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데살로니가전서 1:2-3 / 믿음, 사랑, 소망(생명의 진동)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1:2-3 믿음, 사랑, 소망
이근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모두 예수님의 것입니다. 이 땅에는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는 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대체하는 것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유사품이죠. 엉터리요 가짜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간절히 원한 것들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 행복의 염원이 믿음의 염원, 소망의 염원, 사랑의 염원으로 나온 겁니다.
즉 인간들에게서 ‘염원’이 분출됩니다. 자아도 조절할 수도 없고 멈추게 할 수도 없는 염원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본인조차도 말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염원들의 최종 내용물은 무엇일까요? 도대체 인간은 무엇을 그토록 사모하는 겁니까?
그것은 제발 자신을 신으로 만들고 싶은 겁니다. 배후에서 악마가 인간들을 그렇게 조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없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예수님께서 악마와 마주침을 통해서 새롭게 등장하는 겁니다.
즉 인간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지독스레 악마적임을 인정하는 자들을 통해서 비로소 표출되는 것이 예수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자신이 염원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 때문에 예수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상처난 흔적’을 지니고 이 땅에 등장함을 인정하는 자들이 곧 성도입니다.
성도는 더 이상 자신이 신이 되고자 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악마적 심성을 늘 느끼고 삽니다. 성도가 세상을 살면서, 세상의 생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합니다.
예수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모멸하고 무시하는 식으로 세상은 나름대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한참 유포시키고 있음을 압니다.
가짜가 얼마나 진짜처럼 행세하는지도 압니다. 자신의 행복이나 위대함이나 대단함을 예수님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죄로 자각하는 것을 성도는 도리어 최상의 기쁨으로 삼습니다.
즉 주님께서 자신을 주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전달하는 매개로 사용해주심을 황송해합니다.
생명의 진동
2021년 8월 29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1:2-3
(1:2)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란 ‘은사’입니다. 곧 ‘하늘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창세 전부터 준비된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세상 끝날에 주시는 겁니다. 그 선물이 오기까지 세상에서 만들어낸 모든 것은 다 무너져야하고 파괴되어야 합니다. 즉 창세 후에 만들어진 모든 것은 파괴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그 중에 인간도 포함됩니다. 인간들은 선물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의 자기 노력을 스스로 달성하는데 열중합니다. 뭐든지 자신의 행함으로 얻어내려 합니다. 인간은 신에게도 지지 않으려합니다. 그것은 본인이 엄연히 살아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이미 확정났습니다. “정녕 죽으리라!”
“제발 좀 죽어도!” 그말입니다. 은사, 즉 선물로서 주어지지 않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인간들의 평소의 노력의 일종입니다.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본인의 행함으로 장만해온 것들로 내용이 채워져 있습니다. 이런 일은 이미 구약에서 오랫동안 해왔던 것들입니다. 즉 살아 있기에 쉬지 않고 이 살아있음을 지켜내려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구약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한꺼번에 모든 인간을 전부 다 죽여버리십니다. 이것이 ‘정녕 죽으리라’에 합당한 조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생명은 따로 언약을 통해서 제시됩니다. 창세기 9:15-16에 보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언약은 빛의 스펙트럼 같습니다. 무지개같은 경우, 멀리서보면 마치 그 현장에 있어 보이지만 막상 그 장소에 가면 투명하게 사라져버리고 없어보입니다. 신약에 주어진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마치 이와 같습니다. 전혀 물질적인 보탬이나 유익이 되지를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 중에서 이런 인사들이 있다는 것을 매우 신기하고 반가워합니다.
은사가 이처럼 투명하고 비-물질적 형태를 띠는 이유는, 창세 전의 예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 전에 있었던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데 그 분이 맞이한 체험은 바로, 저주와 심판의 위세를 뚫고 빠져나가신 흔적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곧 ‘피’입니다.
‘피’란 하늘에 계시는 분이 이 세상을 뚫고 들어오신 흔적과 빠져 나가신 흔적입니다. 오시는 메시야를 말릴 수 있는 어떤 권세도 이 세상에는 없고, 빠져 나가려는 분은 붙잡을 수 있는 권세도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은사는 바로 이 힘이 실려 있는 예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의 체험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은사란 사망과 생명이 경계선, 혹은 피막, 혹은 매개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코로나 바이러스를 닮았습니다. 바이러스란 단백질이라는 외피 그 내부에 RNA나 DNA라는 핵산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들 바이러스는 동물, 실물, 및 박테리아를 감염시킵니다. 즉 살아 있는 생명체 내부에서만 증식하는 겁니다.
평소에 죽어있다가 생명체만 만나면서 그 생명체를 공격해서 죽여버리는 겁니다. 바이러스는 분명 생명이 없는 화확적 단위요 블록(뭉치)입니다. 죽어있다 이 말입니다. 따라서 생명체를 만다면 살아 있는 유기체가 되니 이 바이러스는 생명과 죽음 사이의 진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도 이런 바이러스 같습니다. 성도는 분명 죽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영에 의해서 은사가 주어지게 되면, 예수님께서 경험하신 것들이 작동하면서 모든 인간과 대자연을 죽어 있는 것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은사 안에서 구약 출애굽 취지가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10가지 재앙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나일강물이 피로 변하고, 개구리가 온 땅에 올라오고, 이(모기)가 공중을 뒤덮고, 파리가 득실거리고, 가축에 악질이 생기고, 가축 및 사람에게도 독한 종기가 생기고, 우박이 내려지고 메뚜기가 남은 모든 곡물을 다 빨아먹고, 해가 멈추어 삼일 동안 전국이 깜깜해졌습니다.
이처럼 9개의 재앙 전부가 자연과 물질세계와 관련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열 번째 재앙과 자연과 관련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입니다. 즉 인간이란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을 통해서 키워지고 만들어진 것이었던 겁니다. 바로 이 인간이 전부 다 대가 끊기는 겁니다. 즉 모든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실은 “정녕 죽으리라!”에 준해서 죽은 흙에 불과한 것들이었습니다.
