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386강, 387강) 이상한 일, 방관자들 / 220405 본문
녹취:이하림
386강-YouTube강의(이상한 일 마태복음 2:19)20220405-이 근호 목사
제386강, ‘이상한 일’. 사람들은 일이 벌어질 때 그 원인을 추적합니다. 원인을 추적하는 이유가 우리가 예상 못한 이상한 일은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그런 마음이죠. 만약에 자기가 원인도 모르고 시작점도 모르면 본인의 인생에 혼란이 일어나는 겁니다. 붕 뜨죠. 이렇게 했기 때문에 이렇게 일어난다는 것을 분명히 확실히 할 때 자기 일상에 안정감을 얻는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말라기 1장 10절-11절을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여기 말라기 1장 10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성전 문 닫자. 너희들 하는 더러운 짓을 더는 못 보겠다. 너희들은 내 이름을 멸시한다.” 말라기 1장 6절에 나오는 겁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그러니까 6절에서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한 적이 없는데 멸시했다는 거예요. 7절에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그러니 이상한 일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성전을 만들어놓으라 하시고 하나님 자기 쪽에서 그 성전 문을 닫아버릴 때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성전 문을 닫는 그 이유와 원인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만큼 인간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말라기에 나오는 이 대화, 하나님의 지적과 거기에 반발하는 유대인들의 그 반발이 서로 소통이 안 되죠. 이 말라기만 그런 게 아니고 말라기는 구약이니까 이제 신약으로 넘어갑니다. 신약 마태복음 2장에 보면 2장 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여기에 말씀하시는 그 주체가 누구냐 하면 사람이 아니에요. 주의 사자가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에게 현몽하여 꿈을 통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자, 한번 봅시다. 우리는 마태복음 2장에서 천사가 꿈에 나타난 것을 이상한 일, 신기한 일로 보잖아요. 그런데 이 신기한 일의 원인이 다 있어요.
말라기에서, 하나님께서 성전을 만들어놨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운 떡을 드리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멸시했습니까, 하고 오히려 의아해하는 거예요.
이 말은 하나님이 관심 두는 것에 대해서 그 당시 하나님을 믿는다는 존경한다는 사람들의 관심사가 일치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요구하는 뜻과 하나님을 위해서 정성을 다했다고 우기는 인간의 뜻과 불일치가 일어나는 겁니다. 불일치가 일어났을 때 마태복음을 들어와서 보면 진짜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상한 일은 너희들이 현재 문제 있음을 들춰내기 위해서 이상한 일이 주어지는 겁니다. 요셉의 꿈에 사자가 나타났다. 이것은 이미 인간세상에서 하나님 뜻에 합치되는 일은 인간 쪽에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하는 거예요.
좀더 알기 쉽게 말씀드려서 아까 마태복음 2장 19절 이야기잖아요. 그러면 마태복음 2장 초반에 어떤 이상한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하늘에서 별이 나타나서 저 먼 나라 동쪽에 있는 박사들이 별을 따라온다. 그 이야기가 마태복음 2장에 있을 때 사람들은 굉장히 신기하고 이상한 일로 보는 겁니다. 아 참 신기하다. 그런 이상한 일, 신기한 일이 나에게 일어났으면 좋겠다.
사람들은 그것만 신기하게 보는데 마태복음 2장 16절도 동일하게 이상한 일, 신기한 일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돼요. 2장 16절에 무슨 이야기가 있느냐 하면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다 죽이니라. 이게 신기하고 이상한 일이에요.
러시아하고 우크라이나가 전쟁해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시민들을 학살했다. 자, 이게 비참한 일입니까, 신기한 일입니까? 사람들은 이것을 비참한 일로 처참한 일로 생각하는 거예요. 신기한 일, 이상한 일로 여기지 않아요. 전쟁나면 의례히 그렇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제대로 그 동기와 그 원인을 인간들은 볼 줄을 몰라요. 말라기에서 결국 그 유대인들이 로마의 압제를 받잖아요. 그걸 신기한 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 과연 몇 명 되겠습니까?
주께서 일으키는 신기한 일, 별 따라 온다는 것을 신기한 일로 봐요. 그러나 그 별 따라 온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두 살 먹은 애가 그 당시 권력자에 의해서 반항하지 못하고 한 베들레헴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몰살당한 일에 대해서 그것을 신기한 하나님의 일로 보지 않고 뭐로 보느냐 하면 ‘참, 권력 있는 자가 통치를 참 무섭게 하는구나. 우리는 힘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뭐. 권력자에게 당해야지. 이건 참 비참하고 비극이야.’ 이렇게만 생각하지 이걸 신기한 일로 이상한 일로 안 보더라 이 말이죠.
