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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미가 2:6-9 / 공통의 거처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미가

미가 2:6-9 / 공통의 거처

정인순 2022. 2. 16. 22:06

음성 동영상 Youtube

 

공통의 거처 

 

이근호
2022년 2월 16일                 

 

본문 말씀: 미가 2:6-9

(2:6)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어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도다

(2:7) 너희 야곱의 족속아 어찌 이르기를 여호와의 신이 편급하시다 하겠느냐 그의 행위가 이러하시다 하겠느냐 나의 말이 행위 정직한 자에게 유익되지 아니하냐

(2:8) 근래에 내 백성이 대적 같이 일어나서 전쟁을 피하여 평안히 지나가는 자들의 의복 중 겉옷을 벗기며

(2:9) 내 백성의 부녀들을 너희가 그 즐거운 집에서 쫓아내고 그 어린 자녀에게서 나의 영광을 영영히 빼앗는도다

‘야곱의 족속’의 특수성은 늘 하나님의 신의 개입의 대상이 되는데 있습니다. 이방나라에서는 여호와의 신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이방나라는 이스라엘에게 지적을 받아야 하는 합니다. 그것은 세상 진리에 대해서 어둡고 오로지 자신이 구축한 그 세계밖에 모릅니다. 예를 들면, 애굽나라가 그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나라에 등장했을 때, 바로 왕은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대꾸합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데?”(출 5:2) 바로왕은 여호와에 대해서 몰라도 그들의 나라가 멀쩡할 것이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 여호와의 그 어떤 요소가 섞이지 않아도 무방하고 여호와와 상관없이 강한 나라로 유지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통보는 곧 애굽나라에 재앙이 되었습니다. 애굽나라의 잘못은 전 세계가 여호와가 개입된 여호와를 위한 세계다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야곱의 족속’ 본연의 존재성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경우는, 이방나라에 관한 것이 아니라 아예 이스라엘 내부가 ‘야곱의 족속’의 위상을 와해해시키고 있었던 경우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여호와의 신과 관련된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미가 선지자가 남북 이스라엘에 대해서 예언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개인의 자격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거의 이방나라화 되어 버린 이스라엘은 미기 선지자의 말에 대해서 ‘욕하고 있다’고 평을 내립니다.

사람들이 그 누구로부터 욕을 듣고 있다고 여기는 경우는, 자기만의 고유한 가치가 훼손된다고 여길 때 나오는 감정입니다. 이 말은 관심사가 온통 자신의 것에 두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 어떤 누가와서 말을 하면 그 말이 진리냐 아니냐로 평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치가 훼손되느냐 여부부터 먼저 따지게 됩니다.

그만큰 자신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면이 티가 나는 겁니다. 미가 선지자의 말은 누가 가진 것을 공격하는 말이 아니라 왜 ‘야곱 족속’ 본연의 의무를 다 하지 아니했느냐를 문제삼는 겁니다. 그렇다면 야곱 족속의 본연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야곱은 아브라함의 자손 국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이유는, 이 지상에 하나님과 인간이 공통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곳이 인간도 죽고 하나님도 죽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이라는 약속의 자손을 갖게 하셨는데 그 이삭의 자리가 공통의 자리입니다. 이삭이 제물이 되어 죽는 그 자리는 하나님의 것으로 제공된 이삭이기에 곧 하나님의 죽음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그 자리는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의 자식이 죽는 자리라서 사람의 자리도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죽는 그 자리로 말미암아 비로소 생명이 등장되게 하십니다. 죽은 이삭은 옆 풀 속에 있는 양으로 말미암아 죽음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양의 대신 죽음의 효과입니다.

바로 이러한 요소가 늘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 아브라함 후손인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입니다. 이방나라에는 없는 요소입니다. 그러다보니 이방나라는 본인들이 ‘살아 있다’고 여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마땅히 죽어야 될 자라는 규명되는 그 어떤 증거도 갖지 못하는 민족이 이방나라입니다.

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방나라에 대해서 이렇게 외칠 수 있는 유일한 민족이라는 말도 됩니다. “너희 이방나라는 살았다고 우기지만 실은 죽은 자들이다. 죽은 자들은 살아 있는 척을 하니 너희들은 필히 죽어 마땅하고 앞으로의 운명도 그리될 것이다” 이 외침의 역할은 오직 ‘야곱의 족속’만이 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역할을 하기는커녕 이스라엘 자체가 내부적으로 이 할 일을 공격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선지자가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과 인간의 공통의 거처는 죽음의 자리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죽음이란 ‘내가 전에 원하는 나를 가질 수 없이 된 상태’를 뜻합니다.

