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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나 2:1-4 / 생명싸개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요나

요나 2:1-4 / 생명싸개

정인순 2021. 8. 12. 14:44

음성 동영상 Youtube

 

생명싸개

 

이근호
2021년 8월 11일                 

 

본문 말씀: 요나 2:1-4

(2:1)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2:2)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이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2:3)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2: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요나는 지금 대단히 만족합니다. 자기 생명을 살려주셔서 만족한 것이 아니라 더는 ‘주님의 낯을 피하지 않아도 되는 구역’을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것에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구역은 바로 성전과 통하는 구역입니다. 깜깜하기 짝이 없는 공간, 그러나 요나는 사물의 본질이 공간에 있지 않고 외부에서 비쳐주시는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 있음을 압니다.

즉 이 세상은 빛이 아니라 어두움입니다. 그런데 어두움에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어둡지 않고 정상적으로 태양 빛 아래서 훤히 잘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요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깜깜한 죽음의 공간에 들어서야 비로소 빛의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요나는, 죽음이란 소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요나에게 죽음의 세계를 확장시켜 주셨습니다. 죽음이란 그냥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루는 요소들의 모음’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 ‘죽음을 이루는 요소’가 정립되면 그곳이 바로 생명이 발현되고 시작되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죽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마태복음 12:39-40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즉 예수님께서 무덤 속에 사흘 동안 계신 것이 타인의 눈으로 보면, 죽어계신 겁니다. 이 인간세계에 그 어떤 영향력이나 권세를 행사할 수 없는 분으로 취급됩니다. 이렇게 조용히 무덤 속에 계신 분이 어떻게 이 세상이 악하고 음란한 세상인 것을 지적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겁니까?

그것은 그 죽음 속의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의 처음 동작과 움직임이 나오는 구역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실 때, 없음에서 있음으로 창조하셨고, 죽음으로 생명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창조의 시작점에 지금 요나가 들어와 있게 된 겁니다. 요나가 현 형편에 대해서 주님께 감사하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의 일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요나 자신이 자기에게 부여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명이 요나를 부리고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무슨 사명 말입니까? 이 세상 창조에 관한 바닥이 되는 의미를 알리는 사명을 나타내는 사명입니다. 수조(물탱크)의 예ㄹ츨 들어보겠습니다. 수조는 일단 3차원적입니다. 입체적입니다.

거대한 물탱크에 물이 가득차 있습니다. 그 안에 요나가 들어 있다고 봅시다. 요나는 지금 죽어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죽음 안에 살아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요나는 죽음 속에서 생명으로 살아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요나는 성전의 의식합니다. 이는 죽음 속에 들어온 자에게만 경험되는 겁니다.

성전, 곧 하늘의 중심처가 지상의 성전으로 통하고, 그 세상의 성전은 다시 완성된 하늘의 성전으로 전환되면서 모든 일이 마감됩니다. 성전에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일이 지상을 거쳐 하늘로 귀환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체험이 미리 요나의 체험으로 나타났음을 이해해보세요. 예수님께서 길road이라면, 요나 시대의 길은 요나가 물고기 뱃 속에 3일 동안 있는 겁니다.

이는 이 방식 외에 다른 길은 아에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성전에서 시작해서 성전으로 말미암아 성전으로 돌아가는 그 길 노선에 지금 요나가 있습니다. 이 노선으로 인하여 요나는 하나님의 붙잡여서 생명으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즉 자신의 사명이 자기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생명과 통하고 관련있음을 말해준 바가 됩니다.

이로서 요나는 더는 자기 일이 아니라 모두가 주님의 일임을 알게 됩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에 이런 일은 자주 있습니다. 열왕기상 13:9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곧 선지자가 전하는 계시는 생명에 관한 말씀이기에 지상의 일상적 삶을 통해서 목숨을 이어지는 방식에서 벗어나서 귀환하는 모습을 보어야 한다는 겁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수조(물탱크) 속은 분명히 3차원적이고 입체적입니다. 그러나 수조 물 표면에는 3차원이 아니라 2차원이요 수평적이고 표면적입니다.

