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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살전 5:18 / 물질과 영의 만남 / 121109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데살로니가전서

살전 5:18 / 물질과 영의 만남 / 121109

정인순 2012. 11. 10. 07:57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녹취:김창길

서울 의존교회121109a

(물질과 영의 만남)―이 근호 목사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살전 5:20 예언을 멸시치 말고

살전 5: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살전 5: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감사하다, 감사하다 하는데 오는데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는데 인증 삿을 찍는다고 스마트폰을 가지고 사진을 찍어요. 제가 그것을 보고 느낀 점이 자전거를 보고 기뻐하라 이것은 별로 어려운 것은 아니죠. 그런데 성령으로 기뻐하라 하면 될까요? 집을 새로 샀는데 기뻐하라 이것은 되는데 성령으로 감사함으로 기뻐하라 이게 되겠습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나는 성령으로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하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BMW 차를 뽑아서 너 줄게 하면 허 그 까짓것 차 그게 뭐 난 성령이 더 좋지 하는 이런 미친 사람 봤습니까? 없지요.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난처하게 만들어 버려요. 사랑하는 독자 아들 있지? 내게 바쳐라! 이게 무슨 낭패에요? 네가 미워하는 아들 있지? 예. 내게 바쳐라! 그럼 얼른 갖다 바치죠. 믿음도 없고 자식도 처리하고 참 좋겠는데 네 사랑하는 아들 있지? 예. 있습니다. 그거 죽여라!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궁지에 몰아넣고 하시는 말씀이 뭐냐? 오늘 23절 말씀입니다.

 

살전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그러면 앞 19절에 성령을 소멸치 말라 했는데 그러면 성령이 없이는 아무리 우리가 노력해도 영과 혼과 몸에 있어서 우리는 온전치 못하고 흠이 있다. 성령이 오게 되면 흠이 없고 성령 오게 되면 아무리 성령 없는 상태에서는 그 자체가 흠이 된다는 말이죠. 흠 없는 자체가 흠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너는 온전치 못하기 때문에 천국에 못 온다. 이렇게 된다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이 아까 제가 자전거도 이야기하고 차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무엇을 즐거워하고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기뻐하느냐 하면 내가 기대한 것이 소유되고 채워질 때 우리는 감사할 용의도 있고 기뻐 할 용의도 되어 있는데 막상 내가 온전해 지는 것에 대해서는 무척 부담스러워 하는 경향들이 있잖아요. 영과 혼과 몸에 대해서 우리가 흠이 없이 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내가 만들어 뭐? 하면 뭐 하시던지 말든지 별 관심도 없고 뭐 딴 데 출세해 볼까 하는데 있지 영과 혼과 몸 그런 것에 온전한 것에 저는 신경 쓴 적 없습니다. 이렇게 나왔을 때 과연 그 사람이 성령으로 기뻐하겠습니까? 성령 준 것에 대해 감사하겠습니까? 쓸데없는 것 줬다고 짜증이나 내고 하지 않았냐 이 말이에요.

 

제가 이런 말씀을 초반에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눈이 딴 데가 있는 이상은 성경의 진정한 뜻을 헤아릴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가 자전거 예를 들었습니다만 그것을 정립을 해 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여기 있습니다. 자전거를 내가 가졌다 하면 자전거를 가졌으니까 나는 인격자요 자전거는 물질이고 그래서 우리가 기뻐하는 것은 자전거 하나 가져오는 것은 우리는 기뻐한다. 1. 기쁜 것은 물질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자전거 말고 총각이 있는데 사랑하는 어떤 내가 바라고 있는 어떤 여자를 만났다 합시다. 그러면 이것도 기쁜 거죠. 첫 번째는 물질적으로 기쁜 것이고 두 번째는 사랑이니까 정신적인 거죠. 정신적으로 기쁜 것 이게 뭐냐 하면 사랑하는 자를 만났다 결혼했다 이것도 기쁘다. 어느 정도 기쁘냐? 그것은 간단하게 테스트할 수 있어요. 잃어버리면 되지요. 자전거를 줬다가 뺏어가 버립니다.

 

낭패가 없으면 환희도 없다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께서 이 자전거를 뺏어가 버리면 그 빼앗긴 그 아픈 만큼 그 만큼 그동안 좋았다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사랑하는 자와 헤어지고 이혼을 한다든지 이별을 한다든지 하면 상당히 마음이 아프겠지요. ‘사랑아 내 사랑아 사랑아 아픈 내 사랑아’ 하는 노래가 있죠. 사랑이 손톱으로 얼굴을 핥기는 겁니까? 아프긴 왜 아픕니까? 핥기면 후시딘 연고를 바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랑하는 자가 떠났을 때 후시딘 연고로 되겠습니까? 파스 붙인다고 사랑의 상처, 트라우마가 낫겠습니까? 너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게 하고 아파트 옥상에 올라갈 수도 있고 얼마 전에도 수능 앞두고 삼수한 학생이 뛰어내렸다 말이죠. 수능이 어떻게 자기 발을 붙들고 옥상으로 올리고 강제로 뒤에서 밀던가요? 수능이 점수 내는 건데 왜 수능을 앞두고 옥상에 올라가 자살을 하는 겁니까? 누가 그를 그렇게 만든 걸까요? 성적 나쁘다고 매질하는 부모? 뭐에요?

 

사랑하는 자를 잃어버렸을 때도 정신적으로 아프다. 결국 사람이라 하는 것은 첫 번째 물질도 소유하는데 기쁘고 소유의 반대는 뭐죠? 상실이죠. 상실되면 아프고 인간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기쁘고 소유하면 기쁘고 그 소유가 남의 것이 되면 상실이니까 이것은 아프고 그렇다면 사람들이 기쁘고 감사하다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가 만든 테두리 속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집어넣을 때는 기쁘고 그게 자기 영역이 깨질 때는 슬프고 주로 그런 거죠. 제가 그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과연 이러한 배경에 성령님이나 예수님을 여기에 소유할 수 있느냐 문제를 제가 제기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예수님은 좋은 분이니까 한번 내가 한번 소유해봐? 하나님은 좋은 분이니까 소유해봐? 인간은 자기가 기쁘다는 것을 소유하는 것 외에는 달리 기뻐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제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 반대로 내 것이 뜯기고 내 것이 잘라지고 내 것이 깨질 때 기뻐하지 못하느냐 이 말입니다. 성경 내용을 가만히 보면 전체적으로 다 그래요.

 

발람 선지자가 당나귀를 타고 갔을 때 예상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나귀야 빨리 가자 이랴 빨리 가야된다. 하고 있는데 당나귀가 좁은 골목길을 가다가 과수밭 길을 가다가 안겠다고 버티고 있을 때에 그때에 이 당나귀가 어디 왜 주인 말을 안 들어! 심하게 때렸어요. 때리니까 당나귀가 휘 돌아보며 하는 말이 왜 때리십니까? 이렇게 나왔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반람 입장에서 뭐가 깨졌습니까? 절대로 당나귀는 내가 아는 세계에서는 말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 당연한 거예요. 마땅한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쑤시고 들어 온 거예요. 그러면 뭐가 깨진 거예요? 당나귀를 소유했다고 당나귀가 내 뺐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고 당나귀는 절대로 말을 못해! 이 말은 확고해! 분명해! 하는 그 틀이 깨진 거예요.

 

그러면 오늘 본문에 23절에 영과 혼과 육은 흠이 없이 온전해야 돼 라고 나름대로의 틀을 갖추어도 하나님께서는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하겠어요? 네가 이것이 온전하고 이것이 흠이 없고 라고 우겼던 그 틀을 성령님이 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상 밖으로 그 틀을 깨던지 찢던지 차고 들던지 그렇게 할 겁니다. 네가 생각하는 흠 티 없음은 그것은 너한테나 통하지 나한테는 안 통한다. 네가 뭔가 고상한 것 건전한 것을 네가 가짐으로서 내가 이만하면 훌륭하겠지 라고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오는데 그 틀 자체, 인식틀 자체 그게 깨져야 됩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흠없다 흠있다 우리가 판정 할 권한이 없고 우리는 거룩하다, 거룩하지 않다, 온전하다,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판정 낼 입장에 있지를 못합니다. 왜냐 하면 만날 끌어 모으려고 그것만 기뻐하고 잃어버리면 울고불고 하거든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아브라함의 사랑하는 아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 잘 크나? 잘 큽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돌아서면 그만일 텐데, 사랑하는 아들 있냐? 있습니다. 그 아들 네 손에 의해서 죽여라! 우리 같으면 하나님 이게 뭡니까? 그게 티가 없는 것이고 그게 흠이 없는 것이고 그게 온전한 것이다.

 

어떻게 사랑하는 자식을 죽이는 것이 그게 온전한 것입니까? 도대체 무슨 논리에 의해서 세상에 그런 논리가 다 있습니까? 여기 비타500이 있는데 하나님, 한 병 드릴까요? 안 마신다. 안마시면 말고 내가 먹으려고 하는데 주님께서 빼어서 마셔요. 줄 때는 안 마신다 해 놓고 내가 마시려고 하니까 뺏어갑니까? 주님께서 그게 너의 온전함이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그게 너의 온전함이다.

