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학개 2:6-9 / 진동 본문
진동
이근호
2023년 6월 21일
본문 말씀: 학개 2:6-9
(2:6)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2:7)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2: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2:9)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성전과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절차를 선지자를 통해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진동→메시야 오심→성전을 영광으로 가득 채우심→모든 것을 평화로 마무리 지우심’입니다. 이 절차를 위해 학대 당시의 사람들은 부지런히 성전을 지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전을 지은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인간들이 애써 지운 성전을 하나님께서 친히 뭉개버리시기 때문입니다. 즉 소멸되기 위해서 성전을 지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 절차를 위해서입니다. 그 다음 절차란 ‘이전부터 더 큰 영광’으로 가득 찰 성전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들 입장에서 ‘초라한 성전 짓기’라는 소용없는 일을 굳이 할 게 아니라 그 최후의 성전이 일방적으로 오면 되지 않느냐 라는 것이 생각이 들겁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근원적인 오해가 있습니다. 성전이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하는 공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이 바로 인간들이 이해하는 그 인간이 아니라는 점을 인간들은 알지 못하고 있는 처지에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가장 고상하고 거룩한 성스러운 공간에 놓이기를 원합니다. 40일간 노아 홍수로 인해 이미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토대 자체를 흔들어놓으신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그런 거룩한 공간이 사는 것이 마땅한 것처럼 여깁니다. 자신이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는 전혀 모릅니다. 하지만 내부적인 본능상 자신을 결코 더럽고 나쁜 환경에서 지낼 사람이 아니라고 자부하고 싶어지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적 본심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다 이 종교심은 근원적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 종교심의 끝이 어떻게 끝나는지를 알리주는 역할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만 성전을 지어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자기 뒤의 왕이 지을 성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자재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금 십만 달란트와 은 일백만 달란트와 놋과 철을 그 중수를 셀 수 없을만큼 심히 많이 예비하였고 또 재목과 돌을 예비하였으나 너는 더할 것이며”(대하 22:14)
금 10만 달란트는 2,4000톤입니다. 엄창난 양입니다. 이런 성전 재료를 준비하면서 다윗은 하나님과 같이 하나님에게 감사합니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려고 미리 저축한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대상 29:12-16)
그러나 다윗은 몰랐습니다. 인간의 눈에 뜨이는 건축구조물로서의 성전은 장차 오실 더 큰 영광을 품을 수 있는 성전을 위해 무너져야 할 성전인 것을 말입니다. 성전이 제대로 될 성전이 되려면 성전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 손으로 만든 솔로몬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처럼 덮힌 것이 그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의 최종 완성이라고 여겼습니다.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왕상 8:10-11) 하지만 그 최종적 영광을 솔로몬 건축물도 감히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솔로몬 성전같은 건축물이 자신과 더불어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세계가 추구하고 최고의 종교적 염원, 즉 자신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공간 추구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독생자의 영광’을 품고 오신 분에 대한 이스라엘의 종교가 본심을 드러내게 했습니다. 마태복음 12:6에는 “성전보다 더 큰 이”께서 최종 영광을 품고 오시게 되어 있다고 하십니다.
즉 성전이 인물로 바뀌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바뀐 성전에 대해서 이스라엘 종교는 가차없이 차버렸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4-8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즉 예수님께서는 모든 세상을 흔들어놓은 유일한 진동의 출력지요 본인만이 흔들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감당할 수 있는 성전이 실제로 인물로 왔으나 사람들은 그분을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됩니다. 그 버려진 그 돌이 새 성전이요 최종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어 버린 겁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엡 2:20-21)
인간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다 없어져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버리신 돌이신 예수님께서 들어와 버리면 그 사람은 비로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천국 백성이 됩니다. 버려진 돌이 들어왔는지 아니 왔는지 어떻게 알까요? 그것은 자신의 일상의 모든 행위 매일같이 내부에 심겨진 ‘버려진 돌’, 곧 십자가로 소환되어 그 행함이 부정당하게 된다는 성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된 성전 되시는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바로 이런 분을 모시고 있는 자가 곧 하나님의 최종 영광 속에 사는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바탕이 매일같이 십자가로 인하여 진동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정대은
하나님의 말씀 보겠습니다. 하나님 말씀 학개 2장 6절에서 9절입니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만군의 여호와, 만군의 여호와는 전쟁을 시행하시고 승리로 마감하시는 그 여호와의 활동을 이야기 합니다. 근데 그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끄집어내면서 어떤 절차와 순서같은 것을 일렬로 짓고 있습니다. “나는 이런 일을 하고 그다음에 이런 일을 하고 그다음에 이런 일을 하고 그다음에 이런 일을 한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계속해서 관여하고 주도적으로 그걸 진척시킨다.” 라는 말씀으로 돼 있습니다.
