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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학개 1:12-15 / 깨어질 성전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학개

학개 1:12-15 / 깨어질 성전

정인순 2023. 5. 31. 22:41

http://media.woorich.net/%EC%84%B1%EA%B2%BD%EA%B0%95%ED%95%B4/%ED%95%99%EA%B0%9C23/%ED%8C%8C%EA%B4%B4%EB%90%A0%EC%84%B1%EC%A0%84230531.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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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embed/s6pdkWWLZnY

 

깨어질 성전

 

이근호
2023년 5월 31일                    

 

본문 말씀: 학개 1:12-15

(1:12)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바 모든 백성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청종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을 인함이라 백성이 다 여호와를 경외하매

(1:13) 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명을 의지하여 백성에게 고하여 가로되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1:14)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바 모든 백성의 마음을 흥분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역사를 하였으니

(1:15) 때는 다리오 왕 이년 유월 이십사일이었더라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와 남은 백성은 성전없이 망하는 백성이 아니라 성전과 더불어 망해야 하는 백성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전의 이스라엘은 나름 하나님의 성전이 유일하게 자기 민족에게 있음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성전이 이방민족의 침략으로 무참하게 없어지자 처음에는 절망감과 무력감에 사로잡혔습니다.

하지만 약간의 세월이 지나자 성전의 존재, 즉 하나님의 함께 있음이 그들의 일상에서 그다지 필수적인 요건이 아니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민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기도 싫었던 겁니다. 그래서 성전 지어야될 책임을 지고서도 무려 14년 동안에 방치했습니다.

이것은 원래 인간이란 하나님 생각보다 더 우선해서 자기 생각에 몰두하는 속성을 지닌 존재이었던 겁니다. 성전이 없어도 이상스럽지도 않고 어느새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런 생활에 젖어 타성이 되었습니다. 아무런 문제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백성들이 학개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듣는다는 점이 도리어 신기할 정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흥분시켰기 때문입니다. 성전 지으라는 지시에 흔쾌히 나선 겁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제 손으로 만든 성전과 더불어 망하게 됩니다. 성전의 몰락과 더불어 몰락합니다. 이것이 성전이 제대로 완성으로 가는 경로입니다. 건물로서의 성전은 처절하게 깨어지고 난 뒤, 인물로서 오신 그 분 자체가 성전이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만남이 성사되는 장소가 됩니다.

과연 그 성전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평소에 예수님께서는 자주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사라져도 말씀은 남는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때가 될수록 사람들은 애초부터 신은 없는게 아닌가라는 생각에 동조하게 됩니다.

즉 말씀을 배제하고 다른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세계가 기억할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사실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다음의 두 가지 이론으로 정리하면 그러합니다.

⓵이론. 신은 애초부터 없었고 인간들이 지어낸 전설 같은 것이다.
②이론. 참된 하나님은 인간에게 맞아죽으신 바로 그 분이다.

①이론을 믿고 살면 사는 데 있어 그다지 공포스럽지 않습니다. 편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평소 일상에 부담되지 않습니다.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갖출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②이론을 받아들이면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하늘의 징벌만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인간 세상을 가만 두지 않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맞아죽었다는 내용이 들어있는 책인 성경을 멀리하고 마음 두지 아니하면 그저 매일 편하게 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선지자들을 보내었습니다. 성전 지으라고 지시하시고 그 성전이 다시 이방민족의 침략으로 무참하게 무너지는 것을 경험케 하십니다.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단 9:26)

이는 성전이 무너지는 하나님 아픔에 같이 참여해야 참된 백성이 된다는 겁니다. ‘성전이 무너진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둘러싸여 뭇매를 맞는 차원임을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들로 직접 경험토록하는 겁니다. 성전이 있었다가 다시 없어지는 것이 하나님에게 있어 인간으로부터 당하는 큰 수모에 함께 참여된 자들만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신약 시대에 직접 하나님이 오셔서 이 아픔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빌립보서 2:8의 말씀은 그 내용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십자가 사건은 이 땅에 나타난 유일한 탈출구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베데스다 못이 나옵니다.

자비의 못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종일토록 그 못을 쳐다본다할지라도 자비의 혜택을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못 속으로 풍덩 빠져야 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지식이나 시찰이나 관람용이 아닙니다. 스스로 죽는 것은 작위적이고 억지입니다. 그런 죽음으로는 십자가 죽음 속으로 들어설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같이 껴 안고 십자가 죽음 속으로 합류되게 해야 합니다. 그럴 경우에 인간은 비로소 자기에게는 죽음도 생명도 애초부터 없음을 압니다. 인간은 쭉정이 같은 존재입니다. 진정한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뿐이요 진정한 생명도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인간은 그저 무능한 존재일 뿐입니다.

