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나 1:11-16 / 두 종류의 시체 본문
두 종류의 시체
이근호
2021년 7월 28일
본문 말씀: 요나 1:11-16
(1:11)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1: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1:13)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1:14)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1:15)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1:16)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평소에 인간들은 든든한 땅 위에 기거합니다. 어지간하면 아무런 이상이 없는 단단한 땅에다 생활 터전을 박고 삽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위험에 노출될 필요가 없는 존재로 이해합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들이 심하게 바다 위에서 폭풍에 시달리는 경우는 겪는다면 어서 안정된 땅에 당도하여 안심하기를 원할 겁니다.
자신들은 그만한 권한이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는 상황은 극박한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아슬아슬할 정도로 생명이 위태로워 보입니다. 심하게 흔들이는 배 위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을 위인들이 아니라고 당황해 할 겁니다. 그저 단단하고 든든한 대지 위에 사는 것이 자기에게 격이 맞다고 여길 겁니다.
인간들에게 있어 죽음이란 이처럼 낯설고 이질적 상황이라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안정적인 처지에서 마음껏 신을 노래하고 찬양하고 싶어합니다. 모든 것이 종잡을 수 없는 경우 속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없다는 사실을 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인간성이 제대로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이 죽음 속이라고 생각하십니다.
늘 한결같이 단단하게 생동감 넘치게 살아 있는 것이 인간성을 제대로 아는 것이라고 보지를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을 정상적인 존재로 여깁니다. 인간들은 위험하지 않는 환경을 찾아서 그동안 줄곧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제대로된 자신을 알 기회가 없었습니다.
참된 인간성은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때 드러납니다. ‘죽음 속’이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나시는 특이한 상황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같은 배를 탄 요나가 자기네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인물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요나에게는 자신이 준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죽지 않아야 된다’고 여기는 것이 흔히 인간들이 자기를 잘못 생각하는 바이라면, ‘죄 지은 자는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 맺고 사는 사명자의 태도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은 죄 있는 경우 빼놓고서는 자신들은 죽지 않아야 한다고 여기는 반면. 사명자는 하나님과 함께 있음 자체가 ‘원래 인간은 죽은 시체’라는 점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보는 겁니다.
지금 요나는 자신이 죽는 것을 겁을 낼 겨를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아내셨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나는 기꺼이 죽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런 요나의 태도에 대해서 같이 배를 탄 이방인들은 큰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의식의 출발점은 오직 이것입니다. “나는 어쨌든 죽지 말아야 될 존재다”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 있어 신은 자신을 다 다치게 보호하고 지켜주는 신으로 족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신이 우선이 아니라 자신들의 안녕과 행복이 우선인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동일한 죽음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과 요나의 어떤 근원적인 차이를 보이느냐에 유념해야 합니다.
이방민족들이 오해는 ‘희생’에 대해서 확연하게 여호와 하나님과 차이납니다. 그들은 자신의 신상 지키는 것이 우선이기에, 만약 신께서 자신을 위해 대신 희생해준다면 기꺼이 신에게 거하게 제사드리고 맹세할 의도가 있다고 고백합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에서 같이 승선한 자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그런 신으로 이해했습니다.
반면 요나가 이해하는 희생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단 요나를 이방인들과 격리시킵니다. 이방인들은 자진해서 요나가 바다에 빠지겠다고 하니 너무 미안한 마음을 들어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누가 희생되는 자없이 다같이 육지에 무사히 정박시키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로 끝났습니다.
어쩔 수 없는 그들은 요나를 바다의 신에게 제물로 바치게 되는데 여기서 그들은 요나에 대해 ‘참 착한 분이다’는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네들의 생명을 지켜보겠다고 자진해서 희생한 그 성의에 대해 높게 평가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 자체가 자신들도 요나 못지 않고 원래 착한 성품을 가진 자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 뭔가 본인들이 달라져야 할 것이 있어야 하는데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도움받았다’라는 식으로 정리해 버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와 그들을 죽음 속으로 몰아넣으신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들은 당연히 시체입니다. 죽어가는 자가 아니라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이것은 육, 혹은 육체라고 묘사합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에 나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육’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절대성을 고집합니다.
하지만 썩어질 것만 쌓을 뿐입니다. 육의 특징은 자신이 이미 죽은 시체에 불과함을 알지 못하고 자신을 여전히 멀쩡하게 살아 있는 자라는 환상으로 자신을 온통 덮어씌운다는 점입니다. 보다 완전하고 온전하게 살아 있는 자처럼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 애를 씁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잘난 나를 더욱 잘나게 해줄 희생자가 되어 줄 신의 자비를 찾게 됩니다.