이는 3차원에서 출발한 의미가 물표면에서만 살아가면서 그것만이 세사의 전부라고 믿는 자들에게는 이 3차원적 의미가 무의미로 바뀌어지는 겁니다. 즉 물 표면 위와 땅 위에 사는 자들은 눈에 들어오는 것이 같은 인간들의 행위들 뿐입니다. 이는 모든 의미가 어디서 나왔는지, 자신들은 왜 태어났는지, 인간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수조 안, 곧 죽음의 안과 관계가 끊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열왕기상 13장에 나오는 선지자는 자신이 전하게 되는 계시의 말씀은 이 땅의 생존용이 아니라 세상의 무의미를 고발하는 근원적인 계기입니다. 거기에 합당하게 선지자도 처신해야 했다는 겁니다. 결국 그 선지자는 3차원의 계시전달자로 2차원적 삶을 보여주어서 갑자기 길에 등장된 사자에게 물러 죽습니다.(왕상 13:24)

요나가 보여주는 삶은 지상에서 인간들의 생존 방식이 아니라 도리어 성전이 보이는 죽음 속에서만 발견되는 생명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성령받은 성도들은 모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나의 처지와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죽음 안에서 삶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안에서는 어디에 사느냐라는 공간이 본질이 아니라 외부에서 비춰주시는 그 생명의 빛이 그 성도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열왕기상에 나오는 이름 모를 선지자 뿐만 아니라 엘리야, 엘리사 선지자들은 그들은 3차원적, 생명의 계시 때문에 수평적인 2차원적 인물들로부터 목숨이 위태로운 위협을 받게 됩니다. 이럴 때 엘리야나 엘리사가 자기 변명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게 되지만, 자신이 살아 있는 한,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 있으면 주의 일도 ‘나의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는 자라면 예외없이 나를 죽은 자로 간주하는 경우 뿐입니다. 죽은 자로 간주한다는 말은 우리 안에 예수님이 벌리는 일로 가득 차고 모아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사무엘상 25:29에서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생명싸개’.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가능함에 맡기지 말게 하시는 주님의 불가능함에 이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7강-요나 2장 1-4절(생명싸개)2108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나 2장 1-4절입니다.

요나 2:1-4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깊음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찌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이 본문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는 대목이지요. 이 본문을 보면서 이 말씀의 뜻을 우리가 캐내려면 우리가 동일한 환경 속에 있어야 가능하겠지요. 지금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있는데 지금 우리도 거기에 있습니까? 우리는 물고기 뱃속에 있지를 않잖아요. 그러면 이 말씀에 공감이 되지를 못하지요. 요나의 사적인 체험으로 끝나버려요. 이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태평양 바다에 앉아 있으면 요나같은 그러한 기도가 과연 나오겠는가? 그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요나가 알게 되었던 그 체험이 지금의 우리의 체험이 되려면 어떤 손길이 있어야 됩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주시는 것은, 2절에 스올의 뱃속이라 했으니까 요나가 죽음 속, 음부, 죽음 속에 있는 상황을 동일하게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는 것같이 우리는 지금 죽음의 물고기에 동일하게 놓여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어떤 점에서 그것이 일치되느냐 하면, 요나는 거기에서 뭘 봤느냐 하면, 하나님의 성전을 보았습니다. 2장 4절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찌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요나가 속해 있는 이 환경은 하나님의 성전을 인식하고 느끼게 만드는 특수한 환경입니다. 그러면 성전을 느껴서 뭐할건데요? 성전이 있는 쪽을 우리가 바라봐야 할 이유가 뭔데요? 이렇게 될 때에 하나님의 뜻은 뭐냐? 모든 일은 성전에서 시작해서 성전으로 말미암아 성전으로 되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걸 한자로 길, 영어로 하면 road,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뭘로 사용하느냐 하면, 길, road, 길로 사용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2장 39, 40절에 예수님 자신을 요나에 비유했습니다.“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는 것과 예수님께서 3일 동안 땅속에, 무덤 속에 계신 것과 오늘날 우리의 사는 형편과 어떤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가, 이걸 발견하면 되지요. 그것은 우리 입장이나 요나입장이나 예수님입장이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일을 하시는 노선 road, 길, 길이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자기를 길이라 했거든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7)라고 했어요. 예수님의 노선에 서지 아니하면 천국 또는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길에 들어서지 않았다고 확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요나는 예수님 오시기 전에 예수님 체험을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한 거예요.

그런데 거기서 뭐가 보이느냐 하면, 성전이 느껴지는 거예요. 성전이 느껴지니까 성전은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 모든 일을 시작했던 그 출발점이 성전이에요. 다시 말씀드릴까요? 하나님께서는 일을 성전에서 시작해서 성전으로 말미암아 성전으로 마감되게, 되돌아가게 하는 그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 노선이 있어 줘야 그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 간단히 말해서 요나는 자기 일이 없어요. 자기 일이 없기 때문에 요나가 지금 물고기 뱃속에 있는 것은 누구 일이냐 주의 일입니다. 참, 인생에 이것보다 중요한 일이 없어요.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기 일로 여기잖아요.

