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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레위기 26:34 / 안식의 과정 / 201204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레위기

레위기 26:34 / 안식의 과정 / 201204

정인순 2020. 12. 5.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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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윤범

20201204a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안식의 과정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6장 31절부터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 성읍으로 황폐케 하고 너희 성소들로 황량케 할 것이요 너희의 향기로운 향을 흠향치 아니하고 그 땅을 황무케 하리니 거기 거하는 너희 대적들이 그것을 인하여 놀랄 것이며 내가 너희를 열방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거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공격하는 그 대목입니다. 자기 백성을 공격하면 되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사람은 못하지요. 적어보겠습니다. 사람은 자기 것을 공격 못한다. 바벨탑을 못 짓게 하는 것은 바벨탑을 짓는 본인들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못 짓게 했지요.

사람은 자기 것을 공격 못한다. 이것을 하나님께선 인간의 한계로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은 이스라엘은 누구 것이냐 하면, 하나님의 자신의 것이에요. 하나님 자신의 것을 공격함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자기 것을 공격 못하는 인간들로 하여금 이러한 하나님 앞에 온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사는 세계가 천국이죠. 하늘나라. 하나님 나라에 인간들이 왜 들어갈 수 없는가? 본인이 본인을 공격 못해서 못 들어가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 사랑을 공격 못하고 인간이 자기 구원을 자기가 공격을 못해요. 자기 소망과 자기 믿음을 자기가 공격 못해요. 뭐 이렇게 추상적인 것보다도 쉽게 해서 부모가 자기 자식을 공격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아버지가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버립니다.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과냐, 하나님 과가 아니냐를 측정하는 방법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지독하게 사랑하는 자기 자식을 남이 아니라 본인 손으로 본인 자식을 죽이는지, 안 죽이는지 여부를 테스트하는 거예요. 네가 네 아들을 죽이면 합격, 네가 네 아들을 못 죽이면 믿음 없는 걸로 여겨서 불합격.

하나님께선 아브라함에게 일부로 시켜서 그 뒤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의 조상에게 있었던 테스트를 그 후손들도 공히 다 같이 통과해야 된다는 거죠. 그렇다면 집에 가서 곧 결혼을 앞두고 있는 자식을 죽여야 합니까, 할 때 그건 죽여도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그 자식은 약속의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혈육으로 난 자식이 이스마엘이거든요. 혈육으로 난 자식이기 때문에 그거는 테스트 감이 안 됩니다.

그러면 내 자식 죽이지 말고 누굴 죽여야 되는가? 약속으로 오신 분을 죽이면 돼요. 누구냐 하면 예수님을 죽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공식 하나 만들어냅시다. 예수를 죽이는 자만이 구원받는다는 공식, 희한한 공식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어디 눈에 보여야 죽이지요. 안 보이는데. 예수님이 어디 아파트에 살면 우르르 가서 죽이겠는데 아파트에 사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어디 있는 줄 모르잖아요.

그래서 성령께서는 예수를 죽이는 자가 성도지요. 성령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반복할 때마다 뭐가 쏟아지느냐 하면, 성도가 톡톡 생산되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십자가 사건을 가동시켜서 십자가 복음을 가동시켜서 제가 예수님 죽인 사람 맞습니다, 하는 사람마다 쪽쪽 성도가 되게 하시는 방법을 성령께서 하시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그래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아니하면 예수님 나라에 갈 수 없어요. 예수님은 자기를 죽인 자를 통해서 죄라는 것을 최종적으로 굳히고 그 죄에서 어떤 인간도 스스로 죄를 벗어낼 능력이 없음을 분명히 하시고요, 그 다음에 자기 힘으로 구원을 하겠다든지 천국 가겠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건 나로서는 말도 안 됨을 분명히 하시고 바로 그러한 자를 주께서 건져내심으로써 건져냄에 투입된 모든 방법이 오로지 예수님의 공로에서만 꽉 채워서 있음을 드러낼 때 그 관계가 천국입니다. 천국은 나로 인하여 살지 않는 세계거든요. 나의 행복, 나의 즐거움, 나의 편안함 이것을 기대하고 내다보며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성사된 것을 찬미하는 모임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 점을 말을 좀 길게 하게 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성령을 통해서 개입할 때 그것은 남들이 모르는 예수님이 규정한 그 죄가 내가 스스로 죄 지어놓고 죄다, 하는 것은 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오는 죄에 대해서 이건 어렵지 않아요. 아주 쉽습니다. 성경에서 죄라는 게 있잖아요. 죄에 대해서 두 방면에서 이해를 하려고 해요.

