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학개 2:20-23 / 스룹바벨의 위치 본문
스룹바벨의 위치
음성 동영상
이근호
2013년 8월 18일
본문 말씀: 학개 2:20-23
(학 2:20, 개역) 『그 달 이십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학 2:21, 개역)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학 2:22, 개역) 『열국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열방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뜨리리니 말과 그 탄 자가 각각 그 동무의 칼에 엎드러지리라』
(학 2:23, 개역)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 예언을 설명하는데 있어 난감한 점은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먼 과거의 사람이다 는 점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주신 그 예언 속에서 현대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언 속에 들어가지 못하면 그 예언이 약속한 축복을 얻을 재간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냥 교훈이나 얻고 실알맹이는 버리기 일 수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예언된 심판을 취소될 수는 없습니다. 필히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가만 앉아서 당하기만 하는 게 아닐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 속한 나라만큼은 하나님의 저주에서 면제되어 축복받는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에 스룹바벨에 속했다고 여기는 유다 나라는 아주 신이 났지요.
즉 예언대로 자기 나라만 구원받는다고 우기는 겁니다. 얼마나 순진한 생각하고 너무나도 일방적 생각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자기 부인’을 하라고 하셨는데 여기에 대해 유대인들은 도무지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학개 예언을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만국은 다 저주받아도 스룹바벨에 속한 유다 나라만큼은 택함 받는다는 이 사실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단 말입니까!
물고기를 다루는 사람은 오징어 다리와 문어 다리만 놓고도 몸통을 충분히 그려낼 수 있습니다. 다리의 진위는 몸통이 진위에서 가려내어진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스룹바벨의 실체는 그냥 스룹바벨로 바로 이해하지 말고 그의 몸통을 통해서 알아가야 합니다. 야곱이 아버지에게 별미를 만들어 드렸드니 이삭이 축복했다는 내용은(창 27:7) 오늘날 우리가 타인에게 별미를 바친다고 축복받는다는 원리와 통하지 않습니다.
야곱에게 이삭은 단순한 아버지가 아니라 언약을 제공하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언약의 몸통은 누구인가를 봐야 합니다. 그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새언약을 완성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야곱의 축복은 이삭 개인의 것이 아니라 이삭을 이삭되게 하신 언약의 하나님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해석도 스룹바벨의 몸통이 무엇인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는가요? 마태복음 1:21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첫째, 자기 백성이 성립되어야 하고 둘째는 죄가 밝혀져야 하고 셋째는 구원이 성사되어야 합니다.
자칭 스룹바벨의 자손이라고 우긴 유대인들이 도리어 이 예수님을 공격하는 것은 자신들이 학개 예언에 따라 바로 구원될 백성이라고 자부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 소개 앞에서 마태복음에서 왜 예수님의 족보가 나열되어 있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12에 보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스룹바벨은 그냥 인물이 아니라 바벨론에서 나온 스룹바벨이라는 겁니다. 바벨론에서 나왔다는 말은 그 전에 바벨론으로 몰려간 왕들이 있음을 고려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6에서, “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 되어 있지요. 솔로몬과 그 이후의 모든 왕들은 결국 유다나라는 바벨론으로 집어넣은 자들로 대리자로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 언약에 의하면 유다나 이스라엘의 왕은 ‘아들’이라는 호칭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도리어 하나님의 나라를 바벨론에게 함락되는 식으로 이끌게 된 것입니다. 바벨론은 짐승의 나라입니다. 따라서 짐승의 나라로 백성들을 몰아넣은 그 왕은 곧 짐승의 앞잡이로 보면 됩니다. 왕의 자리는 아들이냐 아니면 짐승의 자리를 결정짓는 그 갈림길이 되는 위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빼놓고 그 어느 누구도 왕으로서 왕다움의 역할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달리 말해서 그 어느 왕도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져낼 위력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발휘하지 못했음은 곧 자기 백성을 짐승의 지배 하에 그냥 지내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벨론 모세 때의 애굽과도 같은 나라입니다.
자기 능력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나라, 그래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하나님만의 암호나 기호가 아니면 저주에서 놔주지 않는 그런 상황이 일어나야 되는 동네가 곧 바벨론입니다. 그래서 이 바벨론에서 빠져나왔다는 말은 본인들의 재주나 능력은 아닙니다. 제 3자의 개입이 감지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 제 3자가 누구일까요? 인간들의 현실이란 너와 나의 관계로 구성되는 현실입니다.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제 3자를 일체 허용하지 않는 세계가 이 현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오직 믿음 뿐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란 너와 나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닙니다.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내가 행하지도 않았고 네가 행하지도 않았는데 주어진 세계는 오직 예수님의 개입에 의해서 발생된 현실입니다. 그 현실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스룹바벨이 단순히 바벨론에서 나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제 3장과 연계되는 있는 오징어 다리입니다. 몸통은 따로 있습니다. 그 몸통은 곧 그의 후손을 통해서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1:16에 보면,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누가 낳으면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누가 낳게 되면 과거에 일어난 일로 인하여 발생된 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출생은 누구 낳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셨습니다. 이로서 도리어 과거의 일들은 예수님의 등장을 위해 미리 깔려져야 하는 붉은 카페트와 같은 기능을 보여주게 됩니다.
이로서 유일하게 짐승의 지배에서 벗어난 분으 예수님이시고 오늘 본문에서 스룹바벨을 ‘나의 택한 자’라고 하는 것은 그 노선을 따로 오신 예수님을 두고 말씀하신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친히 만들어내시는 분’이십니다. 다리가 몸을 따라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몸통에서 다리를 다시 만드는 식입니다. 이런 자들만 저주에서 벗어나 축복받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먼저 생각하게 하시고 예수님만이 행하시는 빼내시는 작업의 현장으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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