자기 일로 여기는 것은 자기자존심 챙기는 데는 유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길이 아니야. 그것은 천국으로 통하는 길이 아니라는 거예요. 천국으로 통하는 길이 되려면 내 일이 뭐로 전환되어야 되느냐 하면, 내 일은 없어지고 주의 일로 전환되어야 돼요. 내가 어떤 짓을 해도 그것은 내일이 아니고 주께서 의도적으로 일으킨 주의 일이 되어야 된다 그 말이지요. 나의 일은 그냥 갖고 있으면 이것은 길 바깥으로 노선 이탈을 의미하는 겁니다.

요나는 1장에서 주의 낯을 피했잖아요. 주의 낯을 피했다는 말은 주로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그 길에서 탈선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주의 낯을 피한 요 나를 딱 집어서 어디에 집어넣는가? 물고기 뱃속에 3일 동안 집어넣은 거예요.

이게 바로 길이다. 장차 오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체험을 네가 앞당겨서 공히 같이 체험하는 순간이라는 말이지요. 이것은 네가 잘되고 구원받고 그 문제가 아니에요. 요나로 하여금 그 당시에 길이 되게 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요나와 함께 있으면 그것은 길이고 요나와 함께 있지 않으면 그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 길이 아닌 게 돼요. 엉뚱한 길로 가는 게 돼요. 지옥 가는 길이 되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이 왔다는 말은 저는 아무개입니다, 성씨가 뭐며 이름이 이렇게 됩니다, 하는 그것은 필요 없어요. 그냥 하나님께서 꼭 집어서 “너는 내가 사용하는 길이야.” 다른 말로 하면 “너는 내가 사용하는 나의 일이야. 나의 일의 응축이야.”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너의 일은 아예 너 속에서 찾지를 마라” 그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이 요나의 기도를 돌아보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저는 이런 느낌이 들어요. 요나가 자기 신세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고 굉장히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아, 이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비린내 나는 물고기 뱃속에 사흘간 있으면서 기도하는 그 내용이 나 위주로 살던 나, 그래서 주의 낯을 피하는 요령을 부렸던 나를 드디어 주님의 일의 본선, 본 노선으로 딱 데려다 놓게 하신 그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대단히 감사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사정은 완전히 물고기뱃속이에요.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성전에서 시작한 하나님의 일이 자기를 관통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자기가 죽고 사는 문제 그것은 전혀 시시한 문제에요. 내가 죽고 사는 것은 아무 문제 아니고 주의 일이 나를 뚫고 지나가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그 주의 일이 관통하는 그 한가운데 내가 놓여 있게 되었다는 그 사실에 요나는 지금 감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세상 사람들 특징을 보면 자꾸 의심을 해요. “너 구원 받을 거야.” “아이고, 구원받겠나?” “너 행복할 거야.” “아이고, 뭐 지금 행복해도 나중에 아프면 행복 안 할건데.” 이런 식으로 온종일 하는 짓이 자꾸 의심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이빨 이거 겨우 나았는데 사탕 먹으면 또 아플 건데……’ 계속해서 의심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의심을 한다는 말은 나의 일이 주의 일인데 여전히 내 일이라고 꿍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내가 관리하고 내가 책임져야 될 내 일이라고 계속 우기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뭐 주의 일이 관통 안 된 사람이지요. 어떤 사람이 대놓고 욕을 합니다. “우리 집에 다시 오기만 해봐라. 오기만 하면 물 한 바가지 붓는다. 너 같은 것 오지 마. 내가 오지 말라 했잖아.”라고 욕설을 한다 칩시다.

사람들은 기분 나쁠 거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요나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요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욕을 하든 뭘 하든 간에 지금 내가 욕을 얻어먹을 당사자로서 내가 여기 있다는 게 내가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이 나를 여기 있도록 해주신 그 주님과의 관계가 나에게 욕하는 그것보다 더 우선적이고 그게 더 중요하다 그 말입니다.

