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데살로니가전서 1:4-5 / 복음의 현실(매고 푸는 일)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1:4-5 복음의 현실
이근호
말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의사를 주고 받기 위한 수단입니다. ‘말이 통한다’는 말은 상호간의 의견이 ‘대충 맞다’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인간 세계란 말(언어)을 통해서 그물망처럼 형성되어 있습니다. 법이 바로 그런 겁니다. 계약서가 바로 그런 겁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늘 협상과 흥정과 조율과 양보와 타협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해서 오로지 인간들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복음이 발생했습니다. 복음의 내용을 알리는 말과 글자와 단어들이 기존의 의미의 판에 속하지 않습니다.
분명 사람들이 현지 사용하고 있는 말과 글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해될 수가 없는 내용이 복음에 담겨 있습니다.
사도들이 외친 말들이 다 이런 식입니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행 28:26-27)
기존 인간의 능력으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므로서 인간의 능력이 아닌 성령의 능력의 주도적인 개입으로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합니다.
이는 오로지 천국에 꼭 가야만 하는 자들에게만 알아듣게 하시는 하나님의 복음 전파의 방식입니다. 인간들 중에 가려내는 겁니다.
골라내는 겁니다. 가라지와 알곡 사이를 철저하게 검사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 세상의 현실이란 복음이 복음답게 되기 위해서 딱 적합한 환경으로 조성되어 갑니다.
복음을 알아 듣는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실력과 능력을 의미있는 것으로 자랑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성령의 능력을 모독하고 부정하는 요소가 됨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있기에 이 현실은 복음 전파에 딱 맞춰진 현실임을 알게 됩니다. 즉 천국 오지 못할 자는 그 어떤 일이라도 결국에는 못 알아듣게끔 맞추어서 모든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 현실입니다.
맺고 푸는 일
이근호
2021년 9월 5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1:4-5
(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1: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예수님께서 떠나고 난 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영속적으로 하기 위해 교회를 세우기로 했습니다. 그 교회는 사도가 없이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는 교회의 기준을 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도로 선택되었습니다.
이 ‘선택성’은 같은 성도로 선택받은 그 ‘선택성’과 통합니다. 이 선택성의 특징은 주님께서 이 땅에서 가신 경로를 고스란히 그대로 밟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자기 나름대로 예수님을 죽일까 살릴까 선택했지만, 세상이 도리어 예수님으로부터 선택대상이 됩니다. 즉 버릴까 아니면 데려갈까 라고 말입니다.
이 선택작업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을 하셨습니다. ‘말’로서 세상에 예수님의 자신을 뜻을 알렸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세상은 ‘말’로서 예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리고 떠나 보내었습니다. 이로서 인간 세계에서 통하는 모든 말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로 사용되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말로만이 아니라 능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사도는 ‘말씀’으로서 ‘말보다 더 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세상사람들이 사도의 말을 들어도 같은 인간이 인간들에게 이야기하는 ‘말’로 이해한다면, 이는 ‘말씀’으로 나아가지를 못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의 모든 말들이 세상으로 온 것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갈라디아서 1:12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즉 자신은 그 누구로부터 배운 것도 없기에 사도라는 겁니다.
사도가 이래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예수님께서 당했던 그 수모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말은 모두 인간의 한계성을 나타냅니다. 인간들은 이 땅의 세계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이 땅에서 계속 살아야 될 정당성을 확보하려 합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이 내뱉은 모든 말들 속에 자신을 본색을 감추고 세상이 필요한 것들을 걸려내려 하는 발언을 합니다. 즉 세상에 나서면서 ‘자신의 의’를 유지한 채 대인관계에 나섭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말씀에서는, 이런 세상의 ‘말’보다 능력이 더해지는데 그것이 바로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 관점’과 ‘나를 제대로 아시는 그 타인의 관점’이 담겨 있습니다.
즉 성도는 미리 자신의 장래를 아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떤 식으로 보고 있는지도 압니다. 사도가 복음이라는 절대 기준을 전하는 것은 이 기준이 탐지기 역할을 하여 모든 세상을 조사를 실시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 16:19에 나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사도는 바로 이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땅에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땅은 창세기 3:14에 의하면 이미 저주에 넘겨준 곳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땅에 밀착된 채 살아가는 그 뱀의 모습이 저주를 제대로 보여주는 양상이라는 겁니다. 그만큼 이제 땅은 멸망되는 것이 확정되었습니다. 땅 위에서 모든 것은 썩습니다. 마태복음 6:19-20에 보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땅이 섞는 이유는, 거짓의 영은 사단의 권세에 넘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모든 말이나 단어는- 심지어 성경 말이나 신학적인 내용까지- 인간들에게는 거짓으로 활용됩니다. 그래서 말보다 더한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땅에서 이미 죽은 존재임을 알려주는 능력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로마서 4:25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즉 십자가에 근거한 능력인 성령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죄 때문에 죽은 자로 여기시고 또한 의를 위하여 새로 만들어진 자로 여기도록 작용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푼다는 말은, 용서함이 제공된 자 만드는 일이 됩니다. 용서함은 절대로 스스로 풀고 나올 수 없는 땅의 권세에서 십자가에 활용되라고 풀림을 받았다는 말이 됩니다. 이 과정에서 더는 ‘나는 살아있다’고 상태가 성립되지 못하게 됩니다. 즉 용서란 옛사람을 수리나 개선이나 보선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이고 새로 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땅에서 죽고 하늘에서 산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2에서는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하십니다. 땅은 인간의 잠자는 욕망을 자극하여 탐심으로 전환시킵니다. 악마가 그렇게 합니다. 반면, 말씀의 능력은 성도에게는 육의 것을 땅에 남겨두고 하늘로 떠나게 만듭니다.