인간에게는 신앙도 없습니다. 자기 편한 것만 생각할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무능성과 무기력으로 십자가를 보게 하십니다. 마치 탕자가 되어 돌아올 때, 아버지의 기쁨이 극에 달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사람들에게 맞아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아 있는 인류의 운명은 몰살 뿐입니다.

이런 극한의 공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빠져들므로서 극강의 기쁨으로 돌변합니다. 법을 다지는 율법의 세계에서 베데스다 못 안의 자비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나름대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지만 그들은 십자가 속까지는 오지를 못하고 그 가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유능한 사람이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 16:21-23)

천국은 예수님의 피의 가치에 합당한 사람만 갑니다. 예수님의 피의 가치에 합당한 사람은 겉부터 속까지 거짓됨을 십자가 피 앞에서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추락하고 몰락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정대은

하나님의 말씀은 학개 1장 12절에서 15절까지입니다.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바 모든 백성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청종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을 인함이라 백성이 다 여호와를 경외하매, 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명을 의지하여 백성에게 고하여 가로되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바 모든 백성의 마음을 흥분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역사를 하였으니, 때는 다리오왕 이년 유월 이십 사일이었더라”

다리오왕 2년 기원전 520년이고요. 6월 24일. 그동안 14년동안 성전 건축을 중지하다가 학개 선지자가 여호와의 명을 이야기할 때 놀랍게도 그 지도자급이 되는 스룹바벨과 제사장 여호수아와 그 남아있는 백성들이 학개 선지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 곧이 들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동안 왜 이게 놀라운 이야기인가 하면 일단 사람이 사람보고 이야기한다는 것에 대해서 사람이 그걸 받아들인다는게 놀랍죠.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믿는데 타인 말을 자기 자신 말을 믿음이 형성돼있기 때문에 타인 말을 가려서 듣게 돼 있어요. 곧이곧대로 듣질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하신 도우심이겠지요. 여기 “하나님이 함께하사” 했으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백성의 마음을 흥분시켰다고 돼 있어요. 백성들의 마음을 흥분시키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에게 와서 안 듣습니다. 듣질 않아요. 왜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을 거라고 미리 짐작하느냐 하면은 그동안 유대 나라가 성전이 없다는 거 전에는 성전이 있었는데 하나님이 함께 있었는데 지금은 “성전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다.” 에 대해서 어떤 불안감을 갖고 있던 그들이 점차적으로 내부적으로 그 새로운 환경과 융화가 되고 완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그 환경에 서서히 녹아들고 순응하기 시작한거에요. 그러면 그들이 순응한다는 말은 성전이 없으면 없는 대로 자기들 생활에 안정을 취하는 식으로 자기 생존에 열중했던 겁니다. 인간의 본성이죠. 하나님 있을 때는 하나님 섬겨야 되고 안 섬기면 곧 죽을줄 알았는데 성전 없고 제사장 없고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에 관한 하늘에 관한 연락책도 없고 연락처도 없고 아무것도 없을 때 뭐 그래도 살 만하네요.

그래도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이 없고 선지자도 없다 하는 이것에 대해서 그렇게 호들갑을 떨 일이 아니었던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님 없고 성전 없고 선지자 없고 하늘에 어떤 소식이 들리지 않더라도 자기 편한 대로 자기의 생계에 몰두하는 것이 이것이 본래의 인간의 모습에 부합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유다 나라를 통해서 멸망당한 유다 나라를 통해서 그것을 들추어 내주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에요. 교회를 그냥 습관처럼 꾸준하게 행동 하나의 문화양식으로 생각하고 정기적으로 교회 나가지만 가만히 두고두고 그냥 밤에 자면서 눈감고 생각해도 시간이 갈수록 신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는게 아닌가? 하나님은 애초부터 없는게 아닌가? 오히려 하나님이 없을 수도 있다. 옛날 전설에 하나님이 이렇게 천지를 창조했다는건 전설은 있는건 내 들어서 아는데 실제로 그건 전설이고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행복하고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다면 그다지 자기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중요한 의미로 들어와 있지 않더라도 오히려 그게 속 편안하게 살아가는 지혜로운 방식이 아닐까요? 하는 생각이 드는거에요.

