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디도서 1:1-4 / 목숨과 생명 / 우리교회 오전 예배(2023) 본문
목숨과 생명
2023년 8월 27일
본문 말씀: 디도서 1:1-4
(1: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1:2)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1:3)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1:4)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사도는 지금 의연함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삽니다. 곧 이 세상을 떠난 영생의 나라로 옮겨가는 것을 무한한 기쁨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영생이란 것이 인간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획득하면서 태어났기에 자신이 가진 것으로 살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하지만 이 마음은 실은 악마의 협박에 속아 넘어간 결과입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 2:14-15)
목숨 붙드는 방식으로 줄곧 평생을 살아가기에 생명에 대해서 단호하게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원래 인간들이 선악을 아는 과일을 따먹고 하나님쪽에서 조치를 취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창 3:22)
인간의 목숨을 버리라고 있는 겁니다. 털어버려야 합니다. 영생은 그 목숨을 털어버려야 될 쓰레기 통과 같은 겁니다. 비워있습니다. 인간들이 가질 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영생이 인간이 새삼스럽게 가질 그 어떤 것이 아니기에 어느 누구도 영생을 안 가질려고 합니다. 결국 인간에게는 영생이 못합니다. 인간쪽에서 거부하니까요.
예수님께서는 영생이 다음과 같이 찾아오신다고 합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1-54)
즉 영생은 너무나도 폭력적입니다. 너무나도 파괴적입니다. 목숨을 지키려는 인간에게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기존 목숨까지 뺏아가는 것이 영생입니다. 이 폭력은 구약에서도 나옵니다. 열왕기하 6장과 7장에서 북이스라엘은 아람나라에게 포위당합니다. 사마리아성 안에서는 양식이 떨어져 아비규환입니다.
아이들의 고기를 먹어가면서 버텨야하는데 막상 자기 아이를 내놓을 날이 오자 차마 내 아이를 이웃의 식량으로 내놓을 수없다고 버팁니다. 이것은 바라보는 여호람 왕은 이런 사태를 모두 하나님 탓으로 돌립니다. 선지자 엘리사가 있어도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고 말합니다. 선지자를 꼭 죽여버리겠다고 나옵니다.
선지자 엘리사는, 내일되면 성 안에 양식이 넉넉하다고 예언합니다. 이것을 부정한 장군에 대해서는 “너는 양식도 먹지 못하고 밟힐 뿐이다”고 예언합니다. 그 다음이 되자, 성 안에 있던 네 명의 문둥병자들이 이판사판이라는 식으로 성 밖에 나가봅니다. 아람나라 사람들은 많은 양식과 의복들과 귀중품들을 그대로 놔두고 다 사라졌습니다.
문둥병자들은 이 기쁜 소식을 성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줍니다. 즉 생명이란 이처럼 인간들의 평소의, 생활 방식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 형식으로 주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광야에 나설 때에 그들에게 허락된 것은 ‘일용할 양식’, 즉 하루치 양식입니다. 인간들이 기대하는 모든 시간적 희망을 하루 단위를 끊어버리시는 겁니다.
그 이유는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께서 그 자체가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하루만이라도 영생을 누리는데 전혀 지장없을 정도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생의 반대말은 시간입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는 그동안 인간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설정된 삶의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은 목숨 연장이 아니라 영생입니다.
그렇다면 영생은 어떻게 주어지는 것일까요? 영생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자에게만 돌아갑니다. “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살후 3:2) 이는 영생을 인위적인 시도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영생이 주어지는 사람은 어떤 경로로서 전달될까요?
레위기 17장에서 보면 ‘피’이야기가 나옵니다. 인간에게 율법을 입혀서 짜버리면 인간은 피가 됩니다. 그런데 이 피는 더러운 피입니다. 하나님이 사시는 약속의 땅을 더럽혀서는 아니됩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은 이스라엘의 육신을 제사 지내는 제단, 그 한 곳으로 집결시킵니다. 제단으로 나오는 자는 자기 대신해서 양을 잡든지 제물을 갖고 나와야 합니다.
당연히 양의 피를 흘립니다. 그리고 그 제물의 몸체는 제단 위에서 맹렬한 심판의 불로 인해 다 타버리게 됩니다. 이 제물은 율법에 의해서 피를 흘리는 제물이기에 이 안에 율법의 완성이 담겨 있습니다. 즉 율법 완성에 의한 피는 더러운 피가 아니라 의로운 피가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부활 때까지 3일의 간격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성령께서 개입하십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성령님께 목숨 바치고 수동적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호세아 6:2의 말씀으로 죽으신 예수님은 삼일 만에 살리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호 6:2)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시 51:16) 하지만 그 상한 심령은 하나님의 마음인 성령님에 의해서 새롭게 들어오게 됩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1-12)
이로서 성도의 자아는 구멍이 뚫렸고 그 구멍 사이로 성령님으로 채워졌기에 비로소 성도는 자기 목숨을 위해 살아온 모든 얼마나 큰 죄인인 것을 압니다. 이것이 이미 시작된 천국이요 영생생활입니다. 이 영생생활에서는 더는 악마의 그 어떤 고발도 씨도 먹히지 않게 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8-19)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영생이고 믿음이고 소망이고 사랑도 내가 관리하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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