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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레위기 27:32 / 십일조세계 / 210507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레위기

레위기 27:32 / 십일조세계 / 210507

정인순 2021. 5. 8. 08:57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녹취:한윤범

20210507a 울산강의-레위기 27장 : 십일조세계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레위기 27장 계속하고 오늘 레위기 27장 전체를 마감하겠습니다.

레위기 27장에서 유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두 가지를 유의해서 보면 돼요. 첫째는 인간은 더럽다. 이게 기존 취지에요. 레위기 전체도 그렇지만. 인간이 더럽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시간상 희년을 통해서 인간은 더럽다. 그리고 십일조를 통해서 인간은 더럽다고 하나님께선 증명해줍니다.

인간은 더럽다 할 때 희년과 십일조를 통해서 더럽다하는 이 기준에 가는 과정 속에서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제사장이 등장해요. 제사장은 안 더럽다. 그렇다면 십일조, 희년과 제사장이 어떤 관계냐 하면 십일조는 전체가 아니고 십분의 일이잖아요. 전체 중에서 십분의 일은 딱 떼어서 그것은 더럽다. 십분의 일이 더럽다면 나머지 전체도 더럽겠지요.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시간은 다 더럽다. 그러나 희년을 하나님께서 더러움의 표준으로 사용한다면 이 더러운 인간이 안 더러운 제사장처럼 되려면 여기서 십일조나 희년 속에 제사장의 취지가 여기에 포함이 되게 돼있습니다. 더러운 인간이 제사장을 또는 레위지파 또는 레위제사장을 경유하게 되면 더러운 것이 안 더러운 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어느 지파냐 하면 레위지파겠지요. 자, 레위지파 제사장, 그들은 어디서 일하는 사람들입니까? 그 사람들 업무가 뭐예요, 역할이? 하나님의 성전 또는 성막에서 제사 드리면서 일하지요. 이 사람들 레위지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 땅이 없어요. 자기 땅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레위지파에 땅을 준 적이 없어요. 그러면 이 땅,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영토가 되겠지요. 삶의 땅, 삶의 영토가 이들에겐 없어요.

그러면 여기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인간이 더러운 이유는 바로 땅이 영토가 있기 때문에 더러운 거예요. 왜? 표준은 두 번째 이야기한 것은, 레위지파가 표준이다 또는 기준이다. 이 두 가지, 인간은 더럽다. 레위지파는 더럽지 않는 자의 표준이다. 이것이 레위기를 끝내면서 결론적으로 주어진 내용이 이 내용이에요. 레위지파는 더럽지 않은 자의 표준이다.

그런데 기준인데 레위지파가 뭐가 없다 했습니까? 땅이 없으니까 땅이 있고 영토가 있는 자는 무조건 더러운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땅과 영토를 가졌다는 말은, 인간의 소유가 발생되거든요. 여기서 여기까지는 경계가 있어서 이것은 내 땅이다, 소유가 발생된다고요. 소유가 있으면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건방짐이 돼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저주, 심판 또는 영원한 형벌은 인간의 건방짐에 대한 대가 또는 처벌입니다. 자, 인간이 건방지다는 말은 내 자신의 가치로 버티겠다는 뜻이에요. 지금의 나의 가치로서. 그게 건방짐이에요.

언젠가 제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이 사는 것이 기분 따라 산다고. 무섭다, 기쁘다, 즐겁다. 기분 따라 살아요. 기분 좋으면 헤헤거리고 기분 나쁘면 슬프고. 일이 안 되면 불안하고 짜증내고 일 잘 되면 신나고. 그런데 여러분들의 레위기를 보세요. 레위기에 나오는 내용이 인간의 기분 따라 썼습니까? 인간의 기분을 고려해줍니까? 안 하잖아요.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인간들의 일상은 기분에 좌우되어 살아가요.

그런데 레위기는 인간의 기분 따로 주어진 계시가 아닙니다. 진리기 때문에. 그렇다면 인간의 기분 따라 산다는 그 이유가 인간에겐 뭐가 있느냐? 자기 소유가 있어요. 소유가 흠집이 나면 기분 나쁘고 소유가 증가하면 기분 좋잖아요. 그걸 제가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요것, 그게 뭡니까? 건방짐. 앞에 ‘시’ 자 하나 붙일까요? 뭡니까? 시건방짐. 지옥은 인간의 시건방짐의 대가입니다. 처벌입니다.

인간이 기분 따라 살고 소유가 있다고 시건방진 것은 근본적으로 1번 원칙을 몰랐어요. 1번 원칙이 뭡니까? 인간은 더럽다. 더러운 것을 십분의 일로 표본 조사하는 거예요. 딱 떼는 거예요. 그럼 십분의 일이 되겠지요. 인간의 많은 시간 가운데서 50년째 오는 시간, 희년을 딱 떼는 겁니다.

그 희년, 십일조 그 내용은 더러운 인간이 첫째는, 자기가 더러운 걸 알아야 되고 두 번째는, 더럽지 않은 자의 표준이 무엇인가를 십일조와 희년을 통해서 그들은 접해야 되는 겁니다. 아아, 희년의 완성이 더럽지 않은 것이고 십일조의 완성이 더럽지 않은 거구나. 그렇다면 희년과 십일조 갖고 있는 본내용은 뭐가 되느냐 하면 내 땅은 없다. 내 소유는 없는 거예요.

사람이 웃고 마시고 즐겁게 떠드는 것은 지 소유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내 것, 가진 게 있어요. 따라서 거기에 정신 팔려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뭐냐는 정신이 없고 말씀이 어떻게 우리한테 무슨 이야기하는지에 정신이 없고 지금 나의 가진 것 어떻게 관리하고 키우느냐, 거기에 온통 다 빠져있습니다.

그런데 이 레위지파와 제사장이 하는 일이 뭐라 했습니까? 무엇과 관련돼있다 했어요? 성전과 제사 드리는 일과 관련돼있지요. 성막과 성전, 제사라는 죽음과 관련돼있지요. 더러운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더럽지 않은 자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무엇이 개입되느냐 하면 더럽지 않은 정결한 짐승의 목숨이 거기에 개입되는 거예요. 이것이 시건방지지 않은 유일한 거예요.

나는 이만큼 가졌습니다. 그건 더러운 거고요. 누군가 나 때문에 이렇게 고귀한 목숨과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하는 것이 있을 때만 더럽지 않아요. 관심사가 내가 얼마나 소유하느냐, 가지느냐가 아니라 누가 나로 인하여 희생했느냐 거기에 관심을 둬야 돼요. 가진 것으로 기분 좋고, 그런 것으로 따질 수가 없어요. 이 시대가.

지금 이 철에 시골에 나가면 개구리 울지요. 개구리 울 때 귀 막는다고 개구리 안 웁니까? “개구리야 나 귀 막았다. 너 백날 울어도 나한테는 안 우는 거야.” 이렇게 하게 되면 개구리가 안 울은 겁니까? 귀를 막던 우리가 내 기분에 살던 내 소유의 넉넉함에 도취돼있던 미쳐버렸던 간에 개구리는 우는 것이 사실입니다.

누가 뭐래도 코가 얼굴에 붙어있는 게 맞지요. 꼭 만져봐야 되겠습니까? 코가 얼굴에 붙어있는 것이 너무나 명백한 사실인 것처럼 레위기 이야기가 코처럼 너무나 명백해요. 인간의 정신이 어디에 팔렸는지 전혀 그런 것 하나님이 고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세우는 것은 이거에요. 더러운 것이 어떻게 깨끗하게 되고 그 깨끗함의 모델은 레위지파란 뜻이에요.

그 레위지파의 특징은 뭐라 했습니까? 땅이 없어요. 옛날 농경시대에 땅이 없으면 이건 소유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기업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소유가 되는가? 바로 희년이 소유가 되고 십일조가 소유가 되는 겁니다. 그게 자기의 유일한 소유에요. 그래서 십일조는 누구한테 내느냐 하면 레위 인들에게 제사장에게 주는 거예요.

레위 인들은 제사장으로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고 십일조 받아서 먹고사는 게 아니라 십일조가 유일한 인간의 영토, 이스라엘 택한 백성의 유일한 영토가 바로 십일조고 희년이라는 것. 시간적으로 희년이 유일한 영토고 하나님께서 유일한 영토를 영토답게 유지하기 위해서 땅은 표본조사가 되는 거예요. 그게 표본조사 된 게 뭐라 했습니까? 십일조라 했지요. 전체 다를 조사하는 게 아니고 십분의 일을 떼서 조사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만약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과 자기 아들인지 아닌지를 검사한다고 합시다. 검사는 여러분들이 익숙해서 잘 알 것입니다. 이걸 친자 확인이죠. DNA조사하는 거예요. 친자 확인하는 거예요. 내 아들이냐, 아니냐를 조사하는 거예요. 진짜 나와 더불어 살 수 있는 그러한 더럽지 않은 아들인지 안 그러면 더러운 아들인지 하나님이 친자 조사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십분의 일이에요.