성경이라는 그러한 권위책에 대해서 그동안 부담을 느꼈는데 성경 안 봐도 되고 교회 빠져도 괜찮고 그냥 자식들하고 손자 손녀하고 같이 살면 충분하게 만족스러운 삶이 될 수도 있거든요. 여름에 에어컨있고 음식할 때 에어프라이 있고 전자레인지 있고 냉장고 김치냉장고 있고 자기 아파트 하나 마련하고 텃밭까지 있으면 이 뭐 별 불행스럽게 그다지 불행에까지 이르지 않겠다는 자신감 같은 것 생기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지금 학개 14년 동안 성전에 관심 없었던 이유입니다. 인간의 본모습으로 잠시 되돌아가는거죠. 그래서 이 이스라엘 유다 나라는 인간의 본질을 보여주는 하나의 시범자가 되는겁니다. 그래서 택한 민족이에요. 인간의 바닥은 인간의 내부는 뭐가 들어있느냐? 그들은 인간의 내부에는 하나님을 귀찮아하는 존재 또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싶은 충동으로 가득 찬 존재 비록 하나님을 찾지만 그거는 그동안 찾아왔기 때문에뭐 굳이 안찾을 이유없다 싶지만 그다지 진지하게 찾지는 않고 그냥 ‘나 편하면 최고다’ 하는 생각이 인간의 숨겨진 본성이 아닐까요?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보낸 것은 인간이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기억하는 것을 기억할 필요도 없는 것들로 인하여 막혀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진짜로 기억할 것은 뭐냐, 진짜로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사실.

맞아 죽은 하나님은 생각 안하고 하늘에 어떤 어르신내처럼 거룩한 어르신내 어던 신흥종교 교주같은 옷을입고 계시는 그 하나님을 자꾸 염두에 두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은 사람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이게 인간 앞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간의 만남의 실상이에요.

노아 홍수가 일어났을 때 모든 지역이 심지어 노아가 살던 토지 노아가 살던 집까지 다 물에 잠겼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분노했으면 싹쓸이 물로 다 쓸었습니다.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했을꺼에요. 신이 연약한 인간에게 너무 큰 벌을 내렸다 이렇게 불만이 있겠지만 나중에 그들이 신약시대에 와서 진짜 하나님이 진짜 인간한테 맞아죽은 것을 생각하면 그건 당연한 벌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맞아 죽었다는 말은 그다음부터 인간이 이 땅에서 어떤 일에 열심을 내고 매진을 하고 노력을 해도 그게 다 소용없는 짓이라는 거에요. 하나님이 사람에게 맞아 죽었는데 왜 그거는 기억하지 않느냐 이 말이에요. 그 사실은 왜 기억하지 않고 지가 열심히 애쓰고 자식 키우고 살았다 그것만 기억하니까 그 자기가 열심히 살았다는 기억이 정말 기억해야 될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에게 맞아 죽었다는 그 사실은 애써 그것은 안 받아 들일려고 하는거에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맞아 죽었다는 말은 인간은 어떤 일을 해도 파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이 없는 것 같애. 그게 1번. 2번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실제로 맞아죽었다. 맞아죽은 하나님이 하나님이고 맞아 죽지 않은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에요. 전부 가짜에요. 진짜 하나님은 맞아 죽었어요. 그 맞아 죽은 하나님의 사건 2. 인간은 1번과 2번 중에서 어느걸 택하고 싶습니까? 어느걸 택하고 싶어요? 내가 하는 일이 무슨 일을 해도 말짱 소용없다는 쪽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맞아 죽었다는 그 내용이 담겨있는 성경책을 아예 안 들은걸로 못 들은 걸로 그렇게 간주해서 기어이 하나님은 애초부터 없을 수 있다는 쪽에다가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지 스스로 한번 보시길 바랍니다.

인간이 선악과 따먹을 때 선악과가 얼마나 부담됐으면 따먹었겠어요. 따먹어서 없앤거에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맞아 죽었다. 따라서 ‘인간아 이제는 니는 무지무지한 저주만 기다리고 있고 니가 이땅에서 어떤 고상한 노력해도 그 말짱 헛수고야 소용없는 짓이야. 이제 니 벌만 남아있어.’라는 쪽이 그것이 인간에게 마음 끌리십니까 어느 쪽이 끌리는 거에요?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스룹바벨과 여호사닥과 그리고 남아있는 백성이에요. 전체 백성이 아니고 남아있는 백성에게 성전을 지으라고 하는 것은 신약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맞아죽었다.’ 신약에선 그래요. 구약에서는 뭐냐 ‘하나님의 계시던 집이 인간들에 의해서 불타버렸다.’ 또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섬겨야 될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이 섬기지 말라는 다른 신을 섬기는데 온 헌신을 다했다’라는 그 두 가지의 사실을 두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떠나기로 작정한 것이 성전이 없음 성전이 없던 상태입니다. 아이고 더러워서 떠나버린거에요. 그 떠나버리고 성전은 불타버렸습니다.

