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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나 2:5-10 / 성전의 요소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요나

요나 2:5-10 / 성전의 요소

정인순 2021. 8. 18. 23:38

음성             동영상

 

성전의 요소 

2021년 8월 18일             

 

본문 말씀: 요나 2:5-10

(2:5)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2:6)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2: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2:8)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2: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2:10) 여호와께서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요나는 하나님께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을 때 몰랐던 것을 죽어보니 비로소 알게 되는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소위 자신이 육지에서 살면서 살아있는 세계에 살았다는 그 세계가 바로 ‘죽음의 세계’였던 겁니다. 즉 죽어야 죽음의 세계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죽음의 세계 안에서 놓여져 있었던 겁니다.

그 죽음이 세계는 모든 것이 거짓되고 헛된 것들로만 꽉 채워진 세계였습니다. 요나가 살아 있을 때는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죽어 보니 이 세상은 바다의 잡풀과도 같은 것들이 인간들의 머리 위에 뒤덮고 있었던 겁니다. 바로 이 ‘거짓되고 헛된 것’들을 알게 된 것을 요나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죽음의 세계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요나가 바다 속, 곧 죽음의 세계에 들어오기 전에는 자신 마음이 정하는대로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도 있고 안 피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죽음의 세계에 들어오니 요나 본인의 마음에 의해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자신을 빨아당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위 살았다고 자부하는 그 요나를 죽음의 세계로 강력하게 빨아당긴 그 원천은 어디인가요? 그곳은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즉 성전은 죽지 않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인간은 본인이 살아 있으면 자신을 주인공으로 여기고 자신에게 주도권이 있다고 믿습니다.

즉 자신을 좋은 미래의 세계를 집어넣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게 됩니다. 내가 처신하기 나름으로 자신의 장래가 결정된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요나가 뒤집어쓴 해조류같은 것들입니다. 인간은 본인이 알아서 성전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게 강력한 힘이 나와서 성전에 이끌리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성전이란 과연 무얼까요? 역대상 29:1에 보면, “이 전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위하여 성전이 존재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성전을 사람들이 짓는 줄 압니다. 사람들이 신전을 지으면 이는 필히 사람들을 위한 전이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개념 앞에서 반드시 ‘살아 있는’라는 단어를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짓는 게 아니라 ‘사람을 죽여놓고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으시는 것’입니다. 그 예가 바로 사무엘하 24장에 나옵니다. 다윗왕은 이스라엘이 자기 소유의 나라라고 여기고 인구조사를 실시합니다.

다윗의 인구조사는 결코 자기 백성을 없애려고 수를 헤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다윗이 조사한 그 백성수에 관여하십니다. 백성의 수를 지워나가는 선택을 다윗이 하게끔 유도하십니다. 제일 짧은 기간이 실행되는 벌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백성들이 죽어나가자, 다윗은 비로소 이 백성들이 자신의 백성이 아님을 압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주도권을 하나님에게 넘기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자기 백성 죽이심과 그 후 조치에 대해서 일체 다윗은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다윗의 개입이 멈추었을 때,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 조치를 멈추십니다.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곁에 있는지라”(삼하 24:16)

이럴 때, 다윗은 자기와 자기 아비의 집을 쳐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는 죽임을 당해야 하는 그 집단 속에 자기도 일원이 되어 죄인으로 합류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잘못을 아는 다윗을 제사장 직능을 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바로 ‘제단’입니다.  

다윗에게 이런 제사장 직능을 하기 전에 먼저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제사장 직능으로 이스라엘을 확정지어놓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장이라는 특별한 사람들을 선택해서 그들은 지정된 장소, 지정된 시간에, 지정된 옷을 입고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한정지으신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요건을 친히 결정지어놓으신 겁니다.