더 쉽게 말해서 요나는 두 번 다시 주님의 낯을 안 피해도 되는 확정구역을 부여받은 거예요. 아무리 도망쳐도 이제 주의 낯을 피한 것으로 쳐주지 않는 확정된 마주 봄, 주님과 마주 대하게 된 그 상황 속에 요나가 놓여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성도가 물고기 뱃속에 있는 요나와 동일하게 공감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우리는 주안에서, 성령 안에서 어디 가서 어떻게 무엇을 하든지 간에 주님의 낯을 피할 필요가 없는 그러한 상황 속에 우리가 놓여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요. 사물의 본질은 공간이 아니고 빛이다, 또는 어둠이다, 할 수 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조명발이다. 쉽게 말해서 그 사물의 본질은 본인이 뭘 어떻게 갖췄느냐가 아니라 그를 비추고 있는 그 조명발이 빛으로 쪼아대느냐, 아니면 어둠이 그냥 어둠 속에 있느냐? 그것이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지금 요나는 갑갑해요.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까 촛불을 켤 수가 있습니까, 플래시를 비출 수가 있습니까? 그냥 깜깜한 거예요. 빛이 들어오지 않으니까. 물고기 뱃속도 어둡지만 물고기가 거주하고 있는 그곳도 지금 바다 제일 밑바닥에 있어요. 바다 밑바닥에 있으니 빛이 들어올 수 없잖아요. 하지만 요나는 지금 어두운 그 순간이 제대로 된 빛을 빛답게 발견하는 유일한 장소로 보는 겁니다. 그것은 스올의 뱃속, 죽음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요나의 죽음보다 더 큰 죽음이 요나를 삼켰다. 그러면 이 죽음이라 하는 것은 보통 이 세상에는 뭐라고 하느냐? 죽음이라 하는 것은 없어지는 것, 다 소멸하고 사라지는 것, 이렇게 사람들은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요나는 죽음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죽음 속에 죽음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따로 있으면서 죽음을 만들어내는 있는 것들의 모음이 죽음이다. 죽음이라는 하나님께서 규정한 그 죽음은 그 죽음 안에 들어와야만 비로소 발견되는 그런 있는 것들의 모음, 해태 종합선물, 이것은 죽음 밖에 있는 것들은 못 들어오고 죽어 있어 봐야 죽음을 생명으로 전환시키는 데 필요한 것들의 집합체, 모음 그것이 바로 죽음을 구성하는 거예요.

죽음은 없다, 가 아니라 죽음은 있다, 가 되는 겁니다. ‘2-1=1’이라 할 때 2를 진리라 보고 ‘–(빼기) 1’ 할 때 그 1을 지식이라 본다면 진리에서 지식을 빼버리면 1이 남아요. 지식, 모든 있는 것들의 총합을 1로 보거든요.

그런데 진리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다 통합한 게 진리에요. 따라서 있는 것들의 통합체인 지식을 진리하고 비교해서 그것을 빼기 하면 그 나머지가 죽음, 다른 말로 없음의 세계, 곧 요나가 발견한 빛의 세계, 생명의 세계입니다.

바로 교회는 이 죽음의 세계에 들어 있는 것만 전파되어야 돼요. 눈에 보이는 있는 것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요나는 지금 만족해요. 왜? 자기 것이 날아 가버렸으니까, 자기는 이미 죽었으니까, 죽은 채로 살아 있으니까요. 죽음을 품고 살아 있으니까, 내가 죽었으니까, 자기 고민 걱정 염려 이것도 같이 죽어버린 거예요.

이제 자기에게 부여된 것은 내 일로서 내가 부여된 것이 아니고 주의 일이 나에게 주어진 겁니다. 그렇다면 요나가 하는 모든 일은 뭐냐 하면, 그동안 그렇게 골치 썩고 트라우마 유발했던 내 일은 사라지고 그냥 주의 일만 소복이 내 안에 들어차 있는 거예요.

그것을 요나가 죽음 속에서 체험하게 된 그 이유가 뭐냐? 이게 지금 물속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수조, 그것도 아주 깊이가 큰 통, 수조를 예로 들겠습니다. 수조, 물탱크가 있다면 요나는 지금 물탱크 안에 들어 있어요.

주님과 결부해볼 때 요나 입장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처음 창조할 때의 그 모든 동작과 움직임을 요나가 같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시작된 그 창조가 이스라엘 성전을 통해서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가는 그 노선에 지금 요나가 거기에 참여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큰 수조 같은 물탱크 속에 요나가 있으면서 요나는 뭘 거기서 배우게 되느냐 하면, 아무것도 없는 것 속에서 어떻게 있음이 나오느냐를 요나는 수조같은 이 바닷물 속에서부터 배우게 되는 거예요. 없는 데서 어떻게 있게 되었을까? 죽음에서 어떻게 산 것이 나오느냐 하는 것을 말로가 아니라, 신학이 아니라 실제로 온몸으로 지금 체험하고 있는 겁니다.

요나는 지금 신이 난 거예요. 하나님에게 좀 미안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갔으니까. 그렇게 신이 나지만 하나님께서 도망치는 나, 여기서 도망친다는 말은 이것은 나의 일입니다, 하고 나의 일을 고집해서 도망쳤던 나를 붙잡아서 죽음 속에 집어넣으니까 그렇게 골치 썩였던 나의 일은 깔끔하게 없어지고 몽땅 그게 뭐가 되느냐? 주의 일이 되면서 그 주의 일은 어떻게 시작했고 어떻게 마감되는지를 자기가 몸소 관람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줬으니까 이 얼마나 산 교육의 장이 되겠습니까? 얼마나 기분이 좋아요!