그 불탄 성전 그 성전을 마치 돌판이 깨어지고 다시 돌판을 만드는 것처럼 성전 깨어지고 성전을 다시 만들라는 것은 그 너희들이 잊어버렸던 기억하지 않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설움 받고 배척당하고 무시당하고 모욕과 모독을 당했다는 그 하나님의 뜻을 새로운 성전을 구축하면서 담아서 그것을 다시 한번 이방 나라의 속에서 그게 와장창 무너져 버려라 이말입니다.

문장이 길었습니다만 간단합니다. 이 스룹바벨과 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자들은 학개 선지자 말대로 성전을 지어야 되는데 그 성전 처참하게 다 무너집니다. 망가집니다. 망가질 성전을 지어라는 거에요. 다니엘 9장 17절에보면 나옵니다.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취시옵소서”

황폐해진 성소. 하나님께 관심 있었던 선지자들은 성소가 황폐했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라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요시 여겼어요. 다니엘 9장 26절에 보게되면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하나님이 그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와 학개를 지시해서 만든 그 성전은 얼마 안가서 어떤 이방나라와 서 철저하게 뭉개버리고 짓밟아 버리고 황폐하게 하고 성소를 훼파하는 훼파의 대상이되는 성전입니다. 그것을 오늘 학개 선지자는 지어라는 거에요. 부서지고 무너질 성전을 지으라는 겁니다. 그것은 이 유다의 남은자들은 성전 부서질 때에 그 하나님의 아픔에 니가 참여하라는 겁니다.

성전을 지었는데 힘들게 지었는데 지어진 성전이 이 세상이 얼마나 독하고 악한 세상인지 여호와의 말씀에 대해서 완전히 무시하는 세상인지 그 성전을 이방 민족이 와서 또다시 짓밟아 버리고 없애버려요. 지금 이 성전 짓는것도 이방 민족이 와서 재료 다 내주고 짓는겁니다. 그니까 이것은 뭐냐? 이 땅에서 하나님이 함께 백성들과 있겠다는 그 지정된 공간 성전은 결국은 이 땅에서 처참하게 무너지는 겁니다. 성전이 무너지는 거에요. 성전이 무너진다는 그 의미와 동일한 의미가 장차 성전으로 오신 인물 되신 예수님이 사람에게 얻어맞아 죽는 것하고 똑같은 의미에요.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느냐는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것을 인간들이 얼마나 모질게 짓밟아 버리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드러내겠다는 겁니다. 평소에 우리 예수님께서 늘 버릇처럼 이야기한게 있어요. 뭐냐하면 세상은 없어져도 말씀은 남는다. 인자의 말은 때가 되면 이루리라 그것이 너무 자주 됐어요. 인간은 세상은 없어져도 말씀은 남는다는 거에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인간에게는 죽음도 없고 생명도 없다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무너질 것도 없다는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무너질 것도 없어요. 인간은 죽음이 없다는 말은 죽음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죽음부터 의미가 시작되는 거에요. 예수님의 죽음이 죽음이지 인간 죽는 것은 개죽음이지 죽음도 아니에요. 인간이 목숨부터 사는 것은 생명이 아닙니다. 생명은 예수님 자체가 생명이에요. 인간은 생명도 없어요. 인간은 무너질 것도 없고 생명도 목숨도 없고 그냥 아무것도 없는 쭉정이에 불과한 겁니다.

그런데 이 마귀가 인간을 계속 사주하면서 이렇게 합니다. ‘너 무너지면 안돼. 하나님이 이 땅에 왔는데 사람이 때려죽여 버렸다. 니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믿으면 니가 그동안 쌓아놓았던 평생 쌓았던 행복감이 무너질 건데 그래도 니 2번이야기 하나님이 사람에게 맞아죽었다는 2번 이야기 믿을거냐 안그러면 하나님 애초부터 인간이 지어낸 것에 불과하고 신은 없을 수도 있다 1번을 선택할래’ 자꾸 악마가 부추기는 거에요

뭐 부추길 것도 없이 자연적으로 살면 2번보다도 1번을 더 선호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맞아 죽었다는 말은 이거는 인간에게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인간에게 극한 공포로 다가와요. 하나님이 전체 인간에게 맞아 죽어? 그러면 하나님 쪽에서 가만 안 있을 건데? 그러면 내가 하는 일이 지금 하는 일이 의미가 없잖아 이게? 20세 이하 월드컵이 의미가 있습니까? 지금 뭐 하나님이 인간에게 맞아 죽었는데 월드컵이 우크라이나전쟁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래?