하나는 인간 쪽에서 죄라는 것을 규정하려고 합니다. 물론 인간 배후에는 누가 있습니까? 악마가 있지요. 악마가 죄를 해석하는 것과 주님 쪽에서 하나님 쪽에서 죄를 해석하는 해석이 서로 상충돼요. 이게 대결한다고요. 이게 경쟁이 돼요. 이게 죄뿐만 아니고 천국도 마찬가지고 구원도 마찬가지고 성경에 나오는 율법도 마찬가지고 모든 개념에 대해서 하나의 해석만 있는 게 아니고 두 개의 해석이 서로 대결하고 있는 중이에요.

인간이 이해하는 죄라는 해석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선악을 아는 지식에서 나왔어요. 선악을 지식은 또 어디서 나왔는가? 나는 홀로 살란다, 하는 정신에서 나온 것이에요. 나는 홀로 사는데 지장이 없도록 나는 선과 악을 구분하겠다. 이게 선악지식입니다.

선악지식은 이건 선이고 이건 악이고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이건 선이고 악이고 규정함으로서 내가 사는데 유리한지, 불리한지 따져서 항상 인간은 내가 건재하고 내가 좀 더 잘 살고 내가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은 어떻게든 알리는 방식으로 선과 악을 규정하게 돼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죄라는 것도 구원도 모든 개념이 다 그래요. 죄라는 것은 나는 잘 아는데 내가 이것은 나쁜 짓이라고 생각함으로서 그 다음에 뒤에 내가 이건 나쁜 짓임을 아는 자체를 뭐로 보는 거예요? 나는 선하기 때문에 나는 혼자 살 자격과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이거는 나쁜 짓이야, 살인은 나쁜 짓이야, 간음은 나쁜 짓이야, 도둑질은 나쁜 짓이야, 라고 규정하는 당사자가 최종 판정자가 돼야 한다는 거예요. 내가. 나도 알만큼 안다는 겁니다.

그럼 주님께선 네가 뭘 아는데? 내가 어떻게 하면 내가 당당하게 더 살 수 있는가?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의식을 유지하는 그 방법에 대해서 내가 잘 알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와 여러분 자신들의 평소에 행동하고 생각하는 걸 쭉 보세요. 모든 행동이 다 자기의 정당함과 관련돼있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선악은 잘못됐습니다, 회개합니다, 하고 아무리 가슴을 쳐도 회개를 한다할지라도 그게 진정 자기를 치는 행동일까요, 아니면 자기를 변호하는 행동할까요? 어느 쪽일까요? 자기를 변호하는 행동이죠. 금식하고 회개하고 두드리고, “나는 죽어야 해, 죽어야 해” 하고 막 벽에 들이박는 이유는, “이러니까 내가 안 착할 수 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 이렇게 통회 자복할 수 있는 사람 나와 보라고 그래요. 없잖아요. 그러니까 나를 천국 넣어야지 누굴 천국 넣어주겠어요.”

이건 교회에서 노골화된 것이고 평소에 사람 만나는 사회에선 조금씩, 조금씩 튀어나오지요. 다시 말해서 어떤 경우라도 내가 나를 치는 것은 내 사전에는 그런 것 없다. 내가 있는 한 그런 일은 아예 없다고 여겨라. 그게 인간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너도 그렇게 살고 나도 그렇게 사니까 그런 인간사회가 정상인 줄 알았지요.

그런데 여기 주님께서 죄라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치지 않는 것이 죄가 돼버렸어요. 하나님 쪽에서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발악을 하는 게 죄가 돼버린 겁니다. 아버지로부터 저주 안 받으려고 애쓰는 이게 죄가 돼버린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도 마지막 순간에 할 수만 있으면 이 저주의 잔을 그냥 안 마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다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아버지 뜻이 뭔지 알아요. 뭐냐 하면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을 버리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버리는 거예요. 창세기 22장에 볼까요. 창세기 22장 5절에,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사환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같이 갔어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과 갔는데 어느 지점에서 딱 떼놓고, “기다려. 더 이상 오지 마.”

