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356강, 357강) 목숨 선취, 닫힘 210622 본문
녹취:이하림
356강-YouTube강의(목숨 선취 히브리서 2:9)20210622-이 근호 목사
제356강, 제목은 ‘선취’. ‘선(先)’이란 미리, ‘취(取)’는 취한다, 가진다. ‘선취’는 ‘미리 취한다’고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선취란 말은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에 인간이 갖고 있는 시간 순서를 하나님은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들은 미리 예언을 하게 되면 속으로 상상을 하게 돼요. ‘이러한 하나님의 예언이 주어졌기 때문에 아마 이런 식으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들은 그 예언의 말씀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해석해서 선취가 아니고 성취되는, 완성되는 그 모양새를 미리 짐작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언하셨으니까 ‘하나님께서 미리 예언했다는 말은 대비하라는 뜻으로 우리가 받아들여야 된다.’라고 어느 인간인들 그렇게 생각 안 하겠습니까.
그런데 막상 성경에 보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대비했던 그들은 엉뚱한 메시아를 고대했던 겁니다. 정작 사람에게 오셨던 그 메시아하고 유대인들이 성경을 파고들고 연구해서 내놓은 그 메시아가 달라도 너무 다르죠.
동일한 말씀인데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다 해서 막상 이루어진 그 모양을 보니까, 그 결과를 보니까 전혀 예상 못한, 예상이 안 된 다른 엉뚱한 분으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엉뚱한 분으로 오셨다는 이 사실을 제자들도 몰랐고 나중에 오순절 성령이 오고 난 뒤에 회상하듯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모든 것을 회상해서 새롭게 비로소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려서 깨닫게 하는 그 방식을 하나님은 사용했습니다.
정작 그 현장에서는 깨달은 사람이 없고 나중에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셨을 때에 그 때 하늘에서 누군가 오셨죠. 성령이 오셨죠. 성령이 오니까 ‘우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파악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라는 것을 그제야 그들은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은 후에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예언과 그 완성 사이에 인간의 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게 하셨구나.’ 그것을 그들은 발견하게 됩니다. ‘끼어들어서 협조하는 정도가 아니고 알지도 못하면서 계속해서 자기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그런 착오를 유발했구나.’ 그것은 주님만이 할 수 있는 일에 인간들이 훼방 놓고 방해한 거죠.
그러면 오늘날 성도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새삼스럽게 일을 거창하게 해서 업적을 남기고 실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고 이것만 하면 돼요. ‘아, 잘못 생각했구나. 주어진 현실의 근거와 그 내막 그리고 돌아가는 모든 흐름에 대해서 지금도 여전히 착오하고 착각할 게 계속해서 우러나겠구나.’가 이 생을 다 할 때까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일은 주님 혼자 하셨고 어떤 인간도 주의 일에 끼어들 수 없는 그 정도로 거룩한 일이라면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해야 될 일은 딱 한 가지, ‘이래서 우리는 끼어들 수 없는 존재였군요.’ 그것을 계속 받아들이는 그 자체가 바로 주님 하신 일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주께서는 우리 성도로 하여금 이 땅에 살게 하시고 갖가지 일에 말려들게 하시고 그리고 여러 가지 사건이 들이닥치게 하시면서 그 사건과 그 경우들과 그 모든 경험들을 통해 결국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것은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거예요. 세상과 너 자신과 주님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다른 하나님, 엉뚱한 하나님을 생각했다는 것을 날마다 깨우치게 하는 일을 주께서 하시는 겁니다.
새삼스럽게 우리가 거대한 일을 하는 게 아니에요. 전도, 선교, 실적 하는 것은 잘못된 겁니다. 주께서 알아서 다 했는데 우리는 오해만 늘어놨을 뿐입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이 세상은 이렇게 흘러간다는 것을 다 아시고 그 최종의 순간이 앞에 있는 예언들의 내용을 미리 취했다, 선취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히브리서 1장에 보면 나오는데 1장 1절과 2절에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예언을 하신 거예요. 그런데 그 예언을 주신 그 당시나 인간세계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오신다는 것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선지자나 그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상당히 이질적인 사건이 터졌다.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이해하겠죠,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는 하겠지만 그게 충분하게 무슨 뜻인지 거기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2절에 보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모든 말씀을 말씀대로 이 세상을 다 만드신 그 분이, 처음에 그렇게 만들어놓았던 그 분이 시간상 나중에 끝에 오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이 오실 그 순간의 입장에서는 “내가 다 만들었다”라고 미리 선취한 내용을 품고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선취한 내용이 이렇게 왔을 때 그럼 선취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우리들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조금씩 조금씩 알려주시지 왜 마지막에 한꺼번에 다 알게 하시는가. 어느 누구도 그 아드님이 그렇게 된다는 사실을, 그것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들로 오신 그 분이 모든 것의 창조자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어요.