바로 이 모세언약에 나타난 요건이 다윗 언약에 와서는 성전으로 결정된 겁니다. “ 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 열조에게 주신 땅과 주의 빼신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저희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저희의 일을 돌아 보옵시며 주께 득죄한 주의 백성을 용서하옵소서”(대하 6:38-39)
죽음으로 인간은 끝이 아닙니다. 죽음의 세계가 따로 있고 그 죽음 속의 세계가 진짜 세계입니다. 왜냐하면 그 죽음 속에야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어디서 은혜가 나오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살아 있다고 하는 이 세상에서는 도대체 은혜가 어디서 흘러들어오는 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거짓되고 헛된 것들만 사용하면서 세상을 삽니다. 출애굽기 8:3에 보면, “개구리가 하수에서 무수히 생기고 올라와서 네 궁에와 네 침실에와 네 침상 위에와 네 신하의 집에와 네 백성에게와 네 화덕에와 네 떡반죽 그릇에 들어갈지며”고 되어 있습니다. 평소에 바로왕이 개구리를 키우는 취미를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바로왕 근처에서 개구리를 깨끗하게 치워버렸을 것입니다. 그 흉물스럽고 지저분하고 더러운 것을 멀리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개구리나 바로왕이 같은 죽음의 공간이었습니다. 함께 그런 죽음도 요소가 더불어 있었던 겁니다. 바로왕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 보였고 죄 용서해주는 성전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성전 앞에서 성도는 더 이상 자신이 자신을 협박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능멸합니다.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에 다윗은 남 의식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낮추듯이, 성도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하여 확정지어놓으신 한정된 요건을 접할 때에 조금도 자기 신경쓰지 않고 오직 감사, 감사만 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물고리에서 요나가 튀어나왔듯이 주님의 요건만 챙기고 세상으로 튀어나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8강-요나 2장 5-10절(성전의 요소)2108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나 2장 5-10절입니다.

요나 2:5-10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성전의 의미라는 것, 보통 성전은 솔로몬이 지었다 하거든요. 성전은 솔로몬이 지었다. 솔로몬이 그런 이야기는 안 하지만 만약에 솔로몬 이후의 사람들이 성전은 솔로몬이 지었다고 한다면 여기에 누가 반대하고 나설 것이냐 하면, 다윗이 반대하고 나설 겁니다.

신을 섬기는데 이게 우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그것이, 그 신 또는 그 신전이 인간을 위해서 있는 신이고 인간을 위한 신전이라면 그것은 다 우상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요나 2장 8절에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이렇게 나와요.

지금 요나의 처지가 거짓되고 헛된 것까지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에요. 자기는 지금 바다 깊숙한 곳에 꼬르륵, 하고 빠졌거든요. 자기 한 몸 건지기도 바쁜데, 요나가 기도하는데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그렇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 거짓되고 헛된 것을 요나가 어디서 알았느냐 하면, 바로 죽음 속에서, 죽음의 깊음 속에서 그걸 알게 된 겁니다. 어느 정도 깊으냐 하면, 5절에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영혼 속까지 물이 들어왔어요. 3절에 보면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요나가 지금 이 기도를 물고기 뱃속에서 또는 바닷속에서 하는 이유가, 지금 세상 사람들은요, 죽음 속이라는 거기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요나는 지금 뭘 우리에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죽음 안의 세계에 대해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 거예요.

죽음은 어떤 요소로 만들어졌는가? 이게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진짜 말도 안 되는 허황된 이야기로 생각될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이 살려면 어떤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가, 이것은 충분히 이해가 돼요. 그런데 인간이 살다가 죽게 될 때 죽음은 뭘로 구성되어 있는가, 이런 이야기는 마치 살아 있을 때 인간이 뭘 구성해야 살아 있다, 하는 것같이 죽음의 세계도 죽음의 세계 자체가 살아 있는 거예요.

죽음의 세계가 없는 것이 아니고 죽음의 세계가 죽음을 죽음답게 하는 것들로 꽉 차 있고 그 나름의 죽음의 세계가 구성되어 있는 겁니다. 요나는 그 죽음의 세계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푹 잠겼지요. 죽음의 세계 속에 요나는 푹 잠겨 있습니다.

푹 잠겨 있으면서 거기서 무엇을 발언하느냐,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죽음, 목숨을 잃어야만 비로소 알 수 있는 게 있다, 그 말이지요. 살아 있을 때, 목숨이 유지될 때는 전혀 모르다가 목숨을 잃어봐야 아, 무엇이 거짓되고 무엇이 헛된 것인지, 무엇이 헛된 것을 숭상하는 것인지, 인간은 목숨을 잃어보고 죽어봐야 아는 것, 거기에 대해서 지금 요나가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이 목숨을 잃을 때만 유일하게 현실을 안다. 같은 말이에요. 목숨을 잃는 것……, 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자기 목숨이 죽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진짜 현실이에요. 목숨 부지하고 생각하는 이것은 아직도 안 죽어봤기 때문에 헛되고 헛된 환상더미 속에 있는 거예요.

