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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학개 2:4-5 / 죽음 초과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학개

학개 2:4-5 / 죽음 초과

정인순 2023. 6. 15. 09:12

음성 동영상 Youtube

죽음 초과

 

이근호
2023년 6월 14일                  

 

본문 말씀: 학개 2:4-5

 
(2:4)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2:5)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총독=왕)과 여호수아(대제사장)에게 예언을 주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예언이 수행되는 과정에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두렵고 무서운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미리 말씀하시는 겁니다. 유다나라를 대변하는 두 인물에게 “두러워말라”고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일관된 일이 들이닥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언약의 일입니다. 언약의 일의 끝지점의 효과는 ‘죽음초과’입니다. 창세기 5:24에 보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다음과 같은 류의 인간들도 있습니다. 물론 대다수이지만.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창 6:1-4)

이들 네피림은 거인족입니다. 자기 힘으로 버티는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죽음초과’가 되지를 못하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을 하지 않은채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버티는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신이란 그냥 세상에서 버티는데에 있어 하나님께서 힘주시기를 간곡히 바랄 뿐입니다. 즉 ‘죽음 초과’가 아니라 살아있는 나를 더 살게하는데 있어 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들은 평생토록 죽음에 후달리고 쫓기는 생활을 합니다. 목숨의 연장을 구걸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있어 공포가 내재되어 있으며 구원의 기쁨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해내시는 일을 이 세상에 던져넣으시고 그것을 달성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서 따로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의 일’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여 언약을 세우기 위해 필요한 제물들의 배치를 통해서 알려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창 15:9-10)

이 말씀에 의할 것같으면 제물들은 의도적으로 둘로 쪼개집니다. 그리고 어느 한쪽으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마주보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중간’이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이 중간 지점에 하나님께서 횃불이 되어 통과하십니다.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 15:17)

쪼개놓으시고 다시 통합시키는 그 과정과 절차 역할을 하나님께서 친히 해내시는 업무가 바로 언약입니다. 그런데 이 과업의 수행에는 필히 ‘죽음’이 발생됩니다. 일반 사람들이 언약을 수행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여깁니다.

자신의 최후를 반기거나 즐거워할 줄을 모릅니다. 오늘 학개 본문에서 제사장직과 왕이 두 인간에게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이처럼 갈라져 있는 두 직능이 하나로 통합되는 결과가 곧 언약이 마감되는 상황입니다. 이는 곧 왕이 되지 아니하는 대제사장이나, 대제사장을 거치지 않는 왕은 왕이라는 말입니다.

즉 이 세상에는 엄연히 왕이 있고 백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도 발달해서 종교마다 신과 교류한다는 제사장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죽음을 초과’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왕의 백성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애초부터 ‘왕+제사장’의 통합을 겨냥하고 진행됩니다.

출애굽기 19:5-6에 보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만이 유일하게 ‘죽음을 초과’한 나라라서 주변에 자체적 힘으로 버티는 민족과 전쟁에 나서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유념해야 될 일은 제사장직을 경유하지 아니한 왕은 완성된 왕도 아니요 진정한 백성도 생겨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제사장직이란 제물의 죽음을 다루고 그 죽음을 유지해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본인부터 희생적인 제물의 삶을 살아야 할 자입니다. 이런 자가 이스라엘 역사 속에 등장하곤했습니다.

그 중의 한 인물이 기드온이라는 사사입니다.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삿 6:22-23) 즉 기드온이 하나님의 일을 접수하면서 필히 본인이 감당할 수 없고 두렵고 무서운 일이요 죽음이 찾아오는 일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하나님의 지시를 두려운 가운데 수행합니다. “이에 기드온이 종 열을 데리고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아비의 가족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백주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삿 6:27) 그것도 모자라서 기드온은 진정한 하나님의 일임을 확인하고 싶어 하나님을 상대로 테스트까지 합니다.

그것은 기드온이 제사장직에 직면해서 두려움과 무서움에 떨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예수님 오실때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인간들이 본인 자체가 끝물에 불과함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인간을 상대로 자신의 제사장직을 수행하고 완수하셨습니다. 사도행전 9:3-4에 보면,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 통해서 제사장직을 달성하면서 그런 자를 자기 백성으로 삼습니다. 인간을 죽여서 성도되게 하시고 죄인을 죽여서 의인되게 하십니다. 따라서 성도가 갖게 된 구원의 기쁨이란 자신의 말과 행위에 그 어떤 식으로 구애받지 않고 주눅들지 않는 자가 됩니다.