그 이야기가 히브리서 2장에 보면 쭉 나오는데 그 중에서 한 가지만 보면 2장 9절에, “오직 우리가 천사보다 잠간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주님께서 창조를 선취했다는 말은 자기 백성을 위한 죽음을 미리 자기 죽음 안에 다 선취했다는 말이에요.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내 죽음을 먼저 가져갔다는 생각을 못하고 지금 살아있는 내가 주님을 위해 어떤 실적과 업적을 남길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게 선취라는 의미를 빼버리니까 이렇게 된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 하는 일을 선취한 게 아니고 우리의 죽음을 선취한 거예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죽은 자로 보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멀쩡하게 살았다 여기고 살아있는 내가 예수를 믿어드릴까요, 주를 위해서 충성을 다 할까요? 이러고 있는 거예요.
선취라는 의미가 삭제된 상태에서 마치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충성을 다 하고 순종을 다 하면 예수님과 더불어 천국에 곧바로 들어갈 줄 알았던 그 착각과 똑같은 겁니다. 그리고 구약의 선지자들이 열심히 하게 되면 그걸로 자기 있는 이스라엘 자체가 완성된 메시아 나라인 줄로 착각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오늘날 열심히 기도해서 교회 세우면 그 교회가 천국인 줄 착각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주님께서 성취한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성취한 게 아니고 우리의 활동을 성취한 것이 아니고 뭘 선취했느냐 하면 이미 우리가 죽었다는 것을, 그 죽음을 선취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될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아, 내가 매일매일 죽는구나. 그럼 죽으니까 죽은 자가 할 게 없잖아요. 할 게 없구나. 그냥 매일같이 죽어있으면 되는구나. 이 사실을 어디서 찾는가. 십자가에서 찾으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증인입니다.
357강-YouTube강의(닫힘 창세기 7:16)20210622-이 근호 목사
제357강, 제목은 ‘닫힘’. 사람들이 가정에서 식구들과 같이 살고 식사하면서 다정스럽게 식구들과 이야기하죠. 그러나 부모 입장에서 자식들에게 섭섭한 게 있다면 식사하고 난 뒤에 자식이 제 방에 가서 문을 닫아버린다는 거예요.
문을 빼꼼히 좀 열어놓으면 좋고 엄마가 수시로 들어가서 “애야, 지금 뭐하나? 공부하나? 공부하면 과일 썰어서 갖다 줄 건데.” 이렇게 소통이라 할까요, 늘 닫히지 않고 서로가 눈에 다 훤히 보일 때 부모 자식 간에 허물이 없다, 잘 통한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문을 딱 걸게 되면 그 순간만큼은 자식과의 관계가 단절된 섭섭함이 있기 마련이거든요. 다 컸다고 저녁에 늦게 오면서도 늦게 온다는 전화도 없이 늦게 온다든지 이런다면 부모 입장에서 좀 섭섭하겠죠. 많이 섭섭하고 그럴 거예요.
부모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개방할 때 부모가 신뢰를 안 줄래야 안 줄 수가 없어요. 속으로 이야기하죠. ‘너 필요한 것 내가 팍팍 밀어줄게. 왜? 네가 마음 문을 다 열어놨으니까. 마음 문을 열어놨다는 것은 엄마한테 맡겼다는 것으로 내가 받아줄게. 이해할게. 따라서 네가 필요한 것 있으면 내가 도와줄게.’ 그런 사이가 좋은 사이죠. 그런데 문을 딱 닫아놓게 되면 결별 또는 헤어짐, 영원히 단절된 이별, 갈라섬 뭐 이런 섭섭함 같은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실 때는 세상 사람들끼리 서로 사이좋고 친하게 지내고 이웃사촌이라고 서로 정을 나누더라도 언약이 딱 개입해버리면 사정없이 하나님의 강제 조치에 의해서 문이 닫히게 되어 있습니다.
언약이 들어오는 건 다 마찬가지인데 최초 언약이 노아 언약이거든요. 창세기 7장 15절에 보게 되면 방주 이야기가 나옵니다. “무릇 기식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16절,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 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 닫아버린 거예요. 닫아 넣으신 거예요.
문이라는 경계선을 가지고 폐쇄조치를 한 겁니다. 그러면 닫아놓은, 닫긴 그 안은 언약이 작용하는 세계가 되고 문을 닫아놓은 방주 밖에는 언약에 들어가지 못하고 버려진 자들의 세계가 되겠습니다.
조금 전까지, 홍수가 오기 전까지 방주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서로 사이좋게 지내던 그 이웃사이가 언약이라는 것이 딱 들어와 버리면 언약 안과 언약 밖으로 완전히 아주 차갑게, 냉혹하게 선 그어져 버리죠. 그 언약의 완성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같은 식구끼리 일가친척들끼리 같은 교우들끼리 그리고 같은 주민들끼리 직장 사람들끼리 동창생 친구끼리 이것은 본인의 마음이 아니라 주님의 사정 봐주지 않는 냉혹함이 차가운 얼음장 같은 칼날로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쫙 갈라버리죠.
