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변화산사건 211024 본문
변화산사건 211024
설교:이근호
녹취:정인순
오늘은 예수님의 영광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려고 제자 3명하고 따로 산위에 올라갔어요. 제자 세 명과 올라간 기도는 여기 말고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했는데 그거는 그 이전 겟세마네는 나중이고. 그 이전에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산에 변화산에 세 명과 올라갔습니다. 올라갔는데 제자들은 몸이 멀쩡하게 그대로 있는데 예수님의 몸이 점점 더 변하기 시작했어요.
아직까지 모세와 엘리야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만 하는 거예요. 같은 산 고도로 올라가는데 여기 뭐 산 공기가 좀 달라서 그런가. 예수님의 옷이 영체로 벼하는 거예요 영체. 천사의 옷처럼 천사처럼 변하는 거죠. 천사가 어떻게 생겼느냐를 여러분이나 저나 본 적 없지만 상상을 하잖아요. 그 드라마 보면 영화에 보면 나오잖아요. 천사가 도대체 이거 실체인지 실체가 아닌지 분간 못하게 희미하게 나타나죠.
그 눈부신 거, 눈부신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변하기 시작하더니만 그다음 절차가 뭐냐 하면 예수님만 변했다고 생각하는데 그 변화된 예수님 옆에 갑자기 어떤 모세와 엘리야가 같이 등장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모세와 엘리야를 본 적이 없다는 사실. 왜? 출생년도가 짧아가지고 옛날에 죽었던 모세 엘리야가 나타나도 모세인지 엘리야인지 모르는 거예요. 모르는데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이상하게 그쪽 분위기가 어떤 분위기인지 그걸 단박 그게 알아봤어요. 저 분은 모세고 저 분은 엘리야고.
여기서 우리가 구약 성경에서 모세가 구원을 받았겠느냐 안 받았겠느냐 라고 따지는 구원의 기준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뭐냐 하면 옛날에 목사님이 젊었을 때 악한 얘기를 갖고 나왔다 하면 나오는 사람이 허장강입니다. 그 허장강의 아들이 역시 악한 일을 하는데 허준호예요. 그 허장강을 보면서 사람들은 허장강을 생각하면서 허장강이는 분명히 악한 역할을 하는데 나쁜 사람이다. 이렇게 죽으면 지옥 간다고 애들은 생각해요. 아주 나쁜 일을 하는데 나쁜 역할을 그냥 하는 게 너무너무 잘하니까. 저 사람은 지옥 갈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이 세상에 구약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나쁜 일을 하니까 저거는 반드시 지옥 갈 것이라고 사람들은 그렇게 짐작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짐작하면서 인간들이 구축하는 게 뭐냐? 왜냐하면 나는, 나는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선지자나 저런 사람들을 절대로 나는 마음 아프게 하지 않고 그 말대로 고분고분 착하게 살아야지. 저 구약에 있는 나쁜 사람처럼 살지 않고 바리새인처럼 살지 않고 내가 착하게 살아야지 라고 다짐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바리새인인데. 우리가 태생 자체가 바리새인이에요. 태생 자체가. 남 이야기하듯이 그렇게 하고 있다 이 말이죠.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했잖아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잖아요. 바리새인도 예수님에 대해서 좋지 않게 생각했잖아요. 가룟 유다도 예수님에 대해서 좋지 않게 생각했죠. 그렇다면 예수님을 좋게 생각한 사람은 극소수예요. 제자부터가 뭐 예수님보다는 내 목숨이 우선이다 해가지고 도망친 사람들이 제자들이에요.
그 제자들이 그 사고방식,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구약 성경을 모세와 엘리야를 평가할 때 제대로 봤겠어요. 못 봤죠. 어쨌든 간에 거기에 보니까 놀라운 것은 모세는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간 사람은 다 죽어서 지옥 간다. 그렇게 설명을 해줘야 사람들이 일반 성경 모르는 일반 사람들이 수긍을 하니까 역시 우리 목사님 참 성경 화끈하게 깔끔하게 증거한다. 모세는 못 들어 간다. 모세를 본받지 말고 우리는 여호수아처럼 되자.
그러면 유월절에 피 바른 사람들 다 지옥 갑니까? 목사님 홍해를 건넜는데 요단강 못 간 사람들은 중간에 죽은 사람들 멸망하고 다 지옥 갑니까? 예. 지옥 갑니다. 니나 지옥 가지. 니나.
도대체 구원관이 뭐냐? 어떤 사람이 지옥가고 어떤 사람이 천국 가는 그 기준이 뭐냐? 그 기준은요, 그 기준은 주님한테 일임하세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선택 할 자격이 없기 때문에. 내가 내 인생을 선택할 권한도 자격도 없어요.
지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그냥 왔다. 그냥. 그냥 나타난 거예요. 이걸 돌발적이다. 또는 우발성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이벤트, 사건이란 뜻이거든요. 그냥 사건이 들이닥친 거예요. 실제로 사람들의 일상에도 그런 게 있잖아요. 자기가 생일인 줄 몰랐어요. 그리고 집에 들오왔는데 집안에 불이 꺼졌어요. 정전인가, 그런데 문 여니까 “서프라이스!” 해가지고 뭐 옷 모자 이상을 쓰고 팍팍팍 올리면서 불 켜고. “해피버스데이 투 유. 아빠 사랑해요. 아빠 뭐 좋아해요?” 뭐 하면서 “생일 축하합니다.” 해서 파티, 즐거운 파티를 이 열어줄 때 그게 써프라이즈예요.