그 경우가 모세나 엘리야에게도 나옵니다. 민수기 20:10-12에 보면,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상 19:3-4에 봐도 엘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즉 엘리야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모습은 불수레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겁니다.(왕하 2:11) 이처럼 성도는 자신의 장래를 성령을 통해 미리 아는 자이요 예수님이라는 절대 타인을 통해 자신의 죄인인 것을 아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도 땅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시는 주님께 늘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3강-데살로니가전서 1장 4-5절(매고 푸는 일)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 4-5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4-5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어떠한 사람이냐 하면, 사도바울은 사도입니다. 사도는 본인이 결정한 것이 아니지요. 사도와 성도의 공통점은 선택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거예요. 사도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선택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이라 해서 사도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예수님이 지정해서 그렇게 사도가 된 겁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이 떠나버린 그 이후의 세상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그 증거를 찾으라면 그것은 사도입니다.
그런데 이 사도가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사도는 말뿐이 아니고 말을 주고, 그 말과 능력이 함께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그 시대에, 사도가 있던 시대에 드러내는 일을 사도가 합니다. 오늘 본문에 그게 나와 있지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말, 인간의 말, 인간의 말 그다음에 뭐가 있느냐 하면, 바로 능력이 함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함께 있어요. 말과 능력이 함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바로 사도바울에 의해서 남겨지고 사도바울이 행했던 여러 가지 일들이 그게 곧 사도의 말과 능력이 함께 있다는 겁니다.
능력이라는 것은 실재성, 실재적이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불신자 입장에서는 사도의 이런 주장이 좀 터무니없고 말이 안 되는 이유가, 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다, 해놓고는 말 너머에 있는 말을 가지고 말 자체를 넘어섰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사도가, 나는 말로만 임한 것이 아니고 능력으로 임했다, 라고 말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의 말을 들으면 사도의 말을 두 가지로 나눠야 돼요. 말로만 임한 말이 있고 ‘말 + 성령의 능력’과 함께 있는 말이 따로 있고 ‘말 + 성령의 능력’이 함께 있는 것을 가지고 말씀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말씀이라는 이 이야기를 불신자가, 성령 받지도 않은 인간들이 말씀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말씀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말로만 그친다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의 말 자체가 이 세상을 하나님의 선택된 세계와 선택되지 않은 세계를 구분하는 기준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이 여전히 지금도 유효하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말 + 능력’이 임한다는데 그 능력이 뭐냐 하면, 사도에 의하면 그 능력이 마지막 때 최후의 것, 장래의 것, 내일의 관점이 능력 안에 들어 있어요.
첫째는, “성도들아, 너희의 최후를 이미 내가 알고 있다.” 너희의 최후, 너의 마지막 모습, 너의 미래의 모습, 첫째는 미래의 관점, 장래의 관점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타인의 관점이에요. “너희들은 너희 자신만 알지 남이 너를 어떻게 보느냐를 너희들은 모르고 있다. 그 남 중에서 절대적인, 최종적인 남이라 할 수 있는 주님, 하나님께서 너희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가 사도를 통해서 너희에게 전달된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야기하겠지요. “사도 네가 뭔데? 너나 나나 똑같은데 네가 시건방진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라고 할 수 있는데 사도가 이야기할 때마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거기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1장에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못을 박아버립니다. 1장 12절에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사람의 세계에서 나온 이야기 같으면 내가 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이야기 같으면 내가 안 한다는 이야기에요. 인간의 지식에서 나온 것 같으면 나는 사도라고 이야기할 가치도 없다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할 때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그 안에는 나에 대해서 질책하거나 평가할 수 있는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 말이에요.
심지어 더 나아가서 사도는 엄청난 말을 합니다. “나도 나를 질책할 수가 없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고린도전서 4장 3, 4절에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렇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사도 너는 대단하네. 네가 절대자네. 네가 신인가?” 이렇게 하겠지요.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질책할 수 있는 분은 따로 있는데 나를 사도 되게 한 그 기준에 의하면 이 나, 사도인 나라고 할지라도 그 기준에 합치되지 못하면 나도 잘린다. 저주받는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게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저주받는다는 대상 안에 자기를 기꺼이 넣어버립니다. 나도 복음적이 아니라면 복음을 전하는 나도, 주님께 계시를 받은 나도, 사람에게 일체 질책받을 필요 없는 나도 복음에 위반되게 되면 저주받는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전한 것은 바로 인간들의 말의 한계를 넘어서는 능력이 포함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면, 능력이 빠져버리면 그것은 인간의 말이 되는 겁니다. 인간의 말이라는 것은 뭐냐? 인간이 자기 아는 지식의 한계를 못 벗어나면서 사용되는 것들이 인간의 말이에요. 말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곱게 숨기려는 의도로 사용되는 게 말입니다.
어떤 말을 해도 자기 자신을 그 안에 숨겨버려요. 감춰버린다고요.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어떤 누가 말을 시작할 때는요, ‘자기 숨기는 작업 시~작!’ 이렇게 계산하면 됩니다. 자기를 왜 숨겨야 되느냐? 나를 숨겨야 될 이유는 나의 의가 훼손되지 않게 하겠다는 자기 기본적인 욕망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기 의를 갖고 있는 그 보람으로 살아가거든요.
그런데 인간이 그 자기 의를 감추는 방법이 뭐냐? 온갖 말을 다 동원시켜요. 심지어 이런 말도 나옵니다. ‘방아쇠 수지 증후군’ 방아쇠 수지 증후군이란 방아쇠 당기는 손가락에 문제 있음, 정형외과에서 그 병명을 만들었어요. 혹시 궁금한 분 있거든 그 병명이 뭔지 권사님에게 확인해 보세요.