세상 나라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자신이 되기 위해 지식을 확보하려 합니다. 더욱 나답게 되기 위해 지식을 확보하고 그 확보된 지식을 응출하면 법이 됩니다. 법 안에서 지식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방나라의 사회는 법을 아는 자들로 의해 지배를 받습니다. 사회 자체가 법망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항상 법적으로 정리되지 아니하면 그 누가 와서 자신의 것을 빼앗가도 대응할 수단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주신 평화를 맛보며 귀향하는 자들의 옷을 빼앗고 집에서 쫓아내는 일들이 ‘야곱의 족속 내’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나약한 자들입니다. 대항할 법적 지식이 갖추지 못한 자들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신’이 개입할 이유가 되는 겁니다.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지도층에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야곱의 족속만이 특수적으로 지녀야 할 ‘공통의 거처’를 염두에 두기 때문입니다. 가지고자 하는 자들은 아무리 가져도 결핍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금지한 것에 대해서 멈출 수 없는 호기심과 욕망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속성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영이 임한 자들은 모든 일에 매사에 자족하고 만족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족, 혹은 만족이라는 그런 조건 자체에서 끊어져 있음을 감사하는 자어야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에 대해서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사야 53:7에 의할 것 같으면, 하나님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 죽음에 합류된 이 ‘공통의 거처’가 계속 살아 있을 때만 ‘야곱의 족속’입니다. 인간은 여기에 죄인으로서, 즉 죽어 마땅한 존재로 참여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야곱의 족속에 대해서 이스라엘 자체가 도리어 비난하고 나서는 겁니다. 그것은 진리라는 것이 지식에서 볼 때는 너무 나약하고 힘으로 온전히 충족되지 못한 빈 자리가 형성되어 있다고 얕잡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미가 선지자를 보내어, 강자에게 옷을 빼앗기고, 집을 빼앗기는 그들편에 서서 외치하고 하신 겁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인들이 영생을 가졌다고 기뻐하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이 아무 것도 갖지 않고 죽는 바로 그 자리가 이미 마련되고 확정되었음, 자체를 기뻐하는 자들이 곧 주의 증인들입니다.(마 5:11-12)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일을 하지 말고 성령이 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6강-미가 2장 6-9절(공통의 거처)2202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미가 2장 6-9절까지입니다.

미가 2:6-9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어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도다 너희 야곱의 족속아 어찌 이르기를 여호와의 신이 편급하시다 하겠느냐 그의 행위가 이러하시다 하겠느냐 나의 말이 행위 정직한 자에게 유익되지 아니하냐 근래에 내 백성이 대적 같이 일어나서 전쟁을 피하여 평안히 지나가는 자들의 의복중 겉옷을 벗기며 내 백성의 부녀들을 너희가 그 즐거운 집에서 쫓아내고 그 어린 자녀에게서 나의 영광을 영영히 빼앗는도다”

야곱의 족속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7절에 나오지요. “너희 야곱의 족속아” 야곱의 족속이라는 표현을 하시는 이유가 야곱 안에 하나님의 요소가 함께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민족에게는 그런 경우가 없지요.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이 실현되어 가는 나라는 없습니다. 이스라엘만, 야곱의 족속에게만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야곱의 족속을 건드리는 것도 하나님을 건드리는 것이 되지만 이스라엘 내부에서 야곱의 족속의 특징,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 요소라는 그 특징을 야곱 나라 자체가 건드려도 하나님께서는 가만있지 않습니다. 들고 일어납니다. 누가 들고 일어나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 임한 선지자가 들고 일어나지요.

그런데 이 선지자가 말을 하니까 그 당시에 야곱의 족속, 이스라엘이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의 지도자가 말하기를 ‘너 왜 자꾸 우리에게 욕을 하느냐?’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까 그들의 평이 이렇습니다. “너는 사람 만나면 욕만 하는 것이 취미냐?” 이런 식의 평가, 선지자에 대해서 그런 평가를 해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선지자가 말하기를 7절에 “너희 야곱의 족속아 어찌 이르기를 여호와의 신이 편급하시다 하겠느냐” 편급(褊急)이라 하는 것은 성급하다는 뜻인데요. 여기에 사람들은 그 선지자를 자기하고 같은 인간으로 취급해서 “너나 나나 같은 인간인데 네가 뭔데 우리한테 그렇게 욕을 하느냐?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우리에게 그렇게 대드느냐?”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선지자가 여호와의 신을 언급한다는 것은 “내가 말한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신, 그리스도의 영이 너희들에게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것은 내가 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너희에게 직접 이야기한다”라고 이렇게 그들에게 대꾸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이 임한 사람, 그것이 바로 야곱의 족속이 유지해야 될 하나님의 특성이거든요.

