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아기예수님과 선지자 210620 본문
아기예수님과 선지자 210620
설교:이근호
녹취:정인순
예수님께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태어난 거지요. 사람들만 사는 세상에 하나님이 끼어든 거예요. 이제는 인간 세계의 위기입니다. 인간 세계는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런 존재들이 아닌데 하나님이 끼어들었으니까 이제는 하늘에서 하나님을 찾는 그 자체가 의미 없어요. 무의미하게 된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들끼리 의논하고 인간들끼리 상의하는 것을 그냥 가만 두질 않습니다. 일일이 다 간섭을 해요. “너희들 인간들 사람들끼리 하는 것은 옳아 보이지?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하늘에서 보면 그게 엉터리야.”라고 계속 지적질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태어났다는 말은 인간 세계는 구약에서 보면 이걸 가지고 ‘끝났다’ 그걸 두 자로 ‘종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심판주가 심판을 하시면서 심판 받는 이유를 자꾸만 내놓는 일들이 시작되는 겁니다. 이래서 너희는 태어나도 죽는 거야. 이래서 너희는 멸망당하는 거야. 이래서 너희는 지옥에 들어갈 자들이 너희야.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너희들 자체적으로는 아무도 없어. 이것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저주 받는다는 말 자체도 의미가 없어요. 태어나면서 이미 그 자체가 저주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저주받는다는 말은 저주 안 받고 다른 경우가 있을 때는 “나는 저주 안 받고 구원 받을래.”가 되겠지만 아예 인간 자체에서는 주님은 심판주로 오셨기 때문에 구원 자체가 없기 때문에 저주 자체도 그냥 그 자체가 이미 저주가 되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저주라는 말을 언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먼저 예수님께서 오게 하신 그 노선이 있어요. 그게 뭐냐? 약속 노선입니다. 지금부터 어려운데. 구약 성경에서부터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계속해서 집어넣어준 게 있어요. 그게 약속이라는 거예요. 약속. 약속 그게 있는데 약속은 누가 지키느냐? 구약에 보면 약속은 하나님이 지키게 되어있어요.
문제 출제자가 문제를 풀 수 있지 다른 사람은 풀지를 못 합니다. 1번 2번 3번 4번 그 중에 몇 번이야? 이런 것은 어쩌다 보면 출제자가 4번 같으면 본인도 4번 맞출 수 있겠지만 제일 난감한 게 그런 객관식 문제가 아니고 주관식 문제, 니가 코스모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렇게 하면 실컷 코스모스는 아름답고 청초하고 가을에 피고 입새가 몇 개고 코스모스가 어떻게 생장하고 나중에 어떻게 번식하고 하면, 나중에 코스모스를 만든 당사자가 와가지고 니가 코스모스를 알아? 니가 지금 내가 묻는 것은 니가 얼마나 무식하고 코스모스도 모르는 게 니가 밥 먹고 살 잽이나 돼? 그걸 지적하려고 하는 거야. 니가 살 가치가 없다는, 있는지 없는지 그것도 분간도 못 하면서 니가 아침에 밥을 먹다니, 그것도 두 그릇 먹다니. 니가 청소해서 두 그릇 먹었지? 크려고. “등치 커서 뭐할 건데?” “커서 취직해요.” “취직해서 뭐 할 건데?” “아파트!” “아파트 사서 뭐 할 건데?” “늙어죽어요.” “그래 늙어 죽어. 늙어 죽을 걸 뭐 하려고 니가 그렇게 공부를 했나?”
주께서 이 땅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뛰어 들어왔다는 말은 인간들은 그동안 인간과 인간끼리 상대했다가 그것이 아무 짝도 소용없다는 것을 완전히 주님이 까발리는 거예요. 인간과 인간이 상대하는 법이 생기고 그 법으로서는 니는 못나고 나는 잘났다, 그런 식으로 움직이잖아요. 그게 전부 다 소용없는 거예요.
그래서 아기 예수가 태어났다는 것은 그 다음부터는 분란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분란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이 땅에서 혼란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만약에 여러분 마음속에 주님이 들어오시면 그 다음부터는 여러분 마음속에 혼란이 일어나는 겁니다. 나의 잘남과 나의 의로움 같은 것은 이런 것은 주께서 가만두지 않습니다.
절대로 우리의 잘남과 나의 선택은 옳았다를 용납하지 않아요. 나의 결정은 괜찮은 결정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 없이도 예수 없이는 교회 다녀도 예수 있으면 더는 교회 못 다닐 정도예요.
그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 땅에서 추방된 것처럼 우리는 어떤 조직에서도 어떤 환경 속에서도 추방될 수밖에 없는 이질적인 요소가 들어와 버리면 세상 자체를 교회 다니고 안 다니고 그건 아무 문제도 아니에요. “지구를 떠나거라.” 해가지고 세상을 떠나는 그런 쪽으로 주께서 이끌어내십니다.
“아기 예수님은 뭘 했는데?”라고 하는데 아기 예수 있으면 그 근처에 자장이 퍼져요. 자석의 장이 형성된다는 거예요. 아기 예수는 그냥 누워있지요. 누워 있으면 오줌 싸고 똥 싸고 그냥 누워있지요. 아기 예수 한 번 보여드릴까요? 여기 아기 예수가 아무것도 안 해요. 아무것도 안 하는데 주변에 약속의 장이 형성되어있습니다.
