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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디도서 1:10-11 / 자아 끊어냄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디도서

디도서 1:10-11 / 자아 끊어냄

정인순 2023. 9. 11. 22:16

 음성 동영상 Youtube

자아 끊어냄 

 

이근호
2023년  9월 10일                

 

본문 말씀: 디도서 1:10-11

(1:10)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1:11)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

할례당에 대해서 사도행전 15:1에 잘 나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이들 할례당의 주장은, ‘할례 받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권한으로 삭제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할례도 받고 안식일도 지키고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여야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고린도전서 15:3-4에 나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구약의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즉 십자가 죽으심 안에는 율법 완성이 다 담겨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진짜 할례는 육신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8-29)

할례란 ‘끊어냄’의 증표입니다. 끊어냄이란 단절됨을 표시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율법 해석은 이러하지를 못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진리를 찾고자하고 얻고자했습니다. 바로 이런 시도를 하면서 인간쪽에서 제안되는 방식들이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금식 같은 경우를 들면 이러합니다.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16-17) 즉 인간들은 율법 속에서 진리를 구현하고자 하면서 덩달아 자신을 의롭게 변모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힘으로 ‘다른 인간’이 될 수가 없습니다. 끝까지 인간은 자기 안에 깊숙한 금고를 하나 만들어놓고서 그 안에 보물로서 자아를 넣어두어 보호하려 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28-309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주를 위해 버렸다’는 베드로에 대항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주님께서는 자기를 끊어내지 않는 식으로는 영생 얻을 수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서 자기를 끊어낼 수가 없습니다. 복음이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유대인들의 신앙입니다. 복음이란 사람들에게 ‘줘 팸을 당한 한 남자가 하나님이시다’는 겁니다. 이 남자로 인하여 성도는 자기 생각을 할 이유가 없게 된 겁니다.

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문제는 이 분을 안다는 것은 필히 인간이 자기를 미워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5)

도대체 인간은 자기를 미워할 수가 없는 겁니다. 자기를 미워하고 끊어내는 것이 마음의 할례요 회개입니다. 자기에게 관심두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바로 이를 위하여 주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이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이 받아들임으로 인간은 자기를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서 직접 나서서 십자가와 부활의 효과로 찾아드시는 겁니다. 인간의 자아는 십자가와 부활로 찾아드신 주님에 의해서 으깨지게 되면 성도가 됩니다. 이게 바로 ‘말씀에 응하게 함이니라’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지상 생애에서 평소에 하나님의 영에 의해 움직였습니다. 그 움직임의 연속은 바로 ‘말씀에 응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요 18:32) 성도는 바로 이 예수님의 모델을 이어받게 됩니다.

말씀에 응하기 위해 성도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먹게 되는 방식이 주어집니다.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계 10:8-11)

즉 성도는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농락당하게 되는 겁니다. 성도는 주님의 장난감입니다. 그렇게 해서 말씀의 효과를 드러내게 됩니다. 그 효과란 성도 본인에게는 주님에 의해서 ‘죄가 기억되지 않게’ 됩니다.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8:12)

‘기억한다’는 것은 계속 자아가 ‘살아있다’가 됩니다. 그러나 진정 살아 있는 것은 악마와 주님 뿐입니다. 인간들의 육신은 일시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몸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0-21)

즉 자아는 더는 자아 걱정을 할 필요도, 이유도 없게 되는 겁니다. 성도가 기억하는 것은 오직 ‘그 남자’ 곧 하나님이 되시는 예수님의 행하심 뿐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오류를 따라 진리에 이르는 겁니다. 그것도 반복적으로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 자신이 세상과 한통속인 것을 비로소 발견하는 즐거움을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