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디도서 1:15-16 / 전체성과 부분 본문
전체성과 부분
이근호
2023년 10월 1일
본문 말씀: 디도서 1:15-16
(1: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1:16)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인간들의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선과 악의 개념은 인간 선악과 따먹은 결과로서의 선악개념입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기 위해 인간 안에 심어놓은 그런 선과 악의 개념입니다. 이렇게 인간 내부에 애초부터 잘못 되어 있기에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3) 인간은 가짜 인간입니다. 진짜 인간은 선과 악에 대해서 모르는 존재를 말합니다. 이 존재만이 하나님께 진짜 만드신 그대로의 인간입니다.
문제는 가짜 인간에서 진짜 인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악마가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하늘 나라의 존재입니다. 곧 전체성을 담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 이 전체성의 주도권을 놓고 한바탕이 전쟁이 일어났고 패배한 마귀는 인간이 있는 이 땅의 세계로 들어오게 됩니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계 12:7-9)
이 악마의 사자가 곧 귀신입니다. 이 귀신들의 특징은 이 지상에 자꾸만 어디로 들어갈려고 하는 겁니다. 전체가 부분 속으로 자리잡을려고 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부분들이 집합으로 구성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상적인 존재로 자부합니다.
불신자 가운데서 점잖고 훌륭하고 착하고 성실하게 보이는 자들을 숱하게 많습니다. 아마 대다수가 그런 사람일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소환해서 한 번 다음과 같이 물어보면 그들로부터 무슨 답변이 나오겠습니까? “왜 당신들은 복음을 안 받아들이는 겁니까?” 여기에 대한 답변은 간단합니다. “내가 전체성이거든”
이것, 악마의 사자(使者), 곧 귀신이 말하는 겁니다.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마 8:28-29)
즉 예수님이 아니면 귀신과 (가짜)사람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불신자는 예수님과 상관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이 상관없음의 결과가 십자가 죽음입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배척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배척받으심’이 최종 심판의 확정된 기준이 되어버렸습니다.
즉 예수님은 심판 때 물으십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말입니다. 인간은 마귀의 사주를 받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평가하고 선악 지식으로 관리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17:25에 이와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 17:25)
인간들이 겸손을 가장해서 참된 신을 찾고자 하면서 날리는 멘트가 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께 무엇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찾음이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 세계에 참된 인간을 찾고자 합니다. 선과 악의 지식이 없는 자를 찾고자 하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뭘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친히 주님께서 모든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입장에서 모든 일에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그동안 인간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이유는, 자기 영광성 때문입니다. (요 12:43) 즉 인간은 부분적인 자기 일에 심각합니다.
그러나 그 심각함의 수준이 하나님의 심각함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 때, 전 인류를 싹 쓸어버리고 또 쓸어버려야 하는지 그 심각함에 이르지 못합니다. 인간은 부분에서 전체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전체가 인간에게 찾아들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렇게 되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끔 하십니다.(고전 10:31) 왜냐하면 결국 인간들이 알고 있는 선과 악 지식은 그 자체로 ‘전체 악’으로 규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늘 차원에서의 ‘전체 선,’은 무엇이냐겠지요. 전체 선은 참된 인간이신 예수님에 의해서 성취되었습니다.
모든 율법을 다 이룬 바로 그 의를 예수님께서 달성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전체성이 어떻게 성도 부분에 임하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 세계에서 비웃음과 비웃음의 교차를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심각함을 모조리 비웃습니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시 2:4)
반면에 인간들이 주님에게 일어난 일을 비웃습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포도주를 주며”(눅 23:35-36)
이 비웃음의 함축되어야 비로소 복음다운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이 복음 안에 비로소 ‘전체’가 다 담겨 있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의 새로운 전체성입니다. 희생 피의 효과입니다.
아브라함이나 기생 라합은 이 전체성을 위해 기존의 정치적 전체성을 포기했습니다. 더나아가서 자기에게서 자신의 가치마저 발라내게 되었습니다. 죽은 자에게는 더는 의미가 없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즐겁고 기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주님께서 친히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일상 패턴이 오로지 허무만 양산할 뿐임을 도리어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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