다시 말씀드릴게요. 신기한 일과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모든 상식적이고 일상적인 일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적하기 위해 죄인이라는 규정을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일어난 사건들이에요, 이 사건들이. 그래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심지어 교통사고라도 어떤 사건이 있더라도 그걸 내가 미처 몰랐던,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친히 작용하신다는 그 신기한 일을 평소에 바쁘다보니까 신기한 것을 신기한 일로 안일하게도 안 받아줬다는 사실, 그걸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는 기회라 여겨야 되죠.
이 세상에 신기하지 않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전부다 신기한 일인데. 그런데 신기한 일을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안타깝다, 내가 가서 도와줘야지. 지금 도와주고 안 도와주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 일 하나하나가 우리의 평소 관심사가 얼마나 주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몸 하나 챙기고 자기 몸 하나 안전하게 잘 지내고 내 것 잘 지키는 데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과 불일치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평소에 생각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건을 일으켜버렸잖아요. 그러면 이것은 동방박사에게 별이 나타난 것과 동일하게 감격적이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새삼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기고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해서 살지 말라는 그런 하나님의 지시이고 명령인 줄 알아야 되겠죠.
387강-YouTube강의(방관자들 사무엘상 22:17)20220405-이 근호 목사
제387강, ‘방관자들’. 세상에 정치 돌아가는 것, 세상사 돌아가는 것, 남의 나라 전쟁 일어나는 것에 사람들은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죠. 나는 내 일뿐만 아니고 남의 일까지 돌아보고 관심가지고 신경 쓸 수 있는 그런 배려심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부합니다. 그것은 내가 이기주의가 안 되고자 노력하는 중이다, 그런 뜻이죠.
나는 이웃을 생각하고 타인을 생각하고, 나만 생각하지 않는 그것이 신자로서 또는 성도로서 바른 본분이라고 평소에 생각하면서 될 수 있는 대로 남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 합니다. 모든 인간은 신앙하고 상관없이 어느 정도 양식이 있는 사람은 그 정도는 인지상정이라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동정심 갖은 게 있거든요.
우물에 있는 아이가 있으면 구해주려고 하고 애를 쓴단 말이죠. 나쁜 일보다 착한 일에 나섬으로써 내가 악인이 아니고 내 위치는 선인들이 모이는 그 자리가 나의 자리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누구나 그런 마음으로 자부심을 갖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보면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 자기의 기대심리이고요. 이스라엘을 통해서 인간의 본심을 일거에 드러내는 사건들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그게 사무엘상 22장 17-18절에 나옵니다.
사무엘상 22장은 현직에 있는 사울 왕이 다윗을 굉장히 증오하고 미워했어요. 성경에 보면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 악신이 들려서 그렇다는 거예요, 악신이 들려서. 사울 왕이 왜 그런지 자기도 몰라요. 그냥 악신이 작용한 대로 일하는데 그 악신이 노리는 것, 악마가 노리는 것이 ‘다윗을 죽여 없애라’에요. 이유도 몰라요. 그냥 사울 왕의 마음 안에 악신이 장악하고 있으니까 다윗은 무조건 잡아 죽여야 돼요. 이유도 별로 없죠. 악신이 그러는데...
그래서 자기가 이스라엘의 통치자라고 자부하기 때문에 그리고 왕이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니까 부하들은 어쩔 수 없이 왕의 지시에 의해서 다윗을 추적해서 체포하고 살해하는 데에 따를 수밖에 없죠. 안 그러면 자기 목이 달아나니까요.