제일 먼저 한 것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만군의 여호와가 하시는 것은 세상을 진동시킨다, 흔든다, 요동시킨다. 그다음에 두 번째, 이 만국을 진동시키는 그 출력을 하는, 진동이 나오는 그 출력자, 만국의 보배가 이르게 될 것이다.
세 번째가 이전 지금의 성전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지은 성전 보다 그 영광보다 나중 영광이 훨씬 클 것이다.
네 번째, 마지막으로 그렇게 성전이 큰 영광을 차지하고 난 뒤에는 마지막 만군의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은 모든 것이 일이 완료가 되어서 마감이 되면서 전쟁 후에 평화가 찾아오는 것처럼 평강이 찾아온다. 그렇게 주께서 하는 자기 스케줄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스케줄을 누구한테 하느냐하면 지금 성전을 만들라고 촉구하는 여호수아와 스룹바벨과 그 제사장들에게 방금 이 절차를 이야기 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이걸 들었던 그 스룹바벨과 그 시대의 사람들은,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이 그 절차 가운데서 어느 대목에 해당되는 가를 딱 집어서 간파가 되어야 돼요. 어느 대목이냐 하면 “너희들이 짓는 성전 내가 속히 부셔줄게. 무너지게 해 줄게.” 그것을 주께서는 말씀으로 격려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지으라고 힘있게 성전 지으라 해놓고 “열심히 지으라. 내가 속히 무너뜨릴게.” 그 절차와 지금 하시는 앞에 있는 성전 지으라는 것과 연결 시키면 그런 결론이 나옵니다. “무너지기 위한 성전을 니가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성전지어라. 짓는 것은 너희가 짓고 무너뜨리는건 내가 무너뜨린다.” 그런 말씀 하실 때 사람들이 굉장히 섭섭해 하겠죠. ‘아 주님이 하시는 말씀의 취지가 이런 취지구나. 그런데 무너질걸 왜 열심히 지어라 했을까?’
그것이 어느대목이냐 하면은 바로 이전에 세번째 하실일. 이전의 영광,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더 크다라는 것을 그 크다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뭔가 성전이 뭔가 있어야 되잖아요. 있어지면서 그 초라한 그게, “나중에 성전의 영광이 크다” 라는 말은 “지금 니가 짓고 있는 성전의 영광은 나중의 영광에 비하면 영광도 아니다. 궁색하다. 초라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변변치 않은, 어설프기 짝이 없는 영광이에요. 그 어설프기 짝이 없는 그런 영광에 성전을 너희들이 지으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중 영광, 나중 영광이 더 크다고 했을 때 하나님은 지금 짓고 있는 그 성전, 이걸 스룹바벨 성전이라 합니다, 총독 스룹바벨에 의한 성전보다 나중에 온 보배 되신 그리스도가 오셔서 짓는 성전이 더 크다 라고 이야기 할 때에 그 당시 사람들은 비교 대상이 되는 성전은요 나중에 온 성전은 그들은 모르기 때문에 무엇과 비교가 되느냐 하면 이전에 괜찮았던 대단했던 성전과 비교를 할거다 이 말이죠.
그 이전에 처음 지었던 성전이 솔로몬 성전이었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솔로몬 성전때는 금으로 은으로 멋지게 지었고 대단하게 지었는데 지금 그들에게는 지금 스룹바벨 성전은요 금도없고 은도없어요. “근처에 나무 베다가 나무 가지고 목조성전 만들어라”고 이렇게 한거에요. 금도없고 은도없고 금, 은 영광도 없고 그냥 나무 가지고 만들어라. 초라하기 짝이 없는 성전을 만들라 한거죠.