예상도 못했는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걸 보면서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좋겠다. 좋겠다. 세상에 주님이 해같이 빛나고, 모세 엘리야도 다 만나고. 아 정말 좋겠다. 하는데 성도는 이 변화사의 일이 매일 일상입니다. 매일 써프라이즈예요. 매일 깜짝 깜짝 놀랄 일이 있습니다. 그걸 우리가 늘 주께서는 깜짝 놀랄 이벤트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너무 자기 일에 정신이 다 팔려가지고 주께서 활동한다는 거 모르고 내가 활동한다에다가 몰입을 해버리니까 죽게 해서 “써프라이즈!” 해도 우리는 “뭐? 그날이 그날인데.” 그날이 그날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은 새롭게 알게 되는 그 나라 의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되는 게 이게 새로움이 없어버리면 우리는 이게 내 날이 되고 내 인생이 되고 내가 활동하는 것만 느껴지는 날이 돼요. 이건 비참하고 처참한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써프라이즈, 깜짝 놀라게 했죠. 모세가 약속의 땅에 분명히 못 들어왔어요. 못 들어갔는데 보니까 모세가 “누구야? 내 보고 천당 못 간다고 한 사람 누나야? 나와! 누구야? 나보고 지옥 갔다는 사람 누구야? 그런 잘못된 해석을 가르치는 사람 누구야?” 이렇게 묻는 거예요.
해석 다시 해야 돼요. 어떻게 해석하느냐? 성경에서 어떤 특정 인간이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갈 때는 그거는 모세라는 이름으로 나를 지칭하는 거예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핍박하게 되면 바리새인이라는 것도 아담의 후손이고 나도 아담의 후손의 입장에서 바리새인 요소가 내 안에 여기에 잠복돼 있는 겁니다. 병이 잠복돼 있듯이요. 병균이. 내 안에 바리새인이 잠복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 바리새인 이야기는 내 이야기인데, 하고 끄집어내는 순간 내 몸 자체가 주께서 일하시는 작업의 현장. 곧 구원의 현장입니다. 내가 구원받고 네가 구원받고가 아니라 모세는 모세대로 그 당시에 주께서 일하는 현장이었고 엘리야는 엘리야대로 일하는 현장이에요.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엘리야는 죽을 때 불수레 타고 올라갔다 정말 멋있다. 박수! 그런데 그 곱빼기라는 능력을 받았던 엘리사는 죽을 때 그냥 죽었어요. 그러니까 이거 엘리야는 구원받았지만 엘리사는 이거는 못한, 능력이 없는 시마리 없이 그렇게 끝났다. 이래 하거든요.
그런데 엘리사가 죽었을 때에 어떤 사람이 시체가 있었는데 그것이 시체에 시체를 던지니까 그 죽은 엘리사가, 죽은 옆에 있던 시체가 접촉을 하니까 그 시체가 살아나 버렸어요. 엘리사 본인은 시마리 없이 그냥 맥없이 보통 사람으로 죽었는데 그런 보통 죽음, 그냥 시체라고 여겼던 그 시체가 남을 살리는 부활 회생력을 지니는 시체였던 거예요.
실제로 저는 그런 것을 네 이번에 tv 잘 안 보는데 tv 보니까 그게 안 나타났어요. 강철 부대에서 강철 부대의 사람끼리 서로 지가 고생했다고 자랑질하는 특수부대원들끼리 하는데 웅덩이에다가 물 넣어놓고 사람이 밀어내면서 승리를 하는데 이 박군이 거기 들어가는 거예요. 물에서 서로 끄집어내려고 하는데 희생하는 자가 희생했던 자가 상대방을 바깥으로 끄집어내서 승리케 하는 그 장면이 나옵니다. 이게 진짜 군인 군인이에요. 군인 정신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가 보기에는 일반 죽음과 전혀 다를 바 없어요. 십자가 죽을 때 천사가 내려오고 뭐 그런 거 안 나타나고 그냥 고요하게 죽었어요. 그냥, 그냥 처참한 일반 사형수와 동일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그 피로 말미암아 네가 생명을 얻었다. 니가 영생을 얻었다. 구원받았다.”
바로 예수님께서 이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하고 이야기할 때 그 이야기 한 거예요. 주님 하실 별세 이야기거든요. 죽으심 이야기. 죽으심 덕분에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엘리야가 어떤 일을 하고 모세가 어떤 일을 하든 간에 그리고 야고보 요한 저 베드로가 어떤 일을 하든 간에 주님의 죽으심만 성사된다면 주께서 일하는 현장으로서 있던 그들도 같이 구원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그걸 이미 구약 성도들인 엘리야 모세는 선지자이기 때문에 알았던 거예요. 이제는 우리가 그걸 알 차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이 우리가 해내지 못한 일을 대신 해 주시는 일인 것을 우리가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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