그런데 이런 선지자, 미가 선지자를 향하여 욕한다 하는 사람들은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느냐 하면, 인간치고 별난 존재가 없다는 겁니다. 인간치고. 사람치고 뭐 유별난 인간은 우리는 인정 못 하겠다는 거지요. 그럴 줄 알고 미가가 하나님의 영을 언급한 거예요. 하나님의 신. “내가 말한 것이 너희에게 상당히 속이 좁고 성급한 처사로 보이느냐? 내가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신이 곧 하나님이 하나님보고 ‘하나님은 왜 그리 성질 급합니까’라는 식이 된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미가의 발언은 뭐부터 규정을 해야 되느냐 하면, ‘미가가 이야기하는 것이 개인적인 견해 사견에 불과하냐? 정말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어서 이것은 사람이 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말하는 것이냐?’ 그것부터 먼저 규정지어져야 되는 겁니다.

이것은 오늘날 내가 장래에 천국 가기 위해서 하나님 믿는 것이냐, 아니면 성령이 와서 내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원했던 것이냐에 대해서 우리 자신부터 먼저 규정이 되어야 돼요. 내게 필요해서 하나님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필요해서 나냐, 하는 것부터 정립이 되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 세상에 둘러싸여서 그들의 평에 맞춰주려는 그러한 생활 속에 빠져들어 갈 수가 있어요.

“내 생각에는요……” 이렇게 시작하면 그것은 안 된다니까요. ‘내 생각에는……’ 이런 식. 마태복음 10장 20절에 그런 말씀 있잖아요. 이젠 네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네 속의 성령이 이야기한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얼마나 도발적이고 용감한 발언입니까? 공격적이고요, 적극적이고.

상당히 용감한 발언이지만 그 발언을 내뱉는 순간 그것은 바로 저쪽, 주위의 다른 일가친척이나 식구들, 친구들로부터 한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뭐냐 하면, “너같이 하나님의 영이 임했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내가 성령 받았다는 사람을 한 두 명 만난 것이 아닌데 나중에 오래 살다 보니까 별것 없더라.”

심지어 남편이 “내가 성령 받아서 예수 믿는다” 할 때 누가 가장 그것을 콧방귀 뀌면서 ‘놀고 있네’ 하고 누가 비웃냐 하면, 아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너를 알아. 네가 성령을 받아? 개가 웃겠다. 아이고~, 성령 받은 꼬라지……’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그때 ‘음매 기죽어’ 기가 팍 죽는 거예요. “당신은 그만 입 다물고 있어라. 내 비밀을 소상히 알고 있는 당신은 입을 다물어라. 내 말이 안 먹히잖아.” 이렇게 나오는데 지금 말이 먹히라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선지자가 이런 말을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신 다시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과 자기를 연결시키는 이유가 뭐냐 하면, 세상나라에 대해서 설명할 때는 그럴 필요 없겠지만 이스라엘 족속, 야곱의 족속이라고 말 나올 때는 이 야곱의 족속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하거든요.

우리가 세상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내가 남들 앞에 얼마나 내 모습이 정당해 보이느냐, 남이 인정해주느냐, 그것만 자꾸 챙기는데 사실은 그렇게 살면 안 되고요, 하루하루 살면서 무엇이 되어야 되느냐 하면, 인간세계에 대해서 늘 설명하는 자세로 인생을 살아가야 돼요. 하루를 살더라도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는구나, 하고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세상 전체를 포괄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자, 이게 바로 여호와의 신이 임한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고 반대편에 있는 사람, 그 사람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도 상관없이요, 자기만 맘 편하고 자기 소원만 그때그때 달성되고 자기 뜻대로만 되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든 그것은 설명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성도는 세상에 대해서 일관성 있게 일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그러한 유일한 족속인데 그게 이스라엘이거든요, 그런데 세상 민족은 ‘세상 전체 알아서 뭐할 건데? 나한테 이익되는 것만 알면 되지’ 이런 식으로 흐릅니다.

기숙사에 두 사람이 같이 있다면, 성도는 세상에 대해서 세상 전체를 한꺼번에 말할 수 있는 그런 능력과 자질이 내부에서 올라오는 사람인 반면에 저쪽에 같이 사는 성령이 없는 사람은 내 수건 쓰지 말아라, 우리 비누 따로 쓰자, 치약 너무 많이 짜지 마라, 그저 코앞에 있는 자기밖에 몰라요. ‘오늘 아침 몇 시에 주는데? 반찬 뭐 나오는데?’ 그것밖에 모른다고요.

동대구역에서 구포까지 무궁화를 타게 되면 밀양 근처에서 만나는 건물에 크게 글자 써진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밀양깻잎협동조합”입니다. 자, ‘밀양깻잎협동조합’이 뭘 연구하고 무슨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이겠습니까? 떡잎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깻잎이에요, 깻잎. 우주탐사하는데 아닙니다. 석유개발하는데 아니에요.