그 다음에 번제 나무를 자기 아들한테 지우는 거예요. 그러면 이삭을 제단에 눕기 전에 불타기 전에 이미 자기는 무엇과 결합돼 있느냐 하면 자기가 짊어진 그것이 자기를 불태울 재료와 같이 묶여져서 가는 겁니다. 가면서 이삭은 뭐라고 질문하느냐 하면, 자기 자신이 누군지 전혀 알 수 없어요.

7절에 보면,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아무리 살아도 본인이 누군지 몰라요.

지난 낮 설교 <신령한 기도> 동영상에 어떤 사람이 댓글을 달았어요. 제가 그 설교에서 임재범의 <고해> 가사를 했거든요. 그분이 임재범 편에서 서서 옹호를 하는데 고해란 노래는 임재범이 성경 읽다가 은혜 받아서 그녀가 여자가 아니고 인간을 말하고, 내 피 흘린 죄라는 자기가 예수님이라 생각하고 우울증 걸려서 그렇게 썼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댓글을 달아놨어요. 요한복음 보세요. 어디 인간을 그녀라고 한 요한복음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 사랑의 대상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것은 죽으라고 만든 겁니다.

여기 보세요. 이삭 옆에 뭐가 붙습니까? 번제할 나무도 이삭한테 짊어지우지요. 이게 인간이 태어나서 가야 될 길이에요. 예수님만 그 길 가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은 우릴 대신 대표해서 보여준 거고, 집에 이는 모든 식구, 모든 가족들 이 땅에 인간으로 태어나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번제할 나무와 함께 죽어야 될 그러한 속성을 태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어요.

“내가 나를 치다니 있을 수 없어.” 전부 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주님을 자기 십자가 지고 갔는데 우리는 예수님이 별나서 그렇다는 거예요. 재수 없어서 그렇다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 지고 가셨을 때는 우리는 그런 식으로 나를 치는 그런 짓을 안 하겠다고 노골적으로 버틴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사탄인 가룟 유다였어요. 팔아먹었습니다. 나는 손해 보는 장산 안 한다. 이거거든요. “내가 실망한 만큼 당신도 실망해봐. 보복이야.” 이런 식으로 공격한 거예요.

다른 제자들은 소극적으로 그 자리를 피해버렸지만, 피해도 소용없어요. 주께서 다 불러 모았어요. 오순절에 성령을 통해서 불러 모았다고요. 불러 모으니까 사도들이 안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 가셨던 그 길이 이게 남의 길이 아니고 내가 미처 몰랐던 본인이 처음부터 가야 될 길은 주께서 먼저 시범적으로 가셨구나. 그러면 우리의 길은 안정 빵이죠. 우리의 길이 이미 정해졌어요.

아버지가 재벌이다. 아들 대학 나왔다. 취직하겠습니까? 아버지가 수시로 불러서 내가 늙었으니까 네가 이 회사를 물려받아라. 이런 이야기를 매일 하는데, “아, 나 요새 취직 못해서 미치겠어?” 이런 말하겠어요? 이미 갈 길이 정해졌지요. 아버지 회사가 내 회사, 이미 정해졌잖아요.

그러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안식되는 것, 편안한 게 뭐냐? 오늘 안식이 나올 건데 안식되는 게 뭐냐 하면 이미 안정권에 속한 거예요. 언약보다 더 안정권은 없어요. 여러분, 언약을 방석처럼 깔고 앉으세요. 그리고 여러분 마음대로 사세요. 이 방석이 언약이거든요. 언약을 내가 깔고 앉는 거예요. 깔고 앉아서 자식이 서울서 결혼식을 하던 대구서 하던 울산서 하던 몰라. 하여튼 관심 없어.

지금 코로나가 몇 명이고 600명이고 천 명이고 관계없어요. 이미 안정권이라, 안정권. 확보한 거예요. 정서적으로 안정이 안 되려야 안 될 수 없어요. 무슨 우울증이 걸려요. 무슨 고민상담이 있어요. 남편이 이혼을 하자고 하는데, 해줘요. 안정 빵인데, 뭐. 그게 무슨 고민거리가 됩니까.