 

우리는 하나의 도화지인데 하나님이 어떤 그림을 그려도 그것은 온전한 그림이 돼요. 그런데 도화지 양쪽에 팔이 나와서 자기가 도화지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크레파스를 쥐고 자기 몸에 예쁜 것을 그렸다면 그것은 주님의 깨끗한 도화지를 낙서를 한 거예요. 그동안 우리는 우리인생을 내거라고 여기고 마귀가 시키는 대로 거기에 낙서를 한 겁니다. 그것을 지적 하는 거예요. 네 사랑하는 아들을 내게 줄 수 있느냐? 묻는 겁니다. 네가 주게 되면 믿음이고 안 주면 믿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있습니다. 너라는 인간은 내가 달라고 하면 줘야 되고 죽으라면 죽어야 되고 살라면 살아야 돼요. 살고 죽는 것은 네 소관이 아니고 내 소관에 있다는 것을 네가 인정하면 믿음관계이고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믿음관계도 아니고 흠도 티도 많은 거고 거룩하지도 않다는 겁니다. 도대체 이런 아이디어, 발상은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이게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이스라엘에서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이 나라죠. 나라가 되려면 경제가 뒷받침돼야 돼요.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목축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터전을 잡게 되면 이제는 곡식도 키우고 추수도 하고 가나안 땅에서 적과 꿀이 흐르는 포도원도 하지만 그전에는 목축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목축을 하던 뭘 하던 그것이 경제적인 바탕이 될 때 그것을 분업하고 그것을 나누고 거기에 나오는 생산물, 잉여 생산물은 그것으로 노래한 것이 되고 신에 바친 것, 헌금한 것이 되지요 옛날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헌금이라 하는 것은 내가 일단 내가 기본적으로 먹을 것 챙기고 생존은 되는 것 챙겨 놓고 거기서 약간 남는다 싶으면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내놓고 생존에 지장이 있다고 싶으면 외상으로 달아놓고 하나님이 안 살려줬으니까 하나님이 헌금 받을 자격이 안 됩니다. 나를 이렇게 힘들게 살게 해 놓고 뭘 돈을 바래? 양심이 있어야지 이렇게 힘들게 만들어 놓고 헌금을 바란다면 하나님은 나쁜 분입니다. 이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모든 인간이 생존이 기본이고 생존에서 여분의 힘이 있으면 종교 생활하는 거고 생존이 어렵다면 종교생활도 잘라버리고 그것도 나중으로 미루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했습니까? 생존에 유리하게 했습니까? 불리하게 했습니까? 생존에 불리하게 했어요. 왜? 주변의 자꾸 강대국들이 뺏어가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나라가 스스로의 어떤 경제적인 재력이 있어서 스스로 버틸 수 없는 나라로 만들어버려요.

 

이스라엘은 스스로 자립불가능한 나라로 스스로 만든 겁니다. 특이한 나라입니다. 스스로 자립한 나라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나라가 조금만 여유 있다 싶으면 놀랍게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어요? 믿어요? 안 믿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 주변에 여러 나라 있어서 다 뺏어가 버릴 때 이 나라는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나라는 가진 것 가지고 밥 먹고 사는 여타의 그런 나라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군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밀당, 밀고 당겨서 어떤 하나님이 우리가 원하는 재물이나 주시는 그런 분이 아니고 그것 말고 다른 것으로 우리를 생존케하는 그런 특이한 하나님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비로소 내 비치는 겁니다.

 

돈이 있어서 산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을 산다고 보지를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요소가 하나님의 뜻이 너희 속에 담길 때, 너희 속에 담긴 그것과 더불어서 그것이 살아있으면 너희 주변에 있는 너희들도 산 것으로 간주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제사가 살아있으면 너희들은 못 먹어도 살아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제사가 죽어 버리면 너희들이 돈이 많고 풍족해도 그것은 죽은 민족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특이한 요소가 삽입되는 겁니다. 삽입시켜 놓고 그것을 가지고 흠도 없고 티도 없고 온전하다는 말로 하는 거예요. 흠도 티도 없고 온전하다하니까 사람들은 내가 흠은 없는데 티는 좀 있다 이렇게 나오는데 그렇게 나오지 마시고 흠이 없는 것이 티가 없는 것이고 티가 없다는 것이 거룩한 것이고 거룩한 것이 온전한 거예요.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23절에 보면 너희 영과 혼과 몸이라 할 때에 여기는 인간이 영 따로 혼 따로 몸 따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몸이 괜찮으면 영이 괜찮은 것이고 영이 괜찮으면 혼이 괜찮은 것이고 혼이 괜찮으면 몸이 괜찮은 겁니다. 철수나 안철수나 단일화 하겠다는 후보는 다 같은 사람이잖아요. 다 같은 사람이죠. 안철수라고 철수 아닌 게 아니잖아요. 다 같은 사람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너희들을 혼으로 부르나 영으로 부르나 몸으로 부르나 중요한 것은 이 혼이냐 영이냐 몸이냐 너희는 혼 덩어리고 영 덩어리고 몸 덩어리인데 중요한 것은 그게 흠이 있느냐 없느냐 라는 거예요. 그런데 한국 교회는 해석을 어떻게 합니까? 몸에서 혼으로 나오면 좀 더 온전하고 혼이 좀 더 온전하고 거기다가 혼에서 영으로 진급하면 그것은 보다 더 온전하고 그렇게 봅니다. 그렇게 보는데 그런 게 아니에요. 보다 더 온전하다는 게 없어요. 보다 더 온전하고 흠이 있긴 있는데 이것은 병원에 가서 수술하면 낫고 하는 그런 것 없어요. 네가 몸에 티가 있는데 이것은 크면 낫겠고 하는 이런 것은 없다니까요.

 

이번 강의에 어려운 부분이 나오는데 그중에 첫 번째 언급된 것은 어린 아이가 어린 아이, 자기 입장에서 세상을 볼 때 그게 과연 온전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왜냐 하면 18살에 16살 때에 살았던 것이 온전치 않다는 것을 18살 때에 만약에 돌이켜서 언급할 때 그러면 16살 그 자체는 온전했느냐 하는 문제가 남게 돼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세상을 많이 알게 되잖아요. 알게 되면 자기가 온전했다고 생각했던 것이 뒤돌아보면 온전치 못한 게 타나게 되거든요. 그것은 내가 지식이 모자란다는 정도가 아니고 나로 인하여 뭔가 피해를 보는 사람, 고생하는 사람이 점점 더 많이 등장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극장에 보니까 네 쌍둥이가 나와요. 네쌍둥이 이름이 영웅호걸인데 태영, 태웅, 태호, 태걸 이렇습니다. 아이 네 명이 나오는데 이제 1년 좀 됐는데 어떤 애가 칫솔을 쥐고 있어요. 태호가 칫솔을 쥐고 있으니까 태걸이가 자기도 달라고 달려드는 거예요. 자, 9월 달에 사진 찍었습니다. 태호가 칫솔 가지고 노는데 태걸이가 칫솔 뺏으려고 달려드는 것을 사진을 찍었다 합시다. 1년 6개월 때에 찍었다 하고 그리고 세월이 36년 지났다고 합시다. 36년 지나서 37살 먹은 태호와 37먹은 태걸이가 다시 태호가 칫솔을 쥐면 태걸이가 그 칫솔을 뺏으려고 달려들겠습니까? 형님, 미안하게 됐어 내가 철이 없어서 칫솔 그게 뭐라고 그것을 뺏으려고 이제 나이 37살 대보니까 칫솔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 귀찮던지 그렇게 1년 6개월 동안 왜 그렇게 했는지 그놈의 칫솔 쥐고 있는 것을 못 빼어서 울고불고 난리 났어요. 하나 울고 하나 웃고, 울은 놈 또 웃고 웃는 놈 또 울고, 애 네 명 키우는데 감당이 안돼요.

 

네쌍둥이는 아니지만 여러분들도 어릴 때 다 그렇게 컸잖아요. 언니 동생 하면서 다 그렇게 컸잖아요. 가족들이 다 그래 왔잖아요. 지금 와서 거기에 대해서 회개 반성 하십니까? 언니 몰래 치마 입고 나가서 치마 쭉 째 가지고 온 거 반성하십니까?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그때는 내가 몰랐잖아! 그럴 때는 다 그렇지 하고 이야기합니다. 자 온전하다는 의미가 과연 인간이 시대에 따라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온전함이 변한다면 어느 세월에 온전해 집니까?

 

신앙생활을 몇 년 해야 돼요? 재수를 몇 수해야 합니까? 그러면 10년 믿으면 온전합니까? 교회 15년 다녀야 온전할까요? 흠도 티도 없다 지금 이야 그렇게 보이겠죠. 내년되면 내년까지 갈 것도 없어요. 내일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런데 성령님은 장담합니다. 네가 50살이 되던 백 살이 되던 천살이 되던 내가 너를 흠도 티도 없게 만들겠다! 어떻게요? 성령이 임하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가 자전거를 하나 살 때 기뻐했습니다. 15살 때에 자전거를 사서 기뻐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나중에 나이 50이 되었는데 자동차 회사 사장이 하고 있더라 그때 어떤 직원이 사장님! 제가 귀한 선물 드리겠습니다. 여기 자전거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자전거는 그때 내가 15살 때 좋아 한 거고 지금은 자전거 안 좋아한다. 지금은 나이 50돼서 자전거 탈일도 없고 나는 차를 좋아한다. 이렇게 나온다 말입니다. 그러면 그때 왜 자전거를 좋아했습니까? 그때 자전거 좋아한 것은 온전한 기쁨이 아니었습니까? 그때 당시는 온전한 기쁨이지만 그 다음부터는 자전거를 주게 되면 이것은 욕망 채움의 법칙에 의해서 자전거를 주게 되면 처음에 한 대 주면 좋죠. 세대 주게 되면 이것 딴 것으로 바꿔주세요. 합니다.

