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390강, 391강) 한계, 이름과 아픔 / 220510 본문
녹취:이하림
390강-YouTube강의(한계 시편 104:9)20220510-이 근호 목사
제390강, ‘한계’. 저는 이 시간에 한계를 두 가지 한계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한계는 자연의 한계에요, 자연의 한계. 시편 104편 9절에 보면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내용을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내용을 시편 104편에서 언급하시는 이유는 처음 창세기 때 모든 밑거름을 깔아놔요. 쭉 깔아놓고 기초를 딱 깔아놓고 그 위에 무엇을 꽂아 넣을 것인가. 그것은 천지창조를 한 그 내력에 대해서 후일에 꽂아주는 일들과 사건들로 점점 더 창조의 원리와 그 윤곽을 드러내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그 윤곽 중에 그 원칙 중에 하나가 무엇을 도입해야 이 원칙이 성립되는가? 한계. 자연의 바다와 땅에 한계가 있다. 이런 점에서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왜 한계를 주셨는가는 생각 못하고 해수욕하려고 이렇게 바다하고 땅하고 매끄러운 모래사장 주셨는가 뭐 그렇게 생각하게 되죠. 인간은 모든 것에서 자기 이익을 먼저 계산하기 때문에.
그런데 여기 시편 104편 9절에 물의 경계를 정하사 넘치지 못하게 한다는 이 내용은 장차 물에서 올라오는 수상한 괴물의 출현을 예고하는 일이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수상한 괴물, 하나님의 원수는 하나님이 정해놓은 그 한계를 모독하고 침범하는 존재다. 악마의 종 짐승이 육지까지 올라오는 이유는 육지에 계신 분과 그의 자녀들을 노리고 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 육지에 오셨잖아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죠, 구원을. 또 그로 인하여 주의 백성들이 생겨났잖아요. 바다에 있는 짐승들은 이걸 못 참는 겁니다. 자신의 악마적 능력으로 복음을 무산시키려고 땅에 올라왔다 이 말이죠.
이 성경적 표현은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것, 구원이라는 것이 필히 공격, 표적 대상이 된다는 것을 감안하고 복음과 구원을 받아들여야 된다는 겁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그때부터 무엇을 아느냐 하면 이 복음과 구원이 얼마나 귀하다는 사실을 주님도 아시지만 주님에 대적되는 마귀도 이걸 이미 알고 있다는 그것을 성도는 감지해야 돼요.
내가 선택해서 내가 결정해서 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는 마귀가 누굴 공격한다는 것을 감안해서 이 복음을 주셨다 이 말이죠. 일종의 마귀를 불러들이는 유인책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그런 거죠. 베드로에게 복음을 전할 때 베드로는 이걸 사적인 자기 구원문제로 생각하죠. 그러나 악마가 누구를 노립니까? 베드로가 복음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악마가 노렸다고 되어 있죠. 예수님이 이야기했잖아요, 누가복음에서. “제가 주를 따라가겠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너는 악마가 너 자체도 노린다는 사실을 네가 지금 모르고 있구나.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했기 때문에 그 악마의 손에 넘겨지지 않도록 내가 조치하겠다.”
바다와 물의 경계선을 정하신 하나님께서 무슨 경계까지 최종적으로 이어가느냐 하면 택한 백성과 택하지 않은 백성의 경계까지 주님께서는 내다보면서 복음을 정하셨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택한 백성은 자력으로 택한 백성이 아니라는 이유가 마귀의 표적이 된다는 거죠. 그런데 성도가 자력으로 마귀의 유혹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경계를,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않은 자의 경계를 성도 본인이 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하신 분은 누구죠? 주님께서 정해 놓으셨잖아요. 주님께서 정하신 경계이기 때문에 그 경계 자체를 주님께서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기 택한 백성을 하나님께서는 지켜주시고 보호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경계가 있다는 말은 그만큼 복음이라는 것이 개인적으로 죽어서 천당 가는 문제가 아니고 전체적인 하나님의 일에서 핵심으로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경계를 의도적으로 만들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겁니다.
첫 번째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연의 경계. 땅과 바다. 그리고 자연의 경계가 바로 악마까지 유인할 수 있는 유인책이 되고 예수님이 오셔서 땅에서 이루어진 일을 바다에서 올라온 괴물이 무산시키고자 한다.
그런데 그 바다에 있는 괴물은 지금 경계를 넘어섰잖아요. 이건 막강한 힘이 있다는 뜻이거든요. 바다와 땅의 경계를 넘어서서 왔다는 말은 땅의 모든 권력을 악마가 능히 이기고 악마의 힘을 당할 자가 없다는 것을 악마도 알고서 복음 알고 천국 가는 사람을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고 덤벼들죠.
