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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학개 2:20-23 / 스룹바벨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학개

학개 2:20-23 / 스룹바벨

정인순 2023. 7. 13. 14:49

 음성 동영상 Youtube

스룹바벨

 

이근호

 

2023년 7월 12일                  본문 말씀: 학개 2:20-23

(2:20) 그 달 이십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2:21)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2:22) 열국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열방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뜨리리니 말과 그 탄 자가 각각 그 동무의 칼에 엎드러지리라

(2:23)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스룹바벨’이라는 말은 ‘바벨론에서 태어난 자’라는 뜻입니다. ‘바벨론의 후손’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바벨론이라는 이스라엘의 마지막마저 삼켜버린 이방민족입니다. 바벨론의 현존은 곧 이 지상에서 ‘이스라엘은 없다’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이 지상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더 이상 이스라엘을 찾고자 하면 안됩니다. 이스라엘에 기대걸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영구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이방민족 속으로 들어가서 없어진 겁니다. ‘이스라엘이 사라졌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고대하고 기대하고 계산했던 모든 것들이 다 소멸되었다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이 고대하는 메시야는 더는 없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을 없애버리신 겁니다. 따라서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들어야 될 말은, 왜 이스라엘이 망했는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새롭게 알려주시려고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셨는가입니다.

이스라엘이 알던 하나님과 하나님이 알고 계시던 이스라엘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동안 이스라엘이 철저하게 오해한 겁니다. 출애굽기 23:14-17에는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 일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 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가정의 가장들과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는 현장에서는 제사장들이 있어 각 가정의 남자들에게 율법을 가르칩니다. 그렇게 해서 그 가장들이 자신의 가정으로 돌아가면 자기 가족들에게 자신이 배웠던 율법을 가르킵니다. 그런데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스라엘이 뭘 오해했단 말입니까?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율법이 주어진 그것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망하지 않게 해줄거라고 오해한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을 지목하는 병행해서 하늘과 땅을 ‘진동’ 시키신다고 하셨습니다. 처음 대규모 진동은 노아 홍수 때입니다. 진동한다는 것은 거기에 사는 모든 것들을 망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인간들은 자신이 어떻게하든 안 망하는 식으로 세상 안에 버티면서 살아갑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땅과 하늘을 마구 흔들어 버리시겠다는 겁니다. 왜요? 왜 그렇게 인간들을 못살게 구시는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따로 ‘진동치 않는 나라’를 마련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나라가 ‘영구히 진동치 않는 나라’일 거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의 문제는 자신들을 굳게 믿는다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훼방한다는 점을 알지 못한 겁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7:6에 나오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지는 경우는 인간이 알고 있는 체험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받아들여줄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인간은 자신이 굳게 믿어야 될 것과 안 믿어야 될 것을 정하고 살아오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자신의 결정에 대해 인간은 철석같이 자신을 믿습니다.

과연 이런 태도를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 앞에서 통할까요? 어림도 없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바는, 인간이 자신과 헤어지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내용들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낼 수가 없는 겁니다.

즉 율법 앞에서 인간은 자신을 죽여달라고 할 수가 없는 존재로 발각되는 겁니다. 그 증거가 스룹바벨입니다. 스룹바벨은 마태복음 1:12에서 분명히 ‘다윗의 혈통적 후손’입니다. 하지만 그는 바벨론에서 태어난 자입니다. 이스라엘이 사라지고 난 뒤, 더는 이스라엘이 자기 나라에 그 어떤 기대를 가질 수가 없는 지경에서 출현된 메시야입니다.

역사적으로 덮혀있는 이스라엘이 벗겨지면서 비로소 등장된 이스라엘의 완성시킬 ‘약속의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왕’입니다. 화투치기에서 ‘밑장 빼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방해하고 있으니 하나님 입장에서 그 인간을 죽여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원해 준비해둔 이스라엘이 등장하는 겁니다.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헤어지게 하십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실망케 하십니다. 더는 자기를 지킬 가치나 의미가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처럼 율법 자체가 인간의 힘으로 해내지 못하는 것을 ‘죽임을 통해 자유’를 얻는 방식에 도입된다는 겁니다. 이 내용이 신약 성경에 나옵니다.

로마서 7:1-3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자기가 주관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율법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는 율법의 정수를 드러내기 위해 남녀가 혼인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남편에게 매이지 않는 여자’는 율법에 의하면 ‘남편의 죽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을 율법에 의해서 ‘자유’가 어떻게 성립되는지를 보이는 겁니다. 로마서 7:4에 율법의 진수가 나옵니다. 즉 율법이 인간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한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자기를 부인할 수가 없는 무능력자인 겁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성도가 자유가 된 조건이 나옵니다. ‘나의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겁니다. 남편 죽은 후 여자가 자유를 얻은 것처럼,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된 경우에만 인간은 자유를 얻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에 죽는 방식’은 인간의 자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한 몸이 되는 조건 하에 ‘그리스도께서 죽음’이 일어나는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즉 ‘그리스도 몸’이 되는 경우가 되면 이미 그 사람은 죽은 자에 해당됩니다. 평소 나에게 깔려있던 나를 위에 있는 나를 죽여서 빼내어주십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스룹바벨의 기능이 적용되는 겁니다. 내가 나를 지켜보려고 하는 것은 이 진동하는 하늘과 땅에서 같이 진동해서 파괴되어야 마땅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는 나를 믿도록 나를 지키려는 그 의도를 날마다 무산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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