방아쇠 당기는 손가락에 문제 있다, 그 말이에요. 그 단어를 선정함으로써 어떤 뉘앙스를 주느냐 하면, 안 죽어야 되는데 아프다, 그런 뜻이에요. ‘나는 안 죽어야 마땅하니 호호, 해줘. 방아쇠수지증후군 이거 걸렸으니 호호 해줘.’ 이런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말은 자기를 애써 기어이 숨기고, 감추고, 저항하고, 방어하고,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서 동원되는 것이 언어고 말입니다. 말은 그 말 자체가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기를 숨기는 용도지요. 그래서 인간 대 인간끼리 이야기한다는 것은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의 나열이에요. 끝없는 나열.
시시~한 자기 이야기, 십자가가 어떠니 복음이 어떠니 전부다 시시~한 이야기. 옛날에 교회에서 좀 놀았다 그 말이거든요. 설교 좀 들을 만큼 들어봤다 그 말이거든요. 나도 한 신학교 졸업했다 그 말이거든요. 이것은 말로만 이야기하는 겁니다. 전혀 능력이 포함되지 않은 이야기에요.
그 능력이 포함돼야 대표 기도할 때도 “잠시만요 생각이 안 납니다”……. 능력이 가미될 때 이 능력은, 다른 분의 관점에서 나를 바라볼 때에, 쓰시고 안 쓰시고는 나의 수완, 나의 태도에 달린 것이 아니다. 쉽게 하면, 이게 쉬운 말인지 어려운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결코 나는 나의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 를 가르쳐 주고 그것을 지시하는 다른 관점이 있어요.
내가 나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나를 방어하거나 사수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게 능력이에요. 왜? 그래야 다른 분은 나를 어떻게 봅니까, 가 새록새록 드러나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다른 분은 나를 어떻게 봅니까? 말도 안 되는데 막 기도를 이어가는 것은 기도할 때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게 너무 깊이 생각나서 그런 겁니다.
그래서 사도의 이런 관점이 뭐냐? 나는 이 세상 어떤 말의 구조, 기존세계의 구조에서 어떤 식으로든 나는 배운 게 없다. 내가 전하는 것은 전혀 배운 것이 없다. 사실은 이것을 정확하게 해야 되는데 배운 것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고요, 아는 게 전혀 없는 게 아니고 내가 세상 역사에서 배운 것은, 역사 속에서 배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내가 배웠다.
그러니까 역사를 배워야지요. 세상을 알아야 ‘아, 이게 정말 시답지 않은 것들이구나. 이게 바로 저주받아야 할 이유가 되는구나.’ 그것을 사도바울은 그전까지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으로 충분히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말은 배웠는데, 그 말의 개념들은 다 익혔는데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가 성립되려면 다른 능력이 임해야 돼요.
다른 능력에 의해서 기존의 말의 세계라 할 수 있는, 인간의 세계라 할 수 있는 그런 옛사람과 옛사람의 대화에 불과한 그런 것들이 왜 이것이 문제가 되는지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자기가 알게 되었다는 거지요. 내가 배운 것은 너희한테서가 아니라 주님께 바로 배운 거예요. 직통으로 배운 거예요. 주님께 바로 계시를 받은 거예요.
주님께 바로 계시를 받았을 때 본인이 내린 결론은 뭐냐? 복음적으로 아니면 나도 잘린다는 사실, 주님께 받은 능력이 뭐냐 하면, 나를, 개별자 나를 거기에서 뺄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내 구원을 포기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9장에서 내가 주의 일이라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잘린다 할지라도 나는 그걸 수용하겠다. 3절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게 바로 말로만이 아니에요. 말로만 신학이 아니에요. 실제로 능력이 임한 겁니다.
사도의 말은 굉장히 가혹해요. 어떻게 느끼면 굉장히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유감없이 편지를 좍 썼는데 그 편지가 뭐냐 하면, 사도 이후에 하나님의 말과 능력이 함께 작용하는 그것을 가지고 성경이라고 합니다, 성경.
어떤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성서라고 하는데 성서는 감리교 통합측에서 또는 침례교쪽에서 그렇게 말해요. 침례교도 성서라고 하지요. 성서는 뭐냐 하면, 그냥 말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냐 하면, 이것은 말을 초월하는 능력이 나타나는 책이라고 보는 거예요. 성경이지요. 성서는 그냥 인간들이 쓰고 있고 알고 있는 단어들의 조합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성경해석은 성령을 받아서 파악해야 되지만 성서해석은 그냥 언어탐구하고, 기호학하고, 언어학 동원하면 건질 것을 건진다는 거예요. 인간의 가능성의 여지를 주는 것은 성서, 인간의 가능성을 차단시키는 것은 성경, 그렇게 정리되어야 한다고 성령 없는 인간들, 성령 없는 신학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보수적인 신학자들이.
사도바울이 사도성을 이야기하는 본문 내용은 이거예요. 데살로니가 교회를 보고 “나를 주께서 사도로 택한 것처럼 당신들은 정말 성령으로 택함을 받은 것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도인 것을 아니까.” 그 내용이 오늘 본문 내용이에요. 우리들이란 사도집단이지요. 사도와 같이 동행하는 사람들, 우리가, 사도가 너희에게 어떻게 비취냐에 따라서 너희들이 교회다, 교회 아니다, 가 판정이 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엄청난 이야기에요? “내가 누구게?” 해서 이거 알아맞히면, “사도님!” 그러면 네가 교회라는 거예요. “내가 누구게?” “그렇고 그런 인간!” 그렇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오늘 본문 내용이에요. 선택받지 않았다는 겁니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사도가 누가 봐도 시건방진 이야기를 거침없이 대단하게 할 수 있는 그 근거를 우리가 살펴봐야 되지요. 마태복음 16장 19절에 보면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자,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교회를 만드시는 이유가, 예수님 떠나고 난 뒤에 예수님 자리, 예수님 자리가 반석이니까, 그 반석 자리에다 교회를 세우게 되면 어떠한 기능과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느냐? 땅에서부터, 시작은 땅에서부터 합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아주 신기한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게 단순한 신기한 현상이 아니고 ‘누가 천국 가느냐, 누가 지옥 가느냐? 하는 결정권, 땅에 있는 이 사도들에 의해서 뭘 하느냐? 탐사기가 작동된다, 검증, 조사가 작동되는 거예요. 교 회가 뭐냐? 전수조사하는 겁니다. 모든 공간을 전수조사해서 하나님의 선택된 자와 선택되지 않은 자를 가려내고 골라내는 작업을 해요.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양과 염소, 가라지와 알곡, 그 역할을 하는 당사자가 누구냐? 사도가 되는 겁니다.