인간은 자연물의 일종으로서 자연과 더불어 무너져내려야 될 존재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은사가 왔습니다. 이 은사는 가짜 믿음과 가짜 소망과 가짜 사랑 사이를 진동하면서 오직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가짜 믿음과 가짜 소망과 가짜 사랑은 일종의 노동입니다.
즉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으로 꾸며낸 은사들입니다. 가짜 믿음은, 살아 있는 내가 만들어낸 믿음이라서 ‘행함에서 나오는 믿음’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믿음이란 ‘믿음에서 믿음’입니다.(롬 1:17) 즉 예수님의 믿음에서 나온 믿음입니다. 가짜 소망은 ‘보이는 것을 소망’하는 겁니다.
그러나 진짜 소망은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롬 8:24) 가짜 사랑은, 자신이 은사를 사용하려는 겁니다. 예를 들면, 방언과 천사의 말과 예언의 능력과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말하는 것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구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진짜 사랑은 자신의 그런 행함이 온전치 않음을 자인하는 겁니다. (고전 13장)
이처럼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자꾸만 이런 육적인 것이 돋아나올 따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피자국을 반복해서 적용시키십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을 때에, 그는 주님만 바라봤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을 바라보면서 물에 빠졌습니다.
감히 주님 앞에서 자신의 잘, 잘못을 평하지 마시기 바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 자신을 감히 인간이라고 우기지 말게 하시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고 계심을 증거하는 새우의 껍질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2강-데살로니가전서 1장 2-3절(생명의 진동)210829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 2-4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2-3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에 주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것을 은사라고 하는데 이것은 다른 말로 은혜, 또 다른 말로 하면 선물, 그런 것을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때에, 특별히 마지막때가 왔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주신 것이 은사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전에 뭘 주셨는가? 그 전에는 하나님이 이 대자연을 주시고 거기에 대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대자연과 더불어서, 노아 홍수같은 경우에는 멸망을 하는데 그 멸망을 함과 동시에 새롭게 투입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서 눈에 보이는 대자연의 물질세계, 이 물질세계에 거기에 추가해서 주어지는 이 언약이라는 것이, 서로 다르게 상당히 특이한 모습으로 언약이 주어지는 겁니다. 노아홍수 이전에 창세기 9장 14절에 보게 되면,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여기에 무지개가 나타난다고 되어 있습니다.
무지개의 특징은 눈에 분명히 보입니다만 막상 다가가게 되면 거기에 아무것도 없어요. 투명하지요. 그런데 거울 앞에 비췬 우리의 몸도 물질이고 세상에 나오는 이 모든 물질들은 분명히 눈에 보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먼저 주시고 죄가 들어왔을 때는 그 눈에 보이는 자연세계가 어떻게 망가지고 무너지고 해체되는가를 분명히 알려주시고, 거기에다 무너진다는 이야기와 동반해서 주어지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언약이라는 것을 여기서 하나님께서 거기에 집어넣으셨어요.
그렇게 되면 인간 입장에서는 무너지는 자연 세계와 더불어 자신도 같이 무너지고 있는 자기모습, 그 가운데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그 근원적인 원인이, 바로 주어진 언약 약속이라는 것에 이렇게 무너져야 될 이유가 그 안에 다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은 무지개처럼 있는 데도 마치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막상 거기 가게 되면 없어요. 그런데 멀리서 보면 눈에 보이거든요. 그 무지개 같은 스펙트럼, 그 스펙트럼 같은 것이 오늘 본문에서 은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말씀의 그 세 가지 은사 말고도 은사가 굉장히 많아요. 고린도전서 12장 끝에 은사가 많이 나오거든요. 많이 나오는데 그 은사는 내가 소유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나는 무너져야 되니까. 나는 망가져야 되니까. 그 은사가 마지막 때 주어지는데 마지막 때 이전에는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이 주어졌을 때 그 언약의 특징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잠언 3장 16절에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라고 해서 구약에 있는 언약들은 어떤 물질세계, 인간이 있는 자연세계에서 풍성함을 계속 유지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그래요. 신명기 28장에도 마찬가지지요. 신명기 28장에 1절, 6절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 그 복이 뭐냐? 3-6절에 나와 있습니다.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복의 근원 아브라함이 받았던 그 복, 양과 소, 가축이 늘어나고 아브라함의 재산과 목숨을 지켜주는 그 복, 그 복이란 구약적인 언약과 더불어서 그러한 결과물들을 내놓은 거지요. 그런데 이게 신약에 오게 되면, 모든 눈에 보이는 자연세계는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다 무너지게 되어 있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그 선물이라는 것, 복이라는 것이 뭐냐? 바로 창세 전에 있었던 것을 신약에 주시는 겁니다.
이미 만들어진 자연세계와 물질세계 자체, 이미 창세 후에 만들어진 것은 소멸시키고 없애버려요. 없애버리고 창세 전에 준비해놓았던 것을 마지막 때 이 신약시대에 성령과 더불어서 은사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는 거예요. 그것도 투명하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성령과 더불어서 주시는 거예요.
누가복음에 그런 말씀이 나오지요. 11장 9, 10, 13절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주께서 마지막에 주는 것은 이겁니다. 네 몸뚱이와 이 자연 세계는 그냥 무너지도록 내비 두라는 거예요. “그것과 족히 비교되지 않는 것을 내가 줄게.” 그게 성령의 은사,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요즘 참 뉴스 틀면 처음을 장식하는 게 코로나 바이러스 이야기인데 그 바이러스라는 것이 뭐냐? 단백질 외피를 갖고 있어요. 완전히 새우 같아요.
