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예레미야 10:11-16 / 비나이다 본문
비나이다
이근호
2023년 8월 20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0:11-16
(10:11)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 하라
(10:12) 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 명철로 하늘들을 펴셨으며
(10:13) 그가 목소리를 발하신즉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나니 그는 땅 끝에서 구름이 오르게 하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하게 하시며 그 곳간에서 바람을 내시거늘
(10:14) 사람마다 우준하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10:15) 그것들은 헛 것이요 망령되이 만든 것인즉 징벌하실 때에 멸망할 것이나
(10:16) 야곱의 분깃은 이같지 아니하시니 그는 만물의 조성자요 이스라엘은 그 산업의 지파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라
하나님에게는 엄연한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 외에 다른 신’에 대해서는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 외의 하나님이나 그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는 사정 봐주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 징벌과 심판에 대해 대자연체가 다 동원됩니다. 대자연이 공연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가차없이 공격합니다. 공격 목표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것은 우상과 그 신봉자입니다. 그렇다면 우상 아닌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야곱의 분깃’으로 나옵니다. 야곱에게 준 것이 있었다는 겁니다. 야곱에게 준 것은 마치 연필의 심처럼 핵심되는 겁니다.
그것만이 우상 아닌 겁니다. 창세기 28:11-13에 보면, “한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창 28:11-13)
즉 많은 천사들이 야곱 본인에게 쏟아지는 것을 보고 야곱은 오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뭘 주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목적으로 뭘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야곱의 자리’에다 퍼부어 주시는 겁니다. 그 야곱의 자리가 유일하게 우상이 아니신 분인 예수님이십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우상 척결에 나서시는 이유는, 인간이 범죄한 후에 자기 중심적으로 신을 찾고 만들기에 나서기 때문입니다. 소위 “비나이다”를 인간들은 멈추지 않습니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하다가 ‘부처님께 비나이다’ 하다가 ‘하나님께 비나이다’ 하다가 요즘은 과학자나 자본가에게 비나이다 합니다.
이 ‘비나이나’에 나서는 자들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일절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라오스의 어느 힌두교 신전에 가면 제단에 돌도 놓여 있고 작대기도 놓여 있습니다. 그 신전에 지붕이 없는 이유는, 신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는데 수월하기 위해서랍니다. 그러니까 신전 내부 인테리아조차 인간에게 먼저 납득이 되는 조건을 갖추게 되는 겁니다.
즉 인간이 신전을 만드는 이유는 아무 데서 신을 만나지 않고 인간쪽에서 정성껏 꾸며놓은 영험한 장소가 신을 만날 확률이 높을 것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이것 역시 인간쪽에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못하는 경우입니다. 힌두교 신전에 돌을 갖다 놓는 이유는, 기도 후에 참으로 신이 자기 기도에 응답했는지 여부를 제단에 놓여 있는 돌을 드는데 성공했는지 여부로 측정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작대기가 놓여 있는 이유는, 기도 응답 위에 자기 팔이 길어졌는지 여부를 작대기로 측정해보라는 취지에서 거기 놔둔 겁니다. 요즘 세대에서 보면, 비웃음거리 밖에 안 되겠지만 그 신전을 찾는 힌두교 신자들에게 마음이 한없이 평온해 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기대한 그런 식의 신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자기 마음에 문제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도 요청에 응답할 줄 아는 그런 신이 참으로 살아있는 신이라고 믿고 싶어합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우상이 아닌 이스라엘에 알려준 하나님의 안목으로 봤을 때, 인간은 어떤 점에서 문제가 큰 겁니까? 그것은 범죄한 이후의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인 겁니다.
즉 이 세상에는 천사와 짐승, 그 사이에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의 자리는 그대로 비어있습니다. 이 비어있는 인간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참된 인간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디모데전서 2:5에 보면, 참으로 깔끔한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이 대목에서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의 뜻은 예수님의 본질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겁니다. 그렇게 해서 소위 인간들이라는 작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제대로 인정받을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여 ‘비나이다’라고 할 수 있는 자격 자체가 못됩니다. 그들이 찾는 것들은 모조리 우상인 이유는, 우상이 아닌 참된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죽었다’는 말은 ‘없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은 ‘없는 하나님’ 모습으로 살아계시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들은 거짓된 예수님에 향하여 기도하고 있었던 겁니다.
자신의 아쉬운 것과 자신이 필요한 것, 자신이 원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꼭 들어주셔야 한다고 고집부리게 됩니다. 인간의 자리에 들어설 자격도 못되는 자들이 예수님에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달라는 식으로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시는 언약의 말씀은, 그 언약 받은 자로 하여금 자신의 자리가 없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십니다.
즉 자신의 자리들은 빈 자리가 되는 식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활동을 해오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어집니다. 에베소서 2:20-22에 보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세상에서 핍박을 많이 받았지만 성령님께서는 핍박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 보시기에 건축 자재에 불과합니다. 누가 불러 주지 아니하면 그 자체로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었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첫 번째 돌이라는 겁니다.
바로 이 돌과 동일하게 이 세상에서 버림받는 자들이 성전의 건축 자재가 되어 하나님께 친히 거하는 성전을 이룹니다. 사람들이 신을 붙잡기 위해 만든 건물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사람을 붙잡아 두는 성전이 되기 위해 성령에 의해서 부름받은 바로 그들이 유일하게 우상숭배자가 아닌 겁니다. 왜냐하면 이들만이 십자가를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으로 인해 매사에 십자가를 가리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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