누구의 지시를 받느냐? 그냥 사도라 하면 사도 개인의 사견이 들어가기 때문에 안 되겠지요. 누구의 지시를 받는가?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주님께서 보이는 사도를 통해서 그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 사도의 전권이 대단하지요?
사도를 섬기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도를 알아보라는 이야기지요. 알아본다고 다 섬기는 것은 아니거든요. ‘어, 사도네.’ 그렇다고 해서 사도한테 제사 드리고 그런 것 같으면요, 큰일 나지요. 사도요한의 경우에는 천사라도 우리가 섬기면 안 된다고 하지요.
왜냐하면 천사는 십자가를 진 적이 없기 때문에. 십자가를 진 적이 없으면 기준이 되지를 못합니다. 옛날 출애굽 때 하나님이 하신 일이 어린양의 피 가지고 전애굽의 공간을 전수조사 했어요. 각 집마다 문 앞에 어린양의 피가 묻어 있는지 안 묻어 있는지 조사해서 결정해버렸습니다.
지금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피가 죄용서가 되는지 안 되는지를 결정하는 전수조사에 누가 나서는가? 사도들이 나선다 그 말입니다. 사도들이 성령을 받아서 그렇게 해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가 없으면 뭐가 없느냐? 교회가 없는 거예요. 교회의 반석이고 모퉁이 돌은 주님께서 사도를 세웠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가 하는 일이 뭐냐? 성경을 쓰는 거예요. 성서가 아니고 성경을 쓴 거예요. 베드로가 말하기를, 사도바울의 편지는 함부로 해석하면 안 된다, 함부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말은 세상 지식으로, 성서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예 해석 불가다, 해석불가해야 되고 그것은 마땅하다는 거예요.
그 베드로가 갈라디아서 2장에서 얼마나 사도바울에게 찜빠를 먹었는지 여러분 아실 거예요. 갈라디아서 2장에서 사도행전 15장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있는데 거기서 디도하고 같이 예루살렘에 올라갔어요. 본점이지요. 지점에 근무하는 사람이 본점에 간 격이 되지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거기서 유명한 자를 만났지요. 회장, 부회장, 본사 임원진들을 만난 거예요. 지방 출장소 직원쯤 되는 사람이 본사 임원진 만났다는 말이지요.
만났을 때 거기서 사도바울은 같은 사도로서 할 수 있는 말을 다 했어요. 디도에게 어떤 사람이 할례를 행해야 들어온다 하니까 반대로 사도바울은 디도에게 의도적으로 할례를 안행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3, 4절에 보면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사도가 탐지기니까 다 알아요. 이게 사도의 역할이에요. 사도의 역할에 매면 매인다는 것, 그 맨다는 것은 땅에 그냥 매이게 만드는 겁니다. 고정시키는 것이고. 풀린다는 것은 고정된 땅의 권세에서 풀어주는 역할을 해요. 풀면 천국이고 매여 있으면 지옥이고. 사도의 역할이 매인자를 푸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고 매인자를 더욱 매이게 하는 역할도 사도가 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안 믿는 자를 더욱더 안 믿게 만들어요. 그리고 천국백성을 더욱 천국백성 되게 하시는 겁니다. 땅에 매인 자를 더 땅에 매이게 하고 땅에 안 매여야 되는 자, 풀어줄 자를 풀어주는 일을 주님이 하셨고 이제는 사도가 그 일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땅에 문제가 있어요. 땅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요.
창세기 3장 14절에 보면 악마에게 뱀에게 주는 징벌이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저주를 받는 모습이 뭐냐? 저주란 무엇이 저주일까?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는 게 저주에요. 땅과 결합되어 있는 게 저주에요. 왜냐하면 땅은 망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왜 땅이 망하느냐? 오셨다가 떠나기 때문에 버려야 될 곳이 땅이거든요. 버려질 이 땅에 집착을 하는 이것이 저주의 양상이라는 거예요. 골로새서 3장 1, 2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되어 있어요. 땅과 하늘을 극히 대비시킵니다. 땅과 하늘은 반대라는 거지요.
땅의 특징이 뭐냐? 땅은 썩어요. 마태복음 6장 19, 20절에 보게 되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하늘의 특성은 썩는 특성이 없는 것이 하늘이다. 이 말은, 땅은 무조건 다 썩어요. 인간들이 병든다는 것, 암 걸린다는 것, 이것은 전부 다 썩는 현상입니다. 하늘에서 포기한 거예요. 하늘에서 포기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썩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나이 들면 썩게 되어 있어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병 고치는 이유가, 나는 썩지 아니할 것은 주신다는 뜻에서 병을 고친 거예요. 귀신을 쫓아내는 이유는, 이 세상이 귀신들이 사는 세계라는 말이지요. 그들은 썩어야 되고 저주 받아야 될 자들이에요. 그게 땅입니다. 유명한 말씀 요한복음 3장에서 모세가 하는 행동 중에서 놋뱀을 가지고 어떻게 했느냐? 놋뱀을 들었다고 되어 있어요.