레위기 27장 전체를 보게 되면 레위지파가 표준이니까, 제가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 레위지파가 표준이에요. 그래서 성막 일, 제사 일, 죄를 용서하는 장치에 관해서는 열세 지파 가운데서 오직 레위지파만 일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일하지 못해요. 그런데 일하고 싶다 할 때 그때는 바로 27장 초반부터 쭉 나오잖아요. 정한 값은 “이십세로 육십세까지는 남자이면 성소의 세겔대로 은 오십 세겔로 하고”(3절) 한 세겔은 요새로 하면 이십팔 만원이고, 그렇게 돼있지요.

어떤 사람이 하느냐 하면 자기가 레위지파도 아닌데 굳이 하나님 일을 하고 싶습니다. 할 때는 레위지파에 해당되는 레위지파의 위상을 돈으로 환산해서 내야 되는 거예요. 일하는데 그냥 일하지 말고 성전세 바쳐서 일하는 거예요. 누구든지 레위지파처럼 일할 수 있는 기회는 주되 돈을 바쳐야 돼요. 그 돈이 뭐냐 하면 바로 십분의 일입니다.

레위지파는 모든 지파로부터 십분의 일을 받지요. 그리고 어떤 사람이 레위지파도 아니지만 성막 일을 하겠다면 십분의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십분의 일+십분의 일은 몇 분의 몇입니까? 오분의 일이에요. 그래서 오분의 일이 나온 거예요, 여기서. 십분의 일이 레위지파와 관계 맺는 경로가 되는 겁니다. 돈으로 환산된 경로에요. 절차에요. 일반사람과 레위지파 사이에는 십분의 일이라는 관계로 엮여져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하겠다고 하다가 안 하겠다고 한다면 오분의 일을 내야 돼요. 주고 할 때 십분의 일, 무를 때 십분의 일. 무른다는 말이 많이 나오잖아요. 레위기 27장. 무를 때 십분의 일, 합치면 오분의 일이에요. 이게 그 뒤에 있는 27장에 나오는 여러 가지 소나 양이나 토지 전부 다 모든 것에 오분의 일이 다 개입돼요. 가고 올 때 갈 때 십분의 일, 올 때 뺄 때 방 뺄 때 십분의 일.

결국 레위지파는 바로 이스라엘 전체의 십분의 일에 해당되는 모델케이스가 된다. 그리고 그들에게 특징은 인간들의 그렇게 애지중지하면서 못 버리고 있는 그 소유에 대해서 레위지파는 없다는 겁니다. 이 땅에 자기가 자기를 살릴 수 있는 영토나 소유가 있는 것이 표준모델이 아니고 아예 영토가 없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요. 없을 때 이렇게 없어야 돼요.

“그까짓 것 없어도 돼.” 이렇게 돼야 돼요. “내가 원하는 것은 주님의 죄 용서야. 그 외에는 없어도 돼.” 이게 레위지파에요. 그게 표준이에요. 레위지파가 이스라엘의 표준입니다. 친자 확인검사하면 레위지파 나와요. 하나님의 아버지와 그 아들 이스라엘의 관계, 친자 확인. 희년과 십일조가 DNA에요. 친자 확인할 수 있는 DNA입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죠.

그래서 신약의 십일조는 액수가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십일조가 되는 겁니다. 히브리서 7장에 의해서. 그리고 신약에서 희년은 예수님 자신이 희년이 되는 거예요. 희년과 십일조, 이 두 가지는 더러운 것을 빨아 당겨서 정화시키는 기능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시키느냐? 이렇게 적용됩니다. 크게 쓰겠습니다.

“파괴되지 않으려고 하니 망한다.” 파괴되지 않으려고 하니 망하는 거예요. 안 망하려고 하니까 망해버리는 겁니다. 자, 망한다는 말은 뭐가 없어집니까? 인간의 모든 기분 좋다, 나쁘다, 슬프다, 모든 기분은 어디에 근거가 있지요, 토대가 있지요? 소유에 있지요. 기분 좋다는 말은 덜 망하게 됐다면 기분 좋고, 망할 낌새가 있으면 기분 더러운 거예요, 기분 나쁜 거예요.

인간은 어떻게 살아간다 했습니까? 기분 따라 살지요. 남의 애가 술 먹고 한강에 빠져죽은 것, 우리한테는 와 닿지 않아요. 남의 애니까. 그런데 우리 애가 술은 안 먹었지만 일을 해서 손가락 끝에 약간 베었어요. 장미꽃가지에. 울산에 있는 엄마는 가서 빨리 호호해주고 싶어. 왜 남의 자식은 한강에 빠져죽어도 멀쩡한데 내 손가락에 장미꽃가시로 아파서 가슴이 갑자기 기분이 다운되는 이유가 뭡니까? 자식이 내 소유기 때문에. 자식이 죄 사함 받는지 관심도 없고 무조건 그거는 내 소유가 되는 거예요. 내 존재의 이유, 보람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평생 계속 그런 식으로 지속되지요. 그게 뭡니까? 어떻게 하든지 파괴되지 않으려고 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든지 깨지지 않으려 하고 망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안 망하니까 어떻게 망하느냐 하면, 이게 자꾸 안 망하려고 버티니까 앞에, 망해도 그냥 망하는 게 아니고 영원히 망한다. 이게 뭐예요? 이게 바로 지옥입니다. 레위기는 지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레위기뿐만 아니고 모든 성경이 다 그렇지만.

망해버려라. 왜요? 더럽잖아. 굳이 무슨 다른 이유가, 구차하게 긴 사설이 붙을 이유가 없어요. 더러우니까 지옥 가야지. 저 깨끗한데요? 이 시건방진 것. 네가 지금 소유를 가졌으니까 건방을 떨지. 그게 욥기 1장에 나옵니다. 마귀가 보통 마귀가 아니에요. 아주 간교하고 뱀처럼 지혜롭다 했잖아요. 마귀가 지혜로운 자에요.

어떻게 지혜로우냐 하면 인간은 자기를 모르되 자기는 인간을 안다는 거예요. 어떻게 인간을 아느냐? 인간은 먹여주면 하나님 좋다고 믿고 뺏어 가면 하나님이든 누가 되든 다 불평하고 대들고 원망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나 마귀가 세상을 두루 다니면서 이미 다 파악했습니다. 이게 마귀의 자신감입니다. 건강이든 재산이든 뺏어 가면 화나는 게 인간이다.

누가 그 인간을 변질시켜놨어요? 처음부터 인간은 안 그랬어요. 누가 변질했습니까? 창세기 3장에 악마가 그렇게 변질시켰지요. 그런데 제가 방금 변질이란 말을 썼어요. 원래 질이 있는데 그 원래 하나님이 원하는 질이 아니고 완전히 더럽게 아주 나쁘게 바뀌어졌다는 거예요. 밥이 쉬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못 먹을 밥이 됐다 이 말이거든요. “너나 먹어라. 난 안 먹을래.” 지금 하나님에 내침을 당할 대상이 된 거예요. 변질.

자, 변질이란 말을 하니까 사람들이 의아해하죠. “으잉, 나 변질된 적 없는데?” 태어날 때부터 변질되었어. 태어날 때부터 더러워요. 같은 가족이니까 너무 좋게 보지 마세요. 어린 손자라고 손녀라고 해서 착한 것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변질의 유산을 사명을 갖고 태어난 거예요. 그럼 이 시점에서 태어난 것은 할 수 없는 거고 이 시점에서 뭘 알아야 돼요? 변질되었음을 알아야 되지요. 내가 변질되었음을 어떻게 아는가?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지금쯤 산에 가게 되면 아카시아 향기 나오지요. 마스크 써서 잘 못 맡았어요? 그 아카시아 향기, 본인이 산에 아카시아나무 십년 동안 다 심은 거예요? 어떻게 된 거예요? 그냥 날아오지요. 공기에 따라서 바람 따로 아카시아 향이 그냥 날아오지요. 그게 뭐냐 하면 이게 혜택입니다. 자연의 혜택, 주님의 혜택이지요. 아카시아 향기를 지가 향기 뿌려서 지가 받아낸 건 아니지요. 그냥 주잖아요. 그냥 줄 때 고맙소, 감사하다가 되지요.