그래서 하나님께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뭐냐 하면 니가 무너지는 성전과 함께 추락하는 남은 자 추락해서 없어지는 이스라엘 되라고 성전을 새로 만들고 만들어진 그들이 성전을 붙들 때 이방 나라와 이스라엘을 마감처리 마감해가서 그냥 완전히 싹쓸이 불도저 가지고 이스라엘 없애버리죠. 이스라엘 산산조각 만들어버려요. 마치 성전이 산산조각 났듯이. 누구에게? 이방 민족에게.

분명히 이스라엘 있었는데 그 전체가 이방 나라가 엄습해서 전부 다 싹쓸이 돼 버렸어요. 그래서 이 하나님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서로가 서로를 삼키는 방식으로 서로 으르렁 대고 있는 겁니다. 창세기 4장에 가인도 동생을 죽일 때 악마가 가인을 삼켜서 덮쳤어요. 그리고 창세기 41장 7절에 봐도 “그 바로가 꿈을 꾸는데 그 꿈을 보니까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그 세약한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이삭을 삼킨지라.” 바짝 마른 일곱 이삭이 풍부한 일곱 이삭을 도리어 삼켜버리는 거에요.

이 땅은 인간들이 선택하는게 아니고 어떻게 거대한 해일 같은 파도가 와가지고 인간의 마음을 다 삼켜버렸어요. 하나님 쪽에서 말씀이 어떤 식으로 실현되는가는 관심 두지 말고 악마가 우리에게 마음을 삼켜버리면요 하나님이 말씀을 어떻게 관심두지 말고 니나 편하게 행복하게 살면 돼 라는 마음이 이미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제가 70년 초반에 군에 갔을 때 군에서 천주교 신학교 다니다가 온 사병이 있었어요. 그래서 뭐 이렇게 훈련 나와가지고 밤새도록 있는데 보니까 자기가 천주교 신학교 나오고 난 그때 이제 군에 가서 교회 다녔으니까 교회 이야기 하면서 그 신부 될 그 사람이 회의를 느끼고 있는거에요.

어떤 회의냐? 자기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겠다는 거에요. 인정한다는 거에요. 문제는 그 인정하는 하늘나라에 어떻게 합류하느냐 그거를 모르겠다는 거에요. 내가 그분이 계신걸 믿는데 하늘나라에 그 하늘나라에 내가 어떤 식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그 방법을 모르겠다는 거에요.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차라리 애초부터 하나님 없다 하면 문제 자체가 안되는데 하나님이 계신 것을 잊지를 못하겠는데 천국 가는 방법을 모르겠다.

저도 그때 교회 나온지 초짜가 돼 가지고 그게 저도 고민거리로 전염이 되었어요. 정말 답변할 수가 없다는 말은 나도 거기에 대한 준비가 안 돼 있다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지금은 정리가 되죠. 원칙이 없는 세상은 위험한 세상이다. 아무 일도 없어도 북한이 미사일이 안 쏴도 이 세상이 위험한 이유는 이 세상을 어떤 최종적이고 확정난 원칙이 없으면 그 인간은 위험합니다.

그래서 이제 생각하니까 그 신학생 신부 될 사람의 질문 자체에 뭔가 빠진게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내가 여기 있다가 하늘나라에 어떻게 하나님과 합류하느냐 질문을 그렇게 했는데 뭐가 빠졌느냐하면 이 세상에서 탈출해야된다는 말을 빠졌어요. 이 세상은 우리가 묶여있는데 탈출 돼야돼요. 그냥 예 알겠습니다. 지식 알았습니다. 가겠습니다. 지식 알아서 가는게 아니고 저쪽에 삼킴을 당해 탈출이 돼야돼요. 문제는 그 질문을 그 신학생이 한 질문을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빠져나갈 탈출구가 어딘 줄을 모르겠다. 그 이야기입니다. 탈출은 하고 싶은데 탈출을 하는 방법도 어느 쪽으로 가야 탈출 되는지를 모르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십자가 지시고 그 피를 믿음으로 구원된다는 이야기 있지요. 그러나 객관은 주관이 일치되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성경에 그런 지식이 있지요. 그러나 그 지식에 본인이 몸을 투신 해야죠. 들어가야 돼요.