그 기분 좋음을 오늘날 우리도 똑같이 겪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수조, 물속에 있을 때 세상은 어디 있는가? 수조니까 이것은 3차원 공간이거든요. 그런데 바닷물 위, 여기는 땅인데 여기는 사람들의 2차원 공간이에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나 요나는 지금 무엇을 소개하느냐 하면, 죽음은 끝이 아니야, 죽음을 의미 있게 구성하고 있는 그 새로운 의미가 죽음 안에 고스란히 들어 있어,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왜 우리가 죽음을 생각해야 되느냐? 바로 모든 것은 죽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래요. 죽음에서 나오지 않으면 생명이 아니에요. 생명은 그냥 주는 게 아니고 죽음을 경유해서 생명을 주게 되어 있어요. 누가 그것을 보여줬는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걸 보여주잖아요. 부활은 십자가를 경유해서 부활의 능력이 나와요. 죽지도 않은 사람한테는 부활의 능력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 수조의 물 위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2차원적 사람이에요. 땅에 있는 사람들, 땅 위에서 벌레같이 다니는 사람들 벤츠 타고 달려봐야 2차원이에요. 전기차 타고 달려봐야 2차원이거든요. 그러나 요나는 3차원 전체를 통으로 다 보고 있어요. 없음과 있음의 전체를 다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수조에서 점점 떠오르게 되면 이 부력에 의해서 물 표면으로 올라가겠지요. 올라가게 되면 그 수면 위는 뭐냐 하면, 무의미한 거예요. 수면 위의 인간들, 땅 위에 사는 인간들은 2차원적인데 그들은 왜 사는지, 내가 어디서 나왔는지, 도대체 하나님은 생명을 어떻게 주는지,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일을 하는지 아무것도 없어요.

죽음의 세계를 볼 줄 모르고 그냥 땅 위에서 태어났으니까 애 두 돌 되었다고 생일 축하합니다~, 케이크 사놓고 노래 부르고, 자기들끼리 인간들끼리 즐거우면 그것으로 끝이에요. 2차원이니까. 이것은 요나 입장에서, 물속입장에서 이것은 무의미한 거예요.

무의미하다는 말은, 의미를 경유 하지 않았다, 의미가 처음 나오는 그곳으로 경유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성경 어떻게 봤습니까? 성경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조치했는지를 제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열왕기상 13장에 보면 남쪽의 어떤 선지자인데 이름이 없어요. 이름 없는 선지자가 북쪽으로 갑니다. 북쪽 여로보암 왕에게 가서 뭐라고 예언을 하는데 예언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선지자에게 이런 조건을 부여했습니다.

열왕기상 13장 9절 그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예언을 하고 곧바로 귀환하라 그 말이에요.

이 말은 “남쪽에 있는 이름 모를 선지자가 북쪽 여로보암왕에게 예언을 하게 되면 분명히 여로보암 왕이 너에게 어떤 재정적인 혜택이나 권세로 너에게 제안을 할 것이다. ‘나의 선물이니 받아주세요’ 이런 제안을 할 것이다.” 이미 하나님이 그걸 간파하시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떡도 얻어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도넛도 얻어먹지 말고 왔던 길로 말고 다른 길로 가라.

이 말은 뭐냐? “네가 전하는 그 의미에 있어서 무의미한 2차원적 지평 땅 위에서 사는, 그 물 표면에서 찰랑거리는 그런 인간들에게 절대로 3차원적인 생성되는 의미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라. 왜? 그들은 필히 망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전하는 예언이 이것 당신들이 믿으시면 구원받습니다, 그 예언이 아니에요. 망해야 될 자에게 망하는 이야기를 한 겁니다.

오늘날 성도에게 주께서 당부하는 것은 딱 이것 한 가지에요. 지옥을 지옥이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 그 말이에요. 지옥을 지옥이라고. 이 세상이 지옥이잖아요. 지옥을 보고 지옥이라 하는데 뭐가 나빠요? 아무 문제 아니잖아요. 주저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 세상은 무의미한 거예요. 무의미한 것을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물속에서 튀어나온 요나 밖에 못하는 이야기인 거예요. 요나가 의미의 생성과정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요나는 예수님의 체험을 같이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은 죽음을 경유하지 않으면 자기 삶의 의미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몰라요.

그냥 태어났으니까, 태어났을 때부터 살아 있으니까 사는데, 살다 보면 나중에 죽을 때 되면 죽는데, 죽고 나서는 뭐 누가 아나, 가본 사람이 있어, 죽을 때 되면 죽겠지, 이렇게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요나도 도망친 겁니다. 내가 아는 수준에서는 그냥 하나님이 알아서 하고 나는 내 살 궁리만 챙기면 된다, 라고 해서 도망쳤는데 이 요나가 선지자라, 요나가 사명자라고요.