 

여러분 마이다스의 손에 대한 이야기를 알지요. 이것은 만지기만 하면 무조건 금이 되는 거예요. 금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빵을 먹으려고 손을 데니까 세상에 씹어 먹어야 될 빵이 금으로 변했다 말입니다. 약을 올려도 보통 약을 올리는 게 아니잖아요. 금은 금으로서 있을 때 좋은 것이고 빵은 빵으로 있을 때 좋은 것이지 전부 다 밥이고 빵이고 금 되어 버리면 물을 마시려는데 금이 되어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우리가 우리의 기쁨, 우리의 만족이라 하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결국 우리의 기쁨 우리의 만족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자신 세계 속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뭔가 기뻐한다 할 때 하나님이 기뻐한다 할 때 그 기뻐 한 것은 너무나 철이 없고 우리가 이런 것을 가지고 소유했다고 이런 것을 기뻐합니다. 하는 것 자체가 성령님이 보시기에 그게 흠이 많은 거예요. 그것은 문제성이 보통 문제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뻐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라 할 수 없고 남한테 차 하나씩 현대차 주고 난 뒤에 기뻐하지 마시기랍니다. 여기 기뻐하는 사람 있으면 성령 안 받은 사람입니다. 하면 속으로 좋으면서 좋은 것 참느라 입꾹 다물고 참습니다. 그러니 그것도 이상하고 괴상한 짓이죠.

 

그러면 성령님께서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로 하여금 성령 받은 것을 기뻐하는 방법으로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만날 가진 것 좋아하는 것 말고 온전히 흠과 티가 없는 것이 성령이 임하면 네가 무슨 짓을 해도 흠과 티가 없다고 단정을 해 주는데 그런 기쁨을 우리가 가지려면 가지는 방식이 하나님 쪽에서 어떤 식으로 방식을 동원해서 우리로 하여금 성령으로만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만드는 방식이 뭐냐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을 소멸하는 것을 아주지 안타까워하겠지요. 여기 19절, 20절, 21절을 보면

살전 5: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살전 5:20 예언을 멸시치 말고

살전 5: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성령을 소멸치 말고 예언을 멸시치 않는 것을 가지고 아주 가슴 아프게 생각하면서 내가 절대로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지 내가 예언을 왜 멸시해 하고 가슴 아파하는 것 그런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되느냐 말이죠. 젊은 애들이 차 한 대 사면 그 다음부터는 그것이 조선시대 말인지 줄 알고 훅훅 불고 닦고 집안 청소는 하지도 않으면서 만날 아침마다 들러보면서 잘 있나 들여다보면서 안녕하십니까? 굿모닝 차라 해서 만날 닦고 난리에요. 뭐 하나사면 그렇게 하잖아요.

 

어쨌든 간에 사람들은 자기 기쁨이 된다면 목숨을 바꿀 정도로 그렇게 애지중지한다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성령이 왔음을 그렇게 감사하고 예언을 그렇게 무시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뭐냐 말입니다. 성경에 나오니까 보통문제가 아니잖아요.

 

방법을 제가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인간은 물질, 물건, 상품을 다룹니다. 인간은 물건을 소유함으로서 여기서 기쁨을 얻습니다. 자기의 아쉬운 것, 부족한 것 마저 채우는 겁니다. 고등어가 먹고 싶다 그러면 열심히 노동해서 쌀을 생산하고 쌀을 가지고 가서 고등어하고 물물교환해서 상대편은 쌀을 나는 고등어를 먹고 하는 겁니다.

 

인간은 물질을 다룸으로서 자기만족을 느끼는 것이 바로 경제적 활동입니다. 그런데 이게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이게 흠이 있다고 했죠. 이게 흠이 있고 티가 있고 이것은 온전하지 않고 거룩하지 않은 것이 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할 것 같으면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방 나라하고 똑같은 것이 되는 거예요. 물질이나 물건, 재물을 내 것으로 만듦으로서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누가 복음 16장에 부자가 나오죠. 부자니까 많이 가졌을 거잖아요. 반대로 거지, 거지는 있는 것도 다 빼앗겼으니까 그런데 부자가 지옥간 뒤에 그 부자 행세 또 합니다. 물방울을 내게 가져다주게 하소서! 손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서늘하게 하옵소서! 그러니까 지금 이 인간은 인간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본인이 모르는 거예요.

 

본인이 문제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자꾸 물질을 탐함으로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거예요. 계속 해결하는 거예요 순간적인 기쁘다 마약같이 쇼핑에 빠진 사람처럼 계속자기의 문제점을 이런 것을 채움으로서 해결하려한다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인간이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아니고 악한 영에서 거룩한 영, 다른 말로 하면 거룩이니까 성령, 악한 영의 세계에서 성령의 세계로 바뀌는 겁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2절 너희가 그때에 불순종의 역사하는 악한 영이라

엡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리고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세상신이 복음을 가리게 만든다는 이런 이야기가 나오죠.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너희들이 악한 영의 속했는데 이제는 성령에 속해라 그럴 때 흠이 없고 티가 없고 거룩하다하죠. 우리는 뭐라 하느냐 하면 그런 것은 모르겠고 하여튼 내가 원하는 것 내가 갖고 싶은 것 많이 가지면 제가 행복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면 이 전체가 인간이 물질을 가지고 만족한다는 이 전체가 성경 보기에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이게 악한 영에 속해 있다는 것을 그것을 통보하고 알려주면 되겠죠. 인간 자체가 악한 영에 속해 있다는 것을 묻게 된다 말입니다.

 

인간이 악하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 하느냐 하면 성령께서는 구원 받아라 합니다. 네가 구원받아라! 하면 인간들은 구원받아요? 못 받아요? 자기 나름대로의 악한 본인이 악한 방법을 다 끄집어내서 악한 자기를 악한 방법을 가지고 악하게 구원받고자 시도를 하겠지요.

 

악한 인간이 구원받으려고 하니까 구원되기 위해서 모든 자기가 할 수 있는 역량과 노력과 선함을 총동원하겠지요. 그게 악한 방법이라 말이죠. 성령이 아니니까 악한 인간이 악한 방법을 다 동원해서 자기가 악한 데서 벗어나려고 애쓰면 결국 다음 결과는 뭡니까? 악에다 더욱더 추가 범죄를 추가만 더 될 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이 악하다는 방법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구원받으라는 한 소리 하면 돼요. 거기다가 더 노골적으로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 하면 악한 본성 다 튀어 나와 버려요. 아이고, 그거 간단해요. 손들고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하면 손들고 나오잖아요. 그게 바로 존비에 나오는 거예요. 악한 귀신이 손들고 나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악한 방식에 의한 구원방식입니다.

 

구원받으라는 말은 구원이 된다는 말입니까? 안 된다는 말입니까?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네가 악한 데서 구원받으라 하니까 예. 악한 데서 나오겠습니다. 하고 시도 하는 것 자체가 무엇이 악인지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자기가 선하게 살면 그게 구원되는 줄 알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그 방법을 쓰시는 이유가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입을 싹 닦는 거예요. 이게 입을 닦기는 어디 입을 닦아 네 속에 선악과 들어 있는데 선악과가 작동해라! 하면 그 작동 방법이 뭐냐? 네가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구원하라 하면 그 다음에 숨어있던 자기가 구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작동하는 거예요.

 

그럴 때 나온 게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의 아비는 누구라 말했습니까? 마귀, 마귀가 자기 본색을 하는 거예요. 우리들 힘을 합해서 구원되세. 하나님 잘 믿세! 이래 가지고 나오는 거예요. 속에 숨어 있던 괴물들이 본색을 드러내고 튀어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은 의자에 앉아서 저 봐라 귀신 나오는 거 봐라 마귀 앞장서서 나오는 것 봐라 독사의 새끼들 하는 것 봐라 나온다 말이죠.

 

세례요한도 그만큼 했습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깝다 하니까 바리새인들이 나옵니다. 저 봐라 귀신 회개하고 나오는 것 봐라. 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들이 어떻게 구원받기 위해서 나오느냐? 안 돼!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구원될 수 없으면서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이유 때문에 구원이라고 쳐 달라는 거예요. 거짓말로 너 구원받았습니다. 하고 사인 해 달라는 거예요. 이정도 선하고 이정도 청소하고 봉사했으면 너는 구원되었음 하고 이렇게 손들고 나왔으니까 구원받았다. 이렇게 해 달라는 거예요. 너는 언제 세례 받았고 세례 받을 때 너는 회개했기 때문에 구원받았다. 이렇게 해 달라는 거예요. 이 종교 단체가 바로 그것을 하고 있습니다.

 

동사무소가면 등본 떼어주잖아요. 교회는 뭐 떼어줍니까? 세례증서 떼어주고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억된다는 것을 해 주잖아요. 얼마나 서류상 편리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속에 어떤 악한 것이 들어 있는 가를 까발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모든 지시와 명령을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이것을 옛날 이스라엘사람들도 몰랐고 오늘날 사람들도 역시 이방인들도 이것을 모르는 거예요. 이스라엘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명령이 주어졌습니까? 618가지 율법이 주어졌다고 하는데 그 많은 율법을 야고보서에 보면 그중에서 하나라도 어기면 다 어긴 것이다. 예수님은 더 하죠. 마음속으로 어긴 것도 실질적으로 어긴 것으로 간주된다.

 

흠이 없고 티가 없다고 거룩하다고? 너희들은 흠이 있고 티 있고 거룩하지 않아! 하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산상설교 하셨고 모세에게 율법을 줬고 사도에게 명령과 지시, 말씀을 주시고 내리신 것입니다. 구원받으라고 하니까 갑자기 바쁘기 시작합니다. 몸 간수하고 목욕재개하고 바쁩니다.

 

그렇다면 구원이 안 됨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으라고 함으로서 인간의 숨어있는 그 권세를 하나님께서 까발리는데 이것이 제가 아까 편하게 쉬운 얘기를 했습니다만 이것을 고대의 역사로 이것을 예를 들어서 말씀드릴게요. 주나라 중국 BC800년경의 이야기입니다. 주나라에 있어서 흠도 없고 티도 없고 거룩한 것이 뭐냐 하면 옛날에 농사를 짓잖아요. 농사를 짓는데 수월하게 농사를 지으면 축복받은 것이고 농사짓는데 가뭄이나 흉년이나 홍수가 나면 이것은 벌 받은 것으로 보는 거예요.