그래서 그 당시 성전 짓는 사람들이 실망을 했어요. “옛날에 금도 있었고 은도 있었는데 이게 뭐야? 지금이게 이것도 하꼬방 같은 이것도 성전이야?” 이전에 있는 성전보다 지금이 초라함을 만끽하면서 서글프기 짝이없죠. 그 이야기는 슬픈 성전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그들이 그 거대한 화려했던 성전을 그들이 망쳤고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비교하는 것이 금과 은으로 만든 그 성전을 자꾸 미련 갖고 기대를 거니깐 오늘 본문에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8절에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라.” 이렇게 돼 있어요.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라...”
“전에 솔로몬 성전 지을 때 금, 은 들어가니까 좋았지? 그때 그 금은 누구 것이냐? 뭐 다윗 거라고? 솔로몬 거라고? 아니야 내 것이야. 괜찮았던 멋있었던 대단했던 그 영광스러운 솔로몬 성전도 그것 내가 지었어.” 하나님이 지은 거에요. 전에 있던 멋있는 성전을 지었던 하나님이 약속하기를 “지금의 행색이 초라한 성전보다 더 큰 영광을 내가 장담하건데 내가 더 큰 영광으로 지어줄게”라고 하신 거에요. “그러니까 그전 성전보다 못하다고 너무 실망 하지마.” 이런 뜻입니다.
역대상 22장 14절에 보면 다윗이 성전 지으면서 자기는 성전 짓지 않고 자기 차기왕 솔로몬에게 성전 짓기를 부탁하면서 준비한게 있습니다. 그 준비한 것이 14절에 보면 “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금 십만 달란트”를 준비했어요. 10만 달란트가 금 3만 4천 톤입니다. 3만 4천톤...
그렇게 준비해서 지은 성전에 열왕기상 8장 10절에서 11절에 보면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기 이제 신기한 것 들어갑니다.
뭐가 신기하냐 하면 성전은 어떻게든 다윗이 금, 은 준비해 가지고 준비해서 성전을 지었습니다. 성전을 준비했고 성전을 짓는 것은 일꾼들 필요하고 거기에 기술자 필요하고 목재는 레바논에서 최고급 백향목 수입돼서 수입 목재가 들어왔어요. 우리나라 최고로 쳐주는 목재는 취향목 해가지고 우리 할아버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바람에 의하면 취향목 이에요. 어릴 때 우리집엔 취향목 취향목 해가지고 취향목이 뭔가? 나중에 알고보니까 ‘춘양목’ ‘봉화 춘향 소나무’가 최고에요. 이렇게 된거에요.
레바논 백향목이 최고였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사람들은 다윗이 준비했다고 이야기 했거든요. 그런데 역대상 29장 9절에서 16절에 보면 아주 깁니다만 핵심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다윗이 성전 준비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이런 기도를 합니다. 11절에 보면 “천지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의 것입니다.” 12절에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13절에,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 감사하오며” 14절에,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으로 받은 것인 즉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14절 다시 한번 읽어야 돼요.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께 손으로 받은 것” 금이든 은이든 간에 “주께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그럼 우리는? 15절에 “우리는 주님 앞에 나그네고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이렇게 돼있어요.
여러분들이 14절 15절 16절 요 말씀을 여러분 실감나려 한다면, 실감을 느끼고 싶거든 성전 건축을 앞두고 부흥회 열리는 그 부흥회 집회에 한번 찾아가 보세요. 마지막 돈 내는 타이밍, 목요일 저녁입니다. 목요일 저녁에 그때 목돈 나와야 돼요. 손들 사람 2천만원 할 사람 이렇게 경매 붙이는 그 대목에서 필히 등장하는 대목이 역대상 29장 14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받은 것이 다 주께로 왔사오니 우리가 그냥 억지로?
“No.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마음이 생겨서 드리면서 우리는 주께 손으로 받은 것을 도로 주께 받칠 뿐입니다. 우리는 나그네 같지만 우리 자자손손 신앙적 교육을 위해서 하나님을 전파하기 위해서 이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는데 우리가 참여하게된 이 자체가 너무너무 영광스럽습니다.” 라고 다윗이 그런 믿음을 가지고 고백했는데... 여러분, 여러분들은 다윗과 같은 신앙을 갖고 있습니까? 갑자기 부흥회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갑자기... 우리 예배당 지을일 있어요?