사람이 일단 죽어서, 죽은 상태에서 살펴볼 때 아, 죽어보니 비로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고, 이게 확 다가오는 거예요. 세상이! 죽음 안에 있을 때만. 그래서 마태복음에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 요나의 표적 외에는 이 세상에 진실이라는 것이 없다는 그 말입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안 죽었잖아요. 안 죽었으니 우리는 무식쟁이고 우리는 착각과 환상 속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 요나가 죽었을 때, 요나가 바닷속에 자진해서 뛰어들 때는 자기는 그것으로 끝이라고 봤어요. ‘내 인생은 여기까지구나.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래서 풍덩 뛰어들었거든요.

막상 뛰어드니까 무슨 이야기가 나오느냐 하면, 고맙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나왔어요. 죽어보니까 굉장히 고마운 거예요. 뭐가 고마우냐 하면, 죽기 전에는 무엇이 거짓되고 무엇이 헛된 것인지를 자기가 구분을 못 했는데, 가려내지를 못했는데 딱 죽어보니까 무엇이 거짓되고 무엇이 헛된 것인지가 딱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야, 이거구나.’ 그래서 죽여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죽여주신 것에 대해서. 자기가 죽은 것에 대해서 요나가 감사한다는 말은요,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뭘 이야기하느냐? 죽는 것도 감사한다면 그까짓 거, 사는 것을 왜 감사 못 하느냐, 라고 그렇게 우리에게 지금 요나가 충고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죽어서도 감사하던데 살아 있다는 이것은 감사할 거리가 맞잖아, 라고 그렇게 우리에게 되묻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이 본문을 보면서 도대체 무엇이 거짓되고 무엇이 헛되고, 이걸 왜 살아 있을 때는 모르고 죽어야, 왜 이것이 그때야 밝혀지고 알게 되는가? 그것은 죽음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죽음 안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던 것입니다. 4절에 보면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찌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자, 여기서부터 성전에 대해서 이번 시간에 정리할 필요가 있어요. 성전에 대해서 다윗은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역대상 29장 1절에 “이 전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같은 뜻인데 그걸 제가 바꿔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에게는 구원이라는 것은 없다. 같은 뜻입니다. 인간에게는 구원이라는 것은 없다.

왜? 인간을 위한 구원은 애당초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만들어낸 거예요. 성경에는 그것이 없어요. 구원이 되든 성전이 되든 이것은 사람을 위함이 아닙니다. 그러면 누굴 위함이냐?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를 위함이에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성전을 지은 거예요.

이게 우리 안에 칩처럼……, 기초공사할 때 철근콘크리트 기둥을 박잖아요. 이게 철근처럼 안 박혀 버리면요, 40년, 50년, 교회 다닌 것 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나를 위한 구원은 없어요. 다른 말로 할까요? 더 쉬운 말로, 나를 위한 천국은 없습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도 없고요, 나를 위한 성전도 없고요.

나를 위한 게 없는데 자꾸 ‘하나님, 기도할 테니 응답해주세요. 이게 필요해요.’ 자꾸 이렇게 뭔가 자기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말은 가증되고, 오늘 본문 그대로 하면 거짓되고 헛된 것, 그것에 기초해서 살아 있는 나를 주인공으로 삼는 거예요. 노골적으로 말해서 ‘주님, 죽기 싫습니다.’ 우리가 도대체 우리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요, 툭 건드리면 죽기 싫대요. 코로나 걸려서 죽기 싫습니다. 자꾸 죽기 싫다는 거예요. 아프기 싫고, 죽기 싫고, 가난하기 싫고,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이번 수련회 할 때 했는데 여러분 알다시피 사무엘하 6장에 미갈이라는 다윗 부인이 다윗보고 잔소리를 한 적이 있어요. 언약궤가 오는 것을 보고 다윗이 그 앞에서 그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서 벗은 몸으로 춤을 췄어요. 에봇을 입고 춤을 췄다고요. 그럴 때 사무엘하 6장 20절에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그러니까 “어떻게 왕께서 백성들이나 신복의 계집종 앞에서 주책없이 주책바가지처럼 체면을 돌보지 않고 춤을 췄습니까?” 미갈이 그렇게 나왔습니다. 이걸 누가 지켜봤느냐 하면, 하나님이 지켜본 거예요. 다윗은 언약궤 앞에서 무슨 춤을 췄느냐? 그 춤의 이름을 제가 지어 드리겠습니다. 능멸의 춤. 내가 나 자신을 능멸하는 거예요.