 

아까 자전거 이야기했죠. 자전거를 잃어버리면 기분 나쁜 것이고 자전거를 새로 사면 기분 좋은 거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이 만족하다, 기쁘다, 진리다, 하는 것은 결국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이 복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계속 확인해 주면 그것이 자기로서는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로 갈 수 있는 의도가 있다 그런 뜻이거든요. 이것을 국가로 보면 농사가 잘되면 복 받은 거고 농사가 안되면 저주 받은 것으로 보는 거예요. 누가? 대중들이 백성들이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면 신을 누가 다루어야 된다 말입니다.

 

자연을 다루기 위해서 중간에 누구를 세우느냐 하면 왕을 세우는 겁니다. 왕을 세워서 왕이 제사를 잘 드리면 그 당시에는 왕도 있었고 왕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조상들이었습니다. 다른 조상이 아니라 왕 자체의 조상들이 있었어요. 그 왕의 조상들을 잘 섬기게 되면 자연의 신을 우리 인간 쪽에서 다룰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왕은 제사할 때 되면 목욕하고 흰옷을 입고 자기 부족을 느끼면서 백성을 대표해서 회개하게 되면 갑자기 가뭄때 비가 오게 하기 위해서 백성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그런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고 더 노골적인 것은 왕이 왕궁에 있을 때 사람들은 자연의 신에 대해서 눈에 안 보이니까 경험상 볼 수 있는 신을 원해요.

 

그게 왕인데 겨울 되면 왕이 검은 옷을 입고 북쪽으로 가요. 봄 되면 녹색 옷을 입고 북동쪽으로 가요. 가을되면 흰옷을 입고 남쪽으로 가요. 여름 되면 붉은 옷을 입고 서쪽에 가요. 이 왕궁 안에서 왕이 이런 행동을 보이는 것은 지금 왕의 행동이 곧 신의 행동입니다. 라고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백성들은 그 보이지 않는 신이 왕이라는 인격체를 통해서 움직이니까 그들이 일치단결되는 겁니다. 그러한 밑바닥의 생각은 신은 절대로 우리를 버릴 리가 없어! 라는 것이 기본에 깔려있는 겁니다.

 

그게 성경적으로 볼 때 이방적이고 흠이고 티가 있는 거예요. 반면에 이스라엘에 사람들에게 율법을 준 것은 모세가 시내산에 세 번 올라가잖아요. 첫 번째 올라갈 때 율법을 받고 옵니다. 두 번째는 제사방식을 받아와요. 율법을 줌으로서 죄를 드러내고 그 죄로 두 번째 올라갔을 때는 제사법, 이 죄가 어떤 식으로 이 죄가 없어지는가? 세 번째는 돌판을 받기 위해서 올라가고 이스라엘 백성에서는 율법은 죄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하는 이유가 두 번째 제사제도, 어린 양 중심으로 진짜 거룩한 것은 따로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어린양에 초점을 맞추라고 너 행동은 죄밖에 안 나와 그러니까 너 죄가 어디서 해소되고 어떻게 되는가를 보라고 두 번째 제사, 성막과 성막 만드는 것, 제사법, 법궤 만드는 것이 여기에 다 있다 말이죠.

 

그런데 이 말은 결국 뭡니까? 이미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면서 언약이 모세 손에서 깨어졌죠. 언약이 깨진 상태에서 세 번째 올라갈 때는 언약은 백성하고 맺어지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모세의 말을 따를 거냐 말거냐 라로 결정 돼버려요. 모세한테는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이 있죠. 율법의 기능은 따르는 자의 죄를 낫낫이 지적 하는 가능이 있어요. 자기 죄를 지적 해주는 사람을 따르면 그것은 흠도 없고 티도 없고 거룩한 거예요. 그런데 자기는 버티고 앉아서 신이시여, 이리 와서 나를 구원하소서! 이러면 네가 뭔데 너를 왜 구원하는데? 저한테 잘해 주시면 제가 뭐 그냥 가만히 있겠습니까? 받은 복중에서 십일조 드리겠습니다. 이게 어디서 자기만족에 빠져서……. 이렇게 된다 말이죠.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가지고 그것을 무슨 용으로 사용했습니까? 메시야의 피 없이도 자기의 성과로서 천국을 가려고 덤벼든 거예요. 그래서 선지자가 한 말이 뭡니까? 예수님이 이야기했지만 ‘이 독사의 자식들아! 천국이, 하늘나라 네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하느냐?’ 너희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해서 천국을 차지한다고 보는데 아브라함의 본 약속은 천국에서 다 쫓겨나고 그 이방인들이 그 나라를, 천국을 차지할 것이다. 나가라! 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만족하고 성령으로 흠과 티가 없게 한다는 것은 우리의 방식으로 율법을 우리가 지켜서 흠과 티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내년되면 내년돼서 올해를 바라보면 또 흠이 있고 티가 있어요. 그해도 그 다음 해 되면 또 흠과 티가 또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자기를 정당화해도 정당하다는 이 인식 자체가 내가 남에게 의가 있어서 그 의를 자랑할거야 하는 것 자체가 주님 보시기는 흠이 있고 티가 있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은 그 더러운 행세를 그대로 다 보여 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에서 출발해서 세상에 모든 일어나는 일까지 확대하고 확산해야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안동에 양반이 집에 들어 갈 때 그냥 딩동 계십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이리 오너라! 합니다. 이리 오너라! 선악과 따먹은 것과 이리 오너라 하고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나는 너희들이 영접해야 될 그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다 하고 자기 자랑, 자기 과시를 하잖아요. 그것이 선악과 따먹은 행세 아닙니까?

 

모든 인간의 행동 하나하나가 선악과와 결부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요. 다 선악과와 결부되어 있어요. 반대로 삼수해서 성적이 안 나오면 자살하는 거예요? 성적이 안 나오면 남들이 나보고 쪼다라고 이야기하고 부모는 나를 욕하게 되고 그런데 나는 나를 욕할 마음은 없고, 나는 나에게 욕할 마음이 추호도 없는데 다른 사람은 욕하니까 나는 당신들에게 욕먹기 전에 내가 먼저 이 괜찮은 나라 가슴에 품고 내 의지로 영원히 함께 하는 나는 영원한, 찬란한 아름다운 괜찮은 존재가 되겠지요. 그래서 자기 몸을 안고 뛰어 내리는 거예요. 차마 자기마저 자기가 내칠 수 없어서 남들은 나를 다 내치더라도 나는 나를 내 칠 수 없어서 이게 지금 반성하는 거예요? 회개하는 거예요? 끝까지 저는 잘났다 이 말아닙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께 선악과 따먹은 티를 팍팍 내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은 자체가 흠이고 티고 거룩하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 DNA가 그렇게 되어 버렸는데 지금 와서 어쩌란 말이에요.

 

구원 받아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새로 창조해 줄게 라는 말이에요. 새로운 피조물 만들어 줄게 그런 뜻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원받으려 애쓰다 보니까 더러운 인간이 더러운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서 자기한테 이만하면 됐어! 구원됐어! 이렇게 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창조의 의지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밖에 안돼요.

 

구원받았다고 감사하다고 헌금을 해 버리면 그러면 십자가 피는 그 가치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 십자가 피가 모독 받는 거예요. 뭔가 챙길 것 챙겼으니까 그만하면 보답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이런 헌금하는 식이 되어 버리면 결국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십자가 피를 모독하는 거예요.

 

마치 이런 겁니다. 남편이 아내의 몸을 원했어요. 남편이 자고 나니까 남편이 5만 원짜리를 내놨어요. 아내가 아니고 완전히 창녀죠. 똑같아요. 얼마나 모독 스럽 겠어요? 엄마가 잡채해 주고 나니까 아줌마 여기 계산 얼마에요? 하는 것과 똑같아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다는 것은 아까 처음에 강의 했듯이 우리가 자전거 하나 소유하고 뭐 소유하듯이 구원을 소유하고 천국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소유하면서 만족하는 그 버릇,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구원을 소유하면 안 돼요.

 

구원은 주님의 작품이고 주님의 숙제이고 주님의 업무이지 내 업무가 아니에요. 우리는 구원 당하면 돼요. 참 쉽지요. 우리는 구원 당하면 되는데 참 더러운 버릇이 구원을 가지고 간다 말입니다. 나는 구원 가졌어! 나는 구원 가졌는데……. 미쳤어요. 구원을 가집니까? 구원 작업에 우리가 이끌려 간거에요. 아침에 아내가 콩나물국 끓여주니까 ‘아이고, 해장국 아줌마 5천원 합니까?’ 이러면 뭡니까? 해장국을 얼굴에 바르는 일이 벌어지겠죠. ‘아이고 못난 것한테 이렇게 주니 고맙습니다.’ 이렇게 나와야죠. 내가 월급을 갖다 주는데 이게 뭐고? 하면 곤란하다 말이죠. 월급 준다고 남편이 아니잖아요? 남편인가? 월급 안주면 남편 아니지……. 남편하고 아내 사이가 그런 사이입니까? 월급 주고받고 하는 용역 회사입니까? 커미션 받아 챙길 일 있어요? 우리가 왜 자꾸 그런 식으로 생각하느냐 하면 우리는 남한테 예속되고 복속되기 싫은 되지도 않은 자존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서울 의존교회121109b

(물질과 영의 만남)―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성경에 보게 되면 흠도 티도 없고 모든 게 당연합니다. 어째서 그런가? 우리를 상대안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를 상대해서 뭘 하겠다 하면 그것은 더러운 것을 내 놓는 것이 되기 때문에 아예 우리를 상대 안하면서도 우리를 흠도 티도 없고 그리고 거룩하게 아예 그렇게 만들어 버리면 돼요. 그런데 우리를 흠도 티도 없게 만들어 버릴 때는 우리하고 상대 하지 않고 그렇게 온전하게 만드는 방식을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그게 전쟁입니다.