이 구원의 기쁨에 다른 세상 기쁨거리를 섞지 마세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죽음을 초과하신 분의 능력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정대은

5강-학개 2장 4-5절(죽음 초과) 230614-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학개 2장 4절에서 5절까지입니다.
“그러나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찌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찌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찌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찌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것은 지금 너희들이 너희들에게 두려워할 일이 닥친다는 겁니다. 겁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능력으로 감당 못 하는 일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주도적으로 제공된다는 언질을 미리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감당하지 못 할 때 두려워하지 말아야 될 것은 조건이 있어요. 두려워하지 않는 조건이 “하나님의 신이 너희와 함께 있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신이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 거에요.

인간이 일을 하는게 아니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친히 일을 하시는데 그 일이 5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애굽에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언약한게 있어요. 약속 하신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한 것을 친히 하나님의 신께서 신약적으로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루어지니까 너희들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당부하고 있는거에요.

얼마나 이게 큰 두려워할 일이 오는지 사람으로서는 감당 못 할 두려움이 오는거에요. 사람으로서... 사람으로도 감당못할 두려움이 오기 때문에 그때 그 순간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알아서 처리하고 책임진다는 사실을 내가 감당 못 할 지경 속에서 비로소 새삼스럽게 발견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감당 못 할 일이 어떤 것이냐? 인간이 감당 못 할 일은 이겁니다. 인간은 자기의 종말을 넘어 설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사라져버린다는 사실. 인간은 그게 두렵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인간은 죽음에 쫓기어 있었으며 쫓기어 가면서 살아왔다는 티를 확 내버리는데 사람이 평소에 살아가는 것도 약간의 두려움과 공포에 쫓기듯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열심히 열심히 살아 볼려고 애를 쓰는 것은 자기의 종말을 늦추어 볼려고 자기의 종말을 본인이 감당이 안되기 때문에 자꾸 지연시켜 볼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 겁니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자기의 검은 그림자가 쫓아오니까 그림자 떼낼려고 앞으로 도망치는 것 하고 똑같은 거에요. 도망쳐 봐야 자기 그림자죠.

인간 자체가 이미 종말이 붙어있는데 그걸 무슨 수로 떼어냅니까? 떼어낼 수가 없죠. 죽음이란 것은 인간에게 떼어낼 수가 없는데 떼낼 수가 없다는 그 사실과 죽음이 무섭다는 사실은 두 개다 같이 공존하고 있으니까 이게 문제가 된거에요. 죽음은 말로는 그래요. 죽음은 내 소관 아니고 내가 어쩔 수 없다. 그러면서도 평소의 행동 하나하나 본능적으로 나오는 것은 죽는 것은 무섭다. 그러니 이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뭐냐하면 ‘인간아 니는 니가 할 수 있는게 없어’ 그런 뜻이에요. ‘니 제대로 니를 파악해.’ 니가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근데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과 관련돼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하나님은 자꾸 떼내고 밀쳐서 ‘하나님 저리가세요’라고 계속 밀면서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으로 평생을 자기 일에 몰두하고 매진합니다.

그러면서도 죽음은 점점 더 가까이 오고있고 대책은 없고 해결책도 없고 그럼 이거 어쩜 좋죠? 인간은 평생을 살아도 얼굴이 어둡습니다. 인간이 어두워요. 차라리 아무것도 모를 때는 밝아요 칠드런. 어린아이들. 아이들은 밝아요. 개코도 모르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19살 때까지 밝아요. 20살 때 군에 가야 됩니다. 갑자기 확 어두워집니다. 특히 남자들.

여자는 서른 살 때까지 괜찮아요. 서른 살 넘으면 시집가야됩니다. 갑자기 얼굴이 벌써 어두워집니다. 내 몸매 관리 어떻게 하지. 애 놓고 임신해버리면 내 몸매관리는 끝나는 겁니다. 애 잘 때 같이자고 같이 먹을 때 같이 먹고 찌기 시작하는겁니다. 몸매관리는 끝납니다. 아름다운 내 모습은 하나의 판타지 환상에 불과했던... 여기서 여자로서는 나는 끝인가 보오. 여기가 끝인가보오. 인간은 자기 몸하나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꾸 하나님보고 도와달라고 하지마세요. 하지말고 하나님이여 하나님일을 하시옵소서 이래돼야죠. 하나님 내 하는 일이 너무 무섭고 두렵고 감당이 안되니까 내게 도와달라 하지말고 주님은 주님 하실 일을 하시옵소서. 그렇게 될려면 우리가 그런 믿음이 될려면 주님께서 무슨일을 하는지를 알아야 돼요.

