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예레미야 11:18-23 / 고향 사람 본문
고향 사람
이근호
2023년 10월 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1:18-23
(11:18)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그 때에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
(11:19) 나는 끌려서 잡히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과실을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산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 이름으로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11:20)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정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수를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
(11:21)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취하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
(11:22)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으며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11:23) 남는 자가 없으리라 내가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곧 그들을 벌할 해에니라
예레미야 때에 알 수 있는 인간의 본질과 예수님 때에 알 수 있는 본질이 다릅니다. 차이가 납니다. 여전히 인간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는 그런 시대가 구약입니다. 아직 인간의 범죄가 근원적으로 다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그 와중에 있습니다. 인간에 대해서 약간의 기대는 하고 있고 할 수밖에 없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괴롭히는 이유는, 자기에게만 참된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예레미야 외의 다른 사람에게는 참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바가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레미야 외의 사람들은 분개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싶은 것이지 결코 예레미야를 믿고 싶은 것이 아닌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나의 뜻을 알아라 하는 식으로 예레미야에게 참된 예언을 주신 겁니다. 실은 이것에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을 받은 선지자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은 곧 나중에 참된 메시야, 하나님께서 직접 세상에 나타났을 때, 인간들이 그들의 근원을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음을 미리 예레미야를 통해서 드러내려고 합니다.
예레미야가 당한 수모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끌려서 잡히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과실을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산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 이름으로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19절) 그러나 이 말씀은 이미 시편에 나와 있는 말씀음입니다.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시 27:12-13) “말하기를 가서 저희를 끊어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시 83:4)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은 메시야의 수난을 중심으로 말씀을 쓰여지고 나타나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예레미야는 그 수난으로 접어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즉 곱고 쉽게 예언을 전하고 활동할 수 있는 것이 선지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온갖 수모를 다 받게 되어 있는데 선지자들의 적들이 외치는 있는 바는, 자신들이 시편에 예언된 대로 구원받는 자라는 주장입니다.
곧 적들은 자신들이 말씀 이해에 위배될 만한 말을 하는 자는 참된 선지자가 아니라는 주장을 펼쳐 놓는 겁니다. 따라서 제 3자들이 보면, 예레미야나 그 적들 가운데 어느 쪽이 진짜 하나님편인지를 알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럴 경우에 과연 동일한 말씀을 두고서 서로 자신들이 구원받는 말씀이라고 우길 때, 어느 쪽이 맞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여기서 하나님이 쓰시는 방식은, 어느 쪽이 자기를 변호하는 방어하느냐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고향사람들로부터 공격받고 있습니다. 아나돗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북쪽 4.8km쯤 있는 동리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레미야 대해서 어릴적부터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이는 곧 소위 선지자에 대해서 잘 아는 그들이 가장 오해할만한 내용으로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을 전달토록 하시는 겁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예상하는 모든 바를 기피하는 식으로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이 따로 정해져 있고 그것을 그대로 인간들이 받을 수밖에 없지만 그 하나님의 일이란 인간은 반발심을 유도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되 순수하게 찾지를 않습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뭉개지고 망가지는 것을 목표로 해서 하나님을 찾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는 의도적으로 선지자가 고향사람으로부터 당하도록 합니다. 소위 예레미야를 잘 안다는 자의 평을 외부인들이 들으면 예레미야에게 더욱 더 등돌리게 마련입니다.
예레미야가 원치 않는 공격을 받게 하는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적들에게 친히 나서서 심판하시겠답니다. 이렇게 되면 선지자를 두고서 하나님께서 그 주변에 하나님의 적들이 나타도록 유도하시는 바가 됩니다. 바로 이 방식은 장치 오실 메시야이신 예수님에게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마태복음 13:54-58에 보면,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모두 ‘고향’이라는 정체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체성을 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고향 및 가정에서 지어준 이름이 있습니다. 남자에게는 남자이름을, 여자에게는 여자이름을 지어줍니다. 그리고 그 이름으로 사회에서 자신이 사람으로 대우받는 사실에 익숙해져 있게 됩니다. 만약 고향을 부정하거나 깨어지게 되면 인간은 근원없는 존재가 되고 자기 이름에 의미가 없게 됩니다.
하지만 바로 이점이 장차 메시야로부터 심판을 받아 마땅한 이유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기존의 이름과는 너무나도 다른 이름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자기 이름의 의미를 고수하는 조건 하에 ‘주의 이름’을 부르고 싶은 겁니다. 아무리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받고자 해도 그 와중에 자기 이름이 깨어지는 것은 구원 대상 자체가 깨어져 버린다고 여깁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있어 구원이란 소중한 내 이름을 지키기 위해 주의 이름을 활용하는 것 뿐입니다. 바로 이점을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공격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하시되 조건은 ‘자기 이름’이 이 ‘주의 이름’으로 망가졌음을 전제로 하시고자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주의 이름은 인간들의 이름에 핍박을 받는 그런 내용의 주의 이름입니다. 바로 놀라운 사실은 이런 자기 이름 망가짐을 무너지는 것을 감사하게 된다는 점이 바로 주의 이름의 효력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히 주의 이름을 부르도록 우리 이름을 깨어지게 해주시는 사랑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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