그 단백질 외피 내부에 RNA, DNA라는 보통 생물학에서 핵산이라 하는데, 그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바이러스의 특징은 동물, 식물, 박테리아처럼 살아 있는 생명체 내에서만 증식이 돼요. 살아 있는 것을 가만두지 않는 특징을 갖고 있어요. 코로나바이러스가 생명만 공격하는 거예요.
그런데 바이러스 본인의 생명은 뭐냐? 생명이 없는 화학 단위입니다. 화학 단위. 그냥 뭉치, 결합체, 화학물질의 결합체에 불과해요. 죽은 거예요. 죽어 있는데 생명과 맞닥뜨리면 이게 살아나요. 화학의 블록체, 벽돌 같은 블록이거든요. 생명체만 만나면 이게 생명체처럼 작동을 해서 그때는 살아 있는 것처럼 돼요.
코로나 바이러스가 뭐냐? 생명과 죽음 사이에 진동하고 있는 겁니다. 진동이 핵심이에요. 그냥 바이브레이션(vibration) 요동치고 있는 거예요. 어제는 죽었다가 오늘은 살아 있고, 오늘 살아 있다가 또 죽고. 아까 권사님이 바이러스는 언제 없어지겠느냐고 하시던데 바이러스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죽어야 되는 것은 인간 본인이 죽어야 돼요. 이미 바이러스는 죽어 있기때문에 죽지를 않는 거예요. 우리는 살아 있기때문에 죽어야 되는 거예요. 이게 옛언약이에요. 이게 구약입니다.
에베소서도 그렇고 골로새서도 그렇게 주님께서 새언약을 주시는 것은 창세 전과 창세 후 거기에 경계선을 형성하는 그 경계선 또는 매개 또는 피막, 막, 그런 것에 해당되는 그 힘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는 겁니다. 우리는 죽어 있는데 살아 있다고 여기는 것만 맞닥뜨리면 우리가 산 존재가 돼요. 우리가 바이러스에요. 우리가 바이러스가 되는 겁니다. 언약적 단위체, 블록이 되는 거예요.
은사라는 게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요. 하늘에서 강제로 이 땅을 뚫고 들어왔을 때 흔적이 있는데 그게 피입니다. 피는 강제성을 띄고 있어요. 강제로 뚫고 들어와서 강제로 빠져나갔을 때의 흔적이 바로 피에요. 예수님의 피입니다. 강제로 뚫고 들어왔다가 강제로 빠져나가는 그 힘이 은사에 담겨 있어요.
그래서 은사를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누가 말릴 수도 없도록 강제로 누구에게 침투하게 되어 있고, 그러니까 바이러스하고 똑같지요, 그렇게 침투하게 되어 있고, 이 세상 빠져나올 때도 악마가 이 세상 일가친척 누가 발목을 잡아도 강제로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빠져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피의 힘이기 때문에 그래요. 은사 안에 힘이 들어 있어요. “찾아온 것을 네가 말리지 말라. 또 내가 떠날 때 발목 잡지 말라.” 그 힘이에요. 누가 날 말릴 사람이 없고 빠져 나간다고 못 빠져나가게 잡을 수도 없는 그걸 능가하는 힘, 그 힘이 예수님에게는 무슨 힘이냐? 바로 사망과 죽음을 넘나들었던 그 힘이 은사 안에 들어 있고 그 은사를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만 그 죽음과 사망을 넘나드는 힘이 작동하고 있어요.
지금 안 믿는 눈빛들을 하고 계신데요. 저주와 심판, 거기서 벗어난 힘이 은사 안에 들어 있다는 그 말입니다. 저주와 심판. 하나님 믿고 복음 안다 하면서 감히 하나님 앞에서요, 자기 잘잘못을 논하지 마세요.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그것도 시건방진 짓이에요.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잘잘못을 따집니까? 이제 와서. 이미 죽은 자인데.
화학적 단위체라니까! 이미 생명이 없는데 뭘 잘잘못을 따져요. “제가 참 부끄럽습니다.” 부끄럽지도 말아요. 죽은 자가 뭘 부끄러울 것이 있어요. 죽은 자가!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은사는 투명체입니다. 세상적인 물질 아니에요. 은사는 그 인간으로 하여금 그 인간은 죽고 주님의 피의 힘만 그 인간에게 살아나게 하는 기능, 그게 은사에요.
그래서 여러분이 세상 사람 볼 때에 나는 이렇다, 하는 식으로 나오거든 속으로, 겉으로 하면 또 싸움이 일어나니까, 속으로 이렇게 하세요. ‘네가 언제부터 인간이냐?’ 인간은 인간 자체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말은 주님한테나 해당되지 그 외에는 인간에 해당이 안 돼요.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은 없는데 마귀가 유포를 시킨 거예요. 인간이라고. 인간, 인류, 이렇게 유포를 시키니까 주님께서 성도를 바이러스로 만들어서 전부 다 인간이라고 느낀 자마다 다 다가가서 죽여버리는 겁니다. ‘네가 어딜 봐서 인간이냐?’ ‘내가 인간이니 인간답게 살아야 될 텐데.’ ‘아니, 인간답게 사니 마니 그런 것은 고사하고 우선 네가 인간이라는 근거를 대봐라.’ 네가 어딜 봐서 인간이냐는 말이지요. 그냥 흙이지요. 인간 아닙니다.
이 땅에 인간이라는 것은 아예 없습니다. 인간이 없는데 자꾸 마귀가 너는 인간이다, 라고 하니까 그때부터 인간은 인간이기를 떼쓰는 거예요. 인간이 살기 힘든 것은 떼쓰기 때문에 그렇고 그 떼쓰는 것은 바로 어떤 의도를 갖고 있기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의도를 갖고 있으면 그때부터 사는 게 힘들어져요. 그냥 누리세요. 의도 갖지 말고. 그냥 주는 대로. 이미 죽은 자거든요. 화학적 단위체, 그냥 우리는 바이브레이션((vibration), 진동이에요. 힘의 진동, 피의 힘의 진동, 마지막 때 주시는 언약의 완성을 보여주는 기능체에요, 기능체!