그냥 밀양에서 나는 깻잎 있잖아요. 그것만 연구하고 그것 가지고 장사하면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밀양깻잎협동조합’ 할 때 ‘야, 저 사람은 깻잎만 온종일 생각하겠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다른 사람도 자기 직업에 관련되는 것만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있어요.

대대로 집안에서 중화요리 집 하는데 아버지로부터 그것을 물려받은 사람, 하루도 쉬지 않고 쉬는 날도 없이 매일 문 열고 장사하는 사람에게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서 설명해 보세요, 라고 하면 그런데 관심없어요. 직접 그들이 온몸으로 체득이 되는 관심은 뭐냐 하면, 양파값 오르고 감자값 오르는 그런 겁니다. 짜장면값이 원가에 맞겠나, 탕수육 이게 수지가 맞겠나,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미가 2장 6절에서 선지자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예언을 하는데 저쪽에서 욕을 한다는 말은 서로가 서로에게 분노와 분노의 대결상태에요. “너 왜 나한테 욕하는데?” 자, 한번 생각해 봐야 돼요. 이방 민족 같으면, “네가 뭔데 우리에게 달려들고 우리에게 시비를 거느냐? 자꾸 나 화나게 할래?”라는 말이 이방 민족 같으면 수립이 돼요.

왜냐하면 이방 민족은 대표적인 것이 애굽나라지요, 애굽에 있어서, 바로왕에 있어서 그 자체적인 국가체제 그것만 확보하게 되면 바로왕으로서는 훌륭한 통치지가 되고 훌륭한 왕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바로는 모세보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 “여호와가 누구냐? 굳이 내가 여호와를 알 필요가 뭐가 있는데?” 한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만약이 아니지요, 모세가 여호와 모른다고 재앙이 임할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왜 모세 네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서 우리 민족 전체를 모독하고 우리를 욕하느냐?” 그런 말 당연하지요. 네가 뭔데 우리한테 와 가지고 “우리 히브리 백성 안 내놓으면 너희는 재앙을 받는다” 이것은 일방적으로 시비 거는 것이고 화나게 만드는 거예요.

우리가 애굽백성 입장, 바로 입장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할 일은 내 살 궁리, 내가 할 일만 하면 되지 이거 하늘나라 그것까지 골치 아프게 왜 굳이 그것까지 다 알아야 돼요? 월급 주면 월급 받는 그 일만 하면 되지 왜 하늘나라 그것까지, 그걸 왜 생각해야 됩니까? 그들의 말이요 충분히 일리가 있는 겁니다. 이방 나라라면, 하나님의 영이 개입되지 않는 그런 나라라면 그들 말이 충분히 자체적으로 정당하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이 이스라엘이 뭡니까? 야곱의 족속은 할 일이 있잖아요. 야곱의 족속의 할 일은 시비 거는 거예요. 세상나라한테 시비 거는 겁니다. 그 시비 거는 근거가 뭐냐 하면, “너희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다. 그런데 왜 자꾸 살았다고 우기느냐?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분노하신다” 딱 요 내용이에요.

못 들으신 분 위해서 다시 말씀드리면 “너희들은 살아도 산 게 아니고 그것은 죽은 거야.” 그것까지는 괜찮지요. 그다음에 두 번째 “죽었는데 왜 자꾸 살려고 하느냐?” 또 “살아 있는 척하고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우기느냐?” 세 번째 “그래서 하나님이 너희를 향하여 분노하고 화를 내고 있다.” 요 이야기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좀 터무니가 없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 사람들은 자기 일만 생각하면 되지 세상 전체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 있고 하나님의 지시를 받기 때문에 이스라엘 뿐만 아니고 이방 나라 전체까지 전부 다 아울러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나라, 민족이고 하나님이 빠져 있으면, 언약이 빠져 있으면 그것은 죽은 나라다. 따라서 죽은 나라한테 찾아가서, 다가가서 너는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회개하고 항복하면 사는 쪽으로 귀순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다 밀어버려라, 하는 그 사명과 그 역할을 이 야곱의 족속이 부여받은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그 이방 나라 간섭할 잽이 못됩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그 야곱의 족속은 내부가 야곱 나라 족속 이스라엘의 그 본질에 대드는 식의 경향들이 이미 전염병처럼 확산되어 있어요. 그들에게 율법이 있지만 율법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신경도 안 쓰고 관심도 없지요.

율법이 축약된 것이 선지자거든요. 그래서 선지자를 보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 우리의 본래의 역할이 있다, 이렇게 하니까 그들이 말하기를 “너 왜 나한테 욕하는데?” 이런 식이에요. 복음을 아는 목회자는 정말 그걸 많이 경험합니다. 복음 아는 목회자 자체가 별로 없지만.