16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그 전을 건축하려고 미리 저축한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으로 왔사오니 주의 것입니다” 라고 돼 있어요. 돈은 내기 싫고 또 부흥사한테 속아 넘어가기 싫고 부흥사하는 성경 본문에 반박을 해야될건데 반박할게 없네요. 역대상 29장 14절에서 16절. 도저히 그 현장에 오고난 뒤에 만약에 건축헌금 안내면 이건 졸지에 다윗이 믿는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을 믿는 우상섬기는 자로 전락 될 판이 올 때 어쩔 수 없이 지금은 돈 없으니까 적금 타고 드리겠습니다 하고 미리 손들고 계약하고. “2천 여기있습니다.” “3천 여기있습니다.” 이렇게 되는거에요.
자 뭐가 문제냐 하면, 문제는 딱 하나에요. 그 성전, 다윗이 기도한 성전 망했습니다. 망했어요.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어디로 이끄는 어떤 성전을 말하고 있는지를 다윗은 자기 시대에 국한했기 때문에 한계를 갖고 있었어요. 궁극적으로 만군의 하나님께서 그 다윗 시대 이후의 절차에 대해서는 다윗에게는 아무 언질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성전 짓는 인간의 손으로 준비할 수 있는 목재와 금, 은 수집하는 것 그런 역할만 했을 뿐이죠. 그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룹바벨 성전하고 똑같은 거에요. 너희들이 힘써서 근처에 나무해다가 성전 초라하거나 말거나 성전 지어라. 그다음 절차. 내가 꼭 무너뜨릴게. 꼭 내 다 부셔줄게. 너희들은 힘써 노력했냐? 내가 다 짓밟아 줄게. 왜 부흥사가 그다음 이야기를 왜 학개 그다음 이야기를 왜 안 합니까? 물론 교인들은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모르죠. 뭐 그들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죠.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걸 알아야 돼요. 왜 자근자근 성전이란 성전은 모조리 다 밟느냐 이 말이죠.
놀라운 사실은 그 솔로몬 성전에서 구름이 나면서 제사장들이 감히 들어가지를 못하고 머물러 설 정도로 하늘에 마치 구름이 안개 같은 하늘의 영광이 가득 찼다는 거에요. 여기서 신기한게 어떻게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과 인간의 손 때가 묻은 그 성전과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원활하게 아무 충돌 없이 이게 연계가 될 수 있느냐? 연결 될 수 있느냐?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지요. 하나님의 성전에 있던 영광이 성전 자체를 뭉게버린다는 사실... 이스라엘사람들은 오해했어요. 성전이 있음으로써 ‘그 성전에 있는 우리 이스라엘 성전을 건립한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말은 우리를 지켜 주겠지 라고’ 오해했습니다. 지켜주는게 아니고 새로운 더 큰 영광의 성전을 위하여 인간 손이 묻었던 가짜는 아니지만 주께서 지시해서 만든 성전은 하나님 자체 내에서 성전 교체작업이 있다는 사실을 그 당시 솔로몬 사람들은 몰랐던 거에요.
성전 교체 작업은 무엇을 뜻하느냐?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아담의 몸을 태어난 이 아담의 몸이 장차 그리스도 몸으로 교체하는 징조로서 징후로서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신체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어요. 그러니까 이게 아까 그 “성전 짓고 뭉게줄게” 라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내가 너를 이 땅에 출생하게 했거든 걱정하지마 내 속히 죽여 줄게” 똑같은 말이에요.
뭐 6월달 생일 된 사람 있습니까? 아 그래요? 집사님 6월달 생일... 6월 12일. 녹취 다 됩니다 이것. 태어나는 것은 밟아주기위해서 태어나게 한 거에요. 니가 너를 위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너를 죽여주시는 주님의 뜻 때문에 이 땅에 태어나야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반발이 심하죠. “왜 태어날 때는 왜 태어나고 죽이기는 왜 죽이십니까?” 주께서는 그다음 절차입니다.
학개에 보면 만군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처음에 내 하나님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 시키죠. 주께서 모든 것을 진동시킵니다. 만국을 진동시켜요. 모든 인간이 살고 있는 이 땅 자체를 진동시켜요.