경계선입니다. 사망과 죽음의 경계선. 새우의 겉껍질 같은 거예요. 벗겨버리면 새우의 속살이 나오잖아요. 예수 그리스도의 속살을 담은 겉껍데기 같은 존재가 성도에요. 은사가 작용할 뿐입니다. 마태복음 14장 29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25, 26절부터 보게 되면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예수님이니까, 하나님이니까 걸을 재주가 있다 하지요. 흔히들 사람들이 간증해가면서 무슨 능력을 행했다는 식으로 하는데 나는 허경영이 왜 물 위를 아직 안 걷는지 모르겠어요. 공중부양은 하면서 물 위 걷는 것은 왜 안 하는지 모르겠다니까요.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오셨잖아요. 왔을 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28절에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그래서 29절에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갔다 그 말이지요. 계속 물 위를 걸어가면 되는데 바람이 일고 파도가 일었다는 거지요.
자, 바람이 뭐냐 하면, 자연이거든요. 파도가 뭐냐 하면, 이것도 자연물이에요. 신약에 오게 되면 이 자연물은, 처음 만들어진, 창세 후에 만들어진 이 모든 자연물은 다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무너지게 되어 있는 것에 신경 쓰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베드로가 그냥 주님만 바라보면서 걸어가면 되는데 무너질 수밖에 없는, 아무것도 아닌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니까 그것을 보다가 그만 물에 풍덩 빠졌습니다. 이게 왜 그러냐 하면, 그냥 은사 준 대로, 주께서 주신대로 끌려가면 되는데 자기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자기가 해석을 해버리고 설명을 해버리는 순간 그 사람은 은사성이 소멸되어 버린 거예요. 그 순간.
나는 나를 설명하거나 해명 대상이 안 돼요. 죽은 놈이 무슨 설명이 또 필요합니까?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뭐가 있어요, 죽은 자인데. 베드로가 보여준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은사가 오게 될 경우와 하나님의 은사가 없는 경우를 베드로가 제대로 또렷하게 우리를 대표해서 보여준 겁니다.
은사가 있는 경우에는 주님 바라보다가 은사가 없을 경우에는 자연 세계와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내가 미쳤지.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내가 왜 물 위를 걸어? 갑자기? 그럴 재주도 없는데.’ 자기를 해석하고, 자기를 분석하고, 자기를 이해하고, 검토하고, 자기가 잘되어 보고자 스스로 자기를 해부해 나갈 때 이미 그것은 은사가 날아가 버린 거예요. 다시 물질성으로 돌아와 버린 겁니다.
거울에 비췬 내 모습 되어버리지요. 그래서 이 은사성을 설명할 때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여기 ‘믿음의 역사’라고 한글 번역이 되어 있는데 이것은 ‘믿음의 활동’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믿음의 행위,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 수고라는 말은 희생,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그 다음에 소망의 인내, 소망에 대해서 참아내는 것, 그것이 너희에게 있음을 보고 사도바울은 굉장히 하나님이 주신 선물에 감사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고, 4절에 보니까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하나님의 택하심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된 자에게만 마지막 때에 주어지는 창세 전, 우주 창조 이전에 준비되었던 것을 마지막 때 주시는 거예요.
인간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인간들이 뭘 해도 그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충분히 다 들춰내시고, 그다음에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은 택하심,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을 경우에만 네가 천국 백성,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그 하나님의 숨겨진 비밀의 과정이 지금 그대로 데살로니가에 있는 몇몇 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일어났다고 하니까 지금 사도바울이 놀라운 거예요.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너희를 기억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주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에 기억하는 거예요. 인간에서 일어난 일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하신 일이기에 기억하는 겁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그 영원성이 유지된다는 뜻이거든요.
제가 20대에 알던 노래에 기억이라는 이 상황과 딱 맞는 가사의 노래가 있어요.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박 인희 씨가 불렀던 <모닥불>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은사가 끝이 없는 거예요. 기억이라 하는 것은 뭐냐? “내가 너 기억할 게”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같이 모닥불 피워놓고 모여서 같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님이 하신 일을 그냥 이야기하는 것을 기억이라 하면 적절해요. 이것은 다른 말로 그냥 누리는 겁니다.
“내가 너한테 뭘 해줬잖아” 그런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누굴 지배하거나 장악하거나 정신적으로 종속되는 것이 없이 그냥 모닥불 피워놓고 그냥 이야기하는데 젊을 때, 놀 때 많이 해 봤지요. 12시까지만 이야기한다 해놓고는 벌써 새벽 4시, 기타 치다 보니 벌써 새벽 네 시가 되었어요. 벌써 서너 명은 옆에 쓰러져 자고 있고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여섯 시까지 계속 이야기하고 있고요. 젊으니까 끝이 없어라, 끝이 없지요, 뭐.
이게 뭐냐? 사도바울이 찾고 싶은 것, 사도바울이 정말 성도에게 찾고 싶은 것은 성도가 어떻게 수고하고, 어떻게 인내하고, 얼마나 참느냐가 아니라 투명한 것, 눈에 보이는 성도의 행함 말고 투명한 것, 주께서 선물로 주신 것, 그게 은혜라 하는 겁니다. 그 선물로 주신 은혜, 은사, 그 무지개같이 피어난 그 아우라, 그런 것을 보고 놀랍다는 거예요.
‘너한테 왜 그게 다 있어?’ 그런 거예요. ‘너한테 왜 그게 다 있지? 야, 이거 진짜 신기하네.’ 마지막 때가 될 때, 세상 끝장낼 때 주신다는 그 언약, 그 투명한 언약이 너한테 어떻게 그게 다 있다니, 하고 놀라는 겁니다.