노회나 시찰회 가서 복음을 이야기하게 되면 그 주변에 있던 목사들이 “조용하게 있다가 좋은 자리나 나거든 바꿔치기해서 가기나 하지 왜 우리를 건드리느냐? 너는 왜 입만 열면 욕을 하느냐?” 실제로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욕한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욕을 들을 만한 가치가 없는 인간들이에요. 있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욕을 해서 뭘 얻겠다고요? 욕해서 내 편 만들려고 그런 노림수 같은 것 없습니다.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욕하는 게 아니고 욕한다는 생각 자체가 뭐냐 하면, 지킬만한 자기 가치가 있다고 하니까 너 왜 나한테 욕하느냐고 하는데 욕 들어먹을 대상이 된다는 것도 아주 대단한 가치에요. 그러나 욕 들어 먹을 가치도 없어요. 욕도 뭐 희망이 있어야 욕을 하지 죽은 인간인데 무슨 욕을 합니까? 죽은 자에게, 시체보고 욕 해보세요. 무슨 가치가 있겠어요?

죽은 자를 죽은 자라고 선포하는 거예요, 그냥! 이걸 다른 이방 민족한테는 할 필요가 없지만 이스라엘한테는 해야 되는 거예요. 선지자가! 왜냐?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살려내라고 선지자를 특별히 파견했기 때문에 선지자 입장에서는 욕한다고 하든 뭐라고 하든 간에 거기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영이 너희들 속에 관여하고 있는 이 현실을 현실대로 노출 시킬 필요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좀 더 깊이 있게 나가봅시다. 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파견시키느냐, 하는 그 문제에요. 왜 파견시키느냐? 그것은 처음에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자손의 국가잖아요. 아브라함언약이 살아 있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거기서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오시면 되는데 왜 아브라함을 선택했느냐 하면, 하나님과 아브라함 인간 사이에 그 공유, 공통의 바탕이 되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공통으로 같이할 수 있는 자리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심으로서 그걸 지상에 마련하는 거예요.

그건 뭐냐 하면, 너도 죽고 나도 죽자, 같이 죽자는 공통의 자리를 마련하는 겁니다. 그렇게 만든 것이 이삭이라는 자리에요. 이삭의 자리는 죽음으로써 이삭이 일반인과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겁니다. 멀쩡한데 하나님께서 “죽어!”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이 죽으라고 한 명령을 받음으로써 이삭은 보통 인간이 아닌 별난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러나 세상 나라에서는 자기가 남보다 뛰어남으로써 별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점을 쉽게 가기 위해서 성경 말씀 이사야 53장을 읽어보겠습니다. 7절에 보면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 양은요, 어떤 분이 계신데, 어떤 분이 오시는데 그분은 지금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의 모습처럼, 양처럼 잠잠하게 죽음인줄 알면서도 그냥 끌려갈 뿐이에요. 이것은 죽음의 현장입니다. 이 죽음의 현장이 야곱의 족속의 핵심부를 차지하는 거예요. 자리 잡고 있는 겁니다.

야곱의 나라라는 것은, 하나님과 야곱이 함께 하려면 그 함께 하는 자리가 사람도 죽은 자고 그리고 하나님도 죽은 자다, 같이 이 땅에서의 존재란 죽은 존재다, 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죽은 모습으로 합세할 수 있는 그 공통의 자리가 있어 줘야 그게 야곱의 족속이고 그게 이스라엘이고 오늘날 교회입니다.

교회라는 것은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죽었음을 확인하는 그 자리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활동하는 영역 공간이 교회에요. 그래서 그분이 범죄자로 취급받아서 죽음으로써 얻은 효과가 뭐냐? 이사야 53장 12절에 보면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분이 죽었다 이 말이지요.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죽지 아니하게 되면, 이 말씀에 의하면, 죽지 아니하게 되면 범죄자를 용서할 수 있는 그런 어떤 바탕도 그 현장에는 없다, 가 돼요. 죽지 아니하면, 누가 죽지 아니하면.

그러니까 죽을 때 그냥 죽으면 안 되고요, 대신 죽지 아니하면, 흠 없는 분이 대신 죽지 아니하면 어떤 경우라도 죄인이 죄사함 받는 경우는 성립되지 않는다, 라는 것을 실제로 이스라엘 야곱의 족속 안에 담아두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이 이 세상 나라하고는 어떤 차이가 나느냐 하면, 세상 나라는 이렇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게 되면 어떤 아주머니가 애 둘 낳았어요. 큰애는 여섯 살, 작은 애는 세 살인데 그렇게 낳아놓고는 애 키우기 싫다고 바람나서 애는 시가에 맡기고 다른 남자하고 가버렸어요.

