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422강, 423) 헤어짐과 만남. 남자와 여자 / 230307 본문
녹취:이하림
422강-YouTube강의(헤어짐과 만남 사무엘하 19:4)20230307-이 근호 목사
제422강, ‘헤어짐과 만남’. 성경 특히 구약성경에서 많은 헤어짐과 만남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건을 주니까 같이 있고 싶더라도 있지 못하고 분리되고, 그리고 나중에 또 하나님이 사건을 주니까 헤어졌다고 여겼는데 다시 만나게 되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인간들끼리 같이 잘 살면 되는데 하나님은 왜 헤어지게 하느냐? 인간은 본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저 사람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중간에 관여를 해서 사건을 일으켜줘야 그 사람이 나와 헤어질 때 헤어지면서 나타내는 태도와 말, 말씨를 통해 그 사람의 본색이 드러나죠.
헤어지기 전까지는 서로 좋게 지내겠다는 의도가 강해서 그 사람의 본심을 알지 못해요. 일단 헤어져봐야 그 속셈이 드러나는 겁니다. 물론 인위적으로 그 사람을 알기 위해서 헤어지면 안 되고 하나님께서 사건을 일으켜주죠.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진 사람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다윗을 움직인다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다윗이 하는 모든 하나하나가 사건이 되는 겁니다.
다윗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는 앞다투어 다윗에게 충성하면서 다윗과 자기가 같은 마음, 한마음이라고 그렇게들 오해를 했었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건을 주셔가지고 다윗과 주변 사람을 잠시 헤어지게 만들었어요.
그 이야기가 사무엘하 15장부터 해서 나오는데 15장에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자, 아버지와 자식, 같이 있는 게 정상이죠. 그런데 사건을 주니까 압살롬과 다윗이 헤어지게 됩니다.
압살롬이 아버지에 대해서 반감을 품고 아버지가 갖고 있던 권력이 탐이 난 거예요. 나도 이제 이스라엘 왕 한번 되고 싶다, 라고 나선 겁니다. 그 본성은 압살롬이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는 본인에게 그러한 속성이 있다는 것을 본인도 몰랐죠.
그런데 압살롬이 아버지로부터 약간의 소외를 당한다 할까요, 관심이 없어질 때 이참에 내가 아버지 자리에 올라가게 되면 아버지가 누렸던 모든 부귀영화와 그 모든 공경과 백성들의 사랑을 나도 그 자리에서 한몫 보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니까 압살롬은 뭘 모르느냐 하면 다윗은 하나님과 헤어지지 않고 있는데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과 헤어졌어요. 다윗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졌습니다. 그럼 아버지 다윗과 헤어진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과 헤어지더라도 난 상관없어. 난 왕이 되면 되니까.’ 라는 그런 생각을 가진 거죠.
그래서 이 세상의 사회에서 말하는 헤어짐과 만남은 인간 대 인간의 헤어짐과 만남이지만, 성경에서의 헤어짐과 만남은 언약을 가진 자와 헤어졌을 때 과연 그들의 만남은 예상 밖에 얼마나 비참한 관계로서 만났는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사무엘하 15장에서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반란 일으키기 전에 압살롬은 백성들이 다윗에게 쏟는 마음을 자기에게로 돌렸어요. 자기가 왕이 되고 난 뒤에 반란의 여지가 없도록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래, 다윗 많이 했는데 이제 압살롬이 왕 해도 우리는 상관없어.’라는 마음이 됐다 싶을 때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이 있던 예루살렘에 진입합니다. 다윗은 도망갑니다. 예루살렘에서 도망가죠. 헤어짐이죠. 왜 아버지와 자식이 헤어지는가? 그것은 언약 안에 그런 요소가 있어요.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내쳤던 겁니다. 다시 만날 때 어떠한 성과를 가지고 만났는지를, 하늘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헤어짐과 만남을 통해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 사이에 어떤 절차가 필요한가를 알려주는 겁니다. 하늘의 비밀입니다. 하늘의 비밀은 이 땅에서 사건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압살롬이 왕이 되었는데 나중에 다윗 쪽에서 반격을 취해가지고 요압이 압살롬을 죽였습니다. 죽였을 때 성경을 보는 많은 사람들이 잘 납득 안 되는 것이 지금 압살롬은 아버지의 적이잖아요. 압살롬은 아버지를 죽이고자 하는 겁니다. 그럼 이스라엘을 생각한다면 반란군의 우두머리인 압살롬이 죽은 것을 다윗은 굉장히 기뻐해야 돼요. 비록 자식이라도. 뭐 섭섭한 면은 있겠죠.