이것은 내가 나 자신을 살기 위해서 협박하지 않는 겁니다. 자기 단도리를 하지 않아요. 언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나의 모든 것을 다 빼앗겼을 때. 오늘 요나에 나오는 이 본문을 한마디로 말해주세요, 라고 한다면 요나가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다 빼앗겼기 때문에 감사한 거예요. 목숨까지 빼앗겼기 때문에 감사하고 있는 겁니다.

빼앗기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 있었어요. 그것은 거짓되지 않고 헛된 것이 아닌 그것, 모든 것은 어디서 나왔는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나온 겁니다. 성전에서 지금 요나를 호출한 거예요. 성전에서 요나를 빨아당긴 겁니다. 성전에 뭐가 있느냐 하면, 진공청소기 있어요. 그 성전에 진공청소기가 있다고요. 죽음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성전, 죽음 속에서 요나를 빨아당겨서 그 빨아당긴 그것에 대해서 요나가 감사하고 있습니다.

요나의 오늘 이 기도를 보게 되면 자기 것 전혀 챙기지 않습니다. “주께서 나를 빨아당겼잖아요.” 주님께서 빨아당기니까 내가 주님 앞에 나서겠다는 그 자체가 이게 거짓되고 이게 헛된 것이에요. 내가 나서겠다는 그것. 그 전에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요나가 자기 뜻대로 여호와의 낯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할 수 있다는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결심만 하면 다시 여호와께로 나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하는 것은 내가 살아 있기 때문이고 그렇다면 내가 여호와께 나가볼까, 하는 그것도 자기가 살아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이 오늘 본문 보면서 10절에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토!’ 하니라.” 욱, 하고 토해냈어요. 아마 지금의 이스라엘 욥바 그 근처 어딘가에 토했을 거예요. 니느웨는 지금의 이라크니까, 이스라엘에 면한 바다 지중해 바닷가 어디에 토했겠지요. 여호와께서 물고기에게 명했어요. 지금 요나가 알아서 물고기에서 기어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요나가 지금 자기 죽음에서 헤엄쳐서 탈출한 것이 아니에요. 토!, 그냥 토해버린 거예요.

이것은 주님의 성전에서 요나를 빨아당긴 겁니다. 주님께서 요나에게 명한 것이 아니에요. 누구에게 명했느냐? 물고기한테 명한 겁니다. 물고기가 참다 못해 욱!……, 저녁 먹고 온 분들 죄송합니다만 그냥 토한 거예요. 이걸 네자로 뭐라고 하느냐?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신앙생활이에요. 다섯 글자로 한다면 진공청소기.

왜? 모든 것을 빼앗겼기 때문에. 요나의 모든 요소를 다 빼앗겼어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에는 요나가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낯을 피할 수도 있고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께도 내가 알아서 나갈 수 있다. 왜? 나는 살았으니까. 이게 거짓되고 헛된 것이라는 것을 요나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내가 기도하고 잘해보겠다는 이게 뭐가 문제에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겠다고? 그래,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다고 네가 생각했지? 그것도 잘못이야. 그러면 반대로 내가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 그것도 거짓돼. 그것도 헛되고 거짓된 거야.”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했다고 생각했지만 요나가 성전의 낯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아니라 성전이에요 성전. 성전은 요나를 빨아당기는 원천이었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존재라면 교회 가볼까, 그냥 안갈까, 이걸 누가 결정하느냐 하면, 본인이 결정해요. 진공청소기 정도로 안 되겠다. 강력한 터빈 있잖아요. 제트 비행기가 날아갈 때 그 비행기의 날개에 달린 엔진 앞에 있는 참새 정도?

어떻게 못 벗어납니다. 마치 거대한 물고기가 하나님의 명 따라서 요나를 삼키고 싶어도 못 삼키고 토하듯이, 토할 수밖에 없듯이. 확 빨아당기는데 그걸 누가 저항합니까? 아무도 저항하지 못하지요. 이게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신앙생활이라는 겁니다. 신앙생활!