마치 그 베데스다 못가에 많은 사람들이 웅성웅성거리고 있었잖아요. 베데스다 못 가에서 병이 나은 사람은 못 가에 들어간 사람이에요. 그 안에서 텐트 치고 구경하는 사람은 남 병 고치는 구경하고 사진 찍고 유튜버 생방하고 그런 사람이 아니고 베데스다 뜻이 뭐냐, 자비에요. 자비 속에 들어가야 돼요. 그럼 베데스다 자비 속에 있다는 말은 베데스다 못 가는 어떤 세계냐? 율법의 세계에요. 지식의 세계고 방법을 찾는 세계입니다.

‘내가 뭘 하면 이 자비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를 연구하는 거에요.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게 아니고요. 내 자신을 더 공고히 하고 더 잘되기 위해서 지식을 끌어모으는 자들이 베데스다 못 가에 두고 그냥 둘러치고 있는거에요.

인간은 십자가 피를 믿고 성경 말씀 믿겠다고 덤벼드는 것은 그것은 극한 공포 두려움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 공포 그 신학생이 그런 질문 한 것도 두려웠고 무섭다는 거에요. 자기는 하나님을 잊고 싶은데 차라리 잊어버리면 좋겠는데 안 들은걸로 하면 되는데 하나님이 계신다면 뭔가 조치가 있을 거고 나만 손해가 아니냐 하는 식이에요. 차라리 하나님을 그냥 잊어버리면 되잖아요. 마치 술 끊고 담배 끊듯이 하나님도 끊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게 사람 마음대로 되지를 않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그 방법은 주님 쪽에서 제시되었어요. 그게 빌립보서 2장 8절입니다. 빌립보서 2장 8절에 보니까 2장 6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이 뭐냐하면 예수님께서 탈출구를 마련하시는 탈출구가 없는데 친히 오셔서 탈출구를 마련하셨는데 그 탈출하는 지점이 뭐냐하면 바로 자기가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에 복종한 거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예수님이 먼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데 십자가로 추락하신 거에요. 떨어진거에요.

추락입니다. 십자가라는 곳에 지식이 아니고 십자가라는 곳에는 나를 추락시키는 곳이에요. 원래 아무것도 아닌걸 아무것도 아닌걸로 여겨서 잡아 땡기는 곳이에요. 십자가의 능력이 나를 끄잡아 땡겨서 나를 삼켜서 십자가 안에서 살게 만드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나는 뭐냐 십자가 안에서 무능한 자가 됩니다. 아무 쓰잘때기 없는 아무 쓸모짝이 없는 무능한 자. 이걸 성경에서 탕자라고 해요. 나로 하여금 탕자가 되게하는 겁니다.

어디가도 쓸모없는 인간 무능한 인간. 내가 아무 쓸모없고 무능할 때 비로서 십자가가 보입니다. 내가 유능하면 십자가가 안보여요. 내가 유능하면요 내가 능력있으면 주님이 하나님이 무능해 보여요 그러나 내가 무능하고 아무것도 아닐 때 그래서 율법이고 뭐고 말씀이고 어느하나 못지킬 때 다시 말해서 내가 갈수록 신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 불신앙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십자가가 보입니다. 내가 신앙이 없을 때 비로소 십자가가 보여요.

구원은 주님의 피의 가치를 피의 가치에 합당한 사람에만 구원이 됩니다. 주님의 피의 가치. 십자가 죽음의 가치. 제자들은요 예수님 따르면서 따라가는데 마지막 예수님이 십자가에 추락하니까 자기는 추락하기 싫다고 그 추락하는 장소에까지 가다가 거기서 브레이크 쫙 땡겨서 거기서 스톱 했어요. 우리주님은 어디가셨나? 죽음갔네. 빨리 빼라 차 빼라. 십자가 가 까지는 갔는데 십자가 안에는 못 들어갔어요.

마태복음 16장 22절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그럴 줄 알았어요. 마태복음 16장 22절 보니까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주께서 추락하고 몰락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얘기할 때 16장 23절에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니가 하나님의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마귀 일을 생각한다라고 하시지 않고 니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는 거에요 사람의 일. 사람의 일이 사탄의 일이였던 겁니다.

사람은 기껏 아무리 신에 대해서 아이디어를 끄집어내 봤자 그게 사람의 일이니까 사람의 일이에요. 천국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얻어맞은 그 일을 기념하는 곳이 천국이에요 하나님이 이 땅에와서 사람에게 얻어맞아 죽은 일을 기념하는 곳이 천국이에요 그러니까 천국보다 더 무서운 곳이 없어요.