원래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이렇게 만들었어요. 모든 것이 혜택으로 주어지고 그리고 혜택만으로 살아야만 될 존재, 그게 하나님이 원했던 인간입니다. 동산에 모든 나무를 먹어라. 혜택이에요. 아카시아든 라일락이 됐든 꽃향기 가운데 아카시아, 라일락 참 귀족적이에요. 갑자기 그 향기하게 되면 집에 아무 것도 개뿔도 없어도 귀족이 된 듯 느낌이 들지요.

이처럼 비 오고 난 뒤에 그 다음 날 맑은 하늘과 신선한 공기 뭐예요? 전부 다 혜택이죠. 왜 기본으로 안 돌아가십니까? 기본은 뭡니까? 그냥 혜택 받고 사는 게 기본이에요. 뭐가 기본을 훼방시킵니까, 뭐가 기본을 가려버리고 기본을 찢어버리고 기본에서 혜택에서 눈 돌리게 만들고 뭐가 그렇게 하는 겁니까? 바로 인간의 소유에요. 변질된 거예요.

부자가 죽을 때 지옥 가는 사람으로 들통 나는 게 아닙니다. 거지 나사로 앞집에 살던 부자가 이미 살아 있을 때 지옥 냄새를 팍팍 풍겼어요. 하여튼 지옥의 티를 낸 거예요. 입춘대길 붙인 대문부터 시작해서 모든 자기의 행동과 사고방식이 나 지옥 갈래, 이걸 만방에다 그것도 아주 자랑스러워하면서 광고를 했어요. 지옥 간다고. 물론 그 사람은 지옥 간다는 말을 다른 말로 했지요. 적어볼게요.

“나 지옥 간다=나 잘 산다.” 여러분 가운데 아는 사람을 길에서 만났을 때 “요즘 어떻게 살아요?” “잘 살지요. 아픈데도 없고요. 애는 잘 있고요. 너무 잘 살아요.” 오랜만에 약이나 올리자. 예, 잘 삽니다. 아무 걱정, 고민 없습니다. 굳이 고민이라 하면 돈은 많은데 쓸 데가 없는 그게 고민이고. 써도, 써도 계속 버니까. 다 못 쓰고 죽을까 그게 약간 고민이지 다른 고민 없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거지 나사로 앞집에 있던 부자가 습관처럼 내뱉은 말이죠.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호화로이 날마다 파티를 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부자와 가난한 자를 이야기한 것은, 부자는 지옥의 particle이에요. 부분이에요. 거지 나사로는 천국의 particle. 그러나 이 세상은 조각, 조각이고 부분이에요. particle이에요. totality전체는 나중에 죽어서 결정되는 겁니다. 살아 있을 때는 그냥 particle부분, 조각이에요. 표본이죠, 모델이죠.

그러나 죽어서는 모든 것이 다 드러납니다. 죽고 난 뒤에 잘하겠습니다. 소용없어요. 지옥과 연계돼있는 particle부분인지 천국과 관련된 하나의 패널 조각인지 particle인지 천국 그림의 일부인지 지옥 그림의 일부인지 이것은 살아가면서 자기의 본성을 감출 수가 없어요. 아주 티를 내도 팍 나. 티가 팍 난다니까요. 모든 의식과 사고방식이. 천국의 티가 나는 사람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의아해 할 수 있어요.

사람들은 뭐라고 핑계 대느냐 하면 이런 핑계 댑니다. 평생토록 보통 삶을 살았습니다. 보통이라 하는 것은 양극단이 아니고 중간쯤이란 뜻이거든요.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인간들 생각이고 이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이스라엘을 통해서 특히 이스라엘 중에서도 무슨 지파를 통해서? 레위지파를 통해서 하나님의 친자 확인, 진짜 아들은 이런 삶이라고 보여줬잖아요.

그럼 이런 삶에 참여하지 못한 것, 삶은 뭐가 돼요? 바로 건방진 삶이죠. 망해야 될 삶이죠. 저주받은 삶, 그냥 기분 따라 사는 삶. 내 것 없어지지 않기 위해서 나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용할까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여러분 사다리타기 알지요. 사다리타기 그려볼까요.

아래 위 이렇게 해놓고 줄 죽죽 그어놓고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해놓고 위에서 띡띡띡띡 내려와서 여기는 꽝, 여기는 짜장면, 오늘 점심 사다리타기 할 때 여기는 간식, 이렇게 내려오잖아요. 계열인데요. 천국과 닿지 아니하는 계열에 속한 사람은 뿌리가 끊어진 줄을 잡는 거예요. 천국과 연결되지 않는 그 계열에 속해 있으면서 나는 평생 보통 삶을 살았다 하는 거예요.

여러분은 그런 이야기를 연로하신 시부모에서 많이 들었을 거예요. 친정 엄마나. 요양병원에 가서 “어머니, 이제 나이가 구십다섯인데 마지막 얼마 안 남았습니다. 그저 십자가 알아야 됩니다.” “야야 그런 소리하지 마라. 나는 평생 보통 삶을 살았다.” 그건 노태우나 하는 소리지. 보통. “그러니까 어머니는 지금 천국과 지옥 간다, 정도가 아니고 천국과 연결이 안 돼 있어요, 연결이.” 친자 확인이 아니라니까요. 나 너 모른다가 된다니까요.

뭐 하나님을 만나봐야 알지, 이렇게 주장하는데 안 만나도 레위지파 같은 삶을 하나님께서 꽂아놓은 거예요. 이스라엘에 심어놓은 거예요. 그들이 누군데? 바로 그 당시에 이스라엘에게 십일조를 받는 사람이에요. 자기 소유의 땅뙈기 하나 없는 거예요. 자기 소유의 땅 하나 없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물에 열 사람을 집어넣으면 레위지파만 그 다리가 든든하게 땅에 박혀있고 나머지 지파는 물에 떴다고 보면 돼요. 물에 떴는데 세상의 유익과 즐거움과 세상 소유에 기분 업 되어 붕 떠서 도달해야 될 나는 더럽다는 것, 레위기 27장, 첫째는 인간은 더럽다, 표준은 레위지파다. 이걸 잊어버리는 거예요. 더럽고 뭐고 그건 나중 문제고 지금은 즐길 것을 즐기자. 그 기분에 완전히 빠져있는 거예요.

여러분 운동권에 있는 사람들 봅시다. 관심이 어디 있습니까? 복음에 있습니까? 인권이 살아 있는 정치 바뀌기를 원하지요. 다른 사람들 그 운동권 보고 욕 되게 하는 거예요. 젊을 때 공부하라고 대학 보냈지 데모만 하느냐? 그런데 요구하는 사람들 그들은 다리를 어디에 놓고 있습니까? 죄 용서와 복음에 두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기의 소유에 두고 있습니까? 빨리 자리 잡을 생각하지요.

빨리 자리 잡고 애 키우고 아파트 사고 취직하고 돈 모아서 차 사고. 여전히 그들은 천국과 끊어진 곳에 자기의 터를 잡는 거예요. 자기의 터를 천국과 무관한 곳에 자기의 터를 잡는 거예요. 말씀 위에 잡는 게 아니고 말씀 같으면 집어 던져요. 그러면서 교회 다니는 사람은 평생을 교회 놀이하는 거예요.

목사한테 사랑받고 칭찬받고, “아이고 집사님 믿음 좋아라.” “전도사님 기도응답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 있잖아요. 기도하는 것 자체가 더럽고 헌금도 더럽고 이 살았다는 건 다 더러운 거다. 자기가 더럽다는 걸 일깨워주는 친자 확인되는 계열에 이어지지 못하고 평생을 그냥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그 교회 놀이하는 거예요.

이번에 어느 목사님이 오면 좋겠다. 계속해서 누구는 장로 됐다. 권사 됐다. 누구 집사 아들은 이번에 장가간단다. 쓰잘데기 없는 그 모든 것은 한 마디로 나는 파괴되기 싫다, 나는 망하기 싫다는 그 변질된 본성의 발로입니다. 그러니 교회라는 게 얼마나 위험한 곳이에요. 철저하게 천국을 가로막는 곳이죠.

아까 뭐라 했습니까? 이건 패러디인데 <박하사탕> 마지막 장면입니다. “나 돌아갈래.” 그것처럼 “나 지옥 갈래.” 그걸 점잖은 순화된 말로 이야기하면 세상에선 뭐라고 한다고요? “나 잘 살고 있네.” 이거거든요.