요나의 사명은 요나가 제안한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그냥 퍼부어준 거예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그냥 퍼부어준 것이라고요. 요나는 내빼도 퍼부어진 사명은 요나와 떨어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뭘 퍼부어주고 요나를 찾아갈 때 하나님이 요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요나에게 덮어준 자기 뜻을 되찾기 위해서 요나에게 찾아온 거예요.

이게 유명한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대사가 있지요. “내 다리 내놔라!” 내 다리 내놔라. “지금 네 허벅지가 네 허벅지가 아니고 내 허벅지다. 내 다리 내놔라.” 그 말이지요. 주께서 자기 백성에게, 저와 여러분에게 주께서 이렇게 따라 붙인 거예요. 잘해라, 훌륭하게 살아라, 말씀대로 살아야지. 아니에요. 왜 내 것 가지고 네 것이라고 우기느냐. 그것 때문에 성령이 찾아오신 거예요.

“이것은 내 것인데 왜 자꾸 네 것이라고 우기느냐? 말 똑바로 하자. 우리 계산 확실히 하자.” 그것 때문에 찾아오신 거예요. 이 말은, 여러분이 여러분 인생에 고민할 게 손톱만큼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겁니다. 걱정할 게 없다는 거예요. 내게 아닌데 왜 내가 걱정합니까? 쓰잘데기 없이. 요나는 자기가 살아 있을 때 그걸 못 느꼈습니다. 강제로 체포되어서 죽었을 때도 몰랐어요.

그런데 죽었다고 하는 그 순간, 그는 죽음 안에 있었지 죽지는 않았어요. 이 말은, 나의 죽음보다도 나를 둘러싼 그 죽음, 다시 말해서 처음 의미, 처음 창조되기 전의 의미, 예수님이 갖고 있던 그 의미가 내 죽음보다 더 우선적이었고 더 소중했던 겁니다.

한 3, 40대쯤 되는 사람들에게 50대가 된 고등학교 선배가 말합니다. “아이고, 너희들 보니 나도 이제 늙었다. 너희도 내 나이 되어 봐라. 그러면 늙는 게 뭔지 안다. 머리 허리 안 아픈데 없다.” 하면서 늙었다 하거든요.

그런데 그 자리에 70대가 이렇게 합니다. “네가 늙었다고 말하기까지는 늙은 게 아니다.” 왜냐하면, 늙었다, 하는 순간 더 살아보면 50대 그때가 한참 젊은때거든요. 늙었다는 개념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는 이제 곧 죽는다, 할 때 주님께서는 말합니다. “네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 주님의 생명 앞에서 그때 죽음이 뭐냐를 아는 거예요

죽음이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생명의 묶음, 몸, 요소들, 종합선물, 그게 없는 게 바로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의 노선에서 이탈한 게 죽음이에요. 네 목숨 끊어졌다고 그게 죽음이라고? 그것은 죽은 게 아니에요. 그것은 죽은 게 아니라고요. 하나님의 요소, 주님이 우리에게 부여한 것이 없을 때 그게 바로 죽음입니다.

그러면 열왕기상 13장 9절의 그 대목이 16, 17절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와요. “대답하되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라”

이 말은 뭐냐 하면, 몸은 살아 있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죽은 자로, 2차원 세계에서, 평면적 세계에서 죽은 자로 간주하는 식으로 “네가 전하는 그 말씀은 2차원이 아니고 3차원, 입체적으로, 전체, 통으로 다 아는 3차원적인 예언의 말씀이다. 따라서 네가 3차원적으로 통으로 전체를 보는 안목으로 네가 움직여야지 네가 갖고 있는 예언은 3차원인데 네가 하는 행세는 2차원적으로 하게 되면 나는 너와 네가 전하는 계시가 맞지 않는다는 것으로 나는 너를 죽이겠다.”

그래서 나중에 24절에 보면 그 선지자가 죽어요.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저를 만나 죽이매 그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섰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섰더라” 갑자기 길에서 사자가 나타나서 그 선지자를 물어 죽여버립니다.

이 말은, 선지자야, 네가 전한 계시는 2차원적 인간들이 알아먹을 계시가 아니다. 물도 마시지 말고 떡도 먹지 말고 마치 이 땅 다른 사람 보기에 죽은 자처럼 되는 사람이어야 비로소 알아듣는 이야기, 내가 여기 있다 할지라도 내가 없다고 한다면, 내가 죽었다고 한다면……” 라고 생각할 때 비로소 비로소 눈에 띄는 계시, 그것이 바로 십자가 복음입니다.