우리가 세상에서 뭐 귀신이 겁난다, 밤에 혼자 자는 게 겁나요, 부도난 게 겁나요, 여러 가지 장사했는데 손님 안 오는 것이 겁난다 하지만 진짜 겁나는 것은 그 사람들이 접해보지를 못했어요. 진짜 겁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왜 겁나느냐 하면 십자가는 일체 우리의 의사를 사전에 물어보지 않고 내린 처단이거든요. 십자가를 다른 말로 하면 최후의 심판. 더 노골적으로 최후의 판결. 최종 판결이에요. 대법원까지 항소할 그런 기회도 전혀 없어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죽는 순간에 완전히 갈 길이 달랐던 것처럼 명백하게 나뉘어지는 것처럼 우리가 나누는 게 아니고 주님의 일방적 조치에 의해서 딱 나누어진 겁니다.
옛날 국민학교 다닐 때, 3학년 때 한 반이 되어서 그렇게 애들끼리 친했는데 선생님들이 아주 냉정하게 4학년 올라갈 때 반을 섞어버리죠. 너는 4학년 1반, 너는 4학년 2반. 감정이 격한 애들은 막 웁니다. 복도에서 만나면 될 것을 영원히 헤어지는 것처럼 막 울어요. 선생님 원망하고. 쉬는 시간에 만나면 되잖아요. 그런데 수업시간도 같이 못 보는 그것이 섭섭해서 그간의 정이 섭섭해서 울겠죠.
그런데 사람들이 십자가가 꽂혀버리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죠, 영원히 갈라서니까. 그런데 십자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별로 섭섭해 하지 않는 것은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십자가가 장난인 줄 알고 목걸이 걸고 차에 걸고 다니면 흔하고 흔한 게 십자가인줄 알고 그게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의 실재적 현실적인 작용인 줄 모르고 뭐 안 해도 되는 걸 하나 믿어 얻어걸린 것처럼 그렇게 착각하고 있으니까 십자가의 그 냉혹함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성경이 어려운 게 아까 선취라는 말을 했잖아요. 이 세상을 심판하는 그 선취를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미 선취해서 보여줬습니다. 사람들은 아무 감정도 없겠죠, 십자가 보고 그냥 그러나 싶지만. 그러나 예수님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무서운 일이 예수님 자신의 몸을 통해 하나님께서 확장해 내린 것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 앞에 저주 사건이 실제로 터진 거예요. 긴장 이상입니다. 이것보다 심각한 일은 없죠. 긴장 되죠. 예수님께서는 이 십자가가 그 정도로, 극한적으로 뭐 무서움의 극한이죠, 극단, 그 정도로 무섭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수시로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 하나가 마태복음 25장 10절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25장 8절에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 하거늘” 무슨 일이 벌어졌어요. 신랑이 온다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제야 다급한 거예요. 기름 준비를 제 때 안 해서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위기의식을 느낀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만들어냈으니까요, 심판에 대해서. 천국 이야기하면서 천국은 심판과 동반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천국은 그냥 가는 것이 아니고 갈라짐을 통해서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이 정해진다는 겁니다. 그 갈라짐. 그 갈라짐은 신랑의 있음과 신랑의 존재유무와 관련되어 있죠.
10절에 보면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아, 이런 황망한 경우가 같은 촌사람들끼리 오랜만에 마음 맞춰서 놀러간다고 전세버스 해놨는데 전세버스 타기 위해 마을회관 앞에 모이라 하면 꼭 그런 사람 있어요. 마을회관 앞에 10시에 오라 하면 10시 반 이후에 오는 사람들 꼭 있어요.
그런데 안 기다려주고 딱 10시 되어서 전세버스 기사가 “오늘 스케줄 바쁩니다. 이거 뛰고 또 다른 데 뛰어야 됩니다. 할 수 없습니다. 떠납시다.”하고 떠나버렸을 때 그 떠나고 난 뒤에 떠나는 버스 뒷자석에 앉아서 조그만 창문 열고 뒤에 한번 돌아보세요. 팔 내밀면서 세워달라고 황급하게 쫓아오는 아줌마들, 아저씨들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기사는 너무나 냉혹해서 “거기 뒤에 창문 닫으세요.” 버스 출입구 닫고 그냥 떠나버린 거죠.
이것은 다 가고 난 뒤에, 버스 가고 난 뒤에 늦게 온 사람이 11시 반 되어서 온 게 아니고 10시 2분에 오고 10시 30초에 오게 만드는 광경을 예수님께서 묘사하신 거예요. 중요한 것은 신랑이 문을 닫았다는 거예요. 이것은 누구 멱살 쥐고 목사보고 원망하지 마세요.
주님이 문을 닫은 거예요, 주님이. 노아의 방주를 하나님이 닫으신 거예요. 그게 십자가의 위력입니다. 뭐 친하게 지내고 좋게 지내고 소용없어요. 십자가는 주님께서 친히 손 대지 인간이나 목사가, 사도바울이 손 못 대요. 그냥 닫아버려요, 십자가는. 그냥 문 닫은 거예요.
닫으니까 십자가 안에 들어온 사람은 “어? 내가 십자가 안에 왜 들어왔지?”, 십자가 밖에 있는 사람은 “기다려 주세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못 기다려줘요. 십자가 문 닫아버렸어요. 이것이 얼마나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코로나 백신 이야기는 그 앞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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