그러나 성도, 즉 성령받은 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죄로 인해 자신을 누가 대신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함께’ 죽는 희생만이 여호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희생인 것을 아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 속에서도 사명받은 선지자 요나를 따로 세상 사람과 격리시킵니다.
그리고 그 요나와 함께 두 번째 죽음, 즉 하나님과 함께 죽는 죽음을 겪게 합니다. 이 사실은 신약에 성령을 받는 자만에게는 실행되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즉 사도 바울은 이미 ‘십자가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바깥의 자아가 십자가를 요모조모 관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안에서 세상과 하나님을 봅니다. 바로 이 안목이 신약에 성령받은 자만의 안목이요 주님이 세상을 보는 안목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정상인 양 환상을 갖지 말고 주님에 의해서 쓰임받는 자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녹취:오용익
5강-요나 1장 11-16절(두종류의 시체)2107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나 1장 11-16절입니다.
요나 1:11-16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방금 나왔던 이 장면은 바다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바다가 큰 폭풍으로 잠식되어 있는, 바다인지 하늘인지 구분도 안 되는 큰바람이 약하디약한 그 배 하나를 삼킬 듯이 몰아세우는 그런 지경에 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생각하기를, 현재 이러한 것, 이것이 특수한 상황이다, 라고 생각을 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평소에 어디에 사는가? 그것은 뭐 꽃피고 나무가 우거진 든든한 땅 위에 살지요. 땅 위에 살면서 발견되는 나 그리고 우리가 특수한 듯이 느껴지는 큰 파도에, 곧 폭풍에 삼킴을 당할 수밖에 없는 절대절명의 위기의 배 위에 있는 이 사람들, 우리는 그 사람들과 우리가 동일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여기 요나와 함께 배에 탔던 그 사람들은 빨리 바다가 잔잔해 져서 든든한 육지, 탄탄한 육지에 자신들이 도착되기를 간곡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면 육지에 도달했다고 칩시다. 그들이 무사히 육지에 도달해서 안착해서 육지에서 살 때 그들은 그들 자신을 제대로 알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나는 배 위에서 어떤 변화를 겪었는데 요나와 함께 배를 탔던 그 선원들은 잠시 풍랑을 만났다, 그걸 끝이에요. 다시 자기 집에 돌아가서 식구 만나면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그 인간이 그 인간으로 그냥 유지되는 겁니다. ‘아따 혼났다. 끝.’ 그걸로 끝입니다.
그들이 왜 풍랑을 만났는가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이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이 정상이 아닌 것을 꾸짖으시고 정상인 인간으로 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풍랑을 맞이하게 했다. 그렇게 그들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고, 혼났네.’ 그 정도예요.
자칫하면 나의 나됨이 손상될 뻔했어, 아이고 앞으로는 두 번 다시 배 타지 말고 기차 타고 다녀야지, 앞으로는 좀 조심해야 하겠다든지, 일기예보 잘 보고 다녀야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 뿐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비정상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자기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인간들이 기껏 여호와를 만나게 되면 아이고 무섭네, 겁난다, 그걸로 끝이에요. 그 이상을 생각할 줄 모릅니다. 성경을 보면서 왜 성경이 자꾸 남의 이야기 나하고 상관없는 이야기로 느껴지느냐 하면, 인간들이 자기를 늘 한결같이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성경은 볼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했어요. 아브라함을 택하고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아브라함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든지 저주하는 자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그 말입니다.
아브라함을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 아니라 인간들이 자기 스스로 정상인 인간이라 할 때 제일 싫어하는 것이 뭐냐 하면 ‘신이시여, 나는 정상이니까 제발 저주라든지 지옥이라든지 심판이라는 것은 나와 전혀 상관없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니까 나에게 저주나 심판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마소.’ 이런 식으로 그냥 밀어내는 거예요.
사도행전 17장 17, 18절에 보게 되면 사도바울이 어떤 사람들과 만나게 되는데요. 성경에서 철학적인 학파에 대해서 나온 게 이 대목이 딱 나와요.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라고 되어 있어요.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철학의 학파 이름이 유일하게 나옵니다.
인간세계에서 그렇게 인류사에서 절대적으로 대우를 받고 대접을 받는 철학이 성경에서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쑥 지나가요. 거기에 에피쿠로스학파, 에비구레오라고 되어 있고 스도이고라 하는 것은 스토아학파라고 되어 있어요. 이 사람들과 사도바울이 논쟁을 벌인 겁니다.