그동안 우리가 주님일이 무슨일인지 관심조차 없었던 이유는 내가 아쉬울 때 도와달라고만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뭐 내 시다바리쯤 되는 줄 알고 이 착각을 하는 거에요. “아쉬운거 없냐? 내 도와줄까?”

평소에 자식들이 얼마나 개인적이고 이기주의인지요. 평소에 지 잘나갈때는 부모 찾질 않아요. 꼭 부모찾을 때까 부도났을 때, 사기당할 때, 직장에서 짤렸을 때, 몸이 아파서 누룽지 탕도 지 힘으로 못끓여가지고 끙끙앓고 있을 때, “엄마 나 아프다” (전화기 요새 이렇게 하는게 아니죠) “엄마 나 아프다” 하고 끊지요. “엄마 나 또 사고쳤다” “합의금 필요하다” 뭐 이런거...

부모가 뭐에요. 부모가 뭡니까? 그 부모를 그런식으로 대하니깐 대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평소에 바로 그런식으로 하나님을 종 부리듯 부리고 왔다라는 거에요. 자기의 아쉬운거나 채워주는 하나님이십니까?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점은 이거에요. 이 이야기가 하나님께서 성도한테 이야기한다는 거에요. 성도한테. 지금의 성도 말고 장차 성도가 될 자에게 지금 이스라엘이 아니라 나중에 이스라엘이 될 자에게 이 말씀을 주는거에요.

그러면 이뜻은 뭔 뜻이냐 하면요 비로소 인간은 두려워해도 왜 두려워하는지를 모르는데 제대로 내가 뭘 두려워했던 가를 유일하게 아는자는 이미 구원 받은 성도에게만 무엇이 두려운 일인가를 비로소 파악을 하게 돼 있습니다.

성도에게 무엇이 두려운것인가? 이게 4절에 나옵니다. 여기에 두사람 더 나와요. 스룹바벨 나오고 그다음에 여기에 여호수아 나옵니다. 이 두 사람이 나와요. 두 사람인데 스룹바벨은 왕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대제사장이에요. 투톱이에요. 그 지도층이 두 사람으로 구성돼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만약에 여러분들이 성도라면 뭐를 두려워해야 되느냐하면 왕과 제사장이 통합되지 않을까 두려워 한다면 그사람은 성도입니다.

지 죽을까 걱정돼서 두려워하는 것은 이건 일반사람이고요. 일반 사람이고 성도가 된 사람은 왕과 제사장직이 둘로 나뉘어 졌는데 이 ‘둘로 나뉘어진 것이 하나가 되어야 된다’ 라는 점을 인정 하기에 인간이 무엇을 두려워할 것을 뭐 어떤 점에서 두려워하는가를 비로소 간파가 되는 사람.

이왕 어렵게 한 것 더 어렵게 하겠습니다. 창세기 15장 10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지시에 의해서 제사를 드리면서 그 제물 배치에 대해서 하나님의 지시를 받게됩니다. 자 뭐가 어려우냐? 아브라함이 제사를 드리면서 제물의 배치를 언급하는데 그 제물의 배치는요 아브라함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이 지상에 있는 아브라함이 제물을 배치를 한거에요.

배치를 어떻게 했는가? 제물을 둘로 쪼갭니다. 둘로 쪼개놓고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취득하는 것이 아니고 둘로 방금 쪼개놓고 그 쪼개는 것을 멀리 하나를 버린다던지 멀리 따로 떼내는게 아니고 쪼개놨다는 그 제물을 서로 마주보게 해요.

창세기 15장 10절에 “아브라함이 쪼갠 것을 그 아브라함이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대하여 그 새를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이렇게 돼있어요. 그 소와 양과 소와 암염소와 수양을 둘로 쪼개요. 쪼개어놓고 한쪽을 멀리 따로 따로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마주보게 하는겁니다.

그럴 때 생기는게 중간이라는 것이 생겨요.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대하고. 이 제물 배치는 하나님이 어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났을 때 어떤식으로 자기모습 자기 기능과 역할을 보이느냐에 대해서 미리 아브라함에게 언질을 준겁니다.