그러면 그 빨아 당겨지는 가운데 요나가 알아야 될 것은 뭐냐? 요나가 알아야 될 것은……, 참, 오늘 본문이요, 중요한 게……, 더 쉽게 해 볼게요. 지금 요나는 깊은 바다 속에 빠졌지요. 요나가 깊은 바닷속에 뻐졌잖아요. 그러니까 바다풀이 자기 머리를 쌌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이걸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바닷물을 다 쏙 뺐다고 생각해 봅시다.

지금 지중해에 물이 있지만 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지중해에 물이 다 빠졌을 때가 있었다 합니다. 소금만 있었고. 소금이 응축되어서 알프스 산밑에서 소금 덩어리가 많이 나온다는 거예요. 체코에 소금광산도 있다고 하지요. 안 가봤지만. 하여간 지중해 물을 다 뺐다고 생각합시다. 그러면 다시 지중해에 물이 덮였다 합시다. 요나가 바닷속에 들어갔을 때 자기는 죽음 안에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요나가 뭘 알았느냐 하면, 내가 죽어서 바닷속에 빠졌을 때 바닷속에 있는 게 아니고 내가 바다에 빠지기 전에 공기 좋고 바람 부는 그 땅 위의 세계가 무슨 세계냐 하면, 바로 죽음의 세계였던 거예요. 왜냐하면 거기에 성전이 있으니까요. 성전이 있다면 성전은 이 세상이 바다든 하늘이든 땅이든 전부 다 죽음의 세계로 이미 규정, 확정 지어놓은 거예요.

요나가 바닷속에 안 빠졌으니까 바닷속에 빠져야 나는 죽었고 살아 있을 때는 살아 있다고 오해를 한 겁니다. 그게 잘못된 생각이에요. 로마서 14장 7절에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는 말이 있거든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사나 죽으나 우리는 성전 앞에 있습니다. 사나 죽으나 성전 앞에 있어요.

그러나 살아 있을 때는 성전이 안 보이지요. 아까도 말했지만 자기 자신이 살아 있기 때문에, 내가 잘 되어야 되기 때문에, 남들처럼 되어야 되기 때문에, 남들로부터 내가 능멸을 받으면 안 되니까. 그래서 우리는 감사할 수가 없지요. 인간의 욕망이 있는 한 감사할 수가 없어요. 감사해봐야 욕심 또 생기고 채워지면 또 생기고. 그래서 감사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요나는 물속에 들어가니까, 자기가 세상에서 걸쳤던 모든 것들은 다 빼앗겼으니까 이제는 성전만 보이고 성전에서 나를 빨아당긴다는 그 관계성, 그 관계성만 감사하고 그 감사에 더 추가해서 그동안 거짓되고 헛된 것이 뭐냐를 이제 알게 되었으니 감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지요.

인간에게 달라붙어 있는 모든 허상과 환상, 그것은 뭐와 같으냐 하면, 5절에 보면 나옵니다. “바다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이 바다풀, 해조류가 머리를 뒤덮은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 세상의 쾌락과 유혹 이런 것이 해조류처럼 우리 머리털을 다 뒤덮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서도 우리는 바닷속이 아니라고 여기고 여기가 죽음 속이 아니라고 여기는 겁니다.

이 허상과 환상으로 뒤집어쓴 것 그 점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생각해 봐야 돼요. 출애굽기 8장 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7장부터 죽 보게 되면 열 가지 재앙이 나오거든요. 8장 3절에 “개구리가 하수에서 무수히 생기고 올라와서 네 궁에와 네 침실에와 네 침상 위에와 네 신하의 집에와 네 백성에게와 네 화덕에와 네 떡반죽 그릇에 들어갈찌며”

개구리가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침실에도, 떡 반죽 그릇까지도 온통 개구리예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인간들은 이 땅에 살면서 내 영역, 내가 깔끔하게 청소해서 내 구역에서 나는 깨끗하게 산다고 생각하지요. 지금 바로 왕도 그렇게 생각해요. 바로 왕 취미가 개구리 키우는 게 아니잖아요. 개구리는 저 강에나 살지 여기에는 개구리가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개구리 있는 세상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바로가 생각을 못 한 겁니다.

개구리가 덮여 있는, 마치 해조류, 바다의 미역이나 다시마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뒤덮듯이 언제든지 저주스러운 것, 지저분한 것, 흉물스러운 것, 잡스러운 것 그 속에, 그 쓰레기더미 속에 놓여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바로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 개구리가, 독충이, 파리가, 코로나 바이스러스가 우리 이웃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한 거예요.