애들이 장난감 가지고 놀 때 부모가 애들 다치지 마라고 요에다가 장난감 얹고 하잖아요. 근데 갑자기 귀한 손님이 들이닥친다. 뭐 귀한손님 누구겠어요 사돈이죠. 귀한 손님 온다. 지금 문앞에 곧 왔다. 청소 빨리 해야되죠. 애들은 지금 요 위에서 장난감 갖고 까르륵 웃고 있는 요 자체를 진동시켜버리죠. 요 자체를 진동시켜버리면 요 위에서 아주 아름답고 정성 들여서 고이고이 했던 여러 가지의 장난감 가건물들이 졸지에 같이 요동해서 다 날아가버리죠.
무슨말이냐 하면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작업에 나서느냐하면 이 땅이 영원하고 단단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내가 평생 나는 내가 잘났고 훌륭하고 살만한 가치 있다 는 그 토대, 그 근거 정당한 근거를 그것을 모으고 모으고 그게 나의 토대로 다지고 다져져서 이 땅위에 그렇게 하는거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바다와 땅을 그냥 흔들어버려요. 진동한다고요.
“옛날에 나도 그랬잖아.” 옛날에 창세기 7장에 11절 12절에 보면, “노아가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 2월 17일입니다.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고” 밑바닥에 토대에 있던 샘들이 터지고 “하늘의 창들이 열려서 사십 주야를 비를 내려서 쏟아졌다.” 사십 주야... 비가 쉬지도 않고 폭우가 쏟아져버렸어요. 위에만 내린게 아니고 밑에 또 샘들이 터지고... 흔들깁니다.
사람들은 그 땅에서 뭘 했느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마지막에 중요한 것. 집짓고... 사람들이 집을 왜 짓느냐 하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자리 잡기 내 존재의 자리 잡기, 터 잡기에요. 자식 키워놓고 독립할 때 부모가 신경쓰고 애들이 제일 신경쓰는 것은, 내가 내 몸 하나 누일 곳. 내 몸 누일 곳을 제일 장만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에요. 근데 인자는 뭐라했습니까?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온 말씀이죠.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다.” “나는 여기 머리 안 둔다.”
터를 잡아야 그다음부터 그걸 본부로 잡아가지고 뭔가 살 궁리를 할 게 아닙니까? 무슨 터가 있어야 되죠. 뭐 전세라도 했는데 전세 홀라당 다 날리면... “내 인생 자체가 사기꾼 배 위에다가 터를 잡았어. 사기꾼이 꿀떡해버렸어. 내 터가 날라가버려... 내 터가...” 자살하고 난리가 아니죠.
주께서 진동한다는 것은 땅에서 우리가 기거할 어떤 명분도 없고 자격도 없다는 거에요. 땅은 애초부터 해리되고 무너지고 부서지고 깨지고 불타버릴 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로 인하여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뭐냐하면, 거기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자기의 생계에 관한 활동을 했어요. 활동 할 때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내가 지금 땅위에 나는 있다.” I’m here. 나는 여기에 있다가 돼요. 그러나 하나님은 “너는 없다”가 돼요. 살아도 요동치면 너는 있다가 아니라 없는게 돼요. 요 위에 어린아이들 장난감으로 정성들여서 한 두 시간 동안 장난감 결과물이 있더라도 요 흔들어버리면 그거는 없는거에요.
거기서 애들 장난친 거였습니다. 애들 장난친 거에요. 인생은 애들 장난친 것 같은거에요. 자 그러면 이제 우리가 남아있는 것은 뭐냐하면, 왜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주께서 그렇게 심술이 많은 분인가? 왜자꾸 우리를 못살게 흔들어 버리려는 계획을 갖고 계신가? 그것은 이런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너희들이 감당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는거에요. 너희들이 구축해놓은 그 토대가, 그 원천이 하나님이 주신 영광을 감당을 못해요. 하나님이 주신 영광을 감당을 못하면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편하게 따로 살도록 그렇게 인간을 만든게 아니에요. 하나님과 함께 못살면 그들은 심판 받아야 되고 저주 받아야 돼요. 저주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곳, 그곳을 지옥이라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자기백성과 함께 있는 곳, 그곳을 천국이라 하는겁니다. 그 원칙에 대해선 하나님은 일체 양보가 없습니다.
그러면 왜 처음부터 하나님의 영광스런 성전 지어가지고 자기 백성과 함께 살면 되지 굳이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해케 해가지고 “아, 하나님의 성전 지었으니까 우리는 이제 하나님 백성이다” 자꾸 이런 오해가 생기도록 왜 그런식으로 유도했느냐 이 말이죠. 이스라엘에... “처음부터 너희들은 성전지어도 소용없어” 이러면 이야기가 아주 깔끔하잖아요. 납득하기 쉽고.