어렵지요? 그러니까 이게 뭐가 어려우냐 하면 어렵다 어렵다 할 때 뭐가 어려운지 알아야돼요. 이게 뭐냐하면 하나였는데 둘이 되었잖아요. 둘이 된 그 사이에 중간이 발생했어요. 중간 공간이 발생했고 그 쪼갠 것을 다시 쪼개졌음을 분명히 하고 쪼개진 경우와 그것을 통합하는 경우를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이 이 땅에 자신을 나타낼 때 하시는 일입니다.

쪼개진 것은 지상에 이 땅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쪼갠 모습으로 오시고 하나님께서 쪼개진 상태에서 일을 하시면 통합 된 상태가 나타나는데 그 통합 될 때 그 모습이 창세기 15장에 보면 거기에 뭐가 지나가느냐 하면 거기에 17절에 보면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이걸 가지고 뭐냐하면 그날에 언약을 세웠다 이래요. 약속을 세웠다.

오늘 학개 2장 방금읽었던 본문 학개 2장 5절에 보면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 내가 너희와 언약했다. 언약한 말. 약속한 말이 있어요. 그 약속의 내용이 뭐냐는 거에요. 도대체 하나님 뭘 약속했느냐는 거에요. 하나님의 약속은 뭐냐하면 오실 하나님께서 둘로 쪼개놓고 도로 합치는 그 일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거에요. 하나님이 하나님 스스로 자기를 찾아가는 일. 예수님이 예수님을 찾아가는 일.

그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거에요. 그러면 성도가 되었으면 뭐를 주시해야되느냐면 이미 성도가 된 사람은 뭘 주시해야 되느냐.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무슨 일을 완료 하셨느냐에 주목해야 돼요. 그러면 이 일은 순전히 아브라함 언약도 그렇고 모든 언약은 순전히 누가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스스로 홀로 하셔요. 다른사람의 도움 없이 홀로 하신다고요. 홀로 시작해서 홀로 다 마감을 다 완료를 시켜버린거에요.

제물이 쪼개놓고 제물 사이에 횃불이 지나갔다라는 것은 횃불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말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은 불로 나타나니까... 그 불이 지나가면서 이 둘은 결코 둘은 나누어진 채로 있을 일이 아니고 결국은 통합된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로 통합된다.

어떻게? 내가 아브라함 너에게 약속한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다시 쪼개진 상태에서 둘로 합치는거에요. 그러면 쪼개졌다는 말은 뭐냐하면 쪼개졌다는 것은 왕과 제사장으로 쪼개졌는데 하나님께서 오셔서 그 왕과 제사장을 하나로 통합을 시키는 일을 이거는 사람은 하지 못하고 하나님만이 하신다는 겁니다.

자 여러분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머리들이 좋으시니까 이해되지요. 그다음에 문제가 뭐냐하면 그 하나님께서 스스로 일을 하시는데 왜 우리가 두려워 할 이유가 뭐냐? 아니 “하나님 하세요. 지켜드릴게. 박수나 칠게요.” 이렇게 돼야지 왜 우리가 그걸 두려워해야되느냐 그걸 왜 두려워해야되느냐 이말입니다.

“스룹바벨아.” “예.” “여호수아야.” “예.” “왕아” “예” “제사장아” “예” “두려워하지 말라.” 이 내막을 지금 이 내막을 모르면요 여호수아 왕이 그냥 팔짱끼고 “하나님하세요. 아 잘하시네. 박수나 쳐드리고 감사하겠습니다” 이래 끝나는데 왜 하나님 일을 하나님이 계획적으로 하는데 왜 우리가 두려워해야될 이유가 뭐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일 할테니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주께서 일하는 그 현장에서 감당할 수 없는 도저히 감당 못 하는 두려움이 밀려오게 돼있어요. 밀리게 돼있다 이말이죠.

해변가에 보트하고 그리고 어선 몇 채 작은 어선 있는데 크루즈 집채만한 크루즈가 왔을 때 그들은 “야 이거 배 크다” 하고 구경만 했습니까? “오, 오.” 내 배가 다 뒤집어 지죠. 그 여파에 의해서. 크루즈 칠만톤 십만톤 넘는 그 크루즈가 왔을 때 그 조그만한 배들은 다 뒤집어져요. 전복돼버린다 이말이죠.

하나님의 일의 효과로 인하여 내가 버틸려는 나의 버팀이 감당을 할 수 없는 두려움을 두려워할 수 밖에 없는 내 힘으로 감당하면 두려움이 없죠. 내 힘으로 감당이 안되는 내가 전복돼버리는 사태가 벌어져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께서는 미리 경고하는게 “두려워하지말라 왜?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에서는 그런일이 벌어지게 돼있어”

자 그렇다면 그 파고. 왜 하나님이 하나님을 이야기하는데 그 백성들은 그 난리를 칠 수밖에 없는가. 왜 무서워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일들이 왜 일어나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제사직을 통해서 왕이되기 때문에 왕됨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사직을 통해서...