그런데 사무엘하 19장에 보면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대성통곡하면서 웁니다. 마치 절대로 죽이지 않아야 될 자를 요압 장군이 죽였다는 식으로 그렇게 슬퍼합니다.
이유가 뭐냐 하는 거죠. 압살롬 입장에서는 산 채로 아버지를 못 만났고 아버지 입장에서는 살아있는 채로 아들을 못 만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다윗에게 허락하신, 다윗의 인생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언약은 ‘언약을 위배해서 헤어진 사람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한다.’ 이 원칙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 원칙뿐만 아니고 다윗이 아들에게 쫓겨서 초라한 행색으로 바삐 도망을 칠 때 그 때 사무엘하 16장 5절에 보면 시므이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다윗을 저주합니다. 전쟁이나 하더니 잘됐다 다윗아. 아들한테 당해도 싸다, 이렇게 된 거예요.
시므이란 사람이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는 감히 그렇게 못하죠. 그런데 권력이 아버지에서 아들에게로 넘어갔으니까 아버지 다윗에게는 권력이란 전혀 없다는 것을 본인이 간파하고 비겁하게 권력 쪽에 자기가 서면서 권력 없는 쪽을 이제 구박하듯이 공격하는 거예요.
권력에 놀아나는 인간의 얄팍한 본심이 다윗 언약을 통해서 보여지는 겁니다. 아,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품고 싶은 권력을 원하는구나. 힘을 원하는구나. 다윗의 일대기를 통해서 그것이 나오죠.
나오는데 어? 시므이 자기 계획대로 안 되네요. 다윗이 패배하고 자기가 편들었던 압살롬이 이길 줄 알았는데 사무엘하 19장에 보니까 거기에 시므이가 나옵니다. 땅에 바짝 엎드려요. 이것도 아주 얍삽하고 비겁한 짓이죠. 19장 18절에 “제가 왕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봐주세요.” 한 거예요.
그러니까 옆에 있던 보디가드 장군인 아비새가 “임금님, 저건 당장 죽여야 됩니다. 저런 변절자 배신자는 용서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저주했으니까 죽여도 하나님께서는 잘 죽였다 하실 겁니다.”
이렇게 하니까 하나님께서 시므이에게, 지금은 내가 죽이지 않고 일단 용서할게. 조건이 있어요. 너희 동네에서 연금 상태에 들어가는 거예요. “네가 이 동네 살고 다른 데 가지 마라.” 라고 다윗이 봐주고 지시를 한 겁니다.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것은 다윗의 입장에서는 이건 하나님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다윗은 언약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아들에게 마땅히 죽음 당해야 되는 것을 자기는 기정사실로 알았어요. 이참에 내 인생 끝났구나.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이 개입해서 반란을 일으키는 아들은 패배하고 자기는 승리했으니까 이것은 무슨 하나님의 뜻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본인이 관여를 못했어요. 자기는 아들에게 죽어 마땅하다고 여겼는데 하나님께서 역전을 시켜줬으니까.
그렇다면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지시가 있어야 되지, 내 마음대로 내 위주로 내 기분 따라 사람 죽이고 할 자리가 아니라는 그런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렇다고 마냥 시므이를 용서할 수는 없고 그래서 하나의 조건부로 살게 해준 겁니다.
자, 이렇게 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헤어짐과 만남에서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은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인간을 만났는데 의도적으로 예수님은 인간과 헤어집니다. 헤어지면서 인간의 본색이 드러났어요. 예수라는 작자 잘 죽었다.
그런데 아쉬워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베드로와 열한 제자들. 거기에 대해서 요한복음 14장에 이렇게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합니다. 14장 3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내가 너희에게로 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으로 만나게 한다. 이것이 뭐냐? 언약적으로 헤어짐과 만남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네 자리로 만나지 않고 새로운 자리, 예수님 내 자리로 너희들이 오는 식으로 만나게 한다. 그러니까 주님한테 잘 보여가지고 네 자리 확보할 생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423강-YouTube강의(남자와 여자 디모데전서 2:15)20230307-이 근호 목사
제423강, ‘남자와 여자’. 상당히 가볍고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주제라고 생각이 되겠죠. 그러나 성경적으로 보면 남자와 여자에 담겨있는 비밀은 굉장히 깊습니다.