 

전쟁인데 우리하고 전쟁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이 꼴로 만든 그저 자기 자랑하고 자기가 나름대로의 구원 받고자 하고 그저 흠도 티도 없고 완벽하게 살려고 그래서 저주는 줄이고 축복은 증가 시키고 보상은 받되 피해는 최소화하기 위해서 내 것을 내가 지키겠다는 이런 사고방식을 집어넣어준 그 악한 영들을 상대로 성령께서 또는 하나님께서 전쟁을 벌이십니다.

 

전쟁을 벌이게 되면 구약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전쟁하시는 분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전쟁하시는 하나님과 대비가 되는 신이 있어요. 그 신이 풍요와 다산의 신입니다. 풍요, 넉넉한 것과 다산, 자식을 많이 낳는 신, 이것이 엘리사 선지자가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한 판 붙습니다.

 

그 전에 출애굽 당시에는 애굽신과 여호와 하나님이 붙었습니다. 애굽신은 풍요와 다산의 신이 아니고 내 백성, 내 놔라! 못 내놓습니다! 에 관여하는 신이었어요. 내 백성을 내놔라! 못 내놓습니다. 그러면 네가 죽는 이유는 딱 한 가지 내 백성을 내놔라 할 때 안 내놓기 때문에 너는 죽어! 라고 해서 죽는 일이 벌어졌죠.

 

애굽에 모든 가정의 맏이들은 다 죽었습니다. 심지어 감옥 속에 있는 애굽 맏이도 죽었고 왕궁에 있는 맏이도 다 죽었어요. 이유는 단 한 가지 내 백성 내놔라 할 때 안 내놓기 때문에 죽인 것입니다. 그 맑은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히브리인들이 어디서 빠져 나왔다는 말입니까? 죽음에서 빠져 나왔다 말입니다. 그 때부터 이스라엘은 죽음을 이기는 유일한 민족입니다. 죽음을 이겨서 만든 이스라엘인데 정작 본인 이스라엘은 죽음을 겁냅니까? 겁을 안냅니까? 무지 무지 하게 겁을 내지요. 어려우면 죽는다고 겁을 내고 기도하잖아요.

 

그러니까 이 이스라엘은 진짜 이스라엘이 아니고 수상해요. 진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속에 숨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 이스라엘에서 이스라엘을 분류시킬 필요가 있지요. 그것을 정제작업이라고 해요. 불순물을 제거하고 안에 있는 것만 끄집어내는데 그 끄집어 낼 때 끄집어낸 당사자가 마태복음 1장에 족보에 쭉 나오잖아요.

 

다말에게서 룻에게서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쭉쭉 개통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사람의 개통을 모아서 만든 입장에서는 그것을 마치 어묵꼬지, 닭꼬지처럼 엮어서 개인의 자질에서 인하여 거기서 나왔다고 보지 않고 뭔가 그들을 관통하는 작대기, 꼬챙이 같은 것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 족보입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 덕분으로 그들은 나왔다는 말입니다.

 

기생 라합에게서 기생 라합은 본인의 자질과 능력으로서 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고 미리 그 사람에게 예수님의 꼬챙이가 이미 꿰뚫린 거예요. 제가 꼬챙이라고 했지만 그 꼬챙이를 베드로전서 1장10절에 보면 그것을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이라고 하는 거예요. 성령을 수증기로 보지 마시고 뾰족한 꼬챙이로 보이면 제가 고맙겠습니다.

 

성령이 온다 하면은 꼬챙이로 보셔서 옛날 기생 라합을 꿰뚫듯이 그렇게 보시라 이 말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 꼬챙이가 뚫린 것처럼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마태복음 1장보다 더 상세하게 예수님의 꼬챙이가 쫙 꽂혀져 있습니다.

 

노아는 방주로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그 이전에 아벨은 그의 재물로 인하여 구원받았고 믿음으로 살았고 또 어떤 사람은 돌에 맞아 죽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 꼬챙이 때문에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세계에 합류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전쟁하시는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자신도 전쟁에서, 죽음에서 나왔습니다. 덩어리로 나왔는데 이 덩어리가 정제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방금 예수 성령님의 꼬챙이라 했지만 이 당시, 출애굽 당시에는 이것을 주의 이름이라 하는 겁니다. 이사야 같은 경우에 주의 이름으로 어떤 기능이 있다. 그 기능이 뭐냐 하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이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이란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이다? 아니다? 아닌 거예요. 이스라엘 속에 새롭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일,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기 위한 어떤 바탕을 제공하는 것은 맞지만 이스라엘 그 자체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제가 아까 첫 번째 시간에 뭐라 했습니까? 주나라의 임금이 겨울 되면 검은 옷 입고 북쪽에 서고 봄 되면 녹색 옷 입고 동쪽에 서고 가을되면 흰옷 입고 남쪽에 서고 여름 되면 붉은 옷을 입고 서쪽에 섭니다.

 

그 처럼 우리는 자꾸 인간 자체, 왕 자체가 능력이 나온다고 보는 거예요. 다시 정리해 드리면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 자체에서 나온다고 보는 거예요. 그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인간자체에서는 안 나와요. 사도 바울에게 주의 능력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손수건 가지고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그 사도 바울의 손수건을 국립과학수사에서 성분 분석해 보세요. 분명히 거기에 포로말린이란 거 나올 건데……. 세제 성분 나올 거예요. 능력 나올게 없어요.

 

주께서 더러운 손수건을 사용 했다 자체가 주의 이름이 활동 할 때는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당나귀가 이야기했다 했지요? 당나귀 구원받았습니까? 그렇게 묻는 게 아닙니다. 당나귀를 사용을 했지요. 천국가면 당나귀가 ‘나는 말했던 당나귀’, 이런 이름표 안 붙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우리가 주님의 작품이 되기 전까지는 내가 여기 있음에 존재 자체가 어떤 힘을 발휘한다고 보는 거예요.

 

우리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여! 내가 하나님을 알고 난 뒤에 어떤 식으로 내 힘을 발휘해 줄까요? 선한 일 할까요? 착한 일 할까요? 사랑을 할까요? 자꾸 존재 자체에서 힘이 나온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그런 식이 아니라는 거예요. 가만있어 내가 너를 사랑할 테니까 자꾸 나대지 말라! 이쪽에서 나대면 마치 하나님하고 나하고 동업하는 것밖에 안 되거든요. 그렇게 되면 나중에 보면 자기는 점점 더 뭐가 되겠어요? 죄인이 아니고 점점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오해가 우리는 이스라엘이다. 우리는 애굽을 이겼다! 까불지 마라!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들고 나가면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는 거예요. 민수기 10장에 보면 ‘우리 언약궤가 나가신다. 적들은 물러가라’ 하는 이런 노래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언약궤라는 것이 안가면 무조건 우리는 옆에 서면 죽는다 하는데 언약궤는 자기 원수가 누구인지 알아요. 그 언약궤 옆에서 죽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언약궤를 들고 나오는 그 인간이 그 현장에서 언약궤 때문에 죽잖아요.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잖아요.

 

사울 왕이 선지자 노릇하면서 예언까지 하면서 이스라엘을 지키겠다는 그 사울이 누구의 적이었습니까? 정작 이스라엘의 적이었고 다윗의 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새롭게 벌리는 일에 대해서 우리는

과거에 이랬습니다. 라고 하는 것으로 버티면 그것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매일 같이 아침에 눈뜨면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어제 이랬었잖아요. 그런데 오늘 왜 이렇습니까?’ 이렇게 버틸 때 ‘어디서 누구 앞에서 어제를 거론해?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야!’ 어제 꺼 끄집어 내지 말라 말이죠.

 

우리는 내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어떤 가치가 있다고 그렇게 포장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 존재 자체는 의미가 있어요. 우리가 신학을 많이 있다, 신학이 많이 들어 있을 것이다. 어디에? 우리 두뇌 안에……. 두뇌 안에 끄집어내어 보세요. 뭐가 있는데? 명태 곪아 터진 것만 들어 있지 뭐 있습니까? 대게가 옆으로 가잖아요. 대게 뜯어 보에요. 거기에 뭐있다고? 대게가 옆으로 갈 수 있는 여권이 그 안에 아무 것도 없어요. 그냥 누런 내장만 있어요.

 

사람이 뜯어보면 거기에 아무 것도 없어요. 뭔가 속은 것 같아요. 아하, 우리가 동방박사한테 속았구나! 동방박사가 무슨 재주가 있습니까? 동방박사야 네가 우리를 속이고 딴 길로 새다니? 그러면 동방박사가 뭐라 합니까? ‘저는 모르는데요. 밤에 천사가 와서 했는데요’ ‘천사 같은 소리 하지 마 천사가 어디 있어! 네가 했지?’ 자꾸 우리는 너무 억울해 해요. 여러분들 좀 억울함을 좀 당하시기바랍니다. 내가 이렇게 했다고 우기지 마시고 난데 없는 억울함을 당하는 재미가 있어야 돼요.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의 자체가 전쟁이 할 때 풍요의 신이 바알신인데 바알신은 폭풍의 시작과 전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신이에요. 바알신은 엘리신의 아들입니다. 엘리신의 아들인데 이 바알신은 어디서 올라오느냐 하면 땅에서 올라오는 거예요. 그리스 로마 신화의 모든 시작은 하늘에서부터 시작이 아니라 땅에서부터 시작해요. 땅이 하늘을 만들고 땅이 모든 만물을 만들어요. 바알은 실용적입니다. 실용정신이기 때문에 하늘이 어떻게 됐다는 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하늘의 하나님이 전능 하시다 그게 나에게 무슨 이익이 되냐 실제 이익이 없는데 실제로 땅을 움직이고 움트게 만들고 새싹 돌게 만드는 그 신이 바로 바알의 풍요와 다산의 신입니다.