떠난 지 몇 년인가, 54년이 되었어요. 애들이 커서 큰애가 벌써 60이 넘었지요. 동생은 큰애 보다 세 살이 적으니까 누나가 62세입니다. 그런데 남동생이 배 타고 가다가 배가 침몰되어서 실종이 되고 죽은 것으로 확정되어서 보험금이 2억5천에 위로금 5천 해서 3억이 있었던 모양이지요.

그런데 그 동생이 결혼도 안 했어요. 결혼을 안 했으니 부인도 없고 자식도 없습니다. 그런데 54년이나 지나서 그 떠났던 엄마가 변호사 데리고 나타나서는 내 애 보험금 내놔라,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이 세상 나라는요, 법망으로 구성된 나라에요. 법은 뭐로 구성되었는가? 지식이 함축된 것을 법이라 해요. 지식입니다.

지식은 뭐가 아니냐? 진리가 아니에요. 이 세상 사람은 철저하게 법적으로 정리가 되어 있어야 됩니다. 법적으로 정리가 안 되면 그것은 사달 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이방 민족들이 생각하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살기 위해서 지식이 필요하고 그 지식을 뭉쳐놓은 것이 법이에요. 그래서 이 사회를 지배하는 사람들이란 그 지식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들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식을 함축한 것이 법이라면 지식이 많이 함축된 법을 아는 사람, 서울법대 출신이지요, 뭐. 사법고시 출신들이지요. 대선후보들 나오는 것 보세요. 전부 다 사법고시 출신들 아닙니까? 법 알고 다루는 사람들이잖아요. 지식으로서 구성된 관계망, 이게 세상입니다.

지식은 그렇게 이방 민족적인데 오늘 미가 2장을 봅시다. 8절에 “근래에 내 백성이 대적 같이 일어나서 전쟁을 피하여 평안히 지나가는 자들의 의복중 겉옷을 벗기며 내 백성의 부녀들을 너희가 그 즐거운 집에서 쫓아내고 그 어린 자녀에게서 나의 영광을 영영히 빼앗는도다”

북쪽 남쪽 가릴 것 없이 야곱의 족속의 지도자들이, 쉽게 말해서 법을 아는 자들이,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아는 자들이 힘없는 자들, 이 백성의 부녀들,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 자기들은 그저 하나님 덕분으로 전쟁을 피해서 평안히 가는데 이 하나님이 주신 평안함을 누가 빼앗는가, 이런 법을 아는 지식을 아는 자들이 그 평안함을 빼앗고 겉옷을 벗겨서 그들로 하여금 고통 속에 몰아넣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미가 선지자가 이스라엘 보고 하는 이야기는 “너희들은 왜 지식으로 사느냐?” 그 말입니다. 왜 아는 것으로 사느냐, 그 말이에요. 이방 민족 같으면 “이게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사람이 뭘 알아야 밥 먹고 살 게 아닌가?”라고 할거겠지요. 그러나 적어도 선지자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성령의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인정한다면 ‘아, 우리는 힘으로 법으로 사는 민족이 되어서는 안 되고 진리로 살아야 된다.’ 이방 민족은 지식으로 뭉쳐진 나라인 반면에 야곱은, 이 야곱의 족속인 이스라엘은 진리가 핵심 부분인 곳에서 살아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진리가 뭔데?’ 이렇게 나오겠지요. 진리란 뭐냐? 지식에 의해서 횡포 받음을 당하는 쪽,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지식은 살고자 할 때 필요한 게 지식이라면 진리는 하나님의 죽은 자리에 나도 같이 죽어 마땅합니다, 하고 자기 자신의 죽음을 당연시 여기는, 사는 것과 반대되는 그 죽음을 당연시 여기는 게 진리에요. 그게 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공통의 자리입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이삭은요, 태어나면서 할 일이 있어요. 그건 뭐냐? 죽는 것이 이삭의 할 일이에요. 죽는 것이! 그 이삭의 자리가 제물의 자리고 그 이삭의 자리가 아브라함 너도 죽고 하나님 나도 같이 죽자, 그럴 때 그 이삭은 옆의 양 때문에 죽은 이삭이 다시 부활되잖아요. 다시 살아나지 않습니까?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 다시 말해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필히 반드시 죽는 자리에 하나님이 마련한 죽는 자리에 같이 참여하는 자, 그 사람만 생명, 진리, 영생의 삶을 살 수 있는 진정한 야곱의 족속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이방 민족, 특히 지식은 뭐냐? 뭐가 결여되어 있는가? 이 죽음요소가 결여되어 있어요. 죽음요소가 결여되어 있고 사는 것 보면 힘으로 뺏기를 원하거든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 아무리 많이 가져도 자꾸 결핍을 느끼게 되어 있어요. 이만큼 가졌으니까 더이상 나는 욕심내지 않겠다, 라는 이것은요, 인간의 본래 모습이 아니에요. 인간은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 따먹지 말라, 그 ‘말라’ 하는 그 금지의 명령 하나에도 호기심을 잔뜩 노릴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에요. 하지 말라, 하니까 더 따 먹고 싶은 게 인간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아무리 가졌더라도 그걸로 만족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에 속한 사람은, “저 이방 사람들은 부족을 느끼고 불만을 느끼지만 우리는 만족하면 되겠네요.” 아니에요. 우리는 만족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는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끊어짐의 조건에 충족이 된 사람이지요. 끊어짐의 조건에.