근데 성전을 지으라 해놓고 다윗은 감격해서 성전 짓고 스룹바벨이 또 성전 짓고 왜 성전 지으라 해놓고는 이 성전은 나중 영광보다 못하다. 아니 처음부터 그러면 성전을 지으라는 말씀을 하지 말던지 왜 지으라 해놓고 “이거는 아니거든 다음 오는 성전이 더 커” 라는 말을 왜 자꾸 나중에 의해서 미리 무슨 준비단계를 왜 하게 하시는가.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거는 인간이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를 본인이 아는 자 만이 백성이 되어야 돼요. 우리가 왜 우리의 존재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지.
로마서 3장에 나오는겁니다. 로마서 3장에는 간단하게 돼 있어요. “우리가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돼있는데 도대체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 그거는 인간은 모릅니다. 인간은 자기 죄를 몰라요. 인간은 자기죄를 모르기 때문에 인간은 회개가 성립이 안됩니다. 뭐 자기 죄를 알아야 회개하지요. 자기 죄도 모르는데 무슨 반성이 되고 회개가 되겠어요. 기껏 지가 아는 죄 회개 반성 그건 안통하고요.
주님께서는 근원적으로 인간이 어디가 잘못됐는지를 알리기 위해서 성전 지으라고 한거에요. 성전 딱 지으니까 인간은 본인에게 문제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성전이 있으매 우리는 살았다 이런 생각이 딱 든거에요. ‘성전이 있으매. 하나님이 지시한 성전이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이제는 살았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라는 거에요 종교. 그 종교를 최초로 성전 지으라고 명하신 이스라엘 한테 그 일을 하나님이 지시를 내렸거든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성전을 만드니까 성전에 대한 집착을 갖게 되어있어요. 누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에 집착을 갖게 되어있어요.
성전이 있었다. 성전 지으라는 그 말씀의 하나님과 진짜 하나님을 함께 있다는 것은 성전 중심으로 될 때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라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해석을 한겁니다. 그래서 성전이 있는 그곳이 바로 천국이고 그곳이 바로 하나님이 함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여겼던 거에요.
그런데, 장차 올 이 성전보다, 이 성전은 무너져야되고요. 스룹바벨 성전은, 성전 보다 더 큰 성전이 온다 할 때 구약에 있는 학개 이 사람들은 뭐냐하면 지금 성전 무너지고 이 성전 보다 더 큰 성전 올 것이라고 이렇게 연속적 그 선에서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서 더 큰 영광 온다고 생각하는거죠.
금과 은도 다 내 것이라 했으니까 옛날 솔로몬 보다, 금, 은, 동원해서 지은 솔로몬 성전보다 더 많은 금과 은을 동원해서 성전 짓게되면 솔로몬 보다 더 큰 영광 스룹바벨 보다 더 큰 영광으로 가득찬 성전이 될것이라고 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학개 선지자를 그렇게 해석해서 기대하게 된겁니다. 그래서 헤롯성전 보면 대단하게 크게 잘 지어놨어요. 46년동안 지었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7년만에 지었죠. 7년보다 이건 46년동안 지었죠. 얼마나 큰 영광이 오길래 그렇게 크게 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성전 중심으로 우리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은 참으로 의롭고 정당하고 거룩하다. 정말 성전이라 하는 것은 가장 진실하고 가장 고상하고 가장 성스럽고 가장 염원, 우리가 염원해야될 최후의 거룩한 공간. 그 공간이 우리와 함께 있을 때 인간의 종교적인 욕구는 현실화 되었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에게 맡긴 역할이 바로 그 역할이였습니다.
너희들이 추구하는 그 종교에 인간이 염원하는 모든 종교가 이스라엘 종교로 합류돼요. 집중됩니다. 그게 집중되거든요. 가장 종교적인 거기에 그 사람들이 성전 되시는 오실 성전 되실 분을 죽이는 역할을 떠맡은 거에요.
마태복음 12장 6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있다... 학개 우리가 오늘 본문에 의하면 성전은 건축 구조물로 이해됩니다. 솔로몬 성전 건축 구조물 스룹바벨 성전 건축 구조물 따라서 그 다음에 더 큰 영광을 가진 건축 구조물.