구약을 통해서 이 언약은 원래 물질성을 가지고 나와요. 처음에 방주 만들 때 잣나무 물질이 있거든요. 방주 줬다가 아브라함 때 와서 제단을 쌓아요. 특별한 장소 제단, 특별한 물질 돌을 쌓는다든지 그런 것. 그다음에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제단이 나중에 언약궤와 결합 되면 성전, 눈에 보이잖아요.
하나님께서는 물질로, 또 물질로 해서 언약을 줘놓고, 하나님의 초월적인 것을 줘놓고 그다음에 구약 지나면 그런 초월적인 것, 언약궤도 불타버리고 성전도 다 파괴돼 버려요. 물질은 다 없어요. 심지어 이스라엘 자체도 다 없애버려요. 이스라엘 국가 자체도 다 없애버린다고요. 손에 쥘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내 살과 내 떡을 먹으라, 해놓고 분명히 자기 살과 피를 마시라고 해놓고 주님 자체가 떠나버려요. 자기의 살과 피를 제공해 놓고 떠나버립니다. 떠나버리니까 제자들이 받았던 살과 피도 같이 사라져 버리지요. 소멸 되는 거지요. 은사의 원판은 소멸 되는 겁니다.
은사를 우리가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자아는, 우리 자신은 소멸 되는 거예요. 없어지는 겁니다. 내가 없어져야 사는 게 그냥 누림이 되지요. 요한복음……, 참, 이런 소리 하니까 못알아 듣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요. 요한복음 20장 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고 난 뒤의 이야기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허락하실 때는 예수님 몸을 만질 수가 있었어요. 못 자국 창 자국을 만질 수 있었는데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부활 되기 전과 똑같은 줄 알고 전처럼 만지려고 하니까 주께서 만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만지지 말라. 만약에 예수님 몸을 만지게 되면 만진 자신이 자기 자신을 포기를 못 하게 되어 있어요. 이 손은 예수님을 만진 손이다. 이렇게 되어서 포기를 못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은 우리가 이 땅에서 뭘 만지든 뭘 했든 간에 다 안개처럼 없애버리는 역할을 합니다. 없는 자가 제발 없는 자로 티를 내면서 살아라, 라고 하면서 주신 능력이 바로 은사의 능력이에요. 너 원래 없어, 그렇게 되는 거예요.
데살로니가서의 이 은사를 설명하고, 주님께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마지막 백성으로서의 무지개 같은, 스펙트럼 같은 그 성령의 열매를 주신 것은 기존의 이 세상을 통해서 왜 눈에 보이는 이 물질세계와 대자연 세계가 무너져야 되는가를 성도를 통해서 이 마지막에 증거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인간 자체가 자연과 함께, 이 물질세계와 함께 결합이 되어 있어서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자연 안에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자연 안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자연이 무너지게 되면 인간도 자연스럽게 무너지는 것이 마땅하지요. 그것이 구약에 전도서에 이미 나와 있어요.
전도서 12장에 보게 되면, 요즘 와서 제가 이런 것을 많이 느끼는데요. 3, 4절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여기서 집을 지키는 자라는 것은 손을 말하고요.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힘이 있다는 것은 척추, 다리를 말하고요 “맷돌질하는 자들”이란 이(치아)지요.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이가 다 빠져서 몇 개 안 됨으로 “그칠 것이며” 즉 음식 가는 그것도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창들이라 하는 것은 눈, 눈이 어두워질 것이며, “길거리 문들(귀)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 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나에게 아름다움과 육체적인 쾌락을 주는 것들은 다 재미도 없고 시시하고 즐거운 것도 없고 사는 재미도 없고요.
6절에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깨어지고, 또 깨어지고, 또 깨어지고, 그리고 흙은 땅으로 돌아가고. 이 말은 뭐냐? “너는 흙이었었어!”라는 것을 평생을 걸쳐서 우리에게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본모습을, 본질을 보여주는 겁니다. “원래부터 너는 흙이었었었어! 인간이었다고 하는 그것은 하나의 착각이고 하나의 이미지였었어.”라고 하는 거예요.
그림자가 실체에 욕심 내면 안 되지요. 그림자는 그냥 그림자일 뿐이에요. 실체는 흙인데 흙은 흙대로 가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 무너질 때 우리도 같이 무너지면 되는데 은사는 왜 주셨는가?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예수님 하신 일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은사를 주셨습니다.
예수님 증거 하기 위해서 여기 나오는 믿음, 그다음에 사랑, 소망, 믿음, 소망, 사랑, 이 은사로 받은 믿음과 은사 없이 하는 믿음이 어떻게 다른가를 우리를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분명히 성도는 죽은 자고, 소멸하여 없어지는 자고, 그냥 누리기만 하면 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통해서 우리를 건드립니다. 없는데, 아까 베드로처럼 분명히 우리가 없는 존재, 분명히 나는 복음으로 죽은 존재라고 여겼는데 딱 건드리면 거기서 뭐가 생기느냐? 갑자기 자아가 생기는 거예요. 자아가 생겨서 퇴짜를 놔버려요. ‘씨, 어디서 나를 건드려. 건드리지 말라 했지. 나가!’
이상하게 복음을 알고 수십 년 복음 들었습니다, 복음에 대해서 뭘 들어도 새롭지 않다, 라고 자부하고 나는 이미 죽은 자고 죽은 자 맞다, 죽은 자 맞다, 하는데 “딩동! 택배입니다” 하면 ‘어딜 기도하는데 날 건드려.’ 갑자기 없는 자아가 또 생겨버렸어요.