그 점을 그래가지고 잘 모르겠죠. 그 점을 예시를 들면 쉽습니다. 사사기 6장 23절에 보면 그 기드온이라는 사람이 나타나는데 기드온에게 어떤 일이 나타나는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딱 요거 요거 요 문장.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한다”

자, 지금 이거 기드온에게 나타났는데 이 말씀이 지금 여러분들에게 이 말씀을 주셨다고 해봅시다. “아무개야 안심하라” 벌써 겁나죠? 야 이게 무슨... 사단났구나 사단났어. “안심하라” 그 다음에 뭐냐하면 “두려워 말라” 아 이거 두려움이 벌어진다는 뜻인데? 그다음에 뭐냐. “죽지 아니하냐” “니 죽었어 이제. 넌 죽은거야. 니 인생 그걸로 꽥이야 끝났어. 니 인생 끝났어. 니가 그렇게 지킬려하고 버틸려는 니 인생 끝났어.” 이게 인간과 하나님의 만남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기드온은 용감한 불신자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두려움에 발발 떠는 기드온 사사기 6장 27절에 보면 “이에 기드온이 종 열을 데리고” 혼자서 11명가요. 지 합쳐서.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행하되 아비의 가족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백주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하나님의 지시가 분명히 두려워 하지 말라고 했지 분명히 했지. 안심하라 했잖아.” 그런데 막상 그 일을 수행하는 기드온은 예상못한 두려움이 확 속에서 올라오게 되는 겁니다. 그 두려움이 이유가 뭐냐?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자기가 극복하지 못한 데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자기 죽음을 극복하지 못 해요.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 원래 그래요. 창세기 5장에 보면 에녹이 나오는데 5장에. 21절에 유명한 말씀이죠.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의 일이 뭐냐? 하나님 일은 죽음을 초과할 수 있는 일이 될 때 하나님의 일은 마감이 돼요.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이 주어졌을 때 그 하나님의 일의 최종 모습은 뭐냐? 그 사람으로부터 죽음 자체를 초과한 사람으로 새사람이 되는게 하나님의 일이에요. 일의 완료입니다. 그 인간을 개인적으로 봤을 때...

근데 창세기 6장에 보면 여기에 천사가 나오는데, 타락한 천사죠, 이 천사들이 6장 1절에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이렇게 해서 천사가 인간들을 겁탈합니다. 그렇게해서 4절에 보면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네피림은 거인족이에요.

거인족이고 자식을 낳았는데 그 자식이 용사에요. 힘이 센거에요. 그러니까 네피림은 뭐냐? 천사와 인간의 혼종입니다. 이거는 강력해요. 자, 이거는 뭐 멸망의 대상이죠. 저주의 대상입니다. 에녹과 네피림의 차이점이 뭐냐? 에녹은 죽음을 초과했는데 네피림은 죽음을 초과하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죽음을 이겨낼려고 시도하는 자들이에요.

당연히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죠. 그러니까 이게 교회나와서 “하나님이여 힘주세요.” 하고 똑같은 거에요. 자기는 안 다치고 하나님의 힘을 빌어서 계속 괜찮은 나를 괜찮음을 지켜볼려고 하는거에요. 이거는 아까 기드온도 마찬가지이죠? 근데 기드온의 차이점은 네피림은 자기 본성이 내가가진 큰 힘, 용사니까 힘이 있으니까 힘으로 버틸때까지 한번 버텨보자는 식이에요. 갈때까지 가보겠다는 거에요. 이 세상 사람처럼.

근데 기드온도 마찬가지인데, 기드온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찾아왔다는 거에요. 하나님이 찾아오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안심하라 두려워말라 죽지 아니한다는 말은 내가 너를 죽음 이상으로 죽음을 초과하는 사람으로 만들탠데 그 과정 속에서 너는 결국 죽음과 정면으로 죽음 속으로 니가 기어 들어가야된다는 이야기에요. 이걸 가지고 뭐냐, 제사장직이라하는겁니다. 제사장직.

제사장직. 제사장이라는 것은 죽음을 다루는 겁니다. 그러니 제사장이라 하는 것은 초과된 죽음을 초과된 입장에서 죽음속에서 일하는 직능이 제사장이에요. 출애굽기 그 19장 5절에 보면 하나님은 집단으로 제사장직을 맡긴 민족이 있습니다. 그게 이스라엘 민족인데요.