혜택을 아카시아 향기 혜택을 그냥 고마운 걸로 받아들일 수 있는 아카시아뿐만 아니고 모든 여건을 그냥 주님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그것이 인간들로 하여금 천국에 골인하지 못하게 하는 계열에 그들은 스스로 원했어요. 천국과 끊어져도 좋다. 나를 붕 띄워주고 기분만 업 시켜주면 그걸로 족하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희년은 뭐냐 하면 희년이란 기쁜 날이죠. 기쁜 해, 7x7+1=50 해. 희년의 특징은 뭐냐? 나의 가치를 훼손하는 해, 나의 가치를 다 훼손시키는 것이 희년입니다. 기쁜 날인데 왜 기쁘냐 하면 내가 갖고 있던 나만의 가치가 다 의미 없게 되는 거예요. 그걸 안 받아주는 것, “들어오지 마, 네 가치 들어오지 마.” 너의 가치, 의미 이 희년에는 소용없어요.

27장 18절에, “그 밭을 희년 후에 구별하여 드렸으면 제사장이 다음 희년까지 남은 년 수를 따라 그 값을 계산하고 정가에서 그 값에 상당하게 감할 것이며” 이건 뭐냐 하면 희년에 가까이 오면 올수록 돈 가치가 땅 가치가 거래할 때 같이 아주 더 증가해요. 가격이 높이 쳐줘야 돼요. 왜냐하면 희년이라 하는 것은 모든 걸 무효화시키고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거거든요.

울산시내 요지 땅에 가게를 새로 얻었을 때 계약 조건 속에 뭐냐 하면 5년 뒤에 가게 나가야 되고 원주인에게 다 돌려주고, “당신 여기서 장사 그만 둬야 됩니다. 그래도 좋습니까?” “좋습니다.” 만약에 5년 뒤가 아니고 70년 뒤라면 돌려줄 기간이 70년 남았으니까 그 가게 세는 별로 안 비쌀 거예요. 그런데 2년 남았다. 그러면 2년 동안 실컷 해먹고 빨리 본전 뽑아야 어차피 2년 되면 다 돌려줄 거니까 가격이 높아지겠지요.
※“희년이 가까울수록 가격이 다운, 떨어지겠지요.”(강의자에 의해서 수정되었습니다. 강의b 시작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희년이란 시간의 순환구조에서 1일부터 시작해서 희년 다음 날 1 되잖아요. 1, 2, 3, 4해서 50년까지 갈 때 인생에선 뭐냐 하면 그 가면 갈수록 인간이 얼마나 소유에 미쳤고 집착하느냐를 희년의 존재로 그걸 증명해내는 거예요. 희년을 반기는 게 아니고 아이씨, 얼마 안 남았구나. 악착같이 본전 뽑아내야지, 라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인간의 변질된 본성을 희년이란 제도 때문에 그걸 다 까발려주는 겁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원리에 의하면 로켓이 빛의 속도를 못 따라잡는 이유가 빛의 속도로 가면 갈수록 로켓의 자체 중량이 무거워져서 아무리 에너지를 쏟아 부어도 그 엄청난 무게의 로켓을 빛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이론의 특수상대성이론입니다. 일반상대성원리는 중력이라 하는 것은 힘이 아니고 곡면의 굽어짐에 의해서 거기서 관계망, 기하학적인 힘의 곡률에 의해서 거기서 중력이 형성된다는 것이 일반상대성원리거든요.

이건 뭐냐 하면 인간의 시간과 공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중심이 아니고 중심이 따로 있다. 우주 자체가 중심이고 인간은 그 우주의 particle일부에 불과하다. 그걸 언급한 겁니다. 그러니 물리학이나 이것이 아주 발달하게 되면 인간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무니다. 그냥 기계 조각에 불과하지요. 맛있는 밥 먹고 배설하는 기계, 다른 사람보다 돈 많다고 자랑질하는 한 순간에 기계, 돈 먹고 돈 토해내는 기계.

그래서 귀 아프고 기계로 귀 바꿔버리고 뇌가 다치면 여기다 컴퓨터 칩 AI 심어버리고 다리 부셔지면 다리에다 기계하고 고칠 것 다 고치고 이젠 그것도 모자라 인간의 세포 내부에 태어나기 전부터 괜찮은 DNA를 사전에 조사해서 다 바꾼다는 게 2030년 되면 그게 실현에 옮긴다는 거예요. 인간의 DNA를 유전 때문에 삭제된 DNA를 교체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나는 인간이 아니고 나는 그냥 기계입니다. 그냥 쾌락만 쫓는 기계란 뜻이에요. 처음에 그랬잖아요. 인간은 뭐 따라 산다고요? 기분 따라 사는 거예요. 기분 좋으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천국, 지옥은 죽어봐야 아는 거고.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죽어봐야 아는 게 아니라 이미 표준모델이, 이것이 레위기잖아요. 레위지파로 왔다 이 말이죠.

27장 18절에 제사장이 희년 따라 년 수에 따라서 값을 이미 정하는 주도권자가 레위제사장이에요. 희년까지 기간이 길면 길수록 파는 자가 높은 값을 받는단 말이죠. 그리고 희년이 끝나면 그 땅은 소유권자로 넘어갑니다. 이것은 바로 희년은 우리의 존재 자체의 무게를 희년은 지금 완전히 거부하고 있는 거예요.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 우리 존재가, 여러분 강의 들었으니까 제가 묻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무거운 이유가 뭡니까? 우리 안에 쇠가 들었습니까, 납이 들었습니다, 뭐가 있어서 우리 존재가 무겁습니까? 소유, 내 소유. 애가 몇 명이고 재산, 아파트는 몇 채고, 그리고 차는 뭘 타고, 그런 소유도 되지만 우리 아는 사람 몇 명이고 내가 이 바닥에서 얼마나 인정받고 신용이 높은 줄 아냐, 이런 것들이 내 존재를 무겁게 하는 거예요.

무거우니까 위로 올라가겠어요, 땅 밑으로 내려가겠습니까? 이거는 뭐 자동코스로 지옥 가는 거예요. 거지 나사로는 개뿔도 있어야지. 존재가 가볍잖아요. 붕붕 떴어. 천사가 데려가기도 쉬워요. 있어야지. 병든 몸인데 몸무게도 몇 킬로 나가지 않을 거야. 천사가 와서 그냥 데려가서 위에 있는 아브라함 품에 안아버리고 부자는 그냥 싱크홀, 바닥 자체가 꺼져버려서, 꺼질 것도 없이 그 자체가 벌써 지옥이에요.

사람들은 이 희년이란 막다른 시간이죠. 시간의 끝이죠. 그러면 희년에 의해서 막힌다는 말은 모든 시간은 희년의 particle이에요. 희년의 부분입니다. 희년요소가. 희년은 자기 소유가 없지요. 소유권자가 원래 하나님이 주신 거니까 자기 소유가 아니죠. 하나님 거니까. 희년 시간이 우리한테 개입이 되면 항상 이것의 제곱이죠. 내 것은 없다. 그 다음에 (내 것은 없다)², (내 것은 없다)³, (내 것은 없다)⁴, …… 마지막에 (내 것은 없다)의 50승, 50제곱, 이게 희년이에요.

이건 누굴 닮아 가느냐 하면 레위지파를 닮아 가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레위지파는 십일조를 받아먹었잖아요, 하는데 지금 우리는 주님 자체가 십일조에요. 주님의 생명을 십일조로 받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희년의 완성이고 십일조의 완성이죠. 희년, 십일조 다 율법에 속하니까.

율법을 주신 이유가 여러분들의 강의 들은 내용과 연결됩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로 하여금 왜 죄로 더욱 더 죄 되게 하고 저주 아래 있게 해서 우리 입을 막는 거예요. 내가 가진 것, 내가 행한 선한 행위, 주님한테 일체 통하지 않습니다. 치워라. 너의 존재를 무겁게 했던 것은 저리 가. 내치지요.

그래서 십일조, 희년 앞에서 우리 성도의 자세는 뭐냐 하면 내가 표준이 아니라는 사실, 내가 잘 살았다는 기준으로서 땡 탈락했다는 사실, 자기 잘난 맛에 자기한테 반하고 자기에 매료되어 살지 않는 거예요. 그게 영원한 레위지파, 주님 앞에서 우리의 자세입니다. 그런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희년의 사상이 매일 우리 삶 속에 끊임없이 투입되고 있는 사람에게만 그 사실을 알지요.

현재 사람들은 시간을 자기가 소유하려고 듭니다. 이것도 시건방진 거예요. 건방진 생각이에요. 저는 어느 누구에게도 내일 내가 꼭 살아 있어야 되고 내일 내가 안 죽어야 된다는 이유를 제대로 제시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내일 살아야 된다고 보면 이것은 공간과 시간을 자기가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레위지파 표준에 위배돼요.