세상에서 지옥보다 더 편한 곳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옥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얻어맞았다는 그 하나님의 일을 몰라도 되는 세계가 지옥이거든요. 하나님이 사람에게 얻어맞아 죽은 십자가 사건을 몰라도 되는 세계가 지옥이에요. 그러나 천국은 극단적으로 갑니다. 극단적으로. 천국은 극단에 극단의 무서움을 주고 그것을 뭐로 바꾸냐? 극강의 기쁨으로 바꿔요. 힘 빼고 십자가 우물로 빠져버려라.

아까 말씀드렸던 빌립보서 2장 8절.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해라. 그리고 그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해라.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러니까 내가 자살하는 것은 안돼요. 그리고 억지로 십자가 믿는 것은 자살입니다. 그거는 소용없어요. 작위적으로 행위로 십자가 고통받는 거. 그것도 마귀 일입니다. 그게 아니고 극강의 기쁨을 가지고 ‘바로 여기네’ 하고 빠져버리는 것. 자비의 연못에 빠져들어가는 거에요. 율법과 상관없이 뭘 했느냐 따지지 않고 그냥 빠져 버리는 거에요. 그 빠지는 순간 우리는 완벽하게 우리는 무능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내 모습을 보는 극강의 기쁨이 우리에게 늘 뿜어져 나옵니다.

‘내가 원래부터 무능했구나’에서 오는 그 가벼움. 탕자가 따로 없네 내가 탕자네. 무능한 쪽이 바로 천국 쪽이고 유능한 쪽이 지옥 쪽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통해서 성전을 직접 만들게 하고 거기에 성전을 만들었으니까 성전과 자기의 몸뚱아리가 하나가 되는거에요. 하고 그 성전을 외부로부터 외부의 힘에 의해서 완전히 작살나게 와장창 다 부서지게 만들어요 그러면 성전은 없는겁니다.

성전이 없는데 전에는요 전에 이 성전을 재건하기 전에 성전은 성전만 없고 유대 백성들은 있었어요. 그 성전 없어도 우리끼리 행복하면 되지 않느냐. 편하게 살면 되지 않느냐. 텃밭 가꾸고. 그런데 이제는 성전을 짓는데 그게 없어져 버리면 성전도 없고 이제는 나도 의미가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하면 성전을 지으라 하는 그 말씀과 성전을 지었던 그 스룹바벨 여호수아가 이제는 같은 입장이 된 거에요. 말씀에 의해서 같은 운명이 되어버린 겁니다.

같이 몰락하고 같이 추락하는 거에요. 같이 무능한 자가 되는 거에요. 그 성전, 예수님이 성전 되셔서 예수님이 하나님 만나는 성전 되셔서 그 성전이 죽었다가 다시 부활함으로써 같이 죽었던 자도 예수님과 더불어 같이 부활함으로 주님의 성전으로 부활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움직이는 성전이에요. 이 성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유다의 남은 자에게 너희에게 왜 무능하고 왜 너희들은 살 가치도 없는지를 성전을 짓게함으로써 또 지었던 성전이 사정없이 무너짐으로써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죄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시 받아드림으로써 하나님이 성전을 무너뜨리는 그 몰락의 작업에 흔쾌히 기쁘게 동의하는 백성으로 만드는 거에요. 이것은 바로 인간의 자기의 본래 모습 자기의 모습으로 환원되는 겁니다. 수소이온을 받아드리는 것을 환원이라 해요 수소이온은 마이너스이온이에요. 내가 마이너스라는 사실을 받아드리는거에요.

어떤 사람의 가사에 이런 노래가 있어요. ‘내가 아플 때 보다 너가 아플 때 내 가슴은 철이 들었다. 너의 사랑 앞에 나는 옷을 벗었다. 거짓의 옷을 벗어버렸다.’ 김종환의 사랑을 위해서 2절 가사인데 여기 보면 거짓의 옷을 벗어버리면 순수한게 나오는게 아니고 거짓의 옷을 벗을 때 거짓의 날 것이 나오는 거에요. 주께서 성전을 지으라 하면서 성전이 무너지고 성전이 깨지고 거기에 하나님이 동참하는 것은 다 너 때문이야 니가 거짓이기 때문이다 라는 소식을 들을 때 이것보다 더 극강의 기쁨은 없습니다. 자기자신을 바르게 알았기 때문에.

근데 이 세상에 있는 건축구조물들은요 이렇게 움직이고 소멸하는 것이아니고 전부다 눈에 띄고 이걸 소유하고 그걸 쥐려고 해요. 그걸 가지고 저는 평소에 부동산이라고 이야길 했는데, 이 부동산 소개하는 그 동영상 보세요. 수원 지방법원 성남 사계 2023 타경 54585번 경영 물건 나왔습니다. 세 번 유찰하고 이제 3억 6천만원 짜리 건물이 1억 2천 되었다. 현장 방문해가 동영상 찍어보게되면 옥상은 서로 수리해가지고 방수 잘됐다. 개꿀딱. 꿀꺽했다 공짜다 이말이죠.

