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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예레미야 10:6-10 / 구멍 난 하나님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예레미야 10:6-10 / 구멍 난 하나님

정인순 2023. 9. 12. 09:46

음성 동영상 Youtube

 

구멍 난 하나님 

 

이근호
2023년 8월 1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0:6-10

(10:6) 여호와여 주와 같은 자 없나이다 주는 크시니 주의 이름이 그 권능으로 인하여 크시니이다

(10:7) 열방의 왕이시여 주를 경외치 아니할 자가 누구리이까 이는 주께 당연한 일이라 열방의 지혜로운 자들과 왕족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음이니이다

(10:8) 그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니 우상의 도는 나무뿐이라

(10:9) 다시스에서 가져온 은박과 우바스에서 가져온 금으로 꾸미되 공장과 장색의 손으로 만들었고 청색 자색 감으로 그 옷을 삼았나니 이는 공교한 사람의 만든 것이어니와

(10:10)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열방이 능히 당치 못하느니라

신과 신을 비교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 같습니다. 왜냐하면 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모든 것을 아우려는 총체성의 표현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신을 묘사하는 재료가 뭐가 되었던 신의 개념을 재료로서 마감하는 방식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너희 이스라엘은 모든 것을 아우려는 신을 믿는구나 우리는 그저 나무나 돌만 믿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재료가 뭐가 되었든, 그리고 재료가 있던 상관없이 그들은 자신들의 인생길에 도움이 되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인간의 행함은 자기에게 보탬이 되지 않는 한 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여타의 이방민족의 하나님과 다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즉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인간들은 흔쾌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진노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쪽으로 익히 인간에 대해서 알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은 이 대자연의 풀기 위해서 신을 섬기기에 일부로 진노를 더 보탤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겁니다. 바로 이게 인간쪽의 문제점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누군지를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신을 찾습니다. 진짜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감잡지 못한 채, 그냥 자신의 평온과 행복한 삶을 위해 신을 찾습니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과연 인간이 신을 찾을 권한이 있는지를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이방민족의 신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 이방민족의 신은 그냥 사물체에 불과합니다. 영험한 신의 효력이 나올 리가 없는데 그것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금속체나 나무나 돌’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신을 만들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이방민족이 신을 섬긴다는 것은 곧 돌이나 나무나 금속체에 자신의 마음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왜 신을 섬기는가 하면, 그것은 “내 마음이다”고 답변할 것입니다. 즉 내 마음이 신을 찾기에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열 명이 믿는 신은 열 가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간들의 마음이 하나로 합쳐서 믿는 신이 아니기에 한결같이 오직 하나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십니다. 곧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하나님입니다. 즉 친히 백성을 모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일체 인간이 기대하는 신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예가 사무엘상 8:6-8에 나옵니다.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친히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겠다고 사무엘에게 요구합니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께서도 친히 개입하십니다. 즉 인간들에 의해서 세우겠다는 왕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이스라엘의 왕 개념’과 합치될 수 없다는 겁니다. 도리어 하나님 왕되심을 거부하는 태도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통해서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하나님은 백성들을 따로 형성시켜 나가시는 분이라는 점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의해서 제시된 이스라엘의 왕을 통해서 제대로 하나님이 왕되심을 드러내신다는 계획입니다. 그 왕이 어떤 왕이며 누구일까요? 과연 이스라엘 백성이 그분을 왕으로 받아들일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왕되심을 반영하는 왕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취지에 따라 그분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즉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리어 버림받으셨습니다. 이런 점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인정하는 여호와에게서 나오는 진노하심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는 유대교 사회나 그들이 믿는 여호와 인식에는 가운데 결함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인간들 생각에 온전한 하나님이야말로 참으로 참된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타락하고 난 뒤에 선악체계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온전한 선으로만 가득차 있는 것이 곧 온전한 신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 온전한 신으로부터 주어진 율법과 말씀을 가지고 자신들도 하자 없는 온전한 자되기를 시도했습니다. 즉 악을 버리고 선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염원하는 선한 하나님과 합치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들에게 나타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리어 버림받은 분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선악체계 한 가운데 구멍을 내시려는 겁니다. 선이든 악이든 그 한 가운데서 구멍을 마저 메울 수 없는 체제를 갖추게 하는 겁니다. 곧 선악체계의 작동이 고장나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 방법 중의 하나가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문둥병자를 고쳐주시는 대목입니다.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마 8:2-4)

선악체계 한 가운데 저주의 자리를 마련하는 겁니다. 그 누구도 그 자리에 들어오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저주받은 문둥병자는 예수님에 의해서 그 저주의 자리에서 만나게 됩니다. 선악체계가 전혀 무관한 사랑의 체계를 만나게 됩니다. 그 원리는 이러합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

저주를 대신 담당하시므로서 비로소 인간들이 미처 생각 못한 사랑과 은혜와 생명이 주어지게 됩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새로운 백성들의 왕이 등장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자리가 미움의 자리가 아니라 사랑의 자리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