레위지파는 시간이고 공간이고 내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죽음과 죽음 곁에서 살기 때문에, 죽음을 생산하고 양산하지요. 자기 손으로 죽음을 만들어요. 이제는 성도는 내 손으로 내 죽음을 만들어내는 그게 레위지파 같은 성도입니다.


10분 쉽시다.


20210507b 울산강의-레위기 27장 : 십일조세계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제가 반대로 이야기한 게 있기 때문에 수정하겠습니다. 희년이 가까울수록 가격이 다운, 떨어지겠지요.

그래서 희년 가까이 갈수록 인간은 나의 소유성이 빛을 잃어버려요. 내가 가진 게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주께서 안 받아준다는 것이 희년의 위상이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그 앞에서 나는 왜 그리 작아지는지. 그래서 희년은 기쁜 소식이고 그 기쁨 앞에서 기쁜 사랑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있는 돈을 교회 바치라, 버려라, 다른 사람 주라가 아니라 돈이 있든 없든 그게 나한테 내 존재를 무겁게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굳이 내일까지 살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신약의 희년은 매순간 개입되기 때문에 네가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면 내일 꼭 살아야겠다고 고집부릴 이유가 오늘밤 중에 잘 때 박탈당했어요.

“쓸데없이 걱정하지 말고 잠이나 푹 자.” 네 존재의 무게를 이불에 누워서 이불이 얼마나 압박감을 주는지 보라. 온갖 근심걱정으로 한 밤 지새우지 마시고 그냥 자기 자신을 잘 때는 죽음에 맡기세요. 죄 진 인간이 마땅히 죽음에 맡기는 것은 너무나 지극한 당연한 대우입니다. “오늘 죄 짓는다고 수고했으니까 눈 감고 죽어, 죽어 버려.” “예. 죽겠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시간을 가질 권한도 없고 공간을 가질 권한도 없다. 왜냐?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주님의 혜택이기 때문에. 따라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죽음과 죽음 자체 내에서 생산해내는 기능, 그런 업무, 직업을 갖고 있는 레위지파를 닮아가야 되겠지요. 그래서 레위지파가 하는 종을 일반지파가 하려면 엄청 많은 돈을 지불해야 됩니다.

두 번째 시간에는 뭘 하느냐 하면 32절에 십일조가 나와 있는데 십일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십일조하기 전에 27장 29절에 보게 되면, “아주 바친 그 사람은 다시 속하지 못하나니” 돼있는데 어떤 사람을 아주 바친 사람이라고 보는지 보니까,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돼있어요. 그러니 이거는 도저히 살 자격도 없을 정도로 아주 흉악한 사람은 꼭 죽일 사람은 죽여 버려라.

이것이 율법에 기록돼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바로 이 원칙에 부합됩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버린 자는 반드시 죽일 수밖에 없는 그 바탕에서 출발한 거죠. 그래서 첫째 시간에 1번에 뭡니까? 레위기에 모든 인간은 더럽다. 더러운 인간을 율법으로 엮어준 것만 해도 고마운 줄 알아라 이 말이죠.

그러면 두 번째 십일조에 대해서 26절에 보면, “오직 생축의 첫 새끼는 여호와께 돌릴 첫 새끼라 우 양을 물론하고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구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 첫 번째 태어난 것을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지 말란 말이죠. 원래 하나님 것이니까 네가 생색낼 입장이 못 된다는 말이에요. 이 이야기에 민수기에 18장에 보면 나옵니다.

민수기 18장 15절에,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생물의 처음 나는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네 것이로되 사람의 처음 난 것은 반드시 대속할 것이요 부정한 짐승의 처음 난 것도 대속할 것이며” 그 다음에 17절에, “오직 소의 처음 난 것이나 양의 처음 난 것이나 염소의 처음 난 것은 속하지 말지니 그것들은 거룩한즉 그 피는 단에 뿌리고 그 기름은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로 드릴 것이며”

그러니까 처음 난 것은 처음 난 것에 무엇이 듬뿍 담겨있냐 하면 하나님의 죽음, 하나님께서 죽음의 제도 있잖아요. 그 시스템과 직접 관련된 것이 처음 난 자들이 담당해야 된다는 겁니다. 소가 되던 양이 되던 사람이 되던 첫 맏물은 중심체 돼야 돼요. 하나님의 뜻이 지상에 이뤄지는 중심체로 그건 둘째가 하지 말고 셋째가 하지 말고 처음 난 자가 그걸 해야 된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레위지파가 민수기 2장인가 보면 나오지요. 레위지파는 숫자를 헤아릴 필요 없어요. 1장 49절, “레위 지파만은 너는 계수치 말며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계수 중에 넣지 말고” 그리고 3장 46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자가 레위인보다 이백 칠십 삼인이 더한즉 속하기 위하여” 속전을 드리라고 했는데 이것은 레위지파가 모든 이스라엘 남은 지파의 대속물이 되기 때문에 첫 맏물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레위지파 한 사람당 나머지 지파 한 사람을 비교하는 거예요. 저쪽의 맏물과 일대일 대응시키는 겁니다. 그게 민수기 3장 41절에 나옵니다. “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 모든 처음 난 것의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 이렇게 돼있어요.

표본 조사한다고 했잖아요. 바로 그걸 이야기합니다. 레위지파는 훌륭하다고 보지 마세요. 레위지파 안에 나머지 모든 지파의 죄가 담기기 때문에 레위지파는 죽음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살려내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 지파는 목숨을 살려내지요. 레위지파는 반대로 죽어 마땅함을 살려내는 거예요. 우리는 죽어 마땅함의 취지를 살려내는 거예요.

죽어 마땅함이 될 때 살려줌은 혜택이 되는 겁니다. 아카시아 향기가 되는 거예요. 내가 애쓰고 노동하지 않아도 그냥 주는 게 되는 겁니다. 라일락 향기도 좋고 아카시아 향기도 좋지만 제일 좋은 향기는 그냥 살려줄게, 라는 그 향기 그것보다 더 소중한 향기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그냥 살려줄게. 전제가 뭡니까? “너는 더럽거든.” 이 더러운 자식아. 내 그냥 살려줄게. 이야기 끝까지 들어야 돼요. 이 더러운 자식아, 할 때 화내지 마시고, 그냥 살려줄게.

이러한 인간이, 이스라엘 사람이 다른 민족과 차별화인데 이런 혜택을 받는 게 차별화인데 그렇게 되려면 어떤 공식이 성립되느냐 하면 어려운데요. 인간=영토(땅) 인간이 땅에서 사는 게 아니고 인간 자체가 하나님과 함께 사는 땅으로서 이게 등록이 됩니다. 인간 자체가 땅이에요. 땅이 그러면 두 종류가 있지요.

첫 번째 땅은 뭐냐? 저주받은 대지, 이게 땅이지요. 인간은 저주받은 땅 위에서 살면서 인간은 땅 의존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일은 땅에서 이뤄집니다. 땅은 뭐냐? 땅에 대한 가장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적절한 이해는 이겁니다. 이게 뭡니까? 무슨 글자에요? 땅=부추전, 이게 잘 안 보이면 이거에요. 해물전이죠. 땅의 특징은 plane면, 평면입니다. 그냥 지평이에요.

지평에 뭐가 있느냐 하면 무늬가 새겨지지요. 이게 바로 구약적 하나님의 계시의 지평이에요. 그냥 평면이에요. 그러나 신약은 뭡니까? 평면이 아니고 입체지요. 위, 아래. 위위 아래. 위, 아래가 구분돼있습니다. 그냥 이스라엘은 평면입니다. 평면에서 여기서 에돔 있고 모압, 암몬, 요단강, 사해, 지중해 있다면 전부 다 뭡니까? 아모리 족속도 있고. 전부 다 뭐냐 하면 평면적이죠.

평면적이라 하면 우리가 이걸 보통 지도지요. 구약성경은 지도로 설명이 돼요. 그러나 신약의 사도행전은 지도가 아무 의미 없어요. 땅 끝까지라 하지만 그 땅 끝이 어디냐 하면 결국은 성령의 세계잖아요. 땅 끝을 성령이 임의로 주입시키면 그게 땅 끝이 돼요. 저 알래스카 간다고 땅 끝이 아니고 이 울산바닥이 땅 끝이 될 수 있어요.