방향은 남향 방향. 사용승인은 2016년도에 돼있고 지붕의 마감은 아스팔트 슁글 외벽은 드라이비트에다가 벽돌 뒤에는 옹벽 시설 도로는 집목 도로로 되어가지고 문제없음. 도로 지분도 10퍼센트 있고 한평당 180만원 짜리 이정도 같으면 공짜로 인정 할 만하다. 근데 왜 자꾸 3번 유찰됐지? 임차에 대항력있는 것 서류 확인해보니까 임차인도 없어. 그럼 문제없는데 왜 됐지?

아하 주변에 축사 있었네요. 그걸 똥세권이라 하지요. 바로 이것처럼 사람들은 인간들의 부동산은 요모조모 따져버리고 위아래서 다 보고 드론 띄워서 다 보고요. 가격이 내가 얼마나 소지할만하냐 내가 그걸 왜 따집니까? 유능하고 쪼다 안되고 바보 안될려고. 그러니까 이쪽은 뭐든지 법적으로 따지죠. 율법의 세계죠. 자비의 연못 베데스다 못가 못들어갑니다. 천국에 못들어가죠.

이 세상 탈출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럼 그 중간은 어떻냐? 이 세상은 ‘그냥 편한대로 살자 하나님 가끔 생각하고 잊어버리고 살자’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맞아죽었다는 이 사실이 엄연한 꼭 기억해야 할 이 사실’ 그 중간에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 그 중간은 모두 사기입니다. 그건 사기에요. 무슨 중간이 있어요?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학개에서 학개를 통해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스룹바벨은 왕이고요 여호수아는 제사장이에요. 왕과 제사장의 제도를 통해서 이 성전과 함께 무너지는 왕 성전과 함께 무너지는 제사장 장렬하게. 몰락하고 추락해버리는 그런 역할을 하라고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주신거에요 그 남은 백성을 준거에요.

말씀과 더불어서 그렇게 무너지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어떤 사람이냐? 이 우주가 결국은 불로서 타버리는데 이 우주의 비극에 대한 증인들이에요. 이 오늘날 성도들이고. 세상없어져도 말씀은 남아있어요. 사람들은 그걸 못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그 세상 중에 착실하게 성실한 자기 자신도 거기에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자 그럼 이 선지자 스룹바벨 학개 여호수아 이 선지자가 신약에 왔다면 그들이 진정 예수님에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 누가복음 9장 31절에 나옵니다. 그 모세와 엘리야. 이 선지자들은 전부 다 선배가 엘리야에요. 엘리야의 선배는 모세고. 모세 계통이에요 선지자계통이. 그 선지자 계통이 예수님 만났을때에 변화산에서 뭐라고 했느냐하면요 “주님 언제 별세하십니까?” 그것물었어요. 누가복음 9장 31절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그러니까 이 예수님의 죽으심. 하나님이 인간에게 맞아 죽는다는 이 사실이 세상 사람한테는 극강의 공포지만 이미 주님과 함께 추락하는 그것만이 유일한 탈출구임을 아는 사람한테는 예수님의 그 죽으심 이것이 극강의 기쁨이 되는거에요. 어떤 것도 우리의 유능함과 우리의 재주와 우리의 솜씨를 세상에나 주님 앞에 뽐낼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농사지어도 어설퍼도 괜찮고 돈도 한 푼도 못 벌어도 괜찮고 공부 못해도 괜찮고 행동 엉망진창이라도 묻지 않고. 왜? 이미 주께서 나를 껴안고 십자가에다가 껴안고 물귀신처럼 같이 몰락을 시켜버렸으니까. 십자가 안에 이미 들어와 버렸으니까 이제 더 이상 우리가 무너질 것은 일체 없는 그 상태 이것보다 더 기쁜 순간이 있겠습니까?

정말 무너질 것이 일체 없어요. 왜? 다 무너졌으니까 무너진 자의 텅텅비어있는, 거짓된 것 조차 다 노출되어버린 이 자유함. 이것이 바로 주와 함께있는 오늘날의 성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사람은 없어져도 말씀을 남는다는 취지에 의해서 그들에게 성전 짓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지어봤자 무너질 성전 이 땅에 살아봤자 건강 해봐야 죽을 수 밖에 없는 육신 하지만 그 가운데서 그 인생 속에서 하나님이 죽으심에 참여하게된 이 복을 주께서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