그런데 마태복음 12장 6절에보면, 성전보다 더 큰 이. 갑자기 성전이 건물이 아니고 인물로 바뀝니다. 그러면 기존에 성전을 건물로 여겼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 그 사람들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과 유대민족이죠. 성전이 있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다 라는 것을 자부했던 그들. 그들 손에 의해서 진짜 성전보다 더 큰 분을 그들이 살해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 드리면,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 그래서 가장 고상하고 거룩하고 가장 순결한 인간의 최고의 장소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것이라고 소망했던 그 유대 민족의 그 종교안에 이방인들이 갖고있는 모든 종교가 그 모든 종교를 대표해서 유대인의 종교 성전 중심의 종교가 대변해 주고 있는거에요. 그러면 모든 종교는 유대종교와 직결돼있다고 보는거에요. 직결 된 그 힘으로 누구를 죽이는가? 진짜 성전을 죽여버린 거에요.
그렇다면 인간은 인간의 최고 염원하는 하나님과 함께 있겠다는 그 마음. 그 종교적인 최고의 종교, 그 마음. 그 마음마저 진동돼야 돼요. 떨어버려야 돼요.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너희들의 기초는 아예 없었다. 너희들의 존재의 토대나 기초 이런 것은 하나님께서 너에게 허락한 적이 아예 없었다.” 가 되는 겁니다. 왜 인간의 자기 존재의 기초는 왜 허락받지 못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면 더 큰 영광은 그러면 누가 감당하느냐?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독생자의 영광. 하나님이 “내 사랑하는 아들은 내 기뻐한다” 라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그 영광은 누구 품으로 누가 지니고 있었느냐 하면 오직 독생자만이 지니고 있었던 거에요. 예수님만이 지니고 있었던 거에요. 이제는 예수님이 성전으로 확정됩니다.
예수님이 그 당시 성전을 고집하던 자에게 죽음을 당할 때 베드로 전서에서는 2장 8절에 이렇게 합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돌이 새로운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었다고 돼 있어요. 새로운 성전은 에베소서 2장 20절에도 나옵니다. 21절에,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누가?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에베소서 2장 20절. 예수님이 친히 성전의 모퉁이 되었던 거에요.
그런데 그 모퉁이 돌은 왜 이게 버려진 모퉁이 돌인가? 인간들이 자기 안에 성전을 품고 있었어요. 어떤 성전? 하나님이 함께 있는, 고상하고 거룩한 하나님이 함께 있는 나가 되고싶어하는 그 염원 종교적인 염원. 그 염원이 진짜 성전을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버리운 돌이 되는데, 주께서 사람들에게 버리운 돌이 되게 된 그 근거가 이사야 28장 16절에 이미 예언돼있습니다.
이사야 28장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진동이 출력 되는 유일한 돌. 그래서 진동 자체가 출력 됐다는 말은 이 돌만큼은 진동되지 않는 영원한 돌이되는 거에요. 이 돌 만이 영원함을 알리기 위해서 이 돌 말고 사람에게 버리운 돌 말고 다른 모든 돌 건축돌은 이 돌에 의해서 전부 다 파괴되어야 되고 진동하고 요동쳐서 다 부셔져야 돼요. 부셔져야 됩니다.
그 돌을 우리 마음속에 품은 자가 성돕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궁금한게 그 돌이 내속에 품었다고 치고 과연 품었는지 안품었는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상당히 궁금하실 거에요. 궁금안해요? 궁금해야 됩니다. 내가 진짜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할 수 있는 독생자의 영광이 내 안에 들어있는지 안들었는지 그 돌은 어떤 돌이냐? 사람에게 무시당하고 쓸데없다고 버린 돌이에요.
그 버린 돌이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천국의 돌이 내 안에 있다면,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확인하느냐 하는 거에요. 그게 로마서 9장에 보면 확인 방법이 나옵니다. 9장에 이사야에 나왔던 방금 읽었던 그 본문을 그대로 여기에 싣고있는데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자마다 부끄러움을 당치 않는다.”이렇게 되어있는데, 이걸 우리 마음속에 과연 이 돌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하느냐? 저희가 행함 하다가 그 행함이 저에게 돌부리에 부딪혀 자빠지고 무너지고 부딪히게 되는 거에요.