이 철학적인 학파가 어떤 학파냐 하면, ‘인간의 모든 고통은 인간이 죽음을 이기지 못해서 고통이 온다. 죽음의 공포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죽음을 미리 앞당겨서 해결해버리면 인간에게는 더 이상 고통이 없고 인간은 행복만 남아 있다’ 하는 겁니다. 인간이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이 그냥 물질이고 기계라는 것을 몰라서 그렇다는 겁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은 그냥 그런 기계인데 기계가 죽는 게 어디 있겠습니까? 쓰다 버리면 그만이지요. 기계기 때문에 기계적인 인간에 있어서 그냥 감정에 대해서 휘둘리지 말고 적당하게 무리하지 말고 너무 과하게 뭔가 애쓰지 말고 균형 맞춰서 살게 되면 우리가 그렇게 고대하는 행복은 절로 찾아온다. 이것이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에요.
좀 더 보탠다면 인간의 행복은 신체와 정신이 평안한 데서 온다. 그 평안이라 하는 것은 저울에서 균형일 경우에만 평안하다 그 말이지요. 평정심이라 하거든요. 이들의 핵심은 평정심이에요. 이들의 이론을 우리가 아는 식으로 하면 그냥 불교입니다.
불교. 인간의 자아라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자기의 기억과 번민에서 왔기 때문에 다 그게 허망한 것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밥을 너무 많이 먹지 말고 소화가 안 되니까 적절하게 먹고 적절하게 운동하고 적절하게 인생 살아가게 되면 죽음 자체는 흙이 되는 것이니까 그딴 것은 신경 쓰지 말고요, 살아 있을 동안에 행복해야지요, 하는 그 이야기, 그 사람들은 그 썰(說)을, 그 이론을 푸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죽고 난 뒤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저주가 있고 복이 있다, 라고 이야기해 버려요. 그러면 제가 아까 창세기 12장에 아브라함을 선택했다 했지요. 아브라함을, 특정 인간을 선택했을 때에 그 선택당한 아브라함과 다른 인간, 선택이라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 때문에 아브라함은 특이성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은 그냥 보통 사람이에요.
그런데 아브라함을 선택하고 보니까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겁니다. 그것을 이렇게 보면 돼요. 여호와를 모르는 그것이 비정상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일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비정상인 거예요.
여호와를 모르기 때문에 인간들은 자기가 행한 것만 계속해서 되새기고, 또 되새기고 자기 관리, 조절에 나서는 겁니다. 자기 행한 것만.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지금 난데없이 바다에 풍랑을 일으켰어요. 풍랑을 일으킨 그 주범이 누구냐?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일한다는 거예요. 그것도 인간들이 감당 못할 정도의 일을 벌이시는 겁니다. 왜 그 일을 벌입니까? 그것은 네가 정상이 아니다 그 말이지요. 인간들이 여호와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선택사항이 아니에요.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내가 스스로 정상이라고 여기는 그 생각이 이게 착오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겁니다. 착오!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인간 자체가. 우리가 태어난 인간 자체가 원래 인간 따로 있고 지금 인간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저주, 이 저주라는 것이 이것이 실제상황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그 지중해 바다를 완전히 뒤엎어서, 총동원시켜서, 폭풍을 일으켜서 배 하나를 까딱까딱 지금 삼킬 듯이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누가 타고 있는가? 아브라함같이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자 요나가 타고 있습니다. 말씀을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땅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땅이 흔들리는 경우는 지진이 일어나는 경우밖에는 없으니까 멀미도 나지 않고 어지럽지도 않겠지요. 땅에서 나도 살고 너도 사니까 서로가 서로를 보면서 정상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대다수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요나도 하나님에 대해서 안일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맘대로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과 나 사이는 막역한 사이니 내 뜻을 아시겠지, 하고 하나님 일은 하나님 혼자서 잘 하시오, 하고 도망쳐 온 거예요.
그런데 도망쳐 왔는데 하나님께서 딱 잡았어요. 그 요나를 배 위에서 잡은 겁니다. 배가 흔들리면서. 그럴 때 요나는 자신의 특수성을 다시 한번 자각하게 됩니다. 아, 같은 인간들이 아니에요. 같은 인간들이 아닌 겁니다.
요나가 이 사람들에게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번 폭풍이 야기된 그 원인은 나한테 있기 때문에,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기때문에 나만 격리 시키면, 여러분이 나를 떼놓게 되면 여러분은 아마 편안하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나를 떼놓으세요.”