그럼 경계를 경계답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누가 개입하겠어요? 이것은 성도의 힘으로 막아내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친히 경계를 경계답게 다시 말해서 바다와 땅의 경계를 지으셨던 주님이 숨어있는 뜻은 천국과 지옥의 경계, 그 경계는 굳건하게 주께서 지켜주신다 이 말입니다.
두 번째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한계, 경계와 같은 말입니다, 한계는 인간의 인식의 한계입니다. 인간의 인식의 한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 인식의 한계라는 것은 성경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린 아이는 어릴 때 생각에 머문다. 그때 그 생각에 머문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데 끝부분 11절에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게 바로 인간의 한계, 인간의 경계입니다.
20년 전에 복음 알았어요. 그때 제대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20년 전에 알았던 복음에서 1년 더 살고 안 복음이 1년 전에 알았던 복음보다 깊이가 더 깊겠죠. 그렇게 되면 20년 전에 1년 전에 알았던 그 복음은 자체적으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왜? 아직 1년 더 안 살았었기 때문에. 그다음에 1년 살고 알았던 복음과 2년을 살고 알았던 그 복음 사이에 또 한계가 있는 거예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나는 미리 점프해서 10년 뒤에 알 것까지 미리 알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럴 필요는 없어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적절하게 죽이실 때 그때 우리가 아는 복음은 죽는 순간에 그걸로 마감이 되는 겁니다.
그 한계가 뭐냐 하면 율법을 지키는 행함이 아니라 왜 십자가라는, 내가 행한 것은 거절하시고 예수님이 행하신 십자가만 받으시는가를 매해 살면서 깊게 폭넓게 알게 하시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살면서 우리가 몰랐던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는 겁니다.
죄가 들추어지면서 내가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죄가 들추어지면서 주께서 주신 천국과 지옥의 한계, 그 한계를 우리를 통해서 증거케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모든 인생도 그렇고 세상도 그렇고 악마까지 동원해서 확정된 한계를 우리가 체험하고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가 아직도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391강-YouTube강의(이름과 아픔 출애굽기 3:13)20220510-이 근호 목사
제391강, ‘이름과 아픔’. 누구의 이름을 부르는데 굳이 가슴 찢어지도록 아파할 이유는 없죠. 우선 이름이라 하는 것은 뭔가 존재한다는 뜻이고요. 존재하는 그 사람과 연관을 지을 때 호명을 하게 되어있고 호출하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쪽에서 연락이 되기 위해서 신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인간 쪽에서 신의 이름을 붙이는 거죠. 그걸 우상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면 우상이 아닌 신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인간 쪽에서 이름을 붙인 신이 우상이라는 말은 결국 우상이 아닌 신이 따로 있다는 말이고 그 우상이 아닌 신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나타내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신은 연락이 되어야 되니까 인간 쪽에서 아쉬울 때 뭘 불러야 되지 않겠습니까. 존재한다는 것은 이름이 반드시 있는 거거든요. 존재하지 않으면 이름을 못 붙이죠. 그러니 하나님이 계시다면 인간과 연락이 닿기 위해서 인간 쪽에서 부를 수 있는 호출할 수 있는 무슨 이름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지금까지 우상의 이름은 뭐냐 하면, 이름은 누가 붙인다 했어요? 인간 쪽에서 붙였기 때문에 이름이 인간의 권력, 영역, 범주 안에 들어간 거예요.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창의성, 상상력 그 안에 이름이 갇혀있다고 보면 돼요.
그래서 우상을 부를 때 이름은 인간 쪽에서 지었고 우상은 저쪽에 있으니까 인간 쪽에서 신의 이름을 부를 때 신은 쪼르르 인간 쪽으로 온다는 말은 인간들이 구상해낸 신의 본질에 신이, 우상이겠죠, 신이 거기에 맞춰줘야 될 입장에 있는 거예요.
칠성님이라든지 이런 거. 칠성님 부를 때 별 일곱 개 자기가 칠성님이라고 붙였습니까? 태양신이여, 태양이 우리에게 이름 줬습니까? 아니죠. 저거 태양이네. sun. 인간이 이름을 지었잖아요. 이름을 지을 때 이름 짓는 인간의 아이디어와 의도하는 바, 기대하는 바가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그 태양신을 부를 때 저 멀리 있는 태양신이 오면서 인간이 연락을 취할 때 인간의 의미의 영토, 의미의 장 안에 권력 안에 힘이 작동하는 작용 자리에 태양은 태양답게 놀아야 되죠, 태양답게.