여기 사무엘상 22장 17-18절에 보면 “왕이 좌우의 시위자에게 이르되 돌이켜 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의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고발치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
아히멜렉이라는 제사장이 쫓겨 다니는 다윗을 도와줬어요. 도와줄 때 나름대로의 합리성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내가 보기에는 하자가 없는 사람이고 또 사울 왕 보기에도 다윗은 사울 왕 집안의 사위거든요. ‘사위이기 때문에 왕의 사위를 내가 함부로 죽이거나 체포할 수는 없지 아니하냐. 다윗은 하나님에 속한 사람이다. 나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다. 그 사람은 나쁜 짓 한 것이 없다.’ 그렇게 편드니까 악신 들린 사울 왕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16절에 “아히멜렉아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요 네 아비의 온 집도 그러하리라” 악신 걸린 인간이 다윗 편드는 인간까지 모조리 몰살하려고 하는 거예요. 완전히 스탈린이나 나치 비슷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많은 제사장들이 모였는데 그 중에서 아무도 다윗을 고발할 사람이 없었어요. 사무엘상 22장 8절에 보면 사울이 아주 화가 나가지고 지금 너희들은 다윗이 내 왕권을 노리고 나를 정복하려 하는데 이러한 하극상에 대해서 그런 나쁜 사람을 나한테 고발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막 성질을 내니까 9절에 “때에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의 신하 중에 섰더니 대답하여 가로되 이새의 아들이 놉에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 이른 것을 내가 보았었는데” 저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줬습니다, 하고 현장에서 고자질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사울은 화를 낸 겁니다.
제가 지금 <방관자>라는 제목으로 하잖아요. 아까도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사람들은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려고 하고 나쁜 일보다 착한 일을 하려고 애를 써요. 그런데 막상 강력한 초월적인 실제적인 권세를 갖고 있는 권력자가 와서 ‘너희들 일방적으로 내가 요구하는 대로 내 편을 들라’ 할 때 ‘아니요’라고 할 수 있냔 말이에요. 어쩔 수 없이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인간이 개인적으로 누구를 소소하게 도와주고 어려운 사람 쌀 주고 돈 주고 할 수도 있어요. 그래놓고는 그게 나의 본질이고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그렇게 우길 수 있단 말이죠. 그러나 그 사람은 아직 권력의 맛을 못 봤어요.
만약에 어느 성도님의 남편이 북한의 고위직에 있다면 그 부인은 행동을 어떻게 하겠어요? 북한의 고위직에 있는데 성도님 집에 예수 믿는 사람이 와서 ‘성도님, 숨겨주세요.’ 하면 ‘나가! 내 마음은 당신을 도와주고 싶지만 우리 집안부터 살리고 보자. 혹시 당신 몸에 위치 추적기 달렸을 수도 있잖아. 당신이 우리 집 오는 길에 CCTV 몇 개나 찍혔는지 내가 알 수 없잖아. 당신 때문에 우리까지 화를 입을 수는 없다. 우리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 내가 잘해줄게.’
그러니까 이 권력의 맛, 싸늘하고 차가운 권력의 맛 앞에서 과연 어느 인간이 자기의 의로움을 나는 계속 유지할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어쩔 수 없이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이 악신 들렸거든요. 그러면 사울을 누가 장악합니까? 악마가 장악하고 있죠. 악마 앞에 어떤 인간도 의로운 티를 내기만 내면 그건 곧 한계와 마주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나는 최선을 다하여 착한 일을...’ 그게 악마의 왁! 하는 그런 엄포나 고함 소리에 깨갱하고 어쩔 수 없어요. 맥도 못 춥니다. 자기 목숨이 아까워서 자기 생명이 아까워서 우선 살고보자는 거예요.
그래서 사무엘상 22장 17절에 보면 여기에 왕의 신하들이 처음에는 제사장 죽이기를 겁내요. 제사장은 하나님의 종이란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데 18절에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이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이켜 제사장들을 쳐서 그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 오인을 죽였고”
괜히 왕의 말 안 듣고 버티다가 왕의 충실한 간신배 하나가 왕의 권세를 등에 업고 85명을 다 죽였습니다. 뭐 북한도 마찬가지겠죠. 북한만이겠어요? 뿐만 아니라 19장에 “제사장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제사장의 가족들까지 그 재산인 가축까지 다 죽였습니다.
그때 살아남은 사람인 죽은 아히멜렉의 아들 중 아비아달이 피해서 다윗에게 왔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뭘 이야기합니까? 나는 어떤 상황이든 어떤 자리든 오직 바르게 한다, 나는 오직 진리만 추구한다고 장담하기가 곤란하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보통은 도와준다고 하지 말고 모든 이 상황이 악마가 통치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면 뭐 위기 때 용감하게 ‘아니요’ 할 것을 자꾸 상상하지 말고 작은 일에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니요’ 라고 할 수 있는 그것이 우리의 말이 아니고 우리 속에 있는 성령께서 우리가 못하는 것을 해내게 해주시는 겁니다. 우리가 더 이상 불의에 대해서 방관자가 되지 않게 하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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