아까 이야기했지만 약속은 약속하신 하나님이 이루어나가는 거예요. 따라서 약속의 영을 받은 사람, 약속이 믿어지는 아기 예수 주변 사람들이 아기 예수가 크면서 같이 동반해서 그런 사람둘이 하나 둘씩 출몰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옛날 이야기 보면 그런 이야기도 있어요. 괜히 삿갓 쓰고 도사가 지 갈길 가면 되는데 괜히 안 가고 어느 집 문 앞에서 갑자기 발길을 멈추지요. “이 집에 기운이 인다.” 해가지고. “아이고. 스님께서 왜 우리 집에 서십니까?” “혹시 이 집에 아기 하나 태어났어요?” “어떻게 맞췄어요?” “나중에 이 나라의 위대한 영웅이 되는 겁니다. 나무아미타불 툭툭툭.” 밥 달라는 이야기지요. 삿갓 푹 눌러쓰고 도인이 왔다 가는 거예요.
이건 인간 세계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지만 아기 예수가 있는 거기에 파장이 퍼지듯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기 예수에 이끌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끌렸으면 아기 참 잘 생겼다. 튼튼하다. 훌륭하게 되겠다, 그런 이야기 하는 게 아니에요.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하나는 시므온과 또 하나는 안나라는 사람이 있는데 둘 다 선지자예요.
안나는 여자 선지자, 시므온은 남자 선지자인데 선지자가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딱 보는 순간, 부모 말고 마리아 요셉 말고, 딱 보는 순간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저 아기 예수로 인하여 세상이 두 조각난다고 하는 거예요. 한 쪽은 승하고 한 쪽은 패배가 되고, 한 쪽은 패해지고 저주받고 한 쪽은 복 받고. 그것을 할 위인이 바로 아기 예수님이다. 딱 지적하면서 “이제 나는 선지자로서의 내 역할은 이제 여기서 끝났습니다. 내가 이때를 위하여 지금 아기 예수를 만나려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선지자 되는 하나님의 영을 주셨습니다.” 하고 아기 예수를 안고 축복을 해줬습니다. 본인이 시므온이라는 본인이 이렇게 해요. “이제 나는 내 마음을 아기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이제는 편히 쉬게 되겠다.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도 되겠네.”라는 생각을 했어요.
이걸 보면 이 선지자가 오늘날 성도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요. 왜냐하면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성도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성도 이 선지자 이 사람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아기 예수의 존재가 나의 존재보다 더 선행된다는 것. 선행이라는 말 알아요? 먼저 성립이 되고 나는 그 후발 조치로 아기 예수의 예수됨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는 연계되어서 연결되어서 나는 이 땅에 출현했다는 고백을 해요. 그러니까 단독적으로 나는 나를 살지 않는다는 그런 공통적인 고백을 내어놓습니다. 그게 바로 성령이 임한 사람들의 공통점이에요. 성령이 임한 사람은 다 그렇습니다.
만약에 제가 어떤 유통업에 관여했는데 그래서 내가 수 조 원 되는 유통업 회사에 내가 회장님인데 그 유통업 회사가 며칠 전에 불이 나서 홀라당 다 탔어요. 그런데 회장님인 내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종을 편안하게 놓아주는군요.” 왜냐하면 나는 내가 세운 회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아기 예수님, 오늘 본문대로 하면 아기 예수님이 존재한다면 그걸로 이미 내 마음의 평안은 끝났어요. 나는 정리할 거 깔끔하게 정리 다 해놨어요. 유통회사가 불이 나든 안 나든 소방관이 한 명 죽든 말든, 그건 좀 안 되었지만 어쨌든 내 마음에 안정과는 요동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거예요. 연결되어 있으니까.
옛날에 국민 학교 때 공작 시간에 만드는 것 중에 전화기 해본 적 있어요? 무선 전화기 유선 전화기 실로 해가지고 여기서 이야기하고 실 타고 해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 주님하고 서로 통하고 있는 사이에서 아기 예수가 왔다는 것은 세상을 둘로 쪼개는 것이거든요. 천국 갈 사람, 지옥 갈 사람. 그 일을 하실 분이 하신다는 것을 여기에서 반긴다는 말은 그 약속이 약속대로 주께서 빈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그대로 실현되었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터무니없을 정도로 놀라운 기적이냐 말이에요. 이게 얼마나 큰 기적입니까? 집에 불 난 건 아무것도 기적도 아니지요. 진짜 기적은 뭐냐? 내 것이 다 무너져도 괜찮은 이유는 더 큰 기적이 현실로 그대로 주어졌기 때문에 그것과 연계되어있는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할 필요가 없지요.
그 다음에 여기 안나라는 분이 계신데 안나라는 이 분은 과부 된 지 84년. 과부된 지 84년이니까 최소한 나이 잡아도 백 살이에요. 다시 말해서 오래 산 게 아니고 안 죽은 거예요. 사신 게 아니고 계속해서 꾸역꾸역 버티고 있는 겁니다. 누가 올 때까지? 아기 예수 올 때까지. 그건 그 여자가 안나라는 여자가 산 게 아니고 그 안에 약속이 살아있는 거예요. 약속이 뭐와 매치할 때까지? 아기 예수 오신다는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것, 지옥 갈 자는 지옥 보내고 천국 갈 자는 천국 보내는 그 일을 할 당사자 책임자 담당자가 오셨다는 그것과 연계되기 위해서 안나라는 이 선지자는 그 때까지 살아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왜 아직까지 지금까지 18라는 긴긴 세월을 왜 살아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다 종결시키는 종결자인 것을 증거하라고 살아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존재 자체가 주님의 존재를 보여주는 증거가 되게 하옵소서.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예수님 바라보면서 다 이루었다 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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