우선 여자부터 보게 되면 여자의 시작은 마리아부터 시작하게 돼요.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임신하게 됨으로써 마리아 인생은 처녀 때부터 임신한 그때부터 자기 마음대로 안 됩니다. 자기 마음대로도 안 되고 자기 가족끼리도 마음대로 안돼요.
마태복음 2장에서 그냥 마리아는 아기 예수 해산해서 집에 있는데 자기가 뭐 애굽으로 이사 갈 마음이 전혀 없어요. 그 집에 전세담보 갖고 있는데 나가면 그거 못 받잖아요. 그런데 헤롯 왕이 화가 나서 죽이려고 하니까 천사가 와서 “그 집 빼라. 전세 빼서 애굽으로 가서 살아라.” 강제 퇴거조치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냥 동방박사만 다녀갔을 뿐인데.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꾸려간다는 것이 상식이잖아요.
그 원인이 있어요. 여자가 하나님을 임신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자가 아기를 임신하게 되면 그때부터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어야 되는 게 아니고 자기 뱃속에 있는 아기가 원하는 것을 먹어야 돼요. 남자는 모르리. 정녕 모르리. 남자는 잘 모르죠. 그러니까 이것은 이상해요. 몸은 하난데 두 인격이 살아있는 겁니다. 참 기이한 현상이에요. 몸은 하난데 겉으로는 여자 임산부 몸인데 안에 또 다른 생명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이에요. 여자의 후손이기 때문에 이 말은 여자의 후손에 들어가서 구원받으려면 꼭 여자 같은 입장에서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오죠.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똑같은 나라는 하나의 육체에서 나랑 예수님이 함께 살림을 살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구원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 말고. 구원받은 사람은 어느 하나 예외 없이 다들 그래요. 모두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2장 15절에 보면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여기서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 대목에서 ‘구원의 알갱이, 구원의 핵심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의 신체를 통해서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해산은 남자는 못하고 해산할 수 있는 것은 여자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의 육체 가운데 두 인격이 있었다. 어떤 여자가 배가 부르다. 많이 먹었겠지 뭐. 다이어트 안하고 많이 먹고 운동 안하고. 아랫배 톡 튀어나왔죠. 그런 줄 알았는데 열 달 지나니까 애가 나왔다. 아, 그럼 저거는 밥 먹고 그냥 뒹굴러 자가지고 배 나온 게 아니었구나. 실제로 저 여인 안에 다른 인격체가 들었었구나.
그러면 구원이라는 것은 여자가 자기 몸 안에 자기 생명체 하나밖에 없는데 이게 둘이 된다는 것, 이 안에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한다는 것은 곧 없는 데서 생기는 거예요.
그리고 새롭게 나올 새 생명은 여자의 몸이 아니면 엄마의 몸이 아니면 이 세상에 출현될 수도 없는 생명을 얻을 수 없는 겁니다. 그럼 여자는 뭐냐? 새로운 생명의 모태를 제공하는 자. 그렇다면 여자는 새 생명, 새롭게 태어난 생명의 기반을 형성하기 위해서 여자 몸의 기능으로 자궁이 있었던 거죠.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시고 여자로 하여금 새로운 자식들을 낳게 하는 기능을 여성에게만 주었습니다. 남성이 배불러서 임신하고 그런 건 거의 없죠. 혹시 가짜 뉴스 보면 남성이 임신했다는 소리도 있긴 있는데 거의 없어요. 그 여자의 기능을 남자 완전히 제키고 특별하게 돋보이게 하는 것이 마태복음 1장에 마리아가 성령이 임해서 예수님을 임신하는 겁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처녀에요. 남자 배제하고 단독으로 임신해서 아들을 낳는 것, 그 원칙을 알리기 위해서 여자에게 해산하는 그러한 현상과 하나님의 구원을 연관시킨 겁니다.