없는 자아가 생기면서 바이러스하고 똑같아요. 바이러스는 죽은 자인데 내가, 육적인 것이 자꾸 살아나니까 주님께서 성령의 은사로서 죽은 내가 산 나를 건드리게 만들어 버려요. 건드리게 만들어버리는 그 순간 나는 그때부터 무엇을 마시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지 걱정을 늘어지게 하는 거예요.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면 주께서 복 주실 겁니까? 주께서 약속하셨잖아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면서요. 그러면 기도할까요? 구하라, 구하면 주실 것이다, 했잖아요.’ 갑자기 바빠져요. 호들갑을 떨면서 바빠진다고요. 왜? 생긴 자아를 없애지를 못해서.
복음이 아니고 기독교 문화로 가버려요. 기독교 문화로 전환됩니다. 이게 뭐냐 하면, 가짜 믿음, 가짜 소망, 가짜 사랑이에요. 그래서 이 은사가 언제 드러나느냐? 데살로니가 교회의 특징이 환란 가운데 있어요. 환란 가운데 있으면서 가짜 믿음과 진짜 믿음, 가짜 소망과 진짜 소망, 가짜 사랑과 진짜 사랑을 구분하는 그 경계선에 이 데살로니가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셔서 은사가 은사로 티가 나게 만드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 작업은 오늘날 우리하고 똑같아요. 우리는 매일같이 자아에 시달립니다. 인간의 자아라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가 만든 밀실에 자기가 도배를 하는 거예요. 뭐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사랑은 또 밑에 아예 타일을 깔아요. 항상 믿음, 소망, 사랑, 십자가 복음으로.
내가 근사한 나만의 복음의 방주를 만들기 위해서, 구원의 방주를 만들기 위해서 매일같이 믿음 소망 사랑의 활동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 자체가 가짜거든요. 이 자체가! 이 자체가 이게 마귀 짓이 되는 겁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자기 자신을 생각하면 은사성이 날아간다고요.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말씀을 총동원하고 기도를 총동원해서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 밀실을 만드는 거예요. 여러분이 조그만 잠수정을 본 일이 있지요. 심해에 들어가서 관찰하고 실험도 하는 잠수정, 동그랗게 되어 있잖아요. 압력을 견디기 위해서. 그처럼 모든 인간마다 자기 내부에 자기만 아는 그 비밀이 있어요. 딴딴해요. 단단한 쇠뭉치 같아요. 생겨버린 자아를 어쨌든 소멸되지 않기 위해서 전력을 다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믿음의 활동입니다. 그게 뭐냐? 소망의 인내고 그게 사랑의 수고입니다. 똑같은 본문을 보면서, 이 데살로니가전서 1장 2절을 보면서 ‘그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주님 주신 소망의 인내를 내가 멈추지 말아야지. 이것 실시해야지.’ 이렇게 나오신다면 이미 땡, 탈락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사도바울 편지에서는 믿음과 믿음 아닌 것의 차이점을 이야기합니다. 믿음과 믿음 아닌 것. 로마서 1장 17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여기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 이것은 뭐냐 하면, 자아가 죽는 상태에서 주님이 자아를 죽이는 주님의 믿음이 내 믿음이 될 때 믿음에서 믿음이에요. 그런데 자아가 생겨버리면, 내가 믿어버리면 믿음이 아니고 행함에서 생긴 믿음이 되어버립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간 사람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을 들으라면 바로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사람 백부장입니다.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보세요. 예수님이 먼저잖아요. 믿음이 있어야 구원받기 때문에 그 믿음을 내가 만들고 키우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믿음을 만들려면 믿음 이전에 나부터 먼저 있어야 되잖아요. 나부터 먼저 있다는 그 자체가 이게 사달 난 거예요. 이게 화근이에요. 이것이 바로 믿음이 아닌 거예요. 은사가 아닌 겁니다. 그런 것은 구약 사람들이 다 해봤는데 다 실패로 끝난 거예요.
은사라 하는 것은 선물입니다. 그냥 주님께서 주신 거예요. 너는 죽었고 그냥 주는 거예요. “제발 죽어줘.” 그 말이에요. 죽어줘, 그 말은 선악과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선악에 대해서 네가 내 앞에서 따지지 마라. 잘못했습니다, 도 따지지 말고 잘했다, 하는 그것도 하지 말고 그냥 그냥 그냥 죽은 채로 주께서 쓰시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그러면 되는 거예요.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나오는 그 첫 번째 모습이 창세기 4장에 가인이 아벨과 경쟁에 나서는 겁니다. 가인과 아벨이 경쟁에 나선 이유, 아벨은 경쟁에 나서지 않았지요, 가인 혼자 경쟁에 나섰지요. 하나님이 받는 제사 드리겠다고 종교성이 특심했지요. 가인이 거기서부터 살인죄가 시작되는데 인간이 그렇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예물을 드리고자 준비한다는 그 자체가 본인이 살아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을 본 사람은 아시겠지요. 주님께서는 분명히 정녕 죽으리라, 확정 지었잖아요. 아무리 머리 나빠도 이 정도로 머리 나쁘면 안 돼요. 정녕 죽으리라 했으면 우리는 살아 있어도 죽은 겁니다. 죽은 자가 색소폰 불고 그런 거예요.
그런데 그 앞에서 산다는 이야기, 마귀가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가르쳤지 마귀 아니면 누가 가르쳤겠어요? ‘살아 있으니까 더 살아라. 마스크 써가면서.’ 계속 지금 이런 식으로 밀어붙이잖아요. ‘살아남아야 돼. 네가 살아남아야 네 처자식 사는 거야.’ 이런 식으로요. “나는 죽더라도 우리 애만큼은 살려 주세요!’ 철조망에 다가가서 미군한테 애 집어던지고 그랬잖아요.