떼놓는다는 말을 그들은 듣기를 어떻게 듣느냐 하면, ‘나(요나)를 그냥 여호와라는 신에게 제물로 갖다 바치면 여러분들은 평안할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이해를 한 거예요. 딱 이야기 들어보니까 여호와를 모르는 그런 입장에서는 요나가 착해도 너무 착한 거예요.
자기도 정상이지만 요나는 자기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그것보다 착함이 더 얹어져 있는 겁니다. 아이고 훌륭한 사람이에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진해서 희생물로 자기를 바다에 던져버리세요, 라고 나설 수 있는 그런 용기 있는 사람, 이들은 요나의 그 자발적 희생에 대해서 상당히 감동 받았어요.
그래서 미안해서라도 그들은 어떤 행동을 취합니다. 12절에 보면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줄을 내가 아노라” 그리고 13절에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돌리고자 하다가”
뭐냐 하면, “나를 그냥 배에서 던지세요. 이 문제는 하나님과 내 문제기 때문에 나의 특수적인 업무와 관련되어 있기때문에 나를 당신들에게서 떼 내서 바다에 던지세요.”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양심이 있어서 “그래도 어떻게 사람을 우리만 살겠다는 그런 이기적인 목적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가만있어 보세요. 당신 마음에 우리가 감동을 받았는데 우리가 할 때까지 한번 해 봅시다.” 하고 육지에 배를 대기 위해서 열심히 노를 젓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이게 바로 인간들이 비정상이라는 증거에요. 지금 인간들은 여호와를 모르고 있어요. 여호와를 모르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 자기가 정상이거든요. 정상이라는 말은 얼추 착한 쪽에 속한다는 뜻이에요. 신이 아닌 이상 완전하다는 그런 고집은 부리지 않지만 얼추 착함은 있다는 말이지요. 착함은 있는데 어떤 위기상황이 왔을 때 요나를 보니 자기들보다 더 착해요.
그러니까 여호와를 모르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교회 안 다니는 사람, 나도 착하지만 교회 다녀서 어려움이 있을 때 먼저 희생적으로 자진해서 제가 할게요, 라고 나설 때 ‘아, 저 사람은 교회 다니니까 우리보다 더 착하구나.’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바로 더 착하다는 것, 이게 바로 저주받아야 될 요소가 밝혀진 거예요.
여호와 믿는 사람과 나 사이에 어떤 연속성이 있고요. 나는 덜 착한데 그분은 더 착함으로 이어져 있다는 거예요. 여기는 어떤 단절 같은 것이 없어요. 한쪽은 무조건 저주고 한쪽은 무조건 영생이고 그게 없고 많이 악한 자는 지옥, 많이 착한 자는 영생, 이렇게 인간과 인간 사이에 부드럽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이런 발상이 유지되고 있는 겁니다.
여호와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좋은 분이니까 나는 못났고 죄인이고 따라서 이 죄는 착한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을 해주게 되면 우리는 구원 받는다,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전혀 복음이 아니에요. 이게 엉터리에요. 가짜에요. 악마가 이야기한 가짜 복음이에요.
제가 시내 나가서 컴퓨터용품 하나 사고 급행 1번 타고 돌아오는데 급행 1번 버스에 탄 6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어떤 아주머니가 전화를 하면서 다리를 이렇게 쑥 내밀었는데 그 발에 양말을 신지 않았어요. 양말 신지 않은 다리의 색깔을 보니 어디서 많이 본 색깔이에요. 그 색깔이 오래전에 장례식에서 본 시체의 색깔이었습니다.
그걸 보고 아, 인간은 시체구나. 색깔이 딱 그 색깔이었습니다. 이 이야기 듣고는 십자가 마을 사람들 양말 꼭 신겠네요. 아, 사람이 죽어가는 것이 아니고, 시체가 되어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시체였어요. 이미 시체이기 때문에 시체로 드러나는 겁니다. 시체로 죽음으로.
요나의 입장에서는 죽는 것을 겁낼 겨를이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마중을 나왔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이 마중 나온 입장에서 나는 어떻게 하면 살지, 라는 그런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같이 배를 탄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몰라요. 그래서 모든 본성 본능이 뭐냐 하면, 어떻게 하면 사느냐, 어떻게 하면 정상적인 내가 어떻게 이 난관에서 살아남아서 다시 나는 정상인 존재 맞다, 라고 우기면서 살아갈 수 있느냐. 관심이 거기에 있는 거예요.