이 세상이 곧 죽음의 세계라는 것은 상상도 못 한 거예요. 죽어야 죽는 세계에 가는 줄 알았어요.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실상을 다 보여준 겁니다. 네가 지금 산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음 그 자체의 세계에 네가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어떻게 했느냐? 그걸 다 떨어버려요.

성전을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언급할 것은 성전은 다윗에게 약속한 거예요. 잊을까 싶어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역대상 29장 1절에 보면 다윗이 생각하기를, 성전은 사람을 위한 집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을 위한 집을 하나님 자신이 짓는다. 그 원칙입니다. 자, 이 원칙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게 다윗언약, 다윗에게 준 약속이거든요. 성전 짓는 게.

그렇다면 그 전에 무슨 약속이 있느냐? 모세에게 준 약속이 있어요. 모세에게 준 약속은 제사장 언약이라 합니다. 자, 제사장 언약의 특징이 뭐냐 하면, 시간과 공간과 옷입니다. 이게 한정되어 있어요. 이것은 요건입니다. 하나의 조건이에요. 하나님이 설정한 요건과 조건이에요. 그렇게 딱 한정적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제사장은 제사 드릴 때 시간 정해서 해야 되고, 장소도 아무데서나 하면 안 되고 딱 장소가 있어야 되고, 그리고 제사장은 옷도 자기가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에서 디자인한 옷을 입어야 돼요. 제사장은 그 요건, 시간이라는 요건, 공간이라는 요건, 옷을 입는 그 요건, 그 요건 때문에 제사장은 뭐가 되느냐 하면,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신앙인이 신앙 생활한다는 것은 뭐냐? 그 요건, 그 한정된 요건 안에서 우리가 완전히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빨려 들어가면 그 전에 내가 이 땅에 살면서 얼마나 착할 수 있느냐, 내가 얼마나 실수 안 할 수 있느냐, 얼마나 나쁜 짓 안 할 수 있느냐,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나를 천당 보내기 위해서 하는 모든 요건, 이것은 다 해조류처럼 갖다 버려 버려야 돼요. 빼앗겨야 돼요. 그것은 다 쓸데없는 거예요.

얼마나 착해야, 얼마나 기도해야, 얼마나 헌금해야, 얼마나 봉사해야 내가 구원받겠느냐, 얼마나 실수를 줄여야 되고, 얼마나 착실하게 살아야 되고, 얼마나 남편답게, 얼마나 아내답게, 목사는 목사답게, 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되고, 남 앞에 어떻게 행동을 할 때 하나님께서 나를 예쁘다 해서 천국에 넣어줄 것이냐, 라는 모든 잡스러운 것, 그것 개구리입니다. 그것 독충이고 그것은 ‘이’고요 벼룩이고 지저분한 거예요. 악마가 우리한테 뒤집어씌운 헛된 것 거짓된 것이에요.

요나는 죽음 속에 가니까 그게 필요 없어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요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마치 모세 언약 때 하늘에서 디자인한 옷 입고 정해진 시간 정해진 공간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치 않아요. 그것만 있으면 안정되어 있고 충분하고 족합니다. 이게 모세언약이에요.

여기서 조금 어렵고 힘들더라도 여러분이 참으셔야 돼요. 그 모세언약에서, 제사장언약에서 뭐가 뽑혀나오느냐 하면, 제사장직이 다윗언약에 계속해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어지게 되어 있을 때 옷과 시간과 공간이라고 이야기했지요. 그중에서 시간 탈락하고 옷 탈락합니다. 뭐가 남아 있느냐? 장소가 딱 남아 있어요. 장소, 그 장소가 사무엘하 24장 18절에 나오는 아라우나 타작마당이에요.

사무엘하 수련회강의 들은 사람은 압니다. 아라우나 타작마당이 무슨 장소냐 하면, 내 백성 이스라엘 백성은 내 백성이기 때문에 내가 다 죽일 수가 있다, 라는 그것을 알려준 장소가 아라우나 타작마당이에요. “다윗아, 이것은 네 백성 아니다. 네가 착각을 해서 지금 숫자를 세는데 네가 왜 숫자를 헤아려? 네가 숫자 헤아리는 것이 아니야. 주도권 너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왕 여호와께 있어.”