19장 5절에 보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 “제사장 나라가 되고”... 제사장 나라라는 것은 제가 방금 언급했습니다.

제사장 나라는 죽음을 다루는 직능이고 기능이고 그 죽음을 다루면서도 죽음을 초과한 입장에서 죽음을 다루는 유일한 민족이고 그에 비해서 다른 너희 이스라엘 빼놓고 다른 모든 민족은 죽음을 초과하지 못하고 죽음에 빌빌 기고 죽음에 쫓기고 죽음을 무서워하고 죽음을 겁내면서 어떻게 살아보고자 하는 그런 민족과 너희들이 맞닥뜨려서 전쟁을 내가 벌이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어느 쪽이 왕 되신 백성이냐 아니면 누가 이 하나님의 왕되심의 백성이 아니냐를 내가 그런식으로 구분하겠다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언약이고 하나님의 일이에요. 개인적으로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는 것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언약 안에는 없어요. 이건 네피림 안에 있지요. 혼종. 저주받은 인간들. 항상 힘있고 강하고 세고 권력있고 부자되고 여기를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있어요. 이 무서움과 두려움이라는게.

그들에게는 구원의 기쁨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냥 항상 평생 다가도록 나의 갈길 다가도록 어두운 얼굴 뿐이에요. “나의 갈길 다가도록...” 시커먼 다크서클낀 얼굴로 평생을 살아가는... 쫓기면서 죽음에 쫓기면서 무서워하면서 돈이 수백억있어도 소용없어요. 권력이 있어도 소용없습니다. 항상 쫓깁니다. 죽음을 초과한 에녹의 기쁨이 없어요.

왜 그렇냐? 그들은 성도가 아니고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도가 아니고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인간으로서 죽여버리고 죽음을 초과한 성도를 생산하는 일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왕과 제사장이 결합이 되면 완성이 되면 두 직능이 하나로 결합이 되면 여기서 없던 인간 종족이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라 하는거에요.

그 성도의 바람은 하나님이여 어서 제사장직과 왕직이 하나로 통합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지금 인간쪽에서 둘로 나눠졌거든요. 여호수아 따로 스룹바벨 따로. 왕과 제사장이 구분되어 나누어져 있어요. 하나로 통합이 안됩니다. 그러면 그 스룹바벨도 죽음에 참여하고 제사장 여호수아도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은 비록 죽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이 맡겨준 직능은 살아있어서 그 직능이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는 조치를 하나님의 신이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과 함께 있어 이루어 내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직능은 하는 역할은 맡아놓고 그 역할에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 일을 우리가 해 낼수가 없어요. 맡은 일은 있는데 해낼 수가없을 때 해낼 수 없는 일은 그걸 제대로 못해놨다는 이유 때문에 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죽어마땅하고 그 우리를 죽어마땅한 존재로 만들어내는 그 직능 제사장 왕 직능이 우리를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 직능 속에 함께 하심으로써 우리를 건져내는 거에요.

이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너희들중에 함께 있겠다” 라는 뜻이에요. “함께있겠다.” “나는 내가 원하는 백성될 죄인과 함께 있겠다.” 내 백성과 함께 있겠다는 거에요. 그러면 그 백성은 잘난게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직능이 있죠. 일이 있죠. 그게 출애굽기 19장 5절에 나오고 “나는 너희를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겠다”는 그 역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인이 자처한 것도 아니고 지어낸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신건데 그 주신 것을 언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언약관계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언약관계를 주신 것은 우리보고 해내라는 말이 아니고 니는 못해낸다는 거에요. 다시 사사기 6장으로 돌아와서 기드온이 그렇게 벌벌 떨고 무서워했잖아요. 용감한 불신자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게 바로 사사기 6장 37절에서 40절까지 나옵니다. 긴 내용을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 일을 하기는 하는데요.

“진짜 이건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 일을 하는 것인지 제가 확인이 안되니까 하나님 용납해 주시고 한번 내가 원하는대로 하면 내 시킨대로 한번 한번만 따라해주세요” 라고 부탁을 해서 하는 기적이 뭐냐하면 “양털을 한뭉치를 마당에 딱 두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에는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줄로 제가 믿습니다” 라고 이야기한 거에요.