 

그리고 풍요와 다산의 신의 그 모든 제의와 제사와 방법은 이 바알신앙과 연관되어 있는데 바알 신을 움직여서 복을 따낼 수는 방법을 모아 놓은 것이 바알의 제단입니다. 그러면 바알신이 그런 지시를 내렸습니까? 하고 순진한 사람은 저한테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바알신이 ‘나는 바알신, 너희는 나에게 이렇게 섬겨라!’ 라고 바알신이 그렇게 계시했습니까? 자꾸 이렇게 묻는데 그것은 너무 순진한 발상입니다.

 

신은 인간이 방법을 만들어 놓고 신을 거기에 갖다 붙인 거예요. 신은 이렇게 하면 기뻐하고 신에게 뇌물주면 받은 게 있으니까 복을 줄 것이다. 하는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인간에게서 나왔어요. 여러분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브라우니라고 하는 개 있죠. 개의 행동에 대해서 해석을 누가 붙입니까? 사람이 붙이잖아요. 박근혜 후보께서 브라우니 안고 와서 앉아있으니까 사회자가 물었어요. 브라우니는 어떻게 해서 이 자리에 왔습니까? 하니까 박근혜는 ‘브라우니, 어떻게 왔지? 여기 왜 참석했지? 후보 하는데 너 여기 왜 왔지?’ ‘흥 과묵한 개’ 이렇게 했다 말입니다.

 

과묵한 개, 그 해석을 누가 붙였어요? 박근혜 본인이 붙였어요. 젊은 사람과 가까워져서 표 하나 더 받으려고 그렇게 했겠죠. 여러분 신이라고 하는 것은 허수아비입니다. 중요한 것은 신을 섬기는 방법이 납득이 된다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신을 섬길 수 있는가 납득이 되는 방식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정성을 다하면 신도 감동 먹는다. 신의 방식부터 먼저 해 놓고 거기 위에 대가리 하나 올려놓으면 그게 무슨 신? 바알신이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간증 집회라는 겁니다.

 

내가 이런 방식으로 감사 헌금하니까 이 교회 복을 주더라. 내가 그때 십일조도 안 하고 내가 목사말도 안 듣는데 어느 날 사업을 망하고 난 뒤에 목사 말대로 십일조도 하고 감사헌금 하니까 갑자기 잃어버린 돈까지 다 찾아주고 가정이 화목 하더라 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납득이 되는 거예요. 어, 그래 나도 그 방법 써 볼까? 내가 암에 걸렸는데 기도원에 가서 간절히 회개 하면서 기도 하고 나중에 병원에 가 검사해 보니까 암이 언제 나았지? 당신의 암이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됐습니다. 하니까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해서? 어느 기도원인데? 효과입니다. 실제적인 효과가 신을 제조해 낸 겁니다. 날조한 겁니다.

 

그래서 여유 있거나 고집이 있을 때는 신을 안 믿게 되어 있어요. 신을 믿느니 차라리 내 주먹을 믿겠다고 버티다가 어떤 부흥사가 와서 그것은 교만입니다. 교만하니까 모든 일이 꼬이잖아요.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그냥 믿는다 하고 한번 믿어 보시면 그 다음부터 예상 밖의 놀라운 축복을 주십니다. 라고 할 때 납득이 되면서 주여, 내가 그동안 소홀하게 한 것 용서 하옵소서! 이렇게 되면서 갑자기 얼굴이 펴지면서 암이 다 나았고 하니까 주님은 살아계시네 하는 거예요. 네가 살아 있지 주님은 안살아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살아있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사람이 죽였어요. 사람이 죽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죽음이후에 죽음 저편에 계세요. 살아 있는 하나님은 사람들이 예쁘다고 브라우니 같은 개 같은 신들만 살아있어요. 브라우니가 cf, 영화 찍고 이렇게 하니까 개그맨이 브라우니 개목을 조르면서 죽 쒀서 개줬다고 합니다. 죽 쒀서 개 줄 때 그 옆에서 그것을 받아먹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목사라는 개,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자기는 거기서 자기 배를 채우는 겁니다. 그런 직업 괜찮아요. 6일 놀고 하루 일하고 돈은 챙기고…….

 

인간들 스스로가 그 개 같은 신을 보이게 만들어 오니까 본인들이 답답해서 사는 게 너무 힘들기 때문에 생로병사가 너무 괴롭기 때문에……. 제가 어떤 장례식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사는 게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렇게 어린 나이에 죽었느냐 이야기했습니다. 주님께서 쓰시는 방법은 ‘사는 게 힘들지?’ ‘예.’ ‘살려줄까?’ ‘예.’ 죽여 버려요. 나도 죽었다. 나도 죽었어. 죽는 게 사는 거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바알 신에게 패배도록 합니다. 지게 하게 만들어요. 지게 만들고 그 다음에 바알 신을 믿는 민족을 망하게 함으로서 결국은 네가 잃어버린 여호와, 하나님 언약하지만 사실은 다 핑계에 불과하고 실제는 그 껍데기 알맹이는 사실은 풍요와 다산, 다산과 풍요 나도 한번 좀 편하게 여유 만만하게 살아보자 돈에 좇기지 않으면 베풀면서 그렇게 안 쪼들리면서 살고 싶다 하는 이런 여망이 우리 속에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런 여망을 가지고 신에게 나간다면 그 방법이 바로 바알의 제사입니다. 너는 나한테 마음이 멀구나! 주님의 탄식소리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방식은 뭐냐? 주님의 방식은 없어요. 처녀가 애를 낳는데 그게 무슨 방식입니까? 교회 처녀 다 모이라하고 앉아서 말미를 주지요. 두 달 만에 누가 잉태하나 보자. 누가 잉태하겠어요? 아무도 잉태 안하죠. 그러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님이 찾아온 방법을 인간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제시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제시한 방법이 없어요.

 

사도 바울은 면제, 속죄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사람들은 교회에서 뭐를 만들었어요?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은 죄의 면제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교회는 뭐를 만들었어요? 면제 방식을 만들어 냈어요. 이거 반칙입니다. 예수님은 사도 바울은 속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교회는 속죄 받는 방법을 만들어 낸 거예요. 이것은 반칙이에요. 이것은 한방에 레드카드로 추방시켜버려요. 구원 받는 방법 없습니다. 속죄 받는 방법 없습니다. 그냥 내가 속죄 한다 하면 속죄된 거예요. 내가 하나님이 의롭다 하면 의로운 거예요. 의롭게 된 거예요. 그 방법은 없기 때문에 그 없는 방법을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인간은 못하기 때문에 다른 데서 방법을 재생했어요. 그게 바로 성령의 인 치심으로 성령의 도장을 찍음으로서 이미 거기서 줄줄이 예수님의 공로가 내 앞에 쏟아져들어 오는 거예요.

 

일종의 논에 물대기죠. 논에 물이 없다, 여기 강이 있다 하면 호스를 가지고 그쪽 논에 일단 박아 놓고 일차 펌프 돌려 버리면 이쪽 물이 어디로 흘러갑니까? 저쪽으로 흘러가잖아요. 그 박는 호스가 성령이다 말입니다. 그 꼬챙이 속에 장차 예수님이 이루어질 모든 것이 기생 라합을 통해서 계속해서 그 시대에도 흘러 들어온 겁니다. 흘러 들어온 그 입구가 뭐냐? 구약은 주의 이름이고 신약에는 구체적 인물 나사렛 예수님입니다.

 

나사렛 예수님이 구약에서는 주의 이름으로 활동하신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이름으로 떼어버리면 신약에 뭐가 됩니까? 신약의 주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안 혼인잔치 때에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잖아요. 우리 같으면 어머니가 와서 예수여! 포도주가 없다. 그래요 여기 포도주 두말, 빨리 빨리 와! 누한테 전화해요? 새로 생긴 포도주 공장에 전화했어요. 하면 될 텐데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했을 때 그 마리아가 제의 하는 것은 포도주가 아니었고 무엇이었습니까? 물이었죠. 물을 줬다 이 말입니다. 완전히 예수님을 물 먹이는 거예요. 현재 예수님은 이 결혼식에 포도주를 줄 마음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신 목적이 있어요. 뭐되기 위해서?

 

물 같은 인간을 포도주 같은 인간으로 만들기 위한 인간을 목적으로 오셨기 때문에 장차 십자가 이전에 십자가의 그림자로서 먼저 십자가의 효과를 남길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야 표적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표적이라는 것은 그것을 잡아서 뒤따라 가보면 십자가가 나오는 연결 고리가 나오는 것을 표적이라 합니다.

 

뭐든지 십자가와 연결이 안 되면 표적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는 따라 가보면 목사가 튀어나오고 어떤 경우는 기도 하는 권사가 나오는데 이것은 표적이 아닙니다. 반드시 끝에는 십자가가 나와야 됩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그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다. 반드시 그것과 연결 돼야 됩니다.

 

모든 설교도, 모든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을 주니까 이게 포도주가 되었다 이 말입니다. 그럴 때 이 의미를 사람들에게 설명을 했습니까? 설명 안 했습니까? 예수님은 설명을 안 했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립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기적에 대해서 설명을 안 해 주셨는가?

 

아까 쉬운 예를 듭니다. 어떤 남자가 있는데 어떤 여자를 사랑합니다. 남자는 기뻤습니다.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갑자기 남자가 싫어져서 끝나버렸습니다. 아픔이죠. 그래서 남자는 앓다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여자가 떠나면서 어떤 장치를 만들어서 남자가 자는데 목을 조르는 그런 기계를 만들게 아니잖아요. 우리 쿨하게 헤어지자 하고 갔는데 그 남자는 그 여자가 못내 그리워서 실음실음 앓는 것을 상상병이라 하는 거예요. 상상병에 걸리면 다이어트도 필요 없어요. 바싹 바싹 마릅니다. 아무리 밤에 라면 두 개 끓여먹고 밤에 고기 먹어도 살이 안 쪄요. 상상병이 그런 거예요. 사랑하는 자식이 죽던지 사랑하는 남편이 죽던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때. 남편이 죽을 때 이 남자를 누가 죽게 만들었습니까?