다윗이 숫자를 헤아렸다는 말은 이스라엘을 누구의 나라로 봤냐 하면, 다윗 본인의 나라로 본 거예요. 제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하나님은 자신을 위한 하나님이지 우리를 위한 하나님 아닙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되었든 이스라엘이 되었든 성전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하나님 자신을 위한 하나님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는 하나님이 되려면 어떤 절차를 밟아야 되는가?

바로 요건, 하나님이 하나님 되는 요건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제시를 해준 거예요. 그 제시해준 것이 뭐냐는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옷과 희생된 장소와 적용되는 시간, 이 세 가지 이야기했습니다. 그게 모세의 약속인데 모세의 약속에서 더 나가서 성전 짓겠다는 다윗언약에 오게 되면 지정된 장소 아라우나 타작마당, 따라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결코 이스라엘 것이 아니고 다윗 것도 아니고 그들을 죽이든 살리든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확정 짓는 장소 아라우나 타작마당입니다.

역대하 3장 1절에 보게 되면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오르난은 아라우나를 말합니다.

같은 그 장소, 여부스니까 예루살렘 근처에요. 그 장소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버려요. 그러면 그 장소는 무슨 장소냐 하면, 죽음의 장소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 성전 앞에서 죽은 자로 간주가 되어야 돼요. 죽은 자였어요. 죽은 자인데 다윗이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면, 제사장 역할을 해요.

제사장에서 시간 날아가고 옷 날아가고 남는 것은 장소지요. 그 장소에 누가 제사장 되느냐? 전에는 제사장이 했는데 임금이, 다윗왕이 친히 제사장이 되어서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자기가 제사장이 되어서 제단을 쌓았던 겁니다. 아예 타작마당과 소를 돈을 주고 삽니다.

“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고하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삼하 24:23-25)

다윗이 제사장 되는 거예요. 왕이 제사장 역할이 되어버리면 거기에 다윗 약속에 의한 제사장이 와서 계신 그곳이 뭐가 되느냐 하면, 성전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제가 아까 요나는 어떻게 여기서 물고기가 토해내서 살았느냐? 이게 요나가 성전을 들어갔다 다시 성전을 경유해서 나오는 거예요. 마치 반환점이 있는 마라톤처럼이요. 반환점 돌고 나온 거예요.

들어갈 때는 내가 알아서 하나님 낯을 피하고 내가 알아서 하나님 잘못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했는데 막상 그 죽음 속에 들어가 보니까 내가 어떻게 구원받고자 한다든지 내가 하나님 말씀 지키는 것이 아니고 강력한 터빈에서 나오는 힘이 나로 하여금 내 속에서, 이 요나 속에서 제사장 같은 역할, 그 역할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확정된 구원의 요건을 찾아내신 거예요. 구원의 요건을 찾아낸 겁니다. 나를 죽여서 끄집어낸 거예요.

물질에 광자를 쏴버리면 거기서 입자가 나와요. 맞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에게 하나님의 성전을 쏴버리면 거기서 구원의 요소들이 나와요. 구원요소들이 나온다고요. 그 요소가 뭐냐?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의 희생이에요.

그래서 역대하 6장 38, 39절에 보면 “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 열조에게 주신 땅과 주의 빼신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저희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저희의 일을 돌아 보옵시며 주께 득죄한 주의 백성을 용서하옵소서”

용서하는 것, 성전에는 용서하는 희생 또는 제물의 피가 있고 자기 백성을 가지고 광자로 쳐버려요. 자기 백성은 물질이라면 광자로 또는 방사능으로 쳐버립니다. 1932년도 그때 세계 최초의 가속기를 발명했어요. 영국의 두 물리학자(John Cockcroft,1897-1967 와 Ernest Thomas Sinton Walton,1903-1995)가 그걸 발명해서 가속된 양성자를 리튬원자에 충돌시키니까 헬륨이 나왔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요나를 쳐버리니까 요나에서 무슨 요소가 나왔느냐 하면 용서라는 게 나와요. 그 용서가 어디서 나옵니까? 이미 성전 자체에서 용서할 수 있는 모든 제사장 기능이 완성이 된 겁니다. 거기에 다 들어 있어요. 성전을 경유하고 나오니까 요나는 비로소 자기가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게 바로 성도에요.

성도는 개인이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개인이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자기 안에 성전으로부터 주어진 어떤 하나님의 하나님다운, 하나님이 하나님답다고 형성된 그 요소가, 약속이 우리 안에 나도 모르게 그 안에 들어 있었던 거에요. 들어 있으니까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는 것처럼 탁, 치니까 이게 나온 겁니다.