놋뱀을 든다는 것은 놋뱀의 가르키는 방향이 지상이 아니고 위쪽이라는 뜻이에요. 요한복음 3장 13, 14절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인자, 예수님 오신 것은 그 자신이 놋뱀처럼 방향을 보여주는 방향타 역할을 이 땅에 하러 왔다는 그 말입니다. 땅에 대한 미련을 버리라고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주님 가신 곳을 보라, 그 말이지요.
인자도 들려야 한다. 들린다는 말은 땅에 있었는데 땅이 주님을 더 이상 붙잡아놓을 수 없는 존재로서, 그 신분으로서 이미 확정되어서 이제는 땅을 떠나 본래 가셔야 될, 계셔야 될 하늘로 올라간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그 양상, 그 전개과정이 예수님 일대기였습니다.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땅에는 영생이라는 게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뱀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너는 영생, 생명나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영원토록 땅과 붙어서 살아라. 그 말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타인의 입장, 타인의 관점입니다. 우리 자신들을 보는 타인의 관점, 주님의 관점이 뭐냐? 너는 들려야 한다는 거예요. 너는 이 땅과 결별해야 되고 분리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겁니다. 그게 성령의 능력이에요.
어떤 말을 해도 그 말씀을 준 취지가 뭐냐 하면, 그러니까 제발 땅하고 이별하라, 그 말이에요. 결별하라, 그 말이에요. 그 썩어질 육신하고 결별하라는 말입니다. 아프면 아픈대로 놔둬버리고, 껍데기는 껍데기로 벗겨버리면 속은 날로 새롭도다. 그 껍데기는 버려버리고 알맹이만, 속알만 사탕 먹듯이 가져가겠다는 겁니다. 우리의 알맹이만. 주께서 일을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한 것이 주님이 하신 일, 이 땅에서 오셔서 올라가시는 그 내용이 사도가 전하는 모든 내용 안에 다 함유가 되어 있어요. 그 안에, 속 내용에 본질로 들어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사도의 말을 듣고 난 뒤에 ‘아, 떠나게 된 이것이 너무나 감사하구나.’ 이렇게 되면 사도의 말을 제대로 알아 듣는 겁니다. 네가 누구냐, 이렇게 대들지 마시고요, ‘아, 떠나야 되는구나.’
사도 본인도 빌립보서 4장에 보면 아주 대범한 이야기를 하지요.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모든 것을 할 수 있는데 어느 정도로 할 수 있느냐 하면 ‘내 목숨이 필요하면 그 목숨까지 가져가세요’ 이렇게 할 정도로 자기는 목숨 잃는 것도 포함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더 이상 내 목숨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 지상의 삶에 연연하지 않겠다. 내 소원이 있다면 빨리 떠나서 내 몸과 분리되어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두 번이나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사도가 복음적 기준으로 말할 때에 이 갈라디아서 2장에서 베드로를 굉장히 질책을 해요. 무슨 말이냐 하면, 게바하고 이방인들이 같이 먹고 있는 중에 할례를 한 사람들이 오니까 급하게 자리를 떴습니다. 남들이 베드로하고 야고보에게서 온 이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싶어서, 겁이 나서 ‘나는 그 개 같은, 할례받지 않고 율법을 안 지키고 선택받지 않은 인간들과 식사를 같이 안 했다’는 그 티를 내려고 후딱 도망을 친 겁니다.
그걸 사도바울이 보면서 “그러면 안 되지요.” 하고 면박을 줘버렸어요. 사람들 앞에서. 갈라디아서 2장 11-13절에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위선을 떪으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래서 14절에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노골적으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너는 복음에 위반된다고 면박을 준 거예요. 출장소 직원이 회사 본사 회장님한테 면박을 줘버린 거예요. 그러면 면박을 줄 수 있다는 말은 그만큼 이 복음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해석에 자신감이 있다는 뜻인데요. 사도 바울이 할례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해석 했느냐?
할례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없음이에요. 할례라 하는 것은 남성의 육을 잘라버리는 겁니다. 잘라버리면 더 이상 육에서 육으로 가는 그 흐름은 이 세상에 없음이 되어버립니다. 고추가 잘려버렸으니까 더 이상 의미 있는 자식은 생산 못 하지요.
사도바울은 이삭이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했다는 것에 의미를 둡니다. 1, 2, 3, 4, 5, 6, 7이 아니고, 창조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로 보는 거예요. 할례란 없음의 세계의 새로운 시작, 없음의 세계의 시작을 할례로 보는 겁니다. 할례는 땅에 속한 모든 육을 없앤다는 미래의 관점으로 이해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할례에요.
이미 몸 자체가 미래의 세계에 도달했으면 더 이상 율법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그 할례언약 자체도 같이 이제는 그 율법자체가 끝나야 된다는 겁니다. 기존에 있는 옛사람을 수리, 보수, 개선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의미는, 할례의 진짜 의미는 인간 자체를 수리하는 것이 아니고 없애버린다는 거예요.
그게 골로새 편지 2장에 보면 나옵니다. 이걸 후딱 지나가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다 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골로새서 2장 18, 11, 12절에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는 이것이 할례의 완성 곧 세례입니다.
성령 받은 자는 이미 그 안에서 할례를 안 해도 된다. 왜냐하면 율법을 다 이루었다, 라는 티가 성령의 세례, 십자가 안에 있다는 그 뜻 안에 다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게 다 들어 있어요. 들어 있는데 내가 왜 그걸 지켜야 되느냐, 그 말입니다. 사도바울의 말은. 다 들어 있는데!