죽음이란 뭐냐 하면, 내가 생각하는, 내가 원하는 그 전의 나를 내가 가질 수 없다는 거예요. 내가 나로부터 끊어짐을 속 시원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제 여러분 속 시원하지 않습니까? 날씨도 추운데. 내가 나에 대해서 ‘빠이빠이’ 했다는 것, ‘아듀’ 했다는 것, 내가 이룰 없는 것 주께서 이뤄주신 것에 대해서 너무나 속 시원하게 느끼는 거예요.

그리고 나한테 주시는 것은 다 주님이 필요해서 주시는 것이지 내게 필요해서 주는 게 아님을 깨닫는 것, 이게 바로 하나님과 우리 성도가 같이 있는 공통의 자리에요. 그래서 이 진리의 자리, 다시 말해서 죽음의 자리는요, 세상의 지식으로 무장된 사람 보기에는 항상 뭘 느끼느냐 하면, 거기에 빈자리가 있다고 투덜대고 불평하는 거예요. 빈자리가 있다고.

“너는 뭐 남자가 되어서 욕심도 없나? 그 점수 가지고 서울의대 들어가나? 재수를 하든지……” 이런 식이에요. 그래서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게 되면 이 주의 복음, 십자가 복음으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나약하게 보는 거예요. ‘굉장히 나약한 사람이다.’

그 나약한 사람이다, 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미가 2장 8절과 9절에서 이것이 이스라엘 내부에 핍박받는 자의 모습으로 이 요소가 내재 되어 있다고 보는 거예요. 다른 민족한테는 약한 자 학대하고 입 싹 닦으면 그만이지만 이스라엘 야곱의 족속은 그럴 수가 없어요. 야곱의 족속에게 벌어지는 일은 장차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지식 위주로 힘 위주로 엘리트 위주로 사는 사람으로 인하여 어떤 피해가 발생 되는가, 를 이미 메시아 오시기 전에 미리미리 약한 자를 통해서 핍박받는 자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끝은 바로 성령 받은 예수님 자신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할때 사람들은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고 실익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예수님을 죽여버린 겁니다. 그들은 바로 왕과 같이, 또는 국가 이방 나라와 같이 하나의 힘으로 구축된 단단한 유대 나라를 늘 생각한 거예요. 25년째 중화요리 집 하는 것처럼 그들은 그냥 내 것만 지키면 된다, 생각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게 되면, 예수 하나 죽여서, 로마가 제공하고 우리에게 허락한 이 자유마저 빼앗기지 않도록 하나를 죽여서 우리 많은 유대민족이 사는 것이 정치적으로 이익이 있다, 해서 죽여버리겠다고 나옵니다. 그 당시 대제사장이 그런 결정을 했어요. 49, 50절에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이 일, 오늘 미가 2장 8절과 9절에 나오는 그 아무 힘없이 당하기만 하는 그런 모습으로 예수님이 오시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미가 선지자는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을 통해서 바로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너희 안에 하나님의 뜻에 위배 되는 이런 일들이 지금 자행되고 있잖아, 그게 네가 하나의 나약한 백성들 부녀들을 건드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건드린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니까 그 이야기를 들은 그 당시 유대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가 미가 선지자보고 “너는 뭐 우리 만나기만 하면 욕하네” 이런 식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들려지느냐 하면, 이 불신자한테는 늘 욕하는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어요. “너는 왜 내가 잘되는 게 그렇게도 싫어?” 이런 식이에요. “내가 떵떵거리면서 살고 내 노력으로 이만큼 성과 얻은 게 그렇게 속이 아프고 배가 아파? 내가 망했으면 좋겠니, 그럼?” 이런 식이에요.

그러나 선지자나 성도가 하는 일은, 왜 하나님과 너의 공통의 자리에 대해서 네가 왜 말 할 줄을 모르냐, 말을 왜 못하느냐, 는 말이지요. 공통의 자리. “내가 사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죽고 내가 함께 죽은 바로 이 자리입니다, 라는 그걸 왜 못 내놓느냐?” 이걸 지금 선지자는 촉구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이 모든 세상이 다 설명이 가능해요.