내 구원이 나온 것이 아니고 주님 자신의 구원의 원칙이 나온 거예요. 구원의 요소가 나온 거라고요. 주님께서 내 속에서 주님 자기 것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이게 어렵습니까? 그동안 왜 그게 안 되느냐 하면 자꾸 껍데기가, 내가 살려고 하니까, 내가 천당 가려고 하니까 안되는 거예요. 자꾸 내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어떻게 복 받습니까, 어떻게 건강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환상이거든요. 그게 전부 다 죽음의 세계인 줄 모르고 세상 것들로 막 뒤집어 쓴 거예요. 그 지저분한 지푸라기를 너무 뒤집어 쓴 거예요. 그런데 깔끔하게 하나님께서 요나를 바닷속에 넣어서 그걸 물에 다 씻어내린 거예요. 그 표정 봐야 돼요. 쓰잘때기 없는 세상 부귀영화 그런 것 있지요.

그걸 다 씻어내니까 남아 있는 것이 뭐냐? 성전에서 나를 용서했다. 그것만 달랑 남는 거예요. 하나님의 다윗언약이 나를 용서한 거예요. 그러니까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헛된 것을 알았던 겁니다. 요나는 무엇이 감사하냐? 나에게 일절 주도권이 없다는 그것이 감사해요. 어떤 주도권도 나에게는 없어요.

그동안 우리는 천당 가려고 너무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코로나 검사 나온다고 호들갑을 떨고요. 도대체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 호들갑을 떠는 이유가 뭐냐 하면, 아직도 숨을 쉬고 있으니까 아직도 살아 있다고 봐서 살아 있는 것을 우짰든간에, 이건 나훈아 멘트인데, 그저 우짰든간에, 어찌 되었든 간에 이걸 한번 천당 보내보려고 그냥 성경이 시키는 대로, 교회가 시키는 대로, 주님이 시키는 대로 살아보겠다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자기가 주인공입니까? 얼마나 자기 위주에요? 주님께서는……, 오늘 이 해조류 이야기 정말 잘 나왔어요. 머리 위에 미역, 다시마, 파래, 이런 것 뒤집어썼다고 보세요. 이걸 주님께서 잡아서 물속에 팍 집어넣어 버릴 때 요나는 어떤 주도권도 내게 없다, 가 아니라 ‘없어야 돼, 어떤 주도권도 내게 없어야 돼.’

이미 주도권은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위한 주도권이지 내가 천당 가는 요령이나 부리는 것, 그것 다 거짓되고 헛된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요나의 그 해조류, 미역, 파래, 다시마, 이걸 바닷물에 다 씻어내린다는데 지금 우리는 아직까지 물속까지 안 들어갔는데 어떻게 씻어내는가?

사람이요, 죽는 게 겁나는 게 아니고 사람이 늙어가는 게 겁나요. 왜? 죽을 때 컥, 하고 한순간에 죽으면 되는데 늙어가는 것은요, 잘근잘근 씹듯이 망가지고 허물어지는 것은 매시간 매분 매초 마다 이걸 처절하게 절절하게 느껴야 돼요. 죽을 때까지. 아, 인간은 이렇게 무너지는구나.

나이 40, 50 때 팔팔했지요. 30대, 20대에 이 피부가 늙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합니다. 서른 넘어도 자기는 젊었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나이 50되고 60되고……, 60대가 늙었다고요? 80 노인이 얼마나 그 자아가 허물어질지 그것은 상상도 못 합니다. 혹독하게 허물어져요. 자기에게 뒤집어씌운 개구리 있잖아요. 지저분한 개구리, 독충 다 뒤집어쓴 것.

이래도 이 세상이 좋으냐? 코로나 보내서 보내줄 때 고맙다 해야 돼요. 산 게 아니고 지금 이것이 깊은 바닷속인 것을 아시고 바로 성전, 십자가만 크게 보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확정 난 것, 이미 정해진 것, 결정 난 사실을 우리는 알아보지 못하고 내 쪽에서 뭘 조심해야 되고, 뭘 관리해야 되고, 뭘 착실해야 되는지 쓸데없이 그런 것만 걱정했습니다. 주여, 그것이 헛되고 거짓된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주도권을 주님한테 드려서 주님의 구원의 요소, 용서라는 요소, 주님의 희생만 증거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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