더 쉽게 말씀 드릴까요? 죽은 자는 죽은 자 티만 내면 되지 왜 자꾸 죽은 자가 개선하려고 하고, 더 나아지려고 하고, 향상되려고 하고, 왜 그런 쓰잘때기 없는 짓을 하느냐, 그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이래도 잘 이해가 안 되시거든요. 우리 교인들 지금 눈치 보니까 잘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십자가 복음이 뭐냐 하면, 로마서 4장 25절에 잘 나와 있어요.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러면 성령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 한 그것을 성령께서는 껍데기 같은 우리 육 안에서 그걸 반복시키는 겁니다. 계속 적용시키는 거예요.
너는 죄에 대해서 죽었고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네가 새로 만들어졌다. 이걸 늘 매일같이 반복시키는 일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에요. 너는 없다는 이야기죠. 결국은 네가 지킬 너는 없어지고 주께서 활용당하는 너만 있을 뿐이라는 말이지요. 있다, 없다, 있다, 없다.
그러니까 그네타기 하는 거예요. 아빠 없다, 그리고 까꿍! 없다, 그리고 까꿍! 늘 그네타기 하는 거예요. 죄를 고치는 것이 아니고,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고 죄에 죽은 거예요. 죄에 죽었다, 의인 되었네, 죄에 죽었다, 의인 되었네……, 성령께서 이걸 계속 반복시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말이 아니고 ‘말 + 능력’이에요. 십자가 복음의 효과를 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이 땅에 보여주는 거예요. 땅은, 아까도 말씀드렸는데 이 세상은 다 썩는 겁니다. 따라서 땅에 맨다는 것은 너는 썩을 놈으로서 같이 지옥 가서 썩어라, 하고 땅과 함께 꽁꽁 묶어버리는 거예요. 꼼짝 못 하게.
비행기가 하늘에 뜨기 전에는 비행기 바퀴를 땅에 꽁꽁 묶잖아요. 함부로 굴러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발목에 족쇄를 채워버리는 거예요. 그 일을 누가 한다? 사도가 해야 되는 거예요. 뭐로? 말씀으로. 말? 아니! ‘말씀 + 성령’으로. “내 말 이해 못했지? 그지? 내 말 이해 못했지? 그지?” 이런 식으로 해서 너는 땅과 더불어 영원한 저주 받아라, 그 말이에요. 악마가 있는 이 땅과 더불어서.
그리고 성도는 그걸 풀어주는 거예요. 풀어주는 그것을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요한복음 20장 22, 23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용서, 그러니까 매고 풀고, 그 사이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뭐냐 하면, 세상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요, 우리가 아쉬운 것을 주는 게 아니고 용서를 줘요.
그 용서가 뭐냐 하면, 그 용서가 예수님 하신 일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용서를 주시는 것은 내가 있고 용서를 받는 게 아니고 나를 죽이면서 주님의 용서하심이 살아 있는 식으로 새사람 만들기, 그게 용서에요. 나 용서받았다, 하고 까불지 마시고요, 까불 수 있는 나는 이미 죽어버렸고 주님의 용서가 미꾸라지처럼 튀는 거예요. 내 안에서 용서가 튀는 거예요. 용서가 내 죄보다 우세한 겁니다. 더 센 겁니다. 그 강도가 더 세요, 용서의 강도가! 이게 풀린 자의 혜택이에요.
그러면 용서가 되려면 죄를 알아야지요. 죄는 어디서 나오는가? 죄는 바로 이 땅에서 죄를 제공하지요. 말의 세계에서. 말이라는 것은 유혹입니다. 세상의 말, 언어는 이 세상을 구성하는 구조고요. 그 구조에 보면 인간이 욕망을 낼 만한, 탐을 낼 만한 것들이, 자극적인 것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속한 사람, 땅에서 이미 풀린 사람, 족쇄가 풀렸는데 그냥 풀린 것이 아니고 죽어서 풀렸지요. 이미 땅에서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땅이 나에게 관계할 것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은 아스트라제네카 놔두고 모더나 백신에 집착하기 있기 없기? 땅에서 더 좋은 것 좋아하기 있기 없기?
‘모더나’라는 이것이 단어잖아요. 말이잖아요. 말은 인간에게 욕망을 자극합니다. 뭘 통해서? 비교를 통해서 아스트라제네카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요. 평생을 우리는 그렇게 살아갑니다. 서울 강남 같은 곳, 연희동, 압구정동, 옛 서울이라면 북아현동, 그런 곳에 길 잘못 들어서서 우연히 골목이라도 들어가 보고 다시 자기 집에 오게 되면 살 맛이 안 납니다. 거기는 살아도 너무 잘 살아요.
그 고급 아파트 안에 뭐가 들어 있는가? 가구가 들어있다. 아니에요. 언어가 들어 있어요. 이것은 이태리에서 물 건너 온 것. 이태리가 어딘지 모르지만 하여간 물 건너 온 것. 모든 것에 이런 식으로 언어가 들어 있어요. 그 언어가 욕망을 자극합니다. 땅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갖게 만들어요. 왜? 우리는 악마에 속한 육이니까, 육의 신체를 갖고 있으니까.
10만 원쯤 어림 계산하고 옷 사러 왔다가 괜히 20만 원짜리 옷 보고 나서는 20만 원짜리를 사 가지고 가지요. 본 그게 문제에요. 이 육에 작동하는 겁니다. 분명히 이 땅에서 죽은 자인데 왜 백화점에 가면 우리는 산자가 되는지요. 더 살고 싶어요. 세상에, 저 옷도 안 입어보고 죽는다는 것은 한 맺힌 것 같아요. 내가 평생 사는 이유는 저걸 가져야 되겠어요.