요나는 알아요. 하나님 낯을 피했다는 것, 이것은 죄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것, 이것으로 죽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그래서 요나는 지금 죽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나름 어떤 정답을 발견했다는 그 기쁨이 거침없이 지금 죽어도 괜찮아, 로 나온 거예요.
그런데 여호와 모르는 사람들은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요나의 그 태도가 진짜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답고 참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요나는 본인을 훌륭하다고 생각을 안 해요. 시체이기 때문에 시체로 적절하게 활용당하는 순간이 왔다고 보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시체로 보는데 시체로 볼 때 두 종류로 나눠서 보는 거예요. 하나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되는 시체, 나, 또 하나는 시체이면서도 계속 시체 아니라고 환상으로 자기를 뒤집어씌우는 쪽이 있어요. 나는 살아 있다, 나는 분명히 살아 있어, 이렇게 뒤집어 씌우는 그런 쪽 그게 여호와를 모르는 쪽이에요.
어떤 분과 통화를 하면서 되게 마음에 걸리는 단어가 있었어요. “목사님,복음을 알고 이 자아가 기뻐해야 되는데 이 자아가 자꾸 복음을 알아도 괴롭고 힘듭니다. 이 자아를 어떻게 하면 복음의 기쁨으로 해방감을 느끼고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이렇게 전화를 해요.
그래서 야, 이걸 설명을 해드려야 되는데……. 그래서 제가 이야기한 것은 그거예요. 성경에서는 그걸 자아라고 하지 않고 그걸 육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이미 인간의 자아를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육이냐 아니면 영이냐, 그런 안목으로 보신다고요.
왜냐하면 이미 죽은 자는 육으로서 다룰 것이냐 영으로서 다룰 것이냐의 그런 안목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하나의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딱 두 종류밖에 없어요. 자신의 육체를 위하여 즉 육체를 살리기 위해서 한번 살아볼까 애쓰는 그런 종류와 주께서 일하시는 성령에 활용되는 사람, 하나님의 언약에 속한 사람이지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다뤄지는 사람, 그게 바로 영의 사람이에요. 그 사람들은 이미 영생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 육과 영 사이에 자아는 없어요. 자아는 철학자들이나 하라 그 말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정상으로 보게 되면 내가 보는 나 자신을 보고, 그다음에 하나님을 생각한다고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요나같은 입장에서는 날 보고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는 일의 연속성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바라봐요.
자기를 바라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요나 본인에게 준 그 사명을 요나는 도망치는 가운데 있는데 하나님 본인이 준 사명이기 때문에 요나가 도망쳐도 요나가 도망친 그 자리가 하나님의 사명이 함께 거기 존재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 사명이 있는 한 하나님이 그 사명 보고 안 따라올래야 안 따라올 수가 없는 겁니다. 제가 아침에 운동가는 데 그 가는 길에 날파리들 한 떼가 집결된 코스가 있어요. 그런데 거기를 통과해야 돼요. 알아요 날파리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다고요. 거기는 날 파리들의 자기 나와바리에요. 자기영역이거든요.
그런데 거기를 지나가니까 날파리들이 생각했던 모양이라. ‘이 이질적인 냄새는 뭐지? 이 촉감은?’ 이래 가지고 날파리들이 공격을 하는 겁니다. 그때는 더 빨리 걸어요. 그렇게 더 빨리 걸어도 날파리 한 7, 8마리가 계속 공격하는 거예요. 왜 우리 영역에 허락도 없이 들어왔느냐, 이런 식으로.
마침 그때 큰 차가 휙 지나갔어요. 차가 휙 지나가고 나니까 날파리들이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어요. 큰 덩치가 자기 영역을 덮치니까 ‘아, 이게 원래 우리 동네 아니구나’ 싶어서 가버렸다 그 말이지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요, 인간의 몸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무슨 아우라가 있느냐 하면, 나만의 영역이라는 날파리같은 영역이 있어요.
그래서 누가 오게 되면 킁킁 냄새부터 맡고요. 상대방에 대해서 탐지를 해요. 이 사람을 내가 가까이 해야 될 사람인지 멀리 해야 될 사람인지. 쓱 지나가도 대번 알아요. “낯선 여자에게서 내 남자의 향기가 난다” 해가면서 나오는 CF가 있어요.