무엇이 임하면? 성령이 임하면.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은 이 땅에서 땅 끝을 통과해서 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 계신 곳이 바로 땅 끝이고 그게 하늘나라와 접점이죠. 예수님 가신 곳. 지구는 동그니까 백날 가봐야 제자리 오잖아요. 그게 아니고 하늘나라 갈 수 있는 유일한, 땅이라는 평면을 뚫고 입체로 가신 유일한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성령이 왔다는 말은 뭔 뜻이에요? 위, 아래. 위위 아래, 위에서 오신 영이거든요. 위에서 오신 영이 지상에 땅 끝을 만들어내신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은 땅 끝까지 간 게 아니고 땅 끝으로 움직였지요. 움직이는 땅 끝이 바로 성령 받은 성도들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입체적 사고, 성령 안 받으면 알 수 없어요. 입체적 사고를 받지 못하면 인간은 뭐만 쳐다보냐? 지평선만 바라봅니다. 언제 환경오염 심한 울산바닥 떠나서 서울에 입성하나. 울산과 서울, 이건 해물전. 부추전보다 해물전이 낫네. 둥그런 해물전 보면 그냥 그렇고 그렇지만 부추전은 가끔은 거기에 특별, 광역시 같은 게 나타나지요. 해물이 홍합 있는 자리.

녹두전 말고 해물전이라야 특징 있는 공작새 같은 무늬들이 있잖아요. 촌에 안 가고 대도시에 가서 가는 것. “너 어디서 사는데?” “나 전복 위에 사는데.” “너 어디서?” “나 오징어 위에 사는데.” 너는 홍합 위에 산다. 하나의 이 손을 평면으로 생각해서 평생토록 여기에 터 잡고 살란다. 그게 무슨 입체입니까? 평면적 존재지요.

수직적 관계성이 끊어졌잖아요. 지금 구약이니까 평면으로 설명하는 겁니다. 왜? 구약의 모든 땅은 결국은 불 심판 받아야 될 땅이에요.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 떨어졌잖아요. 구약적 안목에선 이렇습니다. 전에 낮 설교 때 언급했는데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소돔과 고모라에 불 심판 떨어지는데 행여 거기에 의인 있으면 하나님이여, 의로운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을 치는 모순에 빠지지 않습니까? 어떻게 의인이 악인과 함께 심판 되면 온전한 심판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아브라함이 상당히 혼동해서 기도로서 물었지요.

결국 하나님 답변은 뭐냐 하면 의인은 없었다는 거예요. 이 말은 심판은 정당했다. 예수님 빼놓고 예수님 떠나고 남아 있는 모든 땅에서는 심판이 정당한 거예요. 그럼 성도는? 성도는 알아서 심판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성도기 때문에 심판받아도 되지요. 이미 성도는 이중적이니까 아래 쓰레기 껍데기는 이건 까짓 것 버려주시옵소서, 이렇게 나오기 때문에. 껍데기에 불 심판 떨어지는 것에 대해서 성도는 이미 동의가 된 거예요. 수긍이 된 겁니다. 이 땅에 살다가 몇 년 살든 그건 의미 없다는 거예요.

전에 설교에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사십이든 칠십을 사는 것은 칠십을 살았을 때 체험해보라고 칠십을 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팔십을 사는 것은 팔십 되어 인간이 얼마나 망가지는지 체험보라는 거예요. 구십을 사는 것은 인간이 노망하는 이런 존재가 된다는 걸 한 번 네가 체험해 보란 말이죠. 그 잘나고 멋있고 미모였고 아름다웠고 정갈하고 고상하고 점잖 빼고 그 어떤 것을 해도 나이 구십 넘으니까 입만 떼만 욕만 나오는 더러운 인간, 그것 체험하라고 구십까지 산 거예요. 복이 많아서 구십까지 산 게 아닙니다. 어차피 복은 끝났어요. 저주받을 땅에 복이란 것은 평면상 의미 없습니다.

해물전에 홍합 위에 살고 타버린 채소 위에 산다고 해서 지옥 가는 게 아니에요. 수직적으로 더 떠있어야 돼요. 그 점에 대해서 좀 어렵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미리 선언했습니다, 어렵다고. 어떤 점이 어려우냐? “무인도의 역설”이에요. 바다가 있는데 여기에 섬이 하나 있습니다. 파도가 치고 나무 하나 정도 있어줘야 되겠지요.

무인도란 말 자체는 사람이 살지 않는 겁니다. 여기에 사람 하나 들어왔습니다. 무인도입니까, 무인도 아닙니까? 보통에서는 사람이 없는 섬을 무인도이기 때문에 사람 하나 들어와도 무인도라 하지요. 그러나 사람이 들어가 삶으로서 이 섬은 무인도가 되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이 섬이 무인도란 의미는 아무도 없을 때는 무인도 의미 자체가 없어요.

이 말은 뭐냐? 타자 또는 나의 타인이 없는 나는 나가 없어져요. 의미라 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의미를 부여해도 무의미한 거예요. 남 앞에서 내가 어떠냐가 이게 나의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특징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스스로 하나님 믿는다고 우긴다고 이스라엘 되는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이라고 누가 규정을 해줘야 돼요. 그게 이스라엘의 타인, 그게 바로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십일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십일조를 받느냐, 에요. 누가 십일조를 지시했고 십일조 접수한 분이 누구냐 이 말입니다. 십일조는 일단 레위인한테 가고 레위인은 십일조 제사장한테 가고 제사장은 누구한데 바칩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바칩니다. 자, 여호와 하나님이 손이 있어요, 발이 있어요, 어떻게 받아요? 일반백성들의 십일조는 레위인이 받습니다.

같은 인간 대 인간이기 때문에 받지만 인간 대 인간이 있을 때는 무인도에요. 왜? 같은 류의 인간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 외의 분이 있어야 율법이란 게 정당성을 확보해요. 인간끼리 의논해서 협상해서 우리 법 만들자, 해도 이건 아무 의미 없습니다. 친목회 해서 회비 한 달에 만 원 내기, 이런 법은 천국에선 안 받습니다. 너희들끼리 법 적용을 내가 왜 인정해야 되느냐 말이죠. 같이 더러운 인간끼리 주고받는 그게 뭐가 대단하냐 말이죠.

어떤 사람이 결혼하고 이혼하고, 또 결혼하고 이혼하고, 또 결혼하고 이혼하고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일곱 번 이혼했다 하지만, 그럴 때 그 사람 인생도 참 불행하다. 나처럼 한 남편 하나 해서 죽을 때까지 백년해로해야지, 라고 하지만 결혼 일곱 번 해선 안 되고 한 번만 해야 된다는 그거는 누가 정한 법이에요? 인간은 기분 따라 살지요. 인간들이 이해하는 법은 그건 무인도 아무도 없는 섬이기 때문에 그들의 만든 법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살지 않으면 거기 무인도가 없어요. 무인도가 되려면 딱 한 사람이 그 섬에 들어와야 되는 겁니다. 그 섬을 누가 하느냐? 이스라엘이 하도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 섬에 살게 한 거예요. 율법의 섬에 살게 한 겁니다. 그 섬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못해요. 이미 무인도에 주인이 있습니다. 그 주인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될 그 섬, 바로 이방민족에겐 이스라엘은 고립된 거예요.

“아이고, 보이지 않는 분하고만 이야기하고 얼마나 외롭겠냐. 개나 키우지.” 위로를 하는데 지금 그거는 뭐냐 하면 무인도이면서도 무인도인 줄 모르고 있는 같은 인간들끼리 복작복작 살아가는 것 있잖아요. 서로 너무 많이 해서 바다에 빠지는 것 있잖아요. 우리나라 하나 낳기 포스터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사람을 하나만 낳아야지 둘 낳으면 밀려서 바다에 빠진다는 끔찍한 포스터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복작복작해서 목욕도 하고 여기 경기장에서 올림픽도 열고 백날 해봤자 이것은 이방민족이에요. 이게 무인도가 아니란 사실을 그들은 모릅니다. 무인도라 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들이 사는 이것이 자기들은 무인도가 아니라 하니까 하나님께서 반대로 자, 무인도 여기 있다고 따로 만들어진 거예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 사람이 들어가선 안 되는 곳, 함부로 여기에 못 들어오는 곳, 그곳을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채웠습니다.

광야에 이스라엘 백성들 통과하면서 하나님께선 이 무인도의 성격을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애굽에서 홍해 건너온 사람 중에서 두 사람 빼놓고 못 들어간다. 그 약속의 땅은 무인도에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들어갈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은 못 들어갑니다.

그러면 그것과 십일조 관계는 뭐냐? 십일조라 하는 것은, 인간이 땅이 되는 거예요. 땅과 인간이 결합해서 십일조가 아니고 인간 자체가 땅이 되는 것, 땅이 되도록 하는 게 바로 십일조에요. 인간 자체가 땅이 돼버려요. 하나님과 함께 사는 곳이 인간이 곧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장소되는 이게 십일조입니다. 어디서 그걸 알 수 있느냐 하면 성경 세 군데 찾아보겠습니다.