이 십자가 이야기를 살아 있는 내가 더 잘 살아보려고 애를 쓰니까 그 모두가 사기가 되는 거예요. 십자가 믿고 천당 가야지. 이것은 전부 다 거짓말이지요. 이미 죽은 자가 왜 나는 이 땅에서 죽어야 되고, 그 죽어야 되는 나를 십자가가 어떻게 살려내는가, 그게 바로 십자가 안의 주의 일에 근거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십자가 밖에서 따로 노는 2차원적 존재가 아니고 통으로 되어 있는, 큰 수조 같은 죽음이라는 이름의 십자가 안에 3차원적 존재로서 우리는 거기서 오르락내리락,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습니다.

가끔 세상에서 너무 잘나가면 우리 몸이 부력을 못이 겨서 물 표면에 올라와요. 물 표면에 올라와서 보니까 ‘아, 남들은 저렇게 잘 사는데. 저 차도 너무 좋아 보인다.’ 주님의 말씀, 말씀, 하다가 갑자기 뭐가 보이느냐 하면, 잘 먹고 잘 사는 그 사람이 못되어서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합니다.

주께서 머리를 잡아서 꼬르륵 밑으로 집어넣으니까 이 죽음의 세계가 곧 생명의 세계인데 저 바깥의 사람들은 지금 자기가 살아 있는 것을 생명의 세계라고 착각을 하는 겁니다. 그게 곧 지옥인데 바로 2차원적 존재와 3차원적 존재의 그 차이점을 하나님께서는 구약을 통해서 이렇게 알려주는 겁니다.

점점 더 세밀하게 넘어가면 바로 열왕기상 19장에 나옵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850대 1로 붙어서 이겨놓고 그다음 이야기입니다. 1, 2절에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엘리야를 현 상수배범으로 몰아서 죽이거나 체포하는 사람에게 큰 보상을 내린다 하니까 엘리야가 거짓 선지자들을 이겨놓고도 도망을 칩니다. 도망을 치면서 하는 말입니다. 열왕기상 19장 4절에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죽으려고 한 거예요. 여전히 엘리야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주의 일로 생각하지 않고 본인이 벌인 자기 우환으로 생각해서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고 지금 원망 투로, 반항 투로 자살하겠다고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엘리야가 뭘 찾느냐, 이점이 중요해요. “하나님, 내가 하나님 만나서 이렇게 바르게 살았는데 저를 죽이려는 적들이 이렇게 많습니까?” 하고 따지려고 하나님을 찾았는데 11, 12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 했습니다.

왜 여기에도 계시지 않고 저기에도 계시지 않는가? 지금 그 자리에 엘리야 본인이 계시기 때문에 그래요. 자꾸 본인을 살아 있는 존재로 간주하니까 주님께서는 어디에도 없는 거예요. 열왕기하 2장 14절은 엘리야가 불수레타고 하늘로 올라가고 난 뒤에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그다음에 엘리사가 하는 그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참, 성도라면 가장 실존적인 질문이지요.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을 못 만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라는 질문을 던질 잽이 못되고 그런 자격이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하나님 쪽에서 먼저 우리를 문제 삼아야 돼요. “이 골칫거리야, 죽어라고 말 안 듣는 인간아.” 하고 먼저 우리 자신을 들쑤셔야 돼요. 들쑤셔 줘야 내가 내 인생을 관리할 권한도 없고 자격도 없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그다음부터는 모든 고민과 염려와 걱정이 한 순간에 훅 없어지는 거예요.

수면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미래를 생각하고, 다른 사람 어떻게 사는가, 보다가 주님께서 이 골칫거리야, 이 말썽쟁이야, 하고 그 머리를 수조 밑으로 오늘 본문의 요나처럼 집어 넣어버린 거예요. 꼴깍 집어넣으니까 사람들이 흔히 ‘이제 너는 죽었어.’ 그 죽었다는 그 자리가 생명의 보자기 안에, 생명 보자기 안에서 고이 보호받는 처지인 것을 비로소 깨닫는 환경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나는 공간 존재가 아니라 바로 빛 자체, 빛이라는 조명발, 하나님의 계시의 조명발, 말씀의 조명발, 십자가의 빛, 그 빛이 우리의 운명을 확정 지었습니다. 결정지어버렸습니다. 더이상 내가 나를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 뭐가 보이느냐 하면, 바로 주의 처음 일을 개시한 하나님의 성전이 보이고 그 성전 노선과 일치되는 노선을 우리가 같이 감당하게 된 거예요. 만나게 된 거예요.

제가 말씀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일을 유발 시켜 버려요. 일을 일으키게 되면 우리는 뭘 느끼게 되느냐 하면, 더이상 하나님의 낯을 피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과 늘 함께 있음을 우리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아쉬울 때 하나님을 찾을 필요도 없고 내가 여기 있음, 그 자체가 주께서 있게 하셨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나의 일은 더 이상 나한테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주의 일이 되지요.