사람들은 킁킁킁, 거리면서 이게 나하고 같이할 사람인지 아니해야 할 사람인지 본다는 말이지요. 왜 그러냐 하면, 본인이 정상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나도 착하지만 저 사람이 날 위해서 희생할 사람인지 아니면 나에게 손해 입힐 사람인지를 일평생 인간들은 그것만 킁킁킁, 스컹크도 아닌 게 그런 식으로 냄새 맡으면서 살아온 거예요. 자기가 정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요나가 탄 배에 난데없이 풍랑이 이니까 ‘요나가 뭐야? 정상인 내가 왜 고통을 당해야 돼? 이거 너무 억울한 것 아니야? 너무 억울하지’ 그런데 요나가 자진해서 손들고 나와서 “제가 하나님 선지자인데 하나님 버려서 생긴 일입니다. 따라서 내가 죽겠습니다.” 하니까 “아이고, 고마워라. 세상에 이렇게 훌륭할 데가!” 이렇게 된 거예요.
전혀 그 인간들은 요나를 보면서도 요나와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면서도 전혀 본인들이 달라질 줄을 몰라요. 어디에서 어떻게 달라질 줄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하나님은 정상적인 나 착한 나를 더욱 착하게 해줘야 그게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한다니까 “어찌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희생한 그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제가 믿겠나이다” 하고 나선 거예요. 그게 바로 여호와를 모르는 사람의 특징들이에요. 저주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가 육이라는 것, 육이 어떤 활동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서 희생 안 했다는 말인가? 여기서 오늘 제일 중요한 대목에 돌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희생할 때는요, 우리 좋아라고 희생한 것이 아니고 같이 죽자고 희생한 거예요.
예수님 혼자 죽는 희생은 없어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보면, 나와 그리스도가 함께 죽는 십자가에요. 그 십자가가. 괜찮은 나를 더 괜찮게 만드는 그런 십자가는 없어요. 그런 십자가는 이상하게 교회가 만든 엉터리 십자가에요. 그런 십자가는 성경에 없는 십자가입니다. 사람을 좋게 하는 십자가에요.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도 천당 간다고 사기 치는 십자가에요. 그래서 요나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요나를 일단 격리시킵니다. 요나를 격리시켜서 그다음에 요나와 여호와 하나님이 같이 죽는 십자가를 따로 요나에게 준 그 죽음 안에서 본격적으로 새로 시작해요. 저 사람들 모르게. 여호와의 하나님의 희생이라는 게 뭔지를 같이 배를 탔던 사람들에게는 전혀 알지 못하게 만들어 버려요.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너희들은 자신의 육체를 자랑한다 해놓고 14절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건 뭐냐 하면, ‘아, 내가 너무 죄가 많아. 이런 식으로 죄가 많아서 천국 갈 수 없어.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날 위해서 속죄 좀 해주면 참 좋겠는데, 참 좋겠는데. 그러면 나는 속죄한 하나님을 위해서 몸 바쳐 헌신하겠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십자가, 십자가 너무 좋아. 나 십자가 믿습니다.’
지금 이게 아니라 이미 십자가가 사도바울을 삼켜 버렸어요. 삼켰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위한 십자가는 없어요. 주님을 위한 십자가에 자기가 함몰되어 버린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세상과 격리된 것이 아니고 사도 본인도 세상과 격리되어 버린 거예요. 어디 안에 들어와 버린 거예요. ‘어디 안에서.’
전에는 성경을 볼 때 어항 금붕어 구경하듯이 금붕어 잘 노네, 이런 식으로 관찰자 입장에 있다가 주님께서 마술지팡이로 뾰르릉, 해가지고 그 인간을 아예 물고기로 만들어서 아예 어항 속에 퐁당 집어넣은 거예요. 외부에서 어항 속을 구경만 하는 나를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아예 축약시켜 놓았어요.
축약, 작게 했다 하는데 진짜로 하면 이게 뭐냐 하면, 죽여버린 거예요. 요나가 이건 알아요. 내가 죄지었으니 죽는다는 것은 아는데 그 죽음은 1단계 죽음이고 아직 다음 단계가 남아 있어요. 1단계 죽음 가지고는 안돼요. ‘그래, 나 죄지었으니 내가 죽을게.’ 지금 이것은 오기에요. 객기라니까요. ‘나 하나 칵 죽으면 그만이지.’ ‘지금 너 나에게 개기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주님께서 요나로 하여금 진짜 죽음, 그러니까 저주받는 죽음, 저주를 죽게 하고 저주를 죽게 하는 그 작업이 바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느껴지는 생명의 작업이었습니다. 생명이 온다는 것은 생명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생명 자체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그전까지는 내가 주인공이었는데 주인공이 생명으로 바뀐 것을 의미합니다. 생명이 주인으로 바뀐 거예요. 전에는 내가 주인이고 이 주인에게 생명 하나 주소, 했는데 그게 아니고 생명 얻을 필요가 없어요. 이제는 주님이 생명이 되는 거예요.