이스라엘이 자기 것이 아니에요.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자기 것으로 여겼거든요. 뭐가 방해받느냐 하면 언약의 안전 빵이 방해받잖아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뭐냐? 다 잃어야 네 방석이 보인다는 거예요. 네 덩치 다 날아가야 방석이 보여요. 그동안 너는 진짜 안전 빵, 그걸 안식이라 하는데 여기 34절에, “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동안 하나님의 안식을 이 나라는 내 나라다, 내 몸은 내 것이다. 이러한 너무나 터무니없는 비언약적인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안식을 완전히 가려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그 엉덩이 안 치우나, 치워! 치우는 방법이 뭐냐 하면 약속의 땅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른 나라로 다 흩어지게 해서 네가 깔고 앉았던 것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를 쫓겨난 상태에서 보라는 거예요. 그게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남과 비교할 필요는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남과 비교할 주체가 아니라 주님에 의해서 비교당하는 주체에요. 사람한테 비교당하는 게 아니고 주님 자신과 우리를 비교하는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 비교할 때 비교의 기준이 언약입니다. 약속, 완성 쪽으로 이야기하면 안식. 안식으로 하는 거예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안식을 했고 안전 빵인데 너는 도대체 왜 그렇게 흔들리고 매일같이 바람 불면 덜덜 떨고 왜 그렇게 사느냐는 거예요. 그래서 네가 언약 있다 또는 주님 안에 있다, 약속 안에 있다 할 수 있느냐 말이죠. 약속만큼 안전한 데가 없어요. 그럼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저 사람은 교회 안 나와요.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하잖아요. 우리는 남과 비교할 필요 없는데 자꾸 비교한다고요.

성경에서 이스라엘과 거론하는 게 대적, 이방민족이죠. 이방민족과 견주어서 이야기하는 이유가 어떤 권역도 주님의 손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저 사람 교회 2년 나오다 삐져서 안 나온다. 가봤자, 지요. 가봤자 주님의 권역, 주님의 통치 영역 안에 있어요. 물론 잘리지요. 잘리든 말든 지옥 가든 천국 가든 어딜 가도 지옥과 천국, 그 둘 장소 외에는 다른 장소에 갈 곳이 없어요, 인간은. 이미 언약에 의해서 정해진 겁니다.

신명기 28장에 나오지요. 나를 지키는 자는 복을 받고 나를 지키지 않는 자는 저주받고. 제3의 장소가 없어요. 그 정도로 안정돼있어요. 주님의 계획이. 모호하지 않아요. 확고하고 확실하고 명백합니다. 명확하고 명백해요. 우리가 안 믿어서 그렇지.

예수 안 믿고 촐싹거리고 지 마음대로 사는 걸 부러워하지 마세요. 지옥에서 놀고 있는 거예요. 지옥에서 노는 그게 노는 거겠습니까? 난 교회 안 다녀도 돈 많이 벌었다, 부자 됐다, 그런 소리하잖아요. 그 사람은 사는 게 기적이 아니고 그 나라와 그 의를 바라보는 게 기적인 것을 몰라서 그래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사람들은 이걸 기적이라 하는데 마태복음 6장에서 그건 기적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그건 이방인들이 원하는 거고요. 진짜 기적은 그 나라와 그 의를 바라보는 눈을 가졌다는 눈이 열렸다는 이게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기적입니다. 삼성그룹의 이건희 보세요. 그 나라와 의를 바라보는 기적을 못하고 결국은 주님의 권역, 그러니까 지옥이라는 권역에 배치 받잖아요.

인간은 도망칠 수 있다, 없다? 도망칠 수 없어요. 딴 생각하지 마세요. 난 다른 해석을 어떻게? 다른 해석 찾지 마세요. 도망칠 데가 없어요. 사람들이 다른 해석, 주님의 방금 이야기한 하나님이 자기 아들 버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치는 그 해석 말고 다른 해석을 자꾸 찾는 이유가 본인 도망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해요. 난 복음에 숨이 막히겠다. 이게 목이 덜 졸려서 그래요. 호되게 목이 졸려봐야 돼요. 살려주세요, 할 때 이렇게 하세요. 사는 게 기적이 아니고 죽어가면서도 그 나라와 그 의를 알면 죽어도 괜찮아요. 그리고 살려달라는 말도 쓸데없는 말이에요. 살아봤자 죽어요. 마리아, 마르다 오빠가 살아난 건 맞지만 또 죽었어요. 참 군에 제대해놓고 다시 군대생활하고 이게 무슨 고생이에요. 마르다, 마리아 오빠 나사로 말이지요.