이게 내 욕망에 근거한 미래 장래의 모습인데 성령이 왔을 때는 그게 다 쓰잘때기 없고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거예요. 성령께서 우리에게 미리 최종모습까지 알려줘요. 철저하게 땅은 인간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못 빠져나가요.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왜? 태생 자체가 악마의 마음을 가지고 출생했기 때문에 늘 추구하고 늘 사모하는 것은 이 세상 것밖에 없어요. 손자나 자식이나 공부 안 하면 막 나무라지요. “아이고, 이렇게 공부해서 너 빌어먹겠다.” 주님도 빌어먹었는데요. “너 이러다 빌어먹는다. 세상에서 너 사람 대우 못 받아. 이게 어디에 쓴다고 게임만 하고 노냐!” 막 나무라지요. “모의고사 볼 때 다 되어가는데 너 뭐하고 있는 거냐?” 이런 식으로 하지요.
세상의 노래들이 저에게는 고마워요. 그것은 왜 인간은 땅을 못 벗어나는가, 스스로의 힘으로 이 땅의 족쇄에서 못 풀려나는가가 세상 노래를 통해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런 가사가 있어요.
괜스레 힘든 날 턱없이 전화해
말없이 울어도 오래 들어주던 너
늘 곁에 있으니 모르고 지냈어
고맙고 미안한 마음들
사랑이 날 떠날 땐 내 어깰 두드리며
보낼 줄 알아야 시작도 안다고
얘기하지 않아도 가끔 서운케 해도
못 믿을 이 세상 너와 난 믿잖니
겁 없이 달래도 철없이 좋았던
그 시절 그래도 함께여서 좋았어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게 변해도
그대로 있어준 친구여
세상에 꺾일때면 술 한잔 기울이며
이제 곧 우리의 날들이 온다고
너와 마주 앉아서 두 손을 맞잡으면
두려운 세상도 내 발아래 있잖니
안재욱이 불렀던 <친구>라는 노래 가사입니다.
“세상에 꺾일 때면” 세상에서 너 무시할 때 “술 한잔 기울이며” 술 한 잔 받아주며 옆에 있어준 내가 있어서 좋잖아, 그러니 견뎌라, 하고 위로해주는 거예요. 이 위로에서 발목을 뺄 인간이 없습니다. 교회 오는 것은 외로워서 와요. 교회가 세상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아주 잔인하게 이야기해버려요. “이것들이 내가 이야기한 복음 외에 어디서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성령을 전하느냐?” 그게 고린도후서에 나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4절에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이게 무슨 교회냐, 그 말이지요. 그러면 누가 그렇게 하느냐? 13절에 보니까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악마는 거짓 영이에요. 거짓 영은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어떤 성과, 결과에 욕망을 갖도록 우리에게 격려하는 거예요. 내가 노력하고, 내가 희생하고, 내가 봉사한 업적과 실적을 내 손에 쥐어야 내가 사는 보람을 느끼겠다는 겁니다.
교회가 이 모양 아닙니까? 전부 다! 심방 다섯 번이나 갔는데 왜 교회 안 나옵니까, 그런 것.교회 안 나오는 것보다 더 약오르는 것은 다른 교회 가는 것. 죽 쒀서 개 준 꼴이 되거든요. 아들 키워놓았더니만 세상에, 불교 집 딸과 결혼해서 교회도 안 나오고, 이런 것. 죽 쒀서 개 준 꼴이 되지요.
세상 좋아한다고 나이트클럽 가는 것만 세상 좋아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 내 교회, 내 국가, 그것 집착하는 거요. 그거 아직 안 죽은 거예요. 그것은 신학이고 뭐고 말뿐이에요. 말만 하는 거예요. 왜 그것에 집착하느냐? 그 안에 자기 의가 들어 있기 때문에.
자기의. 이걸 지직지직, 탐색하는 거예요. 사도가. 용서가 되지 않는 자들과 이미 용서가 된 자를 구분하는 탐지기를 작동시킵니다. 용서라는 말은 죄가 있어야 용서가 되지요. 그래서 사도의 말은, 죄를 더욱더 죄 되게 하는 말씀들만 깔아놓는 거예요. 이래도 죄 아니냐, 이래도 교회 생활 하는 것, 네가 예수 사랑하는 것도 죄 아니냐, 이런 식으로 들이미는 거예요.
말로는 예수 사랑한다 해놓고는 실제로는 주님 덕 보자 하는, 덕 봐서 내 병이나 고치고 사업이나 잘되고 가정이나 행복하고, 그것은 바로 옛사람의 한계에 불과한 겁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왔다고 해서 다 말씀이 아니에요. 성경에 나온다 해도 다 말이에요. 전부 다 말. 말들이에요. 잡스러운 말들이에요, 전부 다.
“그러면 사도 너는?” 대번에 그런 소리 하면, “너는 마귀의 종 아니고 진짜 사도라면 가짜 아니고 진짜라는 증거를 대라.”라고 한다면? 그게 뭐냐 하면, 사도의 이중성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가 병에 걸려요. 세 번씩이나 낫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응답이 뭐냐 하면, “됐네, 이 사람아!”
9절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그러니까 “네가 버릴 것을 버려야 돼.” 네가 버릴 것을 버릴 수 있도록 한 이것도, 네가 네 몸에 기대 걸지 않고 미련 갖지 않는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이해가 되어야 해요. 그게 바로 기준이에요. 어차피 버릴 것, 그게 육신의 가시인데 그걸 뭐로 표현하느냐? 사탄의 가시라고 표현해요, 사탄의 가시. 악마가 나에게 육신의 가시를 준 거예요.