주님이 생명이 되어버리면 예수님이 이 세상을 보는 관점을 같이 공유하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의사들이 MRI 사진을 펴놓거든요. 의사들이 환자 앉혀 놓고 이야기할 때 환자들을 가장 약 올리는 순간이 그 순간이에요. “여기 화면 보세요. 잘 보이시지요? 지금 환자분 위가 사진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밝은 면과 어두운 면 외에 아무것도 없어요. 해독이 안 됩니다. 해독이 안 된다고요.
여호와 하나님께 삼킴을 당해야 세상 해독이, 여호와 하나님이 보는 것처럼 해독이 돼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정상이기 때문에 자기가 해석하고 자기가 해독해서 나한테 유리한 것 성경 중에서 괜찮은 것 그것을 뽑아내서, 그것을 내 것으로 삼아서, 이걸 무기로 해서 천국을 쳐들어가 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 중이에요. 교회에서 하는 일들이.
여호와, 여호와, 주여, 주여, 뭐 아주 만발해요. 주여 믿습니다, 쭈여, 쭈여, 만발하는데 성경 보면 해독이 안 돼요. 전혀 해석이 안 된다고요.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 해석을 해요. 세상 사람들 그러니까 저주받고 영생 없는 자들의 해석을 제가 해보겠습니다. 제가 한다기보다는 그게 본문 14절에 나오는 해석이니까요. 아주 편해요. 이렇게 합니다.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주님의 주권까지 언급하지요. 그다음 15, 16절에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이 사람들이 여호와 믿은 거예요? “휴~, 아이고, 큰일 날 뻔 했네. 아이고, 요나 그 사람 참 고맙네. 그 사람 희생 아니었으면 우리 죽을 뻔 했다.” 여러분, 되게 신앙 좋아 보이십니까? 이거 불신자에요. 이게 왜 불신자냐 하면, 육은요 자기의 결핍되고 모자란 것에다 그걸 뭘 로 채우냐 하면, 그걸 환상으로 채워요.
그 환상은 어디서 유입되는가? 하나님으로부터, 신으로부터 유입돼요. 내가 모자란 것, 나의 어설픈 것 하나님이 채워주시겠지, 이런 거예요. 그래서 내가 온전해지겠지, 이렇게 버티고 나가는 겁니다. 결국 노리는게 뭡니까? 이러나저러나 살면 그만 아니냐, 지금 살겠다는 거예요.
양말 신은 그 발은 지금 시체인데. 점점 더 시체 색깔 되어가는 그것은 어찌하려고요? 양말 두겹 신을까요? 여호와의 눈으로 보면 이미 인간은 시체에요. 이미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인데……, 다시 이야기할게요. 죽은 자인데 이걸 육으로 다룰까, 영으로 다룰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 맘대로예요. 그게 요나거든요.
자기가 죽은 것도 모르고 살아 있다 여기는 것은 환상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죽은 자인데 자꾸 살아 있다는 것은 환상이에요. 환상, 환상, 환상, 꿈꾸다가 나중에는 헉, 하고 죽어버리지요. 그러면 뭐예요? 죽음이 실제지 환상은 아니거든요. 이미 죽었다는 이게 실제상황이에요. 이것은 환상 아닙니다.
환상은 죽었는데 살았다고 우기는 게 환상이에요. 이 해석을 이 해독을 여러분은 아시겠지요. 여러분은 아실 거예요. 아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자꾸 살아 있으니까 슬픔은 멀리하고 기쁨은 가까이하려고 애를 쓰거든요. 살아 있을 때 자기가 정상이니까 정상인은 복을 받는 게 당연하고 복 받으면 나에게 기쁨이 된다. 왜? 내가 원하니까, 내가 생명을 원하니까.
그러다 보니까 이런 경우도 있어요. 김 재덕이라고 열일곱 살 먹은 애가 있는데 양궁에서 2관왕, 그 김재덕이 어릴 때부터 대단한 집념을 가진 아이였다는 겁니다. 참, 휴대폰 도둑질하는 사람도 어릴 때부터 대단한 집념을 가진 사람이에요. 금메달 두 개 따니까 이걸 이렇게 기쁨으로 묘사하는 그것이 인간들이 기껏 해내는 해석이에요.