이스라엘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느냐 하면 본인이 본인을 살리기 위해서 자꾸 정보를 모아왔고 어떤 진리와 지식을 수집했단 말이죠. 내가 뭘 알고 있으면 날 살릴 수 있을 것인가, 한 거예요. 이게 선악구조라 했지요. 선악구조는 선과 악을 그 자체가 배후에 뭘 노린다 합니까? 내가 어떻게 살 수 있는가? 그것과 관련돼있지요. 살아도 당당하고 정당하게 살 수 있는가, 그것과 관련된 선악이에요. 그래서 선악으로 많은 지식을 구원받는 지식을 확보하게 되면 내가 사는데 더 유리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그동안 앞의 본문에서 얼마나 공격한지 몰라요. 자기 백성을 못 살게 굴고 공격하는 것은 내가 뭘 아는가가 아니라 주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보란 말이죠. 너 말고, 내가 어떻게 많은 지식을 확보하느냐 말고, 주께서 무슨 지시를 하시느냐, 자기 권역 아래서 일을 어떻게 하시는지 보라고. 어떻게 하시기는 언약대로 일하시지요. 인간은 배제해버리고.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바칠 때에 심지어 사환까지 “너는 손 떼. 이건 아버지와 아들 문제야. 대기하고 있어. 우리 일 처리하고 내려올 테니까.” 올라가면서 아들 잡는 나무 불쏘시개는 아들 등에다 짐을 지운 거예요. 여러분 등짝을 혹시 만져보세요. 간지럽다고 긁지만 마시고 뭐 있는가, 나무 등짐 있는가 보세요. 아들 장가보냈으니 난 인생 끝났다. 모든 무거운 짐 다 없어졌다. 글쎄요. 아들 있던 자리에 뭐가 또 짐이 올지.

이스라엘을 공격하시는 주님, 정말 낯선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레위기에 예언돼있듯이 망했느냐? 레위기 2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예언이 구약 끝날 때까지 계속 돼요. 그 예언에 관한 내용이. 너희들은 망한다, 이 땅에서 쫓겨난다. 왜요? 기다려봐. 역사가 진척되게 되면 우리가 왜 쫓겨났는지 그때에 너희들이 알게 될 것이다.

그 쫓겨난 이유가 뭐냐 하면 다른 신을 섬겼다는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여호와도 선택할 수 있고 다른 신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나에게 있다, 라는 식으로 자기 자신을 이해한 것이 바로 잘못이었던 겁니다. 나한테는 선택권이 있고 부처를 믿던 예수를 믿던 내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을 내가 갖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과 일치하지 않는 악마의 일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온 이유는 아버지 뜻을 이루려함이라. 요한복음 6장 39절에 나오거든요.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함이다. 요한복음 6장 처음에 보면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오천 명을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는 게 있지요. 그때 예수님께선 아버지께 기도를 하시고 떡을 떼어줬습니다. 그게 아버지 뜻이었어요. 오천 명을 먹이는 게.

사람들이 예수님의 뜻을 모르는 이유가 떡을 배부른 까닭으로 모든 이해가 스톱이 된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여기 예수님 계시고 사람들이 오천 명 있잖아요. 예수님은 그 뜻이 어디까지 돌파하느냐 하면 아버지께 돌파한 거예요. 내가 오천 명을 먹이는 것은 축복하사 아버지 뜻을 대행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뜻은 뭐냐?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거든요. 떡만 먹었으면 자기 뜻은 굳이 아버지한테 기도할 필요가 없어요. 왜? 배고팠는데 배불렀으니까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은 다 된 거예요. 이걸 가지고 요한복음 6장에서는 네가 나를 찾는 까닭은 너희들이 육의 것을 찾기 때문에 그렇다.