주님은 “잘됐네. 같이 버리면 되겠네.” 사도가 말하기를, “내가 사도가 된 것은 너희들처럼 챙기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버리게 했다. 여러 번 죽을 뻔 하고 여러 번 옥에 갇히고 그러면 그럴수록 복음의 기준만을 하나님이 고집하더라. 주의 그 기준이 중요하지 나 따위 같은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한다.” 이게 바로 사도바울이 말하는 고백입니다.
“예수님 하신 일이 중요하지, 예수님 하신 일만 능력이 되지 사도 네가 하는 것은 능력이 아니야.” 이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비록 사도라 할지라도. 사도가 한 사람도 구원 못 해요. 그러나 모든 구원은 사도를 통해서 구원되는 겁니다. 마치 오늘날 말씀을 통해서 구원하듯이. 그걸 구분할 줄 알아야 돼요.
구약성경도 예외가 아닙니다. 구약성경 민수기 20장 10절에서 12절에 보면요, 창세기부터 빠트리지 않고 죽 성경을 읽어온 사람에게 민수기 20장 10-12절은 상당히 당황하게 만들어요.“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모세가 잘렸습니다. 창세기부터 죽 여기까지 읽어온 사람들은 모세만큼은 천당 간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모세 당사자가 잘렸어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게 만들어버려요.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돼요?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모세를 하나님께서 허수아비로 만듭니다. 아말렉하고 전쟁하는데 잠시 모세의 인격을 다 빼버리고 나뭇가지로 사용해서 양옆에서 두 사람 아론과 훌로 손들게 해서 내려오면 안 돼, 들었다 놨다 모세를 그렇게 사용하니까 밑에서 하는 전쟁은 모세의 지팡이든 손이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에 따라서 승패가 좌우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모세마저도 주님이 다루시는 허수아비에요. 그 허수아비가 싫어요? 그게 못마땅합니까? 사람들은 누구의 허수아비 되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가, 자기 의가 남아 있어서 그래요. 독자적인, 개별적인 나는 나로 살고 싶은 거예요. 이런 마귀가 어디 있어요.
마귀는 뭐냐? 거짓의 영입니다. 죄는 뭐냐? 죄는 무조건 다 거짓이에요. 그 거짓의 원형이 뭐냐? ‘나는 살아야 되겠다. 왜? 의롭기 때문에.’ 이 의를 인간들은 감추려고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디에도 나의 의를 감출 만한 적절한 곳은 없습니다. 왜? 전 공간을 전수조사 다 하기 때문에.
휴대폰이요? 남편이 자는데 남편 엄지손가락지문 찍어서 열고 다 뒤져요. 8천 통 녹음한 것 다 드러나게 만듭니다. 숨을 곳 없어요. 그래서 이 땅에서 나의 의를 내세울 그 어떤 근거도 주께서 아예 삭제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그 삭제가 얼마나 고마운 용서인가를 알아야 돼요.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있다, 없다, 를 반복시킴으로 말미암아 땅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위로 올라가는 능력을 지금도 용서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해주시는 겁니다. 이게 모세뿐만 아니에요. 베드로뿐만도 아니고 엘리야도 마찬가지예요.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850대 1로 붙어서 이겼잖아요. 이겼는데 이세벨이 엘리야를 현상금 걸었어요. 요즘 같으면 엘리야 사진을 찍어서 배포한 거예요. 엘리야가 그걸 알고 쫄았어요. 땅에 대해서 쫄아서 브엘세바로 도망을 갔어요.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3, 4절에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뭘 했느냐? 죽기를 청합니다. “여호와여 됐습니다. 이 정도 했으면 할 만큼 했으니까 죽여주옵소서.”라고 한 겁니다.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선지자도 걸핏하면 자살하려고 해요. 요나도 마찬가지고요.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겸손을 떠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먹으라, 해서 천사가 와서 또 살려줘요.
엘리야가 자기 미래의 관점, 자기가 어떤 모습인가를 모르고 있어요. 모르고 그냥 다른 사람처럼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지요. 그런데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엘리야가 어떻게 되는가? 열왕기하 2장 11절에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이것은 사전에 미리 약속한 바 없어요. 엘리야가 그런 식으로 비겁하게 자기만 생각한 거예요. 인간이 기껏 아는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로마서 11장에 보면 엘리야가 오해하기를 “세상에 하나님 믿는 자는 나밖에 없습니다.” 하고 까불다가 하나님께서 “너 말고 7 천명을 내가 남겨뒀다.” 이렇게 하거든요.
3, 4절에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천하의 엘리야도 자기가 아는 것밖에 몰라요. 그런데 불 수레 타고 올라가지요. 이걸 누가 봤느냐? 엘리사가 봤어요. ‘아, 마지막 모습이 저렇게 불 수레 타고 올라가는구나. 그렇다면, 그 능력이 임한다면 내가 이 땅에서 처참하게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가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왜? 엘리야의 능력이 곧 나의 능력이기 때문에.’
사도의 능력이 곧 성도의 성령의 능력이기 때문에 사도의 모습이 죽으면 죽을 수도 있는 그 모습이, 주님처럼 들려서 올라가는 그 능력이 여러분에게 있으면 여러분은 이 세상일 가지고 쫄 필요가 없어요. 누구한테 주눅 들 필요가 없습니다. 아스트라제네카 가지고 기죽지 마세요.
세상 것의 유혹에 기죽지 마세요. 그것은 다 거짓된 것이고 용서받을 대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의 그 기준을 생각하게 하옵소서. 십자가로 인하여 이미 우리가 죽었고, 산 것은 의인으로 사는데 우리가 세상에 살다 보니 자꾸 잊어버립니다. 그럴 때마다 성령께서 깨우쳐 주셔서 세상과 말 섞을 필요도 없는 그러한 죽은 자인 것을 사도의 관점에서 다시 세상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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