첫 번째 찾아볼 곳을 레위기 27장 32절 누가 읽어보세요.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여기 막대기 나오지요. 소나 양들이 막대기를 압니까? “야야 막대기다, 막대기 있다. 잡히면 너 제물 되는 거야. 너 죽어.” “그래?” 열째마다 카운트하는 거예요. 첫 번째, “어휴.” 두 번째, “어휴 살았다.” 여덟 번째 되면 아슬아슬, 아홉 번째, 열 번째 딱 막대기로 잡았지요. “아휴 재수 없어. 나 왜 재수 없는 거야.” 십일조로 당첨된 거예요.

이게 바로 뭐냐 하면 하나님의 무작위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법칙 있는 무작위. 인간 입장에선 무작위지만 인간의 뜻이 개입되지 못하니까. 물론 괜찮은 양 따로 뽑았다가 앞에서 카운트할 때 하나둘 하면 못 가게 만들고 열한 번째, 열두 번째 막 집어넣고 그런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억지고요.

무인도에 있어서 무인도가 무너지는 것은 인간적인 인위적인 자기가 거기에 행함이 개입될 때는 무인도가 무너져버려요. 무인도란 말은 뭐냐 하면 이 섬의 주인이 내가 아니란 거잖아요. 내가 아니고 나로 하여금 이 섬의 존재를 알게 하신 그분의 이 섬의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분이 주인공이란 것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가 원해서가 아니고 우리 보기에는 무작위로 뽑힌 거예요. 무작위로 뽑히는 그 질서의 원칙이 그 섬을 덮어버려야 되는 겁니다. 십일조 정신이 완전히 그 섬을 이스라엘 자체를 덮어버려야 돼요.

복불복인가? 복이냐 복 아니냐. 복, 아니 不자 불복. 복불복이란 말은 인간의 노력과 의도와 의사가 전혀 반영이 안 된다는 뜻이잖아요. 그게 십일조에요. 당첨된 사람은 당첨되고 보니까 33절에 보니까, “그 우열을 교계하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속하지 못하리라” 이 말은 뭐냐? 속하다는 말은 도로 돌려주세요, 라고 못한다는 말이에요. “20% 드릴 테니까 도로 돌려주세요.” 이게 안 돼요.

그냥 죽어야 되는데 이게 보니까 살찐 게 아니고 좀 약해. 좋은 걸로 바꿔드리겠습니다. 그러지 마. 무작위 그 자체를 존중해야 돼요. 당첨 그 자체를 손대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일조 뽑기 위해서 양, 소를 통과하는 이것보다 확실하게 선택이라는 하나님의 선택에 창세전의 그 원칙이 이스라엘 내부에 십일조란 방법으로 이렇게 적용되는 겁니다. 이게 같이 보자 하는 첫 번째 구절이고요. 두 번째는 에스겔을 봅시다.

에스겔 20장 37절,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 완전히 하나님이 포로 잡혀 간 이스라엘 백성을 양으로 소로 취급해서 막대기를 통과시켜서 막대기에 당첨된 사람을 사랑의 밧줄로 꽁꽁, 언약의 밧줄로 꽁꽁 묶어버려요. 이건 뭐냐? 무인도 안의 무인도가 되지요.

이게 기존의 무인도는 인간의 우상숭배와 뜻이 개입되기 때문에 무인도는 날아가 버리고 무인도 속에서 새로운 무인도 할 때에 여기에 개입되는 시스템이 막대기 시스템, 막대기로 당첨하기, 십일조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십일조를 내는 게 아니고 나 자신이 뭐라고요? 십일조의 희생양, 십일조의 희생소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십일조에요.

방금 에스겔의 이야기에 의하면 이렇게 인간 자체를 양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그전에 사건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 사건이 뭐냐 하면 도로 포로 됨, 이방나라의 포로가 돼있는 거예요. 포로란 말은, “자기 힘으로 원래의 자리에 되돌아올 수 없다.” 이게 포로에요. 그래서 신약에 로마서에 가면 우리를 뭐라 하느냐? 아까 강의에서 우리가 더럽다 했지요.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이렇게 돼요. 우리가 죄의 포로 또는 죄의 종이 되었다.

우리가 죄의 종인 것은 바로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의 종이 되었다. 죄의 종이 된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어느 율법도 우리가 못 지켜요. 그러니까 율법이 오기 전까지는 자유인이었는데 율법 오고 난 뒤에는 우리는 애초부터 율법이 올 때 죄가 아니라 애초부터 자유롭다 했던 그 세월까지 전부 다 사실은 포로생활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죄 아닌 게 없었고 죄 속에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어느 강의에서 했지요. 인간은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죄 속에 산다고.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죄 안에 있어요. 죄가 인큐베이터, 죄 안에서 우리는 죄인으로 거기서 태어난 거예요. 모친의 죄 중에서. 이걸 아까 저는 인간은 더럽다 하는.

그래서 인간이 사모하는 것은 천국이 아니고 지옥이죠. 그리고 지옥 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 시건방짐, 시건방진 이유가 따로 나름대로 살 궁리를 챙겼다는 거예요. 그게 소유, 내 힘으로 내가 살 수 있다는 겁니다. 자립심, 개체성, 독자성, 이게 건방짐이거든요. 교만이거든요. 교만의 왕초가 로마서에 보면 그게 애굽의 바로에요. 애굽의 바로라 하지만 애굽의 바보라 해야. 요셉으로부터 아카시아 향기라는 혜택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걸 몰랐던 겁니다.

여러분 꿈 자체가 혜택이에요. 왜냐하면 그때 나는 죽었으니까. 나는 죽었는데 내 안에 살아 계시도록 작용하는 게 꿈이거든요. 물론 개꿈 말고 주님의 특별한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특별한 꿈, 계시로 나타나는 꿈은 평소에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혜택과 보호를 받아왔는지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자격으로.

그걸 율법의 십일조에서는 어느 정도 혜택이냐 하면 그 모든 민족 가운데 딱 막대기로 스톱, 해서 당첨됐다 이 말이죠. 당첨돼서 하나님의 죽음에 동참케 하는 고상한 직분을 얻은 거예요. 주와 함께 죽을 수 있는 혜택 중의 최고 혜택이 뭐냐?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혜택, 그것을 얻었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미쳤다고 할 거예요. 못 죽어서 환장했다고 이야기할 겁니다.

어떻게 하든 살아남아야지. 누가? 내가. 네가 왜 살아남아야 되는데, 물어보면 이유가 없어요. 무조건 살고 싶어요. 왜 살고 싶으냐? 죽는 것이 무서워서. 왜 무서운가? 로마서 8장에 보니까 바로 종은 무서워해요. 율법의 종은 무서워한다고. 죄의 종의 특징은 무섭다는 거예요. 의의 종은 해방됐다는 겁니다. 의의 종은 해방됐고 자유 감을 느끼고 죄의 종은 그나마도 내 것 없으면 나는 진짜 죽는다고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내 것만 지켜준다면 뭐든 다 하겠습니다. 살살 비는 거예요. 아까 체온 재는 것도 마찬가지고. 살려주세요.

십일조를 내는 게 아니에요. 물론 부추전, 배추전, 해물전 이 때는 평면의 시대에서는 주님께서 잘하면 이 평면적인 가나안 땅에서 살게 해줄게, 라는 제한적인 상벌구조가 있기 때문에 그걸 묘사하기 때문에 그렇게 했지만 신약에서는 십일조를 드리는 게 아니고 몸을 드리죠. 그것도 죄인의 몸으로 드리는 겁니다. 당첨됐다는 특별한 혜택으로서. 이게 바로 주님이 살 수 있는 영토, 땅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곧 땅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예레미야 봅시다. 예레미야 33장 12절에서 13절,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던 이 곳과” 자, 하나님이 먼저 새 이스라엘을 무인도로 봤어요. 짐승도 없고 사람도 없지요. 무인도입니다. 무인도란 말은 아무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세상, 천국이죠.

“그 모든 성읍에 다시 목자의 거할 곳이 있으리니 그 양무리를 눕게 할 것이라” 자, 목자가 먼저 등장하고 그 다음에 누가 등장합니까? 양이 있게 되죠. 그 다음에 13절에, “산지 성읍들과 평지 성읍들과 남방의 성읍들과 베냐민 땅과” 이것은 구약이기 때문에 배추전, 해물전처럼 평면으로 이야기해요. 에스겔 마지막에 “여호와삼마” 여호와의 성전이 있고, 그것도 평면이에요. 그게 그림자에요, 모형이고. 입체를 모형으로 평면으로 묘사한 겁니다. 구약에서는.