육을 돌파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주님께서는 떡을 떼시면서 알려준 이것이 어디에 포함되느냐? 아버지 뜻에 포함됩니다. 어떤 인간도 아버지께 나아갈 사람은 예수님 자신 빼놓고는 없다. 이게 아버지 뜻이에요. 그럼 인간은 왜 태어났습니까? 육에서 태어난 이유가 뭡니까? 육에서 태어났으니까 육 값을 하라. 육갑? 육 값을 하란 말이죠. 육신의 값을 치루라고 하는 거예요.

뭐와 비교하기 위해서? 너희들은 이렇고 나는 이렇다는 것을 대조하기 위해서 인간이 필요했던 겁니다. 마지막 아담을 위해서 기존의 아담이 먼저 태어나야 했던 거예요. 그래서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란 말은 뭐냐 하면 대리자다, 하나의 모형이었다. 모형이라면 이해 어렵습니까? 인형이었다.

예수님의 인형으로서 아담을 만들었고 아담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한 번 죄 지으니까 그 죄의 세력에서 못 빠져나오잖아요. 그런데 오실 자가 주시는 하나님의 의는 아담과 비슷해요. 아무리 죄를 지어도 의에서 벗어날 수 없고 기어이 주께서 배정한 배치한 천국의 자리에 들어가야만 하는 거예요. 그게 피조물의 운명입니다. 내 행동 따라서 내가 천당 가고 지옥 가는 그런 것 없어요.

오늘 본문에서 이걸 생각해볼 때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출애굽 해 들어왔을 때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죄는 이 약속의 땅에서 지어봐라, 마음껏 해봐라. 온갖 죄를 다 짓지요. 그런데 본인들은 죄 짓는다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니고 인간으로선 마땅히 살고자 하는 본능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그렇게 변명들 하는 거예요.

살려고 하다보니까 이렇습니다. “배고픈데 주님, 해결해주세요.” 이게 잘못입니까? 이렇게 된 거예요. 아까 분명히 했지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그런 것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요. 그런데 인간으로 따져보면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 이게 다 충족되게 되면 그게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뭐가 빠졌지요? 그 나라와 그 의는 빠져 있잖아요. 그 빠진 대가는 처절한 저주입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려서 이 땅에서 하루 산 게 기적이 아니고 살아가면서 그 나라와 의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신 것이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그 나라와 의란 막연한 게 아니에요. 너무나 구체적인 제가 방석을 깔고 앉은 것처럼 언약 위에 우리가 하나님의 그 나라와 의의 혜택 위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육이라 하는 것을, 진도 나가겠습니다. 육의 세계, 여기에 큰 장벽이 있고 장벽 뒤에 영의 세계가 있지요. 이것은 제가 한 말이 아니고 요한복음 3장에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다.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 이것 하고 여기서 그냥 장벽이니까 벽이니까 맨날 되풀이해서 반복해서 무한반복, 테이프 잘못 얹어놓으면 맨 같은 노래 반복하잖아요. 반복하면서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그 다음 날도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반복하지요.

그럼 이걸 뚫어야 영의 세계가 있다는 거예요. 그럼 주님은 여기서 기다리는가? 아니에요. 주님 쪽에서 찾아와요. 찾아올 때 이 벽을 뚫고 찾아오겠지요. 이 벽이 뭐냐 하면 육에서 영으로 넘어갈 때 아버지께 버림받은 아버지께로부터 심판 받은 또는 저주받은 이것이 칸막이 되어서 육과 영이 구분되거든요.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지금 나이가 얼마고 월수입이 얼마고 집이 몇 채고 뭐가 있든 간에 그것은 주님의 심판 받음과 저주받음의 작용인 것을 받아들이게 돼있어요. 이게 장벽이 고정된 게 아니고 주님의 영에 의해서 성도한테는 밀려서 우리에게 덮쳐버린 거예요. 이걸 아주 고상한 말로 하면 깔린다. 길 가다가 갑자기 태풍 불어서 공사장의 부실한 벽이 무너지면서 깔려버리듯이 난데없이 성령에 깔려버린 거예요. 성도는. 이건 죽음이죠. 죽음이란 말은 이게 심판이고 저주란 말이죠.