 

이것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남자가 그 여자에서 준 자신의 의미입니다. 저게 흔해 빠진 여자가 아니고 내가 사랑 했던 여자입니다. 그러면 내가, 남이 아니고 내가 사랑했던 여인이 내 곁을 떠났을 때 나는 더 이상 살 의욕도 떨어지고 살 이유도 없어요. 이제는 하나님이고 예수의 십자가고 다 귀찮아 나는 그것 없으면 예수도 귀찮고 하는 것이 이 모든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의 의미의 장, 의미의 마당, 의미의 멍석을 평소에 깔아놓고 살아가는 거예요. 나한테 의미가 되는 것만 심어놓고 그게 떠나 버리면 고통스럽고 그래서 의미가 사라지면 어쨌든 간에 술로서 그것을 메꾸려고 하고 담배 피워서 메꾸려고 아니면 똑같은 나쁜 짓을 해서 자기의 아픔을 상처를 남한테 사기를 쳐서 그것을 메꾸어야 자기의 의미가 대충 그림이 맞아 들어간다고 이렇게 보는 겁니다.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다가오실 때 성령이 갑자기 손이 네 개가 돼서 네가 예수 안 믿으면 목 졸라 죽인다 하면서 이런 식으로 집개 들고 뺀찌들고 오는 게 아니고 이 의미 자체를 예수님의 의미로 새롭게 덧 입혀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남자는 자기가 주인공 되었다가 내가 저 여자와 만나게 해 주시는 원인되는 분이 따로 계시는데 그 분이 나에게 이렇게 먼저 의미를 주셨다고 보는 겁니다.

 

예를 들어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였잖아요. 그럴 때 사울이 다멕석에서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자기가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다는 그 자체가 자기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창세전에 예수님이 자기를 택하사 이게 디모데전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창세전에 자기를 택하사 자기를 죄인 되게 하는 그런 차원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도록 그렇게 주께서 조치를 절차와 위치를 정해 온 거예요. 그러니까 사울이란 사람은 더 이상 자살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모든 게 나한테 의미를 당길 때는 더 이상 의미 없어 나는 죽어야 돼 이렇게 되지만 내가 뿌린 의미마저 누가 회수해 갔으니까? 주님께서 몽땅 내가 내 인생에 남겼던 모든 것을 회수 해 가는 거예요. 이렇게 의미를 남길 때 의미가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바로 역사가 되는 겁니다. 이 역사를 부술 때가 성령님의 묵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 꼭 우리의 역사를 완전히 박살냅니다.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내가 만약에 이태리 여행을 간다. 계돈을 모아서 여행을 간다. 이태리 여행 가려고 벌써 10년 전부터 한 달에 5만원씩 모아서 여행갑니다. 여행가면 로마부터 갈까? 사진 찍을 때 어떻게 할까? 멋지게 나오게 머플러하고 가고 온갖 것 다하고 갑니다.

 

비행기를 탔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밑에 인천공항을 내려다보면서 한국아 잠시 있거라 난 간다 할 때 지금 그 여행하는 아줌마들은 시간과 공간을 출발점을 한국의 땅에 한국 사람으로 출발을 한거예요. 출발을 했는데 비행기 한 참 가고 있는데 10명이 가고 있는데 그 중에 한명이 멀미한다고 해서 토하고 또 어떤 아줌마는 너무 긴장해서 소변이 안 나와요. 혹시 기내에 의사 있습니까? 자 보세요. 한쪽은 토하고 있고 한 쪽은 긴장해서 벌써 몇 시간째 소변이 안 나와서 이 긴급한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잊어버립니까? 우리는 한국 사람이고 우리는 로마에 가서 어떻게 사진을 찍을 것이고 하는 것들이 어떻게 됩니까? 그게 전부 다 소용없게 됐어요.

 

지금 중요한 것은 그 시간에 그 장소에 빨리 소변 나오게 하고 빨리 토하는 것을 멈추고 정상적으로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이겠죠. 그런 식으로 역사와 공간을 주께서 잘라버립니다. 로마 가서 사진 찍어주고 지중해 가서 폼 잡고 하다가 로마 가서 소매치기 당하고 여권 잃어버린다든지 개한테 물린 거죠. 갑자기 그런 미리 꿈꾸던 낭만적인 꿈이 소용이 없는 거예요. 모든 드라마나 연극은 뭐로 끝납니까? 둘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 결혼 이후는 왜 안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결혼의 모든 총각 처녀의 로망, 환상인데 결혼해서 와보니까 그때 우리 서로 사랑 했잖아! 다 잊어 버려요, 그때는 그때고 콧구멍 비벼가면서 발길질하면서 재떨이 줘! 완전히 낭만이 로망이 다 깨져버려요. 방구 뿡뿡 끼고 완전히 낭만이 다 깨져 버린 거예요. 그때 봤던 시간과 공간이라 하는 것은 현실과 실제로서는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그때그때 주께서 새로운 과제 새로운 사태를 발생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럼 미래를 꿈꾸지 말라는 말인가? 미래를 꿈꾸지 말라가 아니라 현재 주께서 의미를 따로 던지는 겁니다. 내가 나에게 의미를 던지지 말고 주께서 의미를 던져 버리면 이 역사는 뭐로 바뀌느냐 하면 묵시가 되어 버려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주님과 함께 하는 묵시가 되어 가지고 없어도 되는 인간이 지금 이렇게 생산되고 만들어 져 가고 있는 거예요. 흠과 티가 없고 거룩하다는 말은 내가 탄로 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주께서 지금 흠과 티가 없도록 만들어 가는 모습 자체가 지금 내 모습인 거예요.

 

아무리 봐도 내가 남 보기에 결점이 많고 결점이 많은 게 아니고 결점 투성이, 결점 자체죠. 모든 것이 어설프고 뭐만 했다하면 손을 데고 뭐만 했다 하면 베고 모든 게 흠과 티고 제대로 하는 게 없는데 성령이 임해 버리면 그 자체가 강도, 창기, 도둑놈 그 자체가 흠도 없고 티도 없고 거룩하게 된 거예요. 어째서 그렇게 되는가! 이제 그것을 설명을 합니다.

 

내 쪽에서 의미를 주지 마세요. 괜히 의미를 주고 상상하다가 놀러 갔다가 집에 오면 타깃이 돼서 피곤해서 코피가 막 터집니다. 괜히 여행 갔다 와서 돈을 얼마 썼니? 하면서 돈 안 쓸걸. 후회 한다고 여행의 즐거움과 기쁨은 다 날아가 버리고 가면서 싸우고 오면서 싸우고 집에 와서는 안 싸우고……. 하여튼 부부간에 운전한다, 집에 나온다 하면 그때부터 싸움이 벌어져요. 똑바로 대라, 욕하지 마라, 차선 지키라, 온갖 것 다 나와요.

 

성령님께서 우리 몸하고 상대를 안 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이 상대하는 것은 예수님의 몸과 상대합니다. 예수님의 몸과 상대할 때 나오는 것, 예수님의 영으로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관여할 때 구약에는 있었어요. 그때는 성령이 아니고 성신이었습니다. 성신이 올 때는 인간과 직접 상대했는데 사실은 성신이 임할 때에도 그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가운데 누가 계셨다? 주의 이름 되시는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식으로 관여를 했습니다.

 

엘리야하고 바알하고 할 때 둘 다 재단을 만들었어요. 바알이 먼저 하지 않습니까? 밤새도록 북 치고 장구 치고 사물놀이 하면서 가슴을 치면서 오 신이시여! 불을 내소서 했는데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 다음에 엘리야가 물 부어! 세 바가지 부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짖더니만 제물에 뭐가 붙었습니까? 불이 붙었죠. 그거 엘리야의 솜씨입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배치하고 할당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엘리야가 완벽하게 재단을 쌓은 게 아닙니다. 물 부을 때 좀 조심스럽게 붓지, 물 부으라고 해서 물을 부었는데 반은 붓고 반은 흘리고, 주님께서 야, 물 다시 똑바로 다시 부어! 다시 부어야 내가 불내려 이런 거 없어요. 엘리야는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응답은 주님 마음대로 행동한 거예요. 주님의 응답은 엘리야의 행동과 전혀 상관이 없는 거예요. 인간이 흠이 있고 뭐가 탈이 많고 거룩하지 않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그 사람을 사용하게 되면 흠이 없는 것이 되고 거룩한 것이 되고 티가 없는 게 돼요. 그래서 세리와 창기들이 하늘나라 먼저 가는 겁니다. 옆에 없는 강도가 하늘나라 간 거예요.

 

그게 바로 성령이 올 때 비로소 눈뜨는 거예요. 예수님의 효과, 예수님의 십자가 달렸던 효과에 파도쳐서 우리는 그 파도에 휩쓸린 거예요. 우리는 바닷가에 앉아 있는데 파도가 와서 우리를 덮쳐서 나를 삼켜서 주님의 나라, 바다 속에 집어넣은 거예요. 그래서 카메라 물들어 가서 5만원 날아갔는데 남의 이야기 아닙니다. 제 이야기입니다. 카메라 여기 있는데 물들어 가서 고쳤었어요. 파도가 그렇게 칠지 몰랐어요. 이게 파도의 효과입니다.

 

나의 상실, 나의 카메라의 상실, 주님이 오시면 카메라 정도가 아닙니다. 나의 의미를 던진 자체를 회수해 버려요. 너는 내 자식이다. 아니거든 너는 내 아내다. 아니거든 이건 내 돈이다. 아니거든 마지막 때에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고 돈은 쓰지 못하고 하고 자식이 수능을 몇 점을 받던 관계없어요. 모든 것은 파도가 휩쓸어 버리면 주께서 쓰게 되면 수능이 몇 점이고 하는 것은 관계없이 흠이 없고 거룩한 게 되는 겁니다. 오늘 집에 가서 축하해 주세요. 야, 흠 없고 티 없는 인간아! 하고 축하해 주세요. 그러면 아빠, 위로도 그런 이상한 위로가 있어요? 나는 소유해야 만족하는데 왜 엉뚱한 것을 가지고 하나냐? 브라우니처럼 너는 내가 과묵하다하면 무조건 과묵한 거고 내가 차도남이라고 하면 차도남이야 차도 남은 차갑고 도도한 남자래요.