왜 기드온이 왜 하나님한테 이걸 시킵니까? 무서워서 그랬어요. 무서워서... 아니 뭐가 무서운데요? 이게 내 일이 하나님의 일인지 내 일인지 내가 분간이 안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믿음을 줘서 내가 믿게 된 것인지 분간이 안됐기 때문에 무서운 거에요. 무섭다는 말은 구원의 기쁨이 없다는 뜻이에요. 구원 받는다 맨날 구원 받는다 하면서 다크서클 껴가 교회 나오는 거에요.

“뭐 하다보면 은혜 받겠지. 오늘도 성령 안주면 나만 쪽나는데 하, 걱정스럽다.” 이런 것. 지금 인간을 구원하는게 주의 목적이 아니고 주님이 자신의 일을 회수하는게 구원이에요. 언약 주고 언약을 회수하는 그 결과물이 성도라는 겁니다. 근데 그 결과물에, 그 결과물은 예수님이 스스로 죽고 스스로 부활하셨거든요. 하나님이 스스로 부활했다는 말은 성령이 오셔서 부활했다 이 말하고 같은 말이에요.

주의 일의 특징은 일은 맡기되 우리가 못해냅니다. 못해내면 “못하구나” 끝나는게 아니고 우리가 필히 죽어야 돼요. 표정들 보니 이게 ‘뭔뜻인데?’ 하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세상이 생각보다 위험해요 왜 위험하느냐하면 인간쪽에서 지킬 수 없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원칙을 그냥 먼저 움직이면서 밀어붙이고 어디까지? 인류 최후의 날까지. 순간이 올때까지 밀어붙여요.

그러니까 이거는 우리가 하나님 믿고 안믿고 해도 소용없어요. 그 날은 지금 오고있어요. 마치 태풍이 태평양에서 태풍이 만들어져서 일본 오끼나와를 거쳐서 한반도에 오는 것처럼, 이미 일은 벌써 개시 했어요. 어떻게 타협이나 협상 여지가 없습니다. 그냥 밀어 붙여요. 그냥

왜? 아무도 하나님 외에 아무도 이 일을 성사 시킬 분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언약을 지킬생각 하지 마세요. 말씀을 지킬생각하지 마라고요. 말씀은 밀어붙이는거지 우리보고 지킬 수 있는게 아닙니다. 그 위험을 감지하면 돼요 우리가. ‘아, 내가 해도 안되는 것이고, 내가 안해도 죽고,’ 이거는 그냥 들이 닥친 사태, 사태가 들이닥친 사태에요 이게.

따라서 그것을 간파했을 때 그게 바로 구원의 기쁨이라는 겁니다. 구원의 기쁨이라 하는 것은 주께서 일을 하신다는 것이 그것은 성령에 의해서 미리 간파가 되어버린거에요. 그리고 그 일은 내가 해낼 수 없는 일인 것이 또 기쁨이 돼요. 왜냐하면 나의 행동과 내 어떤 말에 내가 일체 구애받을 필요가 없어요. 평소에 우리의 행동과 말은 뭐냐.

이 행동과 말을 통해서 내가 좀더 버티고 잘먹고 잘 사는데 기여될까봐 싶어서 조심스럽게 행동하잖아요. 이제 구원의 기쁨에서는 그런게 필요가 없어요. 오히려 그것이 구원의 기쁨을 막았어요. 막습니다. 훼방합니다.

구원의 기쁨이라 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주께서 그냥 “너는 너에게는 내 일이 있다.” 그 선언으로 끝나버린 거에요. 그 선언으로서... “니는 내 일에 참여 되었어.” 그걸로 끝나는 문제지 이거는 주께서 일방적으로 다 하신겁니다. 이쯤해서 여러분이 또 잊어버렸을 꺼에요. “근데 목사님 하나님의 일이 뭡니까?” 잊어버렸을꺼에요.

하나님 일이란 제사장직과 왕직을 갈라진 것을 스스로 하나님이 통합하는게 하나님의 일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은 왕이 된다는 말은 자기 백성 없인 왕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그 자기 백성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하느냐? 바로 인간들에게 핍박을 받아야 돼요. 희생이 되어야 돼요. 핍박 한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 한 일은 뭐냐 주님을 핍박한 일 외에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게 사도행전 9장 4절에 나옵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핍박 하느냐라는 그러한 이야기를 하시는 사울. 그 사울이 하나님의 숨겨놓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예수님은 사울에게 하나님의 왕이된겁니다.