그래서 성령 받은 기쁨은 뭐냐? 깔린 기쁨, 제목을 이걸로 할까. 깔려버린 기쁨, 일찍이 저주받고 일찍이 심판 받은 기쁨, 즐거움. 깔려버렸으니까 주도권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나에게 있지 않고 나를 깔아뭉개버린, 점점 더 고상한 제목이 자꾸 나오네. 나를 깔아뭉갠 그쪽에 주도권이 있는 거예요. 성령에 주도권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 8절, 육으로 심는 자는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으로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둔다. 나를 깔아뭉개버리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 잘났다는 것밖에 없는데 이 나 잘났다는 늘 불안과 초조하게 만들어요. 계속 잘나고 싶은데 남들이 뭐라 할까 싶어서 늘 잘나고 싶은데

어떤 사건에 휘말렸는데 그 사건이 이낙연 총리와 연관돼있다, 나는 그 측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의리, 의리는 뭡니까? 자살이죠. 내가 죽게 되면 내가 죽기 전에 알았던, 내가 그동안 모아놓은 게 있어요. 나의 잘남, 나의 가치, 나의 우수함, 인생 성공했음, 이걸 살리기 위해서 내 목숨 바치는 거예요. 내가 나를 위해서 내 목숨 바친 거예요.

자살한 사람만 그럴까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내가 사는 이유는 내가 잘난 존재임을 증명하는데 있어요. 나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인생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사는 겁니다. 그러니 사는 것이 어떤 사건이나 조금만 일이 벌어지게 되면 항상 사시나무 떨 듯이 떠는 겁니다. 벌벌 떨어요. 무슨 일 하나 터지면 저게 내게 이익일까, 손해일까 염두에 두면서 벌벌 떨어요. 내 안에 내가 너무나 많아요. 쉴 곳이 없어. 꼭 가시나무 새 같아. 어쩔 수 없네. 이게 하루 이틀이 아니고 이게 고질병이에요.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이 고질병에서 못 벗어납니다.
프로이트란 정신분석학자는 인간을 딱 하나로 봤어요. 딱 하나로 보고 끝냈습니다. 아이는 엄마 없이 못 산다. 그래서 정신병자다. 아이가 태어날 때 엄마 있으니까 자기가 정상인 줄 알지요. 그런데 엄마는 늙어죽어야 됩니다. 엄마를 떠나야 돼요. 엄마를 떠나야 되니까 엄마와 더불어 있던 그것이 난데 자아인데 엄마가 떠난 그 빈자리에 뭐로 채워야 돼요?

엄마를 대행자로 계속 교체해야 되는 거예요. 그것 없으면 내가 깨지니까 나라는 그림이 이미지가 완성이 안 되니까 그래서 엄마 죽고 난 뒤에 교회 나와서 예수님이 엄마 자리에 떡 앉아있는 거예요. 하나님 찾는 겁니다. 온전한 나를 위하여. 깔려죽어야 정신 차리지. 마리아한테 빌고,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

“주여, 믿습니다.” 주님 뭐라 하겠어요? “왜 믿는데? 네가 왜 나를 믿고자 하느냐?” 진짜 그런 음성이라도 들리면 천만다행이지요. 지금 너의 문제는 네가 너를 못 버린다는 그게 문제다. 네 뒤에 악마 있는데 너는 악마가 그렇게 사주했다는 생각 안 하고 맹목적으로 무조건 나는 손해 보면 안 돼, 나는 잃어버리면 안 돼.

도대체 언제까지? 나이 한 팔십 넘으면 철이 날까. 이런 말하면 안 돼, 조심해야 돼. 진짜 개코같은 말이에요. 팔십 넘어 나이 구십, 뭐 구십, 나이 백 살을 먹어보세요. 자기 고집의 엑기스. 도대체 그 많은 백 년 살면서 단 한 순간도 나를 버리는 것이 정상이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교회 와서 그렇게 복음을 듣는다 하면서도 말이죠. 자꾸 계산하고 오늘도 이문이 얼마나 남았는지 자기 인생을 계산해서.

이스라엘이 버림받으면서 꼭 알아야 될 것은 뭐냐 하면 나의 일은 나의 일이 아니었음을. 나의 일이 나의 일이란 이것이 바로 오인 또는 착각이죠. 키 작은 사람은 왜 나는 키 큰 자가 되지 않아야 되는가, 라고 따지지 마세요. 키 작아도 네 일 아니고 키 커도 네 일 아니다. “엄마, 나는 왜 쌍꺼풀이 없어?” 쌍꺼풀이 있으나 없으나 네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다.

