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디도서 1:13-14 / 세례의 세계 본문
세례의 세계
이근호
2023년 9월 24일
본문 말씀: 디도서 1:13-14
(1:13)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1:14)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인간은 사도는 짐승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내부에 하나님과의 연락망이 형성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연락망이란 그저 하나님을 성심성의껏 찾으면 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 바로 종교이며 종교는 최종 ‘유대교’와 ‘그 외의 종교’로 나뉩니다.
‘그 외의 이방종교’의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갖게 됩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입니다. 이 하늘과 땅에서 가장 소중하고 귀하고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나 자신 뿐이다는 겁니다. 스바냐 2:15에 나오는 니느웨 민족의 종교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하며 심중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같이 황무하여 들짐승의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치소하여 손을 흔들리로다”
즉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라는 원칙에서 시작해서 이 원칙을 확답하는 식으로 되돌아오는 교리가 이방종교들의 특징입니다. 그렇다면 유대교는 이런 이방종교와 어떤 차이를 보일까요? 유대교는 ‘나만 절대요 나만 있다’는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일방적으로 나는 최고요 나만 소중하다고 말해도 소용없다. 누가 옆에서 그것을 보증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교는 인간 마음의 심도가 이방종교보다 더 깊게 내려가서 들춥니다. ‘타인이 내가 어떤 자인지를 인정해 줄 때, 그것이 진정 나다’는 겁니다.
유대교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합니다. 그 방법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율법이 있으니 그것을 진정성 마음으로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한다면 그야말로 누가 뭐래도 우리 자신은 하나님 백성이 맞다라’는 겁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내가 하늘나라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방종교나 유대교나 모두 자기에 대한 미련을 포기 못하고 있는 겁니다. 방법이 다릅니다. 이방종교는 스스로 자기 판단에 나서고 유대교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에 의해서 판정받아 보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모두 다 그 하나님이 가짜라면요? 악마의 창안한 신이라면요?
진짜 하나님은 십자가만을 앞장 세워서 찾아오십니다. 기존의 하나님에다 십자가 자신 아들 하나님 사실을 추가시켜 온전한 신에 관한 내용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십자가가 모든 신들이 악마에서 나온 이미지에 불과함을 고발하고 십자가로 떨어냅니다. 유대교에 대한 예수님의 저주가 대단합니다.
마태복음 21:44-46에 보면,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23:27에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그리고 33절에서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유대교는, 인간치고 자기 포기가 불가능함을 몰랐던 겁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인간은 자기를 놓지 않습니다. 자신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배신하는 경우는 낯선 세계가 쳐들어 왔을 때 뿐입니다. 그것이 ‘세례’ 즉 세례란 자아를 제거하는 방식으로서의 환경입니다.
이 환경은 기존 환경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존 환경은 자신들의 운명으로 인하여 애도하고 슬퍼하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 8:19-22)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 세상에서는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디서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걸까요? 그것이 바로 숨어있는 세계가 ‘세례’라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세례는 이 세상 중에 없으면서도 이 세계을 찢고 나타납니다.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막 1:10)
인간들은 대자연이라는 시공간은 결코 찢겨지지 않는 최종 바깥 환경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 밖에 하나님께서 건재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실은 진짜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이 세상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실 예수님의 세계에 있습니다. 세상의 등장은 이 세상의 최종 시공간이 찢김이 동반시킵니다. 그리고 발생된 그 틈으로 숨겨진 세계가 쏟아집니다.
이것이 세례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선지자들이 예언하면서 장차 성도를 겨냥해서 이렇게 이야기입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욜 2:13)
그동안 인간의 마음들은 악마로부터 소송당하며 고소당하며 수배자로 쫓겨다니는 마음이었습니다. 보다 완벽에 완벽을 기하므로서 죽어서 좋은데 갈려고 자기 마음 관리에 애써왔던 겁니다. 하지만 악마의 철저한 추궁 앞에서 인간들은 말씀과 행위에 합치가 맞지 않음이 늘 들통납니다.
세례란 바로 성도가 자기 마음을 자신이 관리할 필요가 없는 환경을 뜻합니다. 따로 마음 관리를 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대신 성도는 자기 선택을 포기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행하시는 선택은 백성 이외의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 방식으로 적용됩니다. 이 말은 곧 나에 대한 나의 선택이 무용지물이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주님으로부터 선택당한 자는 비로소 웃게 됩니다. 주님이 여기 계시니 안 웃을래야 안 웃을 수가 없는 겁니다. 더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관심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관심있습니다. 세상이 이런 맛은 없습니다! 자아 있는 그 마음에 큰 대포 구멍이 뚫여서 바람이 오갈 뿐입니다.
이 세상에 오직 예수님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선택의 효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찢어진 틈만 주의깊게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 > 디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디도서 2:1-5 / 늙음+ 남자 (0) | 2023.10.10 |
---|---|
디도서 1:15-16 / 전체성과 부분 (0) | 2023.10.03 |
디도서 1:12 / 고정성 (0) | 2023.10.03 |
디도서 1:10-11 / 자아 끊어냄 (0) | 2023.09.11 |
디도서 1:5-9 / 움직이는 천국 (0) | 2023.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