참, 이 종교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카불공항에서 IS가 테러할 때의 그 시각이 어떤 시간이냐 하면 기도시간이었어요. 기도시간에 폭탄 터져버린 거예요. 그 기도 왜 했어요? 죽으려고 기도했으면 아예 공항 근처에도 오지 말았어야지요. 탈레반 앞에서 청바지 입고 죽었어야지요. 청바지 입은 여자들 다 죽인다 하니까. 살려고 왔잖아요. 살려고 온 것 주님께서 IS를 통해서 죽여버렸다고요. 우리 처지가 지금 이런 처지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사는데 그냥 살았습니까? 자기가 살고 싶어서 뭘 하느냐? 게임, 승부에 나서요. 그래서 모든 살아 있는 인간의 특징을 한마디로 이야기해라, 한다면 안 지려고 사는 거예요. 하여튼 안 지려고 이기려고 하는 거예요. 이기려고 한다는 것이 너무 심하면 안 지려고.
그걸 창세기 11장에는 우리 이름을 유지하려고, 우리 이름을 끝까지 내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네 이름은 이미 죽은 이름이기 때문에 네 이름을 용납하지 않겠다. 소멸시키겠다.” 이게 주의 뜻입니다.
인간은 살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물질과 이 자연 세계를 이용하는데 몰입하지요. 그래서 그들은 수고를 하는데 사랑의 수고나 믿음의 활동이라든지 소망의 인내, 다른 말로 하면 전부 다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하는 노동이에요.
그런데 이 인간이 평소에 돈 벌 때도 노동하지만 천당 가는 것도 노동이거든요. 노동에는 문제가 있는데 여기에 경쟁이 붙어 있어요. 이래서 힘든 거예요. 어린애들 가르치는 보육교사, 노인들 돌보는 것도 그렇고요. 노인들에게 손자를 맡긴 딸들이 이야기하지요. “엄마, 나 직장 다녀올 동안 내 딸 잘 키워야 돼. 애한테 늘 반짝반짝 웃으면서 돌봐 줘.” 하거든요.
여러분, 다정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노역인 줄 아시겠습니까? 다정한 것. 이 다정하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노동이에요? 이 노동시장에 왜 힘드냐 하면, 경쟁이 갖다 붙어서 그래요, 경쟁이! 이 세상에 치킨집이 우리 집 하나밖에 없으면 괜찮아요. 그런데 젊은 애들이 창업한다고 치킨집을 다 하고 있으니 지금 있는 수입을 유지하려고 하면 힘들어요.
모든 게 경쟁이에요. 심지어 교사부터 해서 모든 영역에서 경쟁 없는 영역이 없습니다. 프로 야구까지, 정치판까지, 심지어 의사도 판사도 다 경쟁이에요. 목사도 마찬가지고요. “같이 먹고 살자!” 같이 먹고 살자. 이 살아 있는 나, 정녕 죽으리라 되어 있는데 그게 아니고, “살아 있는 나 좀 같이 살면 안 되겠냐? 이왕 사는 것 좀 제대로 빼먹고 이긴 채로 살면 안 되겠냐? 이 게임판에서!” 맨날 이것밖에 없어요.
회사에서 노동 잘하면 중간 관리층으로 진급시켜 주거든요. 관리자 되었다고 좋다 하지만 관리자란 뭐냐 하면, 자본가에게 귀속된 역할을 수행하는 대가로 보수를 받는 것이 바로 중간 관리층이에요.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갈수록 자본가에 귀속된다. 그 자본가는 다른 자본가와 경쟁 관계에 있다고요.
이 세상에 경쟁 없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경쟁에서 지니까 하는 말이 나는 실패다, 이러고 있어요. 원래 인간은 실패가 아니에요. 그냥 바이러스, 원래 없는 것이지 실패라는 말을 붙일 자격도 안 돼요. 태어났다가 그냥 소멸하세요. 안개처럼. 야고보서 4장 말씀처럼 그냥 없어지면 되는 거예요. 있다가 없어지면 되는 겁니다. 그것도 못합니까? 진즉 그러지요.
제발 자기 밀실 만들지 마시고요. 밀실에 완전히 믿음 소망 사랑으로 완전히 도배를 해놨어요. 소망은 뭐냐? 로마서 8장에 보면 진짜 소망 나옵니다. 로마서 8장 24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 했어요. 같은 소망을 이야기해도 그저 소망, 소망, “그저 우리 교회 부흥되게 하옵소서. 옆에 있는 불교 신자 땅 헐게 팔게 하옵소서.” 맨날 그런 것.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에요. 우리 소속이,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 때문에 이 땅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그저 재림하시되 우리 딸내미 시집가기 전까지는 재림하지 마옵소서” 이러고 있다 그 말이지요. 왜 자기 딸내미 시집가는 것……, 9월 11일 우리 조카 결혼식 하는데 그날은 재림 안 하고 구름만 와도 ‘구름 저리 가. 자칫하면 주님 재림하시겠다.’
이처럼 소망도 소망 아니지요. 믿음도 자기가 살아 있으면 그것은 믿음 아니에요. 그것은 행함이에요.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도 고린도전서 13장에 유명한 말씀이 나오지요.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사도바울은 무엇이 사랑이 아닌가부터 나열합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는 것도 사랑이 아니고, 예언하는 능력도 사랑이 아니고요,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요,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내어줄찌라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거예요. 사랑은 뭐냐? 내가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을 아는 것이 사랑이라. 온전한 것은 내가 온전하지 않습니다, 하는 그것이 사랑이에요.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9-13)
믿음 소망 사랑 그 제일은 창업이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던데요. 믿음 소망 사랑 그 제일은 창업이 아니고요,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바로 나를 없애주는 그 사랑, 최고의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은사는 능력이 있어요. 그 능력은 나를 뚫고 빠져나오는 거예요.