 

성령은 우리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상대합니다. 왜? 그전에 우리 말고 사람을 많이 상대해 봤습니다. 사울을 상대했죠. 다윗, 예레미야 상대했죠. 성신이 관여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고 엄청 많았습니다. 엘리야도 그랬죠. 모세도 그랬죠. 다 성신이 임했잖아요. 그랬던 그들이 메시야였습니까? 자기 힘으로 그렇게 됐습니까? 자기 힘으로 티도 없고 흠도 없고 그렇게 된 게 그들이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을 바쳤으니까 대단한 믿음이죠. 그런 아브라함이 왜 예수님 보기를 고대하고 그 다음에 뭘 보고 기뻐했습니까? 자전거 사서 기뻐했다? 아니죠. 뭘 보고 기뻐했습니까?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잖아요. 아브라함한테 자전거 안 사줬어요.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성령이 오시니까 알아보신 거예요. 저와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창 자국을 보여주니까 도마가 놀래버렸어요. 이 창자국은 웬 창 자국이고 이 손에 못 자국은 웬 못 자국입니까? 이것은 수능에 안 나옵니다. 예수님 옆구리에 뭐가 있습니까? 하는 것이 수능에 안 나오거든요.제가 수학 문제를 봤어요. 수능에 그런 문제없어요. 도마가 그것을 보고 놀라 버렸어요. 주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만나고 싶었던 그 하나님, 주께서 보여주니까 십자가 보여주니까 비로소 알게 된 거예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이 뭐라 하는지 아세요? 네 앞에 십자가가 보이는데 누가 너를 꼬여서 엉뚱한데 눈을 돌리게 하느냐? 행함이고 율법 지키고 어떻고 십자가 보여주는데 너희들이 구원받은 것이 율법 지켜 구원 받은 게 아니잖아 십자가에서 나온 십자가의 효과, 다시 말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네가 구원됐잖아, 그렇다면 어떻게 네 행동을 보고 나에게 흠이 있니 티가 있니 나는 거룩하지 않니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느냐? 원래부터 네 행동은 더러웠어! 아담의 자손은 원래부터 더러운 거예요.

 

선악과적인 자기 자랑밖에 하줄 모르고 입만 열면 자기 자존심밖에 모르고 그게 우리 인간이에요. 그것 말고 다른 요소가 있어야 돼요. 그것도 있고 그것이 죄라고 알게 만드는 다른 요소가 있어야 돼요. 지난주일 설교가 그런 거예요. 마음대로 살되 옆에 성경이라는 것도 보면서 마음대로 살라는 말이죠. 내가 이제 마음대로 사는데 성경 보니까 그것도 죄고 나는 잘산다고 살아도 그게 죄고 못살아도 그게 죄고 그 말씀을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어서 우리는 죄인 돼야 되고 주님은 죄인을 위해서 대신 죽어야 될 어린 양이 돼야 되고 그게 둘이 조합이 돼서 오직 예수님의 공로만 주되심만 들추어내는 그런 할당된 자리 그게 바로 성도의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라는 호스를 데면 우리는 자꾸 마귀의 꿰임에 빠져서 아주 철저하게 완벽하게 헌금할 때도 돈을 다듬이질하는데 이 다듬이질한 것을 정말 깨끗한지 현미경 비춰봐요? 돈에 박테리아가 얼마나 있는가 한번 볼까요? 다 있어요. 이런 이야기했죠. 애 목욕시키다가 애까지 갖다 버린다고 목욕물을 갖다 버려야 되는데 애 실컷 목욕시키고 자 간다 하고 애 까지 다 갖다 버려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심으로서 되게 하실 분을 위하여 우리가 의미가 있게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지 그것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 성령이 와서 주께서 흠도 티도 없게 만들었다는 것을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겠습니다. 24절 봅시다.

 

살전 5: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미쁘다 하는 것은 믿음직스럽다 이런 뜻이거든요.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할 때 우리는 대번에 성경을 보고 의심을 갖지는 것은 주께서 우리를 불러 줬다는데 몇 데시벨의 음성으로 불러 주시는지 떨리는 음성인지 아니면 한국 언어로 했는지 영어로 했는지 뭔가 나타나야 알지, 뭔가 불러줬다 하면 떨리는 음성으로 근호야! 이리 오너라 이러면 되는데 불러줬다고 해 놓고 조용하고 이게 뭐가 부른 겁니까?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그것을 영광스럽게 한다 하지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에요. 주의 강림하실 때 우리는 영광스럽게 되지요. 십자가에서 의롭게 되지요. 그 다음에 미리 아신 자라 하는 것은 창세전에 됐다 하고 불러 주신다 하는 것은 어떤 시점이 있는지 그것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 꼬챙이 끼어있게 되면 우리가 여기서 불러주실 때 부름 받는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신구약에 나왔던 성도들의 모습을 보게 되면 불러주실 때 구약에는 있죠.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엘을 세 번 불렀잖아요. 엘리 제사장님 저를 불렀습니까? 나 아닌데 누가 불렀지? 다시 사무엘을 불러요. 그러면 그 다음부터 그 사무엘은 주님이 부를 때 꼭 사무엘 이름을 불렀습니까? 계속해서 그 이후에도?

 

그 이후에는 그냥 자동이죠. 사무엘이 하는 것이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그게 주되겠죠. 결국 그 이야기는 하나님의 신이 임하게 되면 이 노선 자체가 축 늘어져요. 그런데 이 불러주심만 끄집어 내지 말고 주의 강림하심이나 의롭게 하심이 한꺼번에 지붕이 내려앉듯이 축 늘어져서 우리를 포함시켜 버립니다.

 

불러줬다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이리 오너라, 저리 가거라, 이게 불러 주는 게 아니고 지금 내게 소속되어 있는 이것이 이쪽 노선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믿어진다는 사실이에요. 내가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이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의 연속이라는 것이 이게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내가 아프다 하면 주께서 아프게 하시고 내가 나으면 주께서 낫게 하시고 내가 태어난 것도 살게 하신 것도 죽게 하신 것도 주께서 하시고 이게 뭐냐 하면 모든 게 성경말씀대로 진행 된다는 게 이 모든 것이 나한테 현재 이 자체 주의 말씀대로 진행된다는 것이 느껴지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령이 오기 전에 제자들하고 성령이 오고 난 뒤에 제자들이 이런 차이가 나요.

 

누가 복음을 보면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그들에게 구약 성경이나 말씀이 예수님과 엮여지지가 않았는데 성령이 오게 되면 능력을 받게 되면 구약에 있는 모든 말씀이 예수님을 겨냥했다는 것이 너희들이 믿어질 것이다.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구약성경 뒤에 나오는 거예요.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은 주가 되시고 모든 것을 관할하시고 모든 것을 자기가 주되심을 위해서 준비된 것들로 통해서 활동하게 하신다. 라는 것을 증거케 하고 이게 믿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 앞에서 모든 것이 주의 일이기 때문에 내가 따로 행한다는 것을 찾아낼 이유가 없죠. 나의 행한 모든 것이 주께서 하셨다는 것이 이게 믿어지는 겁니다. 주께서 이미 우리를 불러주신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이것을 딱 보고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믿음직하니, 그가 이루시리라 그분이 하나님이 이루시지 뭐, 이것을 보고 제가 할 몫은 따로 찾지 않을 경우에 그 사람은 지금 성령 속에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내가 할 것을 따로 챙기지 않는 거예요.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주의 일의 연장이기 때문에 내가 할 것을 따로 챙기고 주님 할 것을 따로 챙기지 않는다 말입니다. 내가 나를 심사 대상으로 따로 세워 놓을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항상 주님 앞에 서기 때문에 내가 나를 따로 불러서 내가 나를 심사 하거나 나를 관섭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못을 치다가 빗나갔다 그냥 아야 하면 되는 거예요. 아이고, 내가 제대로 칠걸 이렇게 치면 되는데 왜 이렇게 쳤을까?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딴 생각하다가 쳤다 이 말이에요. 다시는 안 해야지 다시는 안할 수 있습니까? 또 딴 생각하다가 또 치게 되어 있는데 살아가는 모든 하루 일과의 모든 스케줄이 내가 짜는 것이 아니고 짜여 있는 속에 우리가 그냥 굴러가는 겁니다.

 

모압 여인이 보아스와 결혼했지요. 이 여자가 나오미하고 들어 올 때부터 뭔가 노렸습니까? 괜찮은 남자있을건데 하고 팔자 한번 고쳐볼까? 이렇게 노리고 들어 온 겁니까? 아니죠. 마찬가지로 우리의 만남과 우리의 헤어짐이 이 모든 것이 우리가 노리는 것이 없이 그냥 마주치는 거예요. 다 짝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결혼할 때 여자를 고르지 말고 남자를 고르지 말고 어지간하거든 마주치거든 그냥 하세요. 마지막에 복음으로 끝나는데 그냥 자기가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만큼 자기가 판정을 내릴 자격이 없는 거예요. 주어진 것에 대해서 범사에 감사하는 거 이게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 보다 무슨 정답이 더 있겠습니까?

 

모든 일에 감사하라. 왜? 너희 일이 아니고 주께서 흠도 티도 없게 만드는 역작이 지금 너를 통해서 활용하고 실현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인생을 따지고 들어가 보면 우리의 역사가 나오고 그 역사는 우리가 미리 노렸던 그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죄가 되고 주님께서는 그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은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가 따로 의미를 두지 말고 따로 가치를 주지 말고 있는 자체가 주님의 가치 있는 작품인 것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