“예루살렘 사면과 유다 성읍들에서 양 무리가 다시 계수하는 자의 손아래로 지나리라” 그러니까 새로운 이스라엘의 원칙, 원리가 옛날처럼 양무리를 뽑아서 십일조 드리는 그 행위가 다시 실현될 그때가 천국이 이뤄지는 그때다 이 말입니다. 양무리가 십분의 일, 양을 잡기 위해서 막대기로 사용하는 그러한 일이 실시되거든 이미 도착할 곳에 다 도착했고 하나님이 원하는 이스라엘 나라가 완성됐다고 알아라.

그게 십일조의 원리가 계속 유지되거든 다시 그것이 재현되거든 그 세계가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럼 이걸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뭡니까? 신약에 있는 사람의 특징은 선택이란 의식에서 뽑혔다는 그 감사지요.

다시 오늘 본문 레위기로 돌아와 봅시다. 30절 봅시다.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이렇게 돼있지요. 땅의 십분의 일이라 하는 것은 십분의 일이 어느 땅의 십분의 일이든 간에 에브라임지파라든지 므낫세지파라든지 어느 땅의 십분의 일이든지 간에 그 십분의 일은 누구한테 바쳐야 돼요? 레위지파한테 바쳐야 되지요.

그래서 구약에서 분명히 배추전이고 평면이지만 평면 가운데서도 유독 레위지파가 아침 안개처럼 약간 거리를 두고 떠있지요. 왜냐하면 모든 것에 대한 통합적 위치에 있으니까. “레위지파는 위상공간을 형성한다.” 같은 평면에서 옆자리가 아니라 붕 떠있는 거예요. 위상공간에 있어서 평면인 호박전이든 배추전이든 평면공간을 전부 다 열두 지파에 지점을 개설하고 있습니다. 본점은 역시 예루살렘이 되겠지요.

우리가 지금까지 했던 것은 레위지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레위지파가 레위지파답게 돌아가려면 왕이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왕이 필요 없지요. 왜냐하면 레위지파 위에는 여호와가 왕이기 때문에. 구약에서 왕이란 개념은 전쟁의 승자의 개념이에요. 유일한 용사 개념이에요.

모세가 아말렉과 광야에서 전쟁할 때에 그때 이스라엘 쪽에 유일한 용사가 무엇이었습니까? 지팡이죠. 사람들의 배추전, 사람들의 평면 말고 위에 뭐가 내려갔다 올라갔다 합니까, 바로미터처럼? 지팡이가 내려가면 이스라엘 군대가 밀리고 지팡이가 올라가면 이유도 모르는데 아말렉이 힘을 못 쓰는 거예요. 모세는 지팡이를 오르락내리락하는 하나의 장치에 불과하고요. 그래서 모세가 지팡이를 드니까 아멜렉 군대가 칼질하다가 갑자기 힘이 빠졌는지 전부 다 흐느적거리고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스라엘과 마주했던 모든 이방민족들은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우리가 만약에 섬이라면 저쪽도 섬이고 우리가 섬의 주인공이라면 저것도 섬의 주인공이다, 라고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그들에게는 뭔가 다른 분이 계시는 거예요. 이방민족들이 느끼는 것은. 그걸 알았던 사람이 기생 라합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을 이스라엘이 쳐들어오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과 함께 한 그분이 어떤 인간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그야말로 저돌적으로 쳐들어왔을 때에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들과 누가 함께 있다는 것을 감지했지요. 기생 라합이. 그게 바로 신약에 와서 믿음이라는 거예요. 야고보서에서.

믿음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니라야 마땅하다는 것. 나? 너 누구지? 아무 것도 아니야. 아무 것도 아니라가 유지될 때 비로소 우리는 믿음의 대상이 보입니다. 느껴집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기가 되고 내가 뭔가 돼버리면 그 순간 주님의 이 레위기의 말씀이라든지 모든 말씀, 주님의 복음, 십자가 그런 것은 다 우리에 의해서 배척받지요. 냉대 받습니다. 경멸이 여김을 받지요. 천대받습니다.

누가 통제하니까? 내가 높여지니까 하나님은 낮아지고 내가 낮아지니까 주님이 높아지고. 그게 바로 무인도의 땅이거든요. 땅의 주인공이 내가 되면 주님은 주인공이 아니에요. 주님이 만든 땅의 주인공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내가 땅 주인이 돼버리니까. 그래서 우리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언약의 결정판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천국이 뭐며 지옥이 뭐며 그것이 계속해서 표출되고 있습니다. 성도를 통해서.

자, 어디까지 이야기했느냐 하면 십일조는 선택이라는 거기까지 이야기했습니다. 적어볼게요. “십일조는 선택이다. 선택된 것은 위상공간을 따로 형성한다.” 평면 위에 약간 붕 뜬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 에브라임지파나 일반지파들이 레위인에게 십일조를 바치게 되면 그들은 벌써 레위지파의 위상을 그들이 인정해주고 이걸 인정해준다는 말은 나는 나의 노동과 희생과 나의 지혜에 의해서 살아가는 게 아니고 내가 십일조를 드렸던 그 십일조를 받는 쪽에서 나를 살려내고 있다는 그 관계가 형성되는 겁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예수님이어야 되고 십일조는 십자가이어야 될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십자가라는 죄 용서의 취지를 살려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 울산바닥에 살게 하시는 겁니다.

레위기 27장 마지막 34절 봅시다. “이상은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이지요. 그러니까 이 모든 계명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 거예요. 인간은 들러리죠. 인간은 왜 들러리냐? 더러우니까. 같은 더러운 인간 속에 레위지파를 따로 위상으로 한 단계 높이고 높여진 그들이 자기 소유의 땅도 집도 아무 것도 없어요. 없어도 괜찮아요, 그들은. 오늘 제목이 이게 좋네. 없어도 괜찮아요. 너무 길다.

없어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자기는 그 희생 죽음 위에서 나오는 생명이 인간으로선 도저히 존재하지 않는 무인도, 새로운 세계, 그 세계의 원리원칙을 나타내는 기능을 레위지파가 하고 있으니 레위지파가 얼마나 소중한 겁니까. 그게 부러우면 막대한 돈을 성전세를 바치고 청소하든지 만약에 하다가 지쳐서 안 하겠다고 하면 바친 것의 20%를 물어내면서 올라갈 때도 십분의 일, 내려올 때도 십분의 일, 십분의 일로 엮여지고 뭉쳐진 그러한 관계, 그 관계망이 바로 이스라엘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십일조 하는데 일단은 십일조 받는 사람이 없어요. 누구한테 낼까요? 교회 서기한테 낼까요, 목사한테 십일조 갖다 바칠까요? 어떤 목사는 자기한테 직접 갖다 바치라 했는데 자기가 목사, 레위지파라고. 정말 그 사람이 레위지파라면 그 사람 부인 조사해봐야 돼요. 왜냐하면 제사장들은 처녀 아니면 결혼 못하게 돼있고 바보나 이런 사람과 결혼 못하게 돼있어요. 나쁜 직업에 있는 사람과도 결혼 못하게 돼있어요.

돈만 시범만 챙긴다 할 게 아니고 그 사람 모든 행동이 그야말로 인간들의 혈육에서 순수한 그것만 유지하도록 그렇게 돼있어요. 그러니까 레위지파에 있는 사람들, 제사장들은 소주나 포도주도 못 마셔요. 술 먹고 성막에 들어가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죽었잖아요. 나답과 아비후가.

참 그걸 생각해볼 때 구약의 평면으로 가나안 땅이라는 영원히 이스라엘 사람이 그 나라가 가서 결국 그들이 망했잖아요. 이스라엘이 망함으로서 무인도는 망한 이스라엘 속에서 예수의 나라로 열두 제자 이름으로 다시 성령을 주심으로써 다시 무너진 곳에서 생명이 있었던 겁니다. 그게 바로 위에서 낚싯대로 건지는 게 아니고 십자가로써 건지는 거예요. 같이 망한 곳에서 망해야 마땅함을 무너져야 마땅함을 파괴돼야 마땅함을 아는 자가 오늘날에 레위지파에 속한 거룩한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왕이 필요 없고 죽어야 될 레위지파만 필요했던 그 이유를 이제 알게 되었사오니 굳이 이 땅에 살지 않아도 되는 그런 자유함을 허락해주시고 기쁨을 허락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