끝으로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무엘상 25장 29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 표 현이 너무너무 좋아서 제가 잊을 수가 없어요. 거기에 단어 하나 나오는데요 보통 현재 인간들은 이게 잘 안 쓰는 단어인데 한글에 나와 있어요. “생명싸개”라는 단어입니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찌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오줌싸개는 있지만 생명싸개는 처음 들어보지요. 생명싸개라 하는 것은 생명의 보자기로 그 사람을 폭 둘러싸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누가 했느냐? 아비가일이라는 아주 미모가 뛰어난 여자가 했습니다. 이게 유부녀거든요. 남편이 나발이라는 사람인데 나발 부인이 아비가일이에요.

그 아비가일이 어떤 소식을 들었느냐 하면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이 일을 하실 때 바로 저렇게 일을 한다는 것을 발견한 거예요. 인간의 능력을 동원해서 일을 벌리는 하나님이 아니고, 2차원적 인간이 가능한 것을 다 버리고 그냥 하나님께서 불가능함으로서 그 인간을 사용할 때 그자가 진짜 하나님의 성도인 거예요.

그래서 다윗이 가는 곳마다 그 아비가일 눈에는 뭐가 보이느냐 하면, 다윗이 보이는 게 아니에요. 불가능함이 싸개, 보자기니까요, 그 생명의 보자기처럼 불가능함이 다윗을 폭 둘러싸서 다윗이 가는 곳마다 생명의 보자기가 같이 움직이는 걸로 아비가일은 다윗을 파악한 겁니다.

그 파악하는 순간 누구하고 비교하겠습니까? 돈만 챙기는 남편과 비교하겠지요. 그래서 호시탐탐 아비가일은 자기 남편하고 헤어지고 하나님의 사람에 대해서 은근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다윗이 피신할 때 자기 동네로 피신하게 되니까 아비가일이라는 그 유부녀는 다윗 앞에서 대놓고 자기 남편 욕을 합니다.

아비가일은 그 남편에 대해서 욕을 했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천대했던 그 나발을 죽여버렸어요. 사무엘하 25장 38절에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되어 있어요. 나발은 그 동네 유지였어요. 그 나발을 죽이고 39절에 보니까 “……다윗이 아비가일로 자기 아내를 삼으려고 보내어 그에게 말하게 하매”

글쎄요. 제가 그 시대에 안 살아봐서 이게 연하인지 연상인지 그것은 장담 못 하겠어요. 말씀에서 벗어난 것은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쨌든 간에 이 둘의 만남은 복음의 만남이에요. 불가능함으로만 연결된 사람이에요. 전에 남편은 그저 인간이 뭘 할 수 있는가, 인간이 어디까지 될 수 있는가, 가능함만 내세웠던 수조의 표면에 있는 무의미한, 아무 의미 없는 자기 일만 챙기는, 의미로부터 끊어진, 생명으로부터 끊어진 그러한 존재와 아비가일은 과감하게 이혼하고, 지금 제가 이혼을 자꾸 격려하는 것 같은데, 과감하게 이혼하고 지금 다윗과 혼인을 해버렸어요. 아비가일은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지금 아멘, 할 문제는 아니고요.

아비가일이 한 이야기가 뭐냐 하면, “난 당신을 보는 것이 아니고 당신을 둘러싼 생명의 보자기만 보입니다. 불가능함, 인간이 할 수 없는 불가능함만 보입니다.” 지금 요나는 이 불가능함을 찾아다닌 것이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 앞에 납치된 거예요. 강제납치 되어서 하나님의 그 의미의 시작점, 창조의 시작점, 모든 것의 생명의 시작점, 그것까지 요나가 포로 잡혀 온 거예요.

왜? 요나는 선지자니까요. 장차 예수님과 같은 체험을 해야 되니까요. 오늘날 우리도 같은 체험을 해야 되니까요. 따라서 정말 이 시대에 여러분이 성령을 받았다면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구경하는 사람말고 십자가 수조, 십자가 안으로 집어넣습니다.

“죽은 너를 나는 매일같이 살리고 있고 없는 너를 있게 했다.” 이유가 뭐냐? 예수 그리스도가 오직 길이라는 사실을, 너를 통해서 내가 길이라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서 내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여러분, 공간은 없습니다. 미국에 가든지 어디에 가든지 주님의 빛의 조명발이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하고 비교하면서 진리와 지식을 구축한 그것이 얼마나 거짓되고 오류인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에게 아무것도 얻을 수 없고 아무것도 배울 수 없음을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의 근원부터, 우리의 의미부터 십자가로부터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서 어디에 가든지 주님의 생명이 살아 있음을 증거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