사람들은 내가 옳고 정상이고 내가 죽지 않고 엄연히 잘난 채로 살아 있어, 라는 그 환상을 그걸 증명하고 싶어해요. 그걸 증명하고 싶은 그 엉터리 해석과 해독이 계속해서 우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거예요. ‘뭐든지 나는 잘났다. 나는 더 살아야 돼. 더 살아서 국가와 인류에 교회에 큰 보탬이 돼야 해.’
진짜 이건 배를 타서 그 배가 한번 뒤집혀 봐야 아, 요나를 만나봐야 정말 우리는 여호와를 이용할 사람이지 여호와를 우리는 알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고 우리는 내 위주지 여호와 위주가 아니라는 것을 요나를 만나봐야, 또 십자가를 우리가 만나봐야 들통나요.
그리고 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왜 슬픈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왜 빗나가야 되는데요, 슬픈 예감은? 참, 지금 이 요나를 보면서 사람들이……,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람들이 요나를 보면서 자꾸 요나를 격려하고 요나 편이 되어서 ‘요나 좀 살려주지. 드라마에서 주인공 죽으면 안 되는데 요나 좀 살려주시지.’
요나 2장을 모르는 사람들, 피노키오 뒷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 요나 2장을 모르고 1장만 본 사람들 같으면요. 요나가 성경의 이름은 <요나서> 그 요나인데 1장에서 이미 주인공이 물에 빠져서 죽어버려요. 감정이입이 되어서 자기가 요나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가, 내가 요나라면, 하나님이 너무 하시다. 요나 죄지은 것 스스로 회개해서 죽겠다고까지 한다면 하나님께서 “아이고, 네 죄를 아는구나. 네가 한 것 감안해서 내가 바다를 그만 잔잔하게 해줄게. 혼났지? 앞으로 까불지 마.” 하면 “예, 앞으로 안 까불겠습니다.” “그냥 네 할 일 하고 볼일 봐라.” 이렇게 끝나면 얼마나 좋아요. 그렇지 않고 오늘 본문에 보면 요나를 집어던져 버립니다.
집어 던질 때 그 사람들이 얼마나 미안했는지요. 미안하니까 요나의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한 겁니다. 뭐라고 서원했겠어요? ‘혹시 신에게 나쁜 짓을 했으면 제가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이런 식이에요. 인간은 신에게 나쁜 짓을 한 게 아니고요. 인간은 시체라니까요. 참, 정말……, 오늘 본문은 사람이 시체가 돼야 여호와를 알아요. 내가 시체가 돼야. 죽음의 깊이에 따라서 여호와의 깊이가 달라지는 겁니다.
세상은 우리보고 말합니다. “좀 더 잘하지.” 아니에요. 하나님은 이렇게 합니다. “시체는 시체다워라.” 뭘 좀 더 잘해요? 뭘? 십자가 안에 들어간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주님의 십자가잖아요. 그러면 주님께서 살아오면서 주님께서 내뱉으신 여러 가지 말씀의 성취들이 있어요.
그러면 십자가 안에 들어온 사도바울이나 오늘날 우리들 성도 같으면 살아가면서 말씀들이 일어나요. ‘아, 이 말씀, 이 말씀, 우리는 못 지켰는데 주님이 지켰구나.’ 그러면 그다음 날 또 어떤 일이 벌어지면 ‘아, 이 말씀, 이 말씀은 우리는 못 지켰는데 주님은 지켰구나.’
그래서 이미 시체가 된 사람은 모든 일에 오직 감사와 감사밖에 없어요. 왜? 이미 살았으니까, 이미 생명 일을 하고 있으니까, 불합격이 아니고 이미 합격했으니까 더 이상 자기를 살릴 이유가 없잖아요.
다만 어떤 일을 하느냐 하면, ‘아, 사태가 이렇기 때문에, 실상이 이렇기 때문에 주께서 너 대신 죽으셨구나.’ 그걸 날마다 매일 삶 속에서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오직 살려주신 주님께 고마운 것, 그 외에 나올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해독 그 해석만이 세상을 제대로 보는 사람들의 해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봤습니다. 남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그걸로 위로한답시고 그런 식으로 살아왔었습니다. 극히 나쁜 짓은 안 했잖아, 기껏 이것이 우리의 변명이었습니다. 주여 저희들 아브라함 되게 해주시고, 요나 되게 해주시고, 사도바울 되게 하셔서 이미 합격한 자의 여유와, 그리고 주님에 대한 감사와, 세상이 왜 여호와를 버리는지, 복음을 버리는지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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