육합니다. 돌보고 가르치고 때립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의 인간에 의해 양육 이외에 그 어떤 양육도 부정하는 분위기를 조성해놓았습니다.
현대에 와서 인간들은 매사에 악마 탓을 하지를 않습니다. 자기 탓 아니면 남의 탓입니다. 자체적으로 모든 난관을 극복하므로서 형편이 어렵거나 나아지더라도 모두 다 인간의 덕으로 여길 마음의 준비가 된 상태에서 살아갑니다. 즉 ‘나에게’로 모든 의미가 쏟아져들어오기를 원하는 겁니다. 이는 곧 인간의 악마의 위세에서 빠져나갈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좋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 다른 가능성은 없다는 겁니다.
자율적으로 사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깁니다. 독수리 날개로 업어 온 것을 금방 다 잊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신약에 들어서서 하나님의 대처방식은 ‘남의 구원’을 제공하는 겁니다. 곧 예수님의 구원을 주시는 겁니다. 인간들은 내부적으로 이물질에 대해서 강력하거 거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은 이것은 숨어 있는 악마의 본심입니다. 잘난 인간 놔두고 왜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다는 식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
인간 내부의 악마의 방해를 부수고 들어오는 방법은 ‘창세 전의 계획’입니다. 일종의 금수저 같은 대우를 받으면서 비로소 성도는 주님에게로 갈 수가 있습니다. 창세 전의 복음의 위력은 폭탄이 되고, 자기 가치를 지키려는 모든 것들을 폭파시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이제 저를 안 살려주어도 상관없어요. 주님”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의 내세우는 것과 하나님께 주시는 것에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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