나를 재봉틀 위에 놓고 주님의 십자가로서 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박아 버려요. 십자가 피로서 박음질해버려요. 우리가 세상 육으로 살기 때문에 그렇게 박음질해도 또 세상 만나면 자아가 또 새롭게 나타나요. 나 이래서 천당 가겠나, 벌벌 떨고 있어요. 또 나타나면 또 박아 버려요. 또 나타나면 또 박아 버려요. 성령이 아니면, 성령이 매일 같이 함께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도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맨날 자기 잘못 한 것 잘한 것, 그거나 따지고요.
은사 안에 뭐가 살아 있느냐 하면, 출애굽 정신이 살아 있어요. 출애굽을 이야기할 때 마지막 재앙을 이야기해도 되지만 사실은 그 열가지 재앙 안에 출애굽이 담겨 있습니다. 뭐냐 하면,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서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게 바로 열 가지 재앙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열 가지 재앙이 전부 다 자연에서 나온 거예요. 나일강의 피, 두 번째가 개구리, 세 번째가 이, 또는 모기, 요새 모기 들끓지요. 네 번째가 파리, 다섯 번째가 가축의 악질, 여섯 번째가 독종, 일곱 번째가 우박, 여덟 번째가 메뚜기, 아홉 번째가 흑암. 이게 전부 다 뭐냐 하면, 이게 다 자연물이거든요.
그렇게도 인간이 의지하고 의지했던 자연물, 모든 과학은 자연물이 있음에 자연이 나온 거예요. 과학은 자연물을 이용하는 데 있어요. 그런데 마지막에 그 자연물 속에 진짜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자연물이 있어요. 그게 뭐냐? 나, 장자의 죽음, 족보의 죽음, 혈통의 죽음, 그 장자의 죽음, 모든 인간의 대를 아예 끊어버립니다. 더 살 필요 없다.
기존의 노선은 끝났어요. 기존의 노선은 다 죽음으로 끝나고요. 그 죽음에서 뭐가 나오지요. 죽음을 뚫고 어린양의 피가 나오지요. 그 피에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데 그 생명이 바로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 언약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새로운 백성이 등장하는 겁니다.
오늘날 이 마지막 때 그 취지가 그대로, 주신 은사 안에 그대로 녹아 살아 있어요. 그러니까 그 이스라엘은 이미 죽은 자에요. 바이러스 같습니다. 새우 안에 새우속살이 있는데 자기는 새우 껍데기에요. 딱딱한 껍질 그거 안 먹잖아요. 벗겨서 버리잖아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니까 나는 살아 있는 분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나는 살아 있는데 그리스도가 살아 있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죽은 채로 붙어 있는 새우 껍데기가 되어줘야 이게 하나의 언약이 된다고요.
그런데 이걸 우리의 육신이 있는 한 유지를 못 하거든요. 그래서 세상이 건드려요. 건드리고 내 안에 내가 살아 있으면 또 어디서 찾아왔는지 성령께서 우리를 재봉틀에 눕혀놓고 ‘오늘 좀 맞자.’ 해서 밟아요. 다다다다다, 이렇게 한번 뚫어서 이렇게 꿰어볼까, 구멍을 뚫어버리지요.
그러면 사도바울의 고백이 나옵니다. “나는 내 안에 십자가가 뚫고 지나간 십자가의 흔적을 지녔노라. 나는 내 안에 십자가의 흔적을 지녔다. 내가 소원이 있다면 이 짓 그만하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게 소원이다. 하지만 너희 교회를 위해서 주께서 이 짓 하게 만들었다. 내가 그래서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이게 바로 투명한 거예요. 투명성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 모닥불 피워놓을 것까지는 없지만 모닥불 피워놓고 밤새도록 그 이야기 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끝으로 오병이어와 엘리야의 사르밧 과부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오병이어, 마가복음 6장에 보면, 분명히 보리 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거든요. 이것은 인간의 육으로 보기에 분명히 5와 2, 5, 2, 그렇게 정해져 있어요. 제가 5! 2! 강조하는 것은 제 손자가 숫자 5하고 2밖에 할 줄 몰라서 5와 2입니다. 오병이어인데 이게 계속 나와요. 계속 나온다고요. 이게 선물이거든요.
재봉틀 박을 때마다 계속 나오는 거예요. “우리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열왕기상 17장 14절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사르밧 과부에게 죽으라고 해놓고 일부러 마지막 먹을 것까지 빼앗아서 일찌감치 죽게 만들어놓고는 밀가루와 기름이 끝없이 한없이 나오잖아요. 교회가 뭡니까? “모닥불 피워놓고~” 교회가 바로 끝없이 주시는 것, 이렇게 자아 생각하다가 이렇게 당했다는 그 이야기, 교회가 윤석렬 이야기나 하는데 입니까? 그 이야기로 지새울 수는 없는 거지요.
정치 이야기, 아프가니스탄 이야기, 코로나 이야기, 그것은 뉴스 시간에나 많이 하라 하세요. 그것은 19번에서 21번, 22번 23번에서 많이 하라 하세요.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데 관심 두다가도, 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재봉틀 구멍 나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걱정할 것도 아무것도 없고, 그냥 주님의, 예수님의 생명 이야기만 하라.
그 십자가 복음 중심 아니라면 그 사람은 천국에서 연락이 안 온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직 복음 이야기를 위해서 이제부터 윤석렬 이야기하시고, 문재인 이야기를 하시고, 복음 이야기하기 위해서, 하지 말라고 해놓고는 또 강조합니다, 하세요. 코로나 이야기하시고.
그게 얼마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지, 무너져가는, 이 흙 같은 육체가 무너져가면서 기껏 그런 것에 내가 주눅 들었고 쫄아서 살았다는 자신의 과거 이야기하듯이 세상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옛적 이야기하듯이 하게 하옵소서. 세상 이야기 안 할 수 없음을 저희들이 깨닫게 해주시고, 얼마나 그것이 허무하며 주님 주신 그 생명이 얼마나 고귀한지를 비교하면서 주님의 증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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