인간의 모든 인간이 시도하고 생각에서 나온 모든 행함은 그 버려진 돌 앞에서 맥을 못추고 부인당하고 부정당할 때 나의 행동 나의 시도 계획 기도가 노력과 모든 것이 주님의 한 돌에 의해서 그게 다 부정당하고 고발당해야 돼요. 왜? 내가 행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치도 못하면서 내 안에 새로운 내 존재에 토대로서 근본으로서 원천으로 고이 자리잡으려는 시도를 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 행함 위에 나는 내가 버젓하게 나는 살 이유가 있고 천국갈 이유가 있다는 그것을 내세우기 위해서 나 개인을 위한 새로운 토대를 내안에 장만할 때 불신자는 그냥 장만해요. 근데 신자는 십자가가 이걸 용서하질 않습니다. “니가 또 종교인 되었구나.” 우리가 매일 일상을 살면서 이번에 한 것은 착한일이기 때문에 요거는 내가 고이고이 내안에 귀한 내 마음의 금고에다가 놔 둬야지 하는 순간 그 금고안에 이미 부딪히는 돌이 그걸 우리의 마음 안에 제일 깊숙한 곳에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게 십자가가 이미 장악하고 있으면 우리의 평소에 버릇대로 내 잘난 맛에 살기 위해서 근거를 마련하는 그 근거는 십자가와 만나면서 작살나는 겁니다. 매일같이 작살나요. “니 그럴 필요 없다. 너 잘남을 위해서 따로 니가 근거를 마련할 이유 없어.”라고 십자가는 부딪히는돌 반석이 시온의 반석이 우리 주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이게바로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내 행함이 만들어내지 않은 결과물. 주님이 십자가에 대한 결과물이 나의 제일 안쪽 제일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아서 우리가 평소에 안일하게 해왔던 모든 것을 족족 내가 매일같이 박살낼 때...
매일. Everyday. 매일 우유. 매일매일 박살 내 주시는 이 고마운걸...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할 수 있는 독생자의 영광이 우리와 함께 있는 성전인 거에요. 남들은 놀려라 하세요. 우리는 거기에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에선 그렇게 알고 있지만, 또 세상에 나가면 또 세상에 나가서 하면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나는 도대체 인생 뭐야, 나 왜 내세울게 없어 왜 매일 이래 살지?” 또 자기 비난에 나섭니다.
Lascia ch'io pianga la dura sorte(라쉬야 끼-오 삐앙가 라 두라 쏘-르떼) 이 뭐냐하면 나도 첨 알았죠 이태리 말. 울게하소서. 파르넬리에 나오는 헨델의 울게하소서 노래에 이대목 나옵니다. “나를 울게 하소서, 이 잔혹한 운명에 대해서” “오 신이시여 나를 울게하소서, 내 인생이 이렇게 망가짐에 대한, 잔혹하게 망가짐에 대해서 내가 울지 않고서 도대체 견딜수가 없습니다.”
그 가사를 잠시 보면 “울게하소서 내 잔혹한 운명을... 나로 하여금 탄식하게 하소서 나의 자유를 위하여. 나를 탄식하게 하소서 내 자유를 위하여... 고통을 끊어주소서 이 큰 고통의 끝을 다 끊어주소서 자비를 내려서 다 끊게 하소서. 나로 하여금 내 서글픈 인생에 대해서 울게 하소서” 이러한 어떤 인간의, 그러니까 이 인간은 뭐냐하면 카운터테너가 되기 위해서 거세한 거에요. 자기는 거세하고 천상의 목소리하고 맞바꾼 겁니다. 남들이 그걸 원하니까.
어쩌면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남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같이 거세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 이러한 사고방식과 성경의 복음은 어떤 엄청난 큰 차이가 있는가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이사야 53장 3절에,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나 니 모른다 우리 아는사이 아니야.”라고 멸시를 당하는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분으로 오신거에요.
그 유일한 분 앞에서 우린 매일같이 나라는 존재의 가치는 매일 같이 거세 당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왜? 우리안에 누구만 남깁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의 독생자의 영광만 남기는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게 된겁니다. 성도로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존재의 이유를 남하고 비교하지 말고 십자가 앞에서, 주님의 죽으심 앞에서, 사람에게 멸시 당한 그분 앞에서 사람에게 버려진 돌 앞에서, 우리 자신의 영광이 얼마나 어리석은 영광인지 깨닫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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