여러분, 세상의 비밀을 아는 재미를 느껴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세상의 비밀을 아는 재미. 하나님께서는 반대를 도입해서 세상의 비밀을 파헤치는 방식을 사용한 겁니다. 반대. 이 세상, 자연스럽게 역사적으로 흘러가는 이 세상에 대해서 반대를 외치는 사람, 그 반대를 외칠 때 보통 정치적으로 반대를 외치잖아요. 혁명을 부르짖잖아요. 촛불 집회하잖아요.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뭐냐? 반대가 되게 되면 옛날보다 더 좋은 사회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좋은 민주주의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내가 원하는 세계로부터 끊어짐을 이야기하지 않아요.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 후손들에게 물려줄 더 살기 좋은 ‘아, 대한민국! 짝짝짝……, 대한민국!’ 이거 위해서 우리는 제대로 대통령 뽑고 제대로 선거해야 된다. 안 그러면 촛불 집회 또 일으킬 거야.”

하지만 야곱의 나라는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서 죽었던 그 죽음의 자리가 그게 바로 진리의 자리라는 말입니다. 그게 진리의 자리고 그것은 어떻게 해보자, 가 아니라 이미 그것은 확정되고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새삼스럽게 개선하고 더 나은 쪽으로 가보자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세상에 대해서 너희가 아는 게 없다는 거예요. 밀양사람들은 그냥 깻잎, 깻잎밖에 몰라요, 그 동네 사람들은. 설교 제목을 ‘깻잎’으로 해야 할까 보다.

지식으로, 세상적으로 볼 때에 우리는,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항상 빈자리, 공백의 자리를 갖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 그 빈자리, 공백의 자리가 중심 자리인데 그것은 내 자리가 아니고 나를 죽은 자로 늘 말씀하시는 주님의 자리가 남들 보기에는 보이지 않지만 성도한테는 주님의 자리가 우리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거예요.

너는 이미 죽었고, 이제는 하나님의 그 진리 있잖아요, 십자가라는 진리, 그거 증거 하라고,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증거 하라고 우리를 성도 되게 하신 겁니다. 모세가 “여호와를 아느냐?” 할 때 애굽나라 바로가 하는 말이 “내가 굳이 그 여호와를 알 이유가 없다. 참, 같잖다!” 하는 식으로 했지요.

그런데 유월절 사건 일어났을 때 그 애굽나라 바로왕 아들 죽었잖아요. 그들은 모세가 전하는 것이 그냥 모세의 개인적인 이념, 이데올로기, 사상, 개인적인 종교, 이렇게 했지 현실이 아니라고 본 거예요. 왜? 현실은 진리가 현실이 아니고 지식, 힘의 뭉텅이가 현실이기 때문에 그래요. 얼마나 많은 힘을 가졌는가, 그것보다 더 확실한 현실이 없다고, 그게 우리를 살린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진리에 속한 이 이스라엘, 야곱의 족속은 ‘어떻게 하면 삽니까?’를 더는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왜? 본인이 죽었으니까. ‘이제 예수 믿고 살아야지’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예수 믿고 산다는 것은 저 이방 민족하고 똑같은 거예요. 돈으로 사는 것이나 예수 믿고 사는 것이나 어떤 목적으로 내가 사는데 두면 똑같은 불신자들입니다.

사는 게 아니고 주께서 우리에게 외치고 있는 그 진리를 남들이 나약하다, 너는 허술하네, 어떤 소리를 해도 상관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를 전하는 것, 이게 진리가 갖는 힘이요 자유 아닙니까? 제가 부산강의에서 검침원이라 했는데 그 검침원이 바로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집의 가정형편이나 그런 소리 하지 말고 “가스 검침하겠습니다. 이만큼 썼네요.” 그것만 하면 되듯이 그 가정에 어린양의 피, 다시 말해서 이 가정이 자기가 죽었음을 아는가, 하나님과 함께 죽었는가, 십자가에 함께 죽었는가, 그것만 외치고 전하면 되는 거예요.

마지막 으로 마태복음 5장 11절과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을요, ‘예수 열심히 믿으면 당신은 영생 얻기 때문에 당신이 영생 얻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지금 그런 뜻이 아니에요.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 일이 아닌 점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나와 상관없다는 점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거예요. 그것도 항상 왜 내일이 아니니까. 보너스 탄 것이 내일이 아니잖아요. 주의 일이잖아요.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선지자들은 이처럼 아무 구애받지 않고요, 선지자들은 뭐 거칠 것이 없는 그런 사람이 선지자입니다. 왜?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영이, 성령이 크게 작동하고 작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객기를 부릴 일도 아니고 용감하라는 말도 아니라, 어쩔 수 없고 그럴 수밖에 없는 명확한 이 현상을 우리가 더 이상 감추거나 참거나 하지 말고 거침없이 외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