그러면 이스라엘의 여호와는 모세가 연락을 취하려고 하면 이름을 불러야 되니까 또 계시기도 하고 계신다면 이름이 있으니까 “뭐라고 호출시키면 되겠습니까?”라고 했어요. 하나님은 거절했어요. “아니. 네가 불러서 쪼르르 가는 게 아니고 반대로 내가 네 이름을 부르는 거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이름을 호출할 권한만 있는 거예요. 인간이 호출해내지 못해요. 호출할 권한만 있습니다. 모세는 대기했다가 여호와 하나님이 부르고 계시 주시면 따라야 돼요. 인간이 여호와 이름을 부르고 우상 이름을 부르는 목적은 뭐에요?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복 받기 위해서 부르잖아요. 그걸 진짜 하나님은 도저히 용납 못하시는 거예요. 주여 주여 백날 불러도 주께서는 안 나타납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3장이나 6장에 보면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이름을 남겨주지 않았습니까. 남겨줬거든요. 나는 여호와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이름을 남겨줬단 말이죠. 그러면 부르라고 이름을 줬기 때문에 그러면 처음부터 이름을 안 가르쳐줘야 되는데 왜 이름을 남겨두시는가.
여기 하나님 이름에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이름이라 할 때 그 이름은 호출하는 자기 백성과 하나님과 더불어서 하나님의 고통을 완성시켜나가는 의미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스스로 고통당하는 게 아니고 고난과 고통의 빌미가 되는 자들이 있어줘야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의 우상들은 고통을 당하는 게 아니에요. 인간에게 뭘 도와줄고? 그러니까 인간들이 신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우리가 이러이러한 것들을 바칠 테니까 이러이러한 우리의 소원을 들어줘야 거래가 형성되지 않습니까.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으면 된단 말이죠.
새벽에 교회 예배당 썰렁한데 차가운 마룻바닥에 겸손하게 엎드려서 한나의 기도처럼 막 울면서 술 취한 건지 기도인지 분간 안 가게 열심히 할 때 그만한 노동의 대가는 있어줘야 기도하는 보람이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일종의 거래 아닙니까, 거래. 겸손했습니다. 희생하겠습니다. 이번 일만 도와준다면 제가 주님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흥정, 거래. 계약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하고 계약하는 게 아니에요. 계약은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 자신하고 계약하는 겁니다. 그 계약의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거예요. 죽을 때 그 환경이 필요할 게 아니겠습니까.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에요.
언약 안의 내용이 그거에요.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해서 죽이고 다시 살리신다는 그 내용입니다.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철딱서니 없는 인간들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들이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이방나라하고 똑같아요. 자기 복 받고 자기에게 좋은 이익과 혜택을 입기 위해서 보호받기 위해서 이름을 불렀겠죠.
그러나 그러한 정신 상태로 부르면 부를수록 누가 아픕니까? 바로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 철딱서니 없는 자기 백성 속에 친히 오신 분이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 고통이 선지자의 고통으로 계속해서 불거졌고 마지막에는 주여 주여 이름을 부르는 자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그들에 의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살해당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하박국 1장, 2장 전체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1장 12절에 보면 “선지자가 가로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를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를 세우셨나이다” 해놓고 14절, 15절에 보면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으로 바다의 어족 같게 하시며 주권자 없는 곤충 같게 하시나이까 그가 낚시로 모두 취하며 그물로 잡으며 초망으로 모으고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주께서 보내신 만드신 주의 백성이 주께서는 반드시 공정히 심판하시고 우리의 반석이신 것을 우리가 인정하겠는데 왜 바벨론이라는 적을 보내서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낚싯밥이 되게 하느냐.
17절에 “그가 그물을 떨고는 연하여 늘 열국을 살육함이 옳으니이까” 하박국 보기에 앞뒤가 안 맞다 이 말이죠. 12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반석으로 지켜주는 것이 자기 믿음인데, 14절, 17절에서는 왜 살육을 당하냐 이 말이죠.
지금 하박국이 뭐를 놓치고 있는 거예요? 진짜 자기 백성은 주님이 당하는 아픔에, 그 이름을 갖고 있는 존재의 아픔에 같이 아픔으로 참여하라고 이름을 불러야 되는 것이고 그게 제대로 이름을 부르는 거라는 거예요.
물론 하박국이 선지자니까 그걸 알죠. 아니까 2장 3절에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지금 이렇게 괴롭지만 언젠가 마지막 때가 되면 주께서는 우리 백성을 제대로 백성이라고 구원하실 겁니다, 라고 해서 나온 말이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장 4절) 지금은 죽을 지경이라 이 말이에요. 지금은 죽을 지경인데 끝까지 주의 약속은 변치 않는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박국 3장에 유명한 말씀 나오죠. 가스펠송 가사에 나오는 거. 3장 17절,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미리 당겨서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게 바로 주님의 아픔에 참여한 상태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그게 바로 하나님이 정하신 의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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