해산한 여인이 구원받았다는 뜻은 아니고요. 구원이라는, 상당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어 보이는 이 내용이 실질적이고 실제적으로 여자의 해산을 통해서 설명하시고자 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바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는 아브라함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아내 사라에서 결정됩니다.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같이 많으리라 할 때 사라 없이는 이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라가 거기에 대해서 아브라함도 사라도 믿지 못한 것은 지금 사라가 어떤 상태냐 하면 자궁이 있지만 이건 죽은 자궁이에요. 따라서 이것은 잉태되지 못한 여인입니다.
잉태되지 못한 남성이 아니고 잉태되지 못한 여성. 여자의 후손이어야 인간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통치하고 있는 왕이 있는 악마를 연약한 여자의 몸의 해산작용으로 주께서는 그걸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신 거예요.
잉태치 못한 여인을 마귀의 세계에서는 인간 세계에서는 누구나 인정해요. 나이 구십 됐는데 잉태치 못한다. 그거 뭐 당연한 거지. 늙어서 잉태 못하는 거 당연하지 않느냐. 이렇게 당연한 걸로 가요, 일단은.
거기에 대해서는 별일 없을 거야, 이렇게 갑니다. 만약에 별일 없는데 별일 생긴다면 이건 인간이 예상하거나 인간이 기대하거나 인간이 사전에 생각한 바는 절대 아닌 거예요. 기이하고 신기한 거예요.
그렇다면 그걸 좀 이어보면 평범한 여성이 아기 낳는 것을 어떻게 봐야 되는가? 그걸 신기하고 기이하게 봐야 되지, 여자니까 애 낳지 뭐 이렇게 쉽게 넘어갈 일은 아니라는 거예요.
이것은 더 나가서 이런 뜻입니다. 남성들이여. 세상의 권력을 다 쥐고 있는 남성들이여. 권력 없다고 시시하게 보고 얕잡아 보고 아주 무시했던 여성에게는 남성이 감히 못하는 신기하고 이상스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에 주목하라.
너희 남성들이 권력을 쥘 때 남성들이 악마와 한패였다는 사실을 너희들은 몰랐지. 그러나 여성에게 새 생명을 잉태하는 능력을 주신 것은 기존에 남성 위주의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이 여자의 몸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주께서 알려줍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 시작은 마리아에게서 시작했고 그 예언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마찬가지고요, 야곱의 아내 라헬도 마찬가지에요. 아기 낳고 난 다음에 죽잖아요. 그러니까 이 애는 하늘나라와 관련된 애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이 땅의 사람의 아기가 아닌 거예요.
이런 것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조금씩 보여줬던 것이 신약 성경 디모데전서 2장 15절에 와서 교회는 그걸 새롭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여자가 해산하는 그 평범한 일을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는가와 관련시켜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자, 그럼 이제 남자는 뭐냐? 역전됐어요. 남자가 여자의 시다바리, 보조에요. 여자는 아기 해산하고 남자는 아기 키울 때 필요한 모든 여건과 돈, 재정적인 것과 정신적인 보호를 보디가드 역할에 충실해야 될 임무가 있는 겁니다. 그것은 여자를 보호함보다도 여자 안에 있는 새 생명의 의미와 가치가 하나님과 관련 있음을 알면서 그걸 지켜줘야 되겠죠.
여자가 남자처럼 일 못하고 여자가 남자처럼 돈 못 벌어오고 여자가 남자처럼 밭일 못한다고 해서 그걸 남성적 기준으로 학대하거나 천대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여성이 그렇게 힘든 것은 창세기 3장 15절 사건을 하나님은 놓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자가 먼저 따먹었잖아 하는 그러한 사실. 그러니까 남성 여성을 통해서 창세기 3장의 선악과 따먹는 사건을 반복해서 남아있는 모든 인생사에 하나님의 계시를 거기다 담아두고 실어두는 그 역할을 남성과 여성이 본의 아니게 하게 된 겁니다.
'유튜브 강의(이근호) > 유튜브 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426강, 427강) 약속과 언약, 추억과 기억 / 230404 (0) | 2023.04.05 |
---|---|
(424강, 425강) 중요한 것, 말씀의 시간 / 230321 (0) | 2023.03.22 |
(420강, 421강) 경쟁 게임, 사람의 한계 230221 (0) | 2023.02.22 |
(418강, 419강) 속임수(2), 복된 말씀 230207 (0) | 2023.02.08 |
( 416강, 417강) 속임수, 폭력 221220 (0) | 2022.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