“사울아 사울아 너는 왜 나를 핍박 하느냐”... 핍박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어요. 이 말은 죽지 아니하는 제사직은 없습니다. 죽지 않고 왕이 되는법은 없어요. 왜? 제사를 아브라함의 제사를 통해서 갈라지고 난뒤에 통합되기 때문에 그래요. 제물이. 갈라졌다는 말은 하나님과 하늘에 있는 하나님과 땅에 있는 하나님이 갈라졌다는 거에요. 하늘에서 헤어지고 땅에 오셨다는 거에요. 헤어진 하나님이 자체적으로 하나님의 자체적인 능력이 일의 수행에 의해서 다시 하나로 합쳐지는거에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왜 벌어졌는가? 자기 백성을 모집하기 위해서. 그럼 자기 백성 어디있는가? 없지요. 이세상에 죽음을 초과한 사람은 없어요. 없으니까 주께서 왕과 제사장이 완료가 되면 그 완료 된 것을 통해서 죄인들을 의인되게 하고 백성 아닌 것을 백성되게 하는 자. 그게 바로 없던 자가 생겨나는데 그 없던 자를 가지고 성도라고 이야기하는겁니다. 그래서 이 오늘 학개의 말씀은 일반인에게 준 말씀이 아니고 바로 성도에게 되돌아봐서 성도만이 이해되는 말씀이에요. 오늘 본문 말씀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여호수아 주시고, 제사장 스룹바벨주시고, 왕, 하지만 왕 주고 스룹바벨 준 것... 그들 성공했습니까? 메시아됐습니까? 통합했습니까? 다 실패했지요. 다 실패했어요. 그러나 그 인간들 실패했지만 그들에게 남긴 학개 말씀은 그대로 살아있어요. 스룹바벨은 왕이고 여호수아는 제사장인데 그 역할을 둘로 줘놓고 그 둘을 하나님께서 하나로 결합하는 일. 왕같은 제사장 되게 하는 일 그 일은 예수님 본인이 본인에게 완성시켜버린겁니다.

어떻게? 바로 제사장이면서도 제사장으로서 희생되면서도 결국 다시 부활하심으로써 왕이 돼버려요. 또는 희생당한, 같은말인데, 왕으로써 희생당한 제사장이 진정한 죽음을 초과하는 최초의 죽음을 초과하는분이 되었습니다. 최초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거에요. 에녹이 최초가 아니고 죽은자들 가운데서 죽음 자체 가운데서 벗어나신 분은 우리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제사장직이 죄를 해결하고 죽음을 이기는 제사장직은 예수님이 최초입니다. 그 예수님의 하는 일을 하나님에 의해서 주님에 의해서 품게 된 자, 이 자가 백성들이에요. 이 자가 이스라엘입니다. 두려움을 안한다는게 두려움을 승리하는게 완성이 아니라 기뻐하는거에요. 기뻐하는 것. 적극적으로. ‘난이제 두려움없다’ 이게아니라 항상 기뻐하는거에요. 항상 기뻐하는이유가 뭐냐하면 내가 내 어떤 내 행위에 대해서 내가 구애받을 필요없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참, 정리해야 되겠죠. 이 표정들 보니 한번 정리해야 되는데 뭐냐하면 인간이 왜 두렵냐 하면 내가 죽음을 못이기기 때문에 두려운 거에요. 죽으면 안돼. 죽으면 끝장이야. 그러니까 인간은 내가 자기의 죽음을 이겨내지를 못해요. 그런데 주님의 일이 우리안에 이루어져 버리면 내가, 이땅에 태어났던 내가 끝물인 것을 내가 발견해요.

내가 내한테 종말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어떤사람은 이름지을 때 종말이라한 사람들 있어요. 드라마에 나옵니다. 종말인데. 딸은 그만 아들 낳아라고 이름을 종말이라 지었는데 옛날사람들...

우리가 우리자신이 종말의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는 거에요. 이미 끝을 죽음을 초과했기 때문에 에녹같이 죽음을 초과했기 때문에 나를 볼 때 나는 없어져도 상관없는 종말의 존재로 자기를 볼 수 있을 때 그 이유를 설명하면 되죠. “너는 왜 종말이야?” “내가하는 어떤 일도 나를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에 종말이다.” 이게 바로 구원의 기쁨입니다. 두려움이 없는상태 이상으로 기쁨. 이게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있는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말씀대로 그걸 이루어지는데 있어서 우리가 개입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개입했음에 감사하게 하여주옵소서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무서워하고 두려움에 떨었습니까? 행여 죽을까 조마조마했었습니까? 주여. 그게 바로 네피림의 후손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가 에녹의 자손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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