태어나서 일찍 희귀한 병에 걸려서 햇빛 며칠 보고 죽은 아이가 있다 합시다. 그런 애들 많잖아요. 뭐 걔는 인생 실패했다 하는데 실패한 게 아닙니다. 자기 일이 아니니까. 주의 일이거든요. 히스기야 왕 때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앗수르 군대가 십팔만 오천 명이 죽었습니다. 하나같이 귀한 집 자식이에요.

그 군의 용병들 월급 많이 받거든요. 앗수르 임금으로부터 옛날부터 군인들 돈 많이 받았어요. 위험하니까. 네팔의 구르카 용병이 영국군인이 되는데 월급으로 네팔 성인남자의 칠십 배를 받아요. 그러니까 서로 되려면 200명 뽑는데 몇 만 명 오고 그래요. 그렇게 용병들 하루아침에 십팔만 오천 명 다 죽었어요.

그건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너희들은 눈에 보이는 사람을 건드린 게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건드린 거예요. 우리가 지금 성도로 살아 있는 것은 뜻을 안 건드려서 살아 있는 게 아니고 언약이란 방석 보고 다시 날마다 살려준 거예요. 어젯밤으로 운명하셔도 괜찮아요. 어차피 내 일 아닙니다. 내 일 아니에요. 주의 일이니까 더 필요하다 싶으면 계속 살려두는 겁니다. 내 일이라고 고집부리면 부릴수록 주님한테 더 힘들게 시련을 당하게 될 겁니다.

여기에 레위기 26장 24절 봅시다. “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를 인하여 너희를 칠 배나 더 칠지라 내가 칼을 너희에게로 가져다가 너희의 배약한 원수를 갚을 것이며 너희가 성읍에 모일지라도 너희 중에 염병을 보내고 너희를 대적의 손에 붙일 것이며 내가 너희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때에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너희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 주리니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리라”

29절에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내가 너희의 산당을 헐며 너희의 태양 주상을 찍어 넘기며” 아까 읽었던, “내가 너희 성읍으로 황폐케 하고” 모든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입니까? 흩어버리고.

이게 뭐냐 하면 안전 빵인 방석을 보고 싶다는 거예요. 근데 자꾸 방석에 앉아있으면서 자기 걱정하고 있으니까 네 엉덩이 치우란 말이죠. 네 걱정은 네가 한다는 자체가 그게 죄라는 겁니다. 너의 일이 없는데 자꾸 저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 아들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 남편은 어떻게 됩니까? 맨날 우리 교회는 어떻게 됩니까? 앞으로 나는 내일 되면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할까요, 어찌 합니까, 제발 저 여자만큼은. 맨날 임재범의 <고해>처럼 말이죠.

그게 나의 일인 이상은 어떤 여자를 주던 떼돈을 줘도 그건 지옥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평생토록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율법으로 우리에게 밀어붙이죠. 자, 율법이란 것은 아까 이야기했지요. 육과 영 사이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육과 영 사이에 장벽이 있지요. 이 장벽을 예수님 쪽에서 뚫고 들어오기 때문에 뚫고 들어오면 장벽의 본질이 드러나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심판 받고 저주받아야 될 세계가 인간들이 사는 이 세계다. 그 사실을 가지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안 떨어지려고 육적으로 애를 쓰지요. 그러니까 성령을 통해서 오게 되면 주께서는 그냥 네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라고 네 손을 놔라 해도 우리는 계속 붙들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와서 레위기 26장에 나오는 그런 모든 일을 계속해서 우리한테 퍼붓는 거예요. 우리가 미워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0분 쉽시다.


20201204b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안식의 과정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강의하겠습니다.

첫 번째 강의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친다, 이스라엘을 친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것을 친다는 뜻이고요, 그 모습은 바로 어떤 인간도 자기 것을 치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이 천국이라든지 구원이라든지 주님이여 사랑을 주세요, 라고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은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일체 없었다는 겁니다.

다만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침투해서 하는데 그 밀고 들어오는 율법의 장벽 속에 거기에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들어있는 겁니다. 그 저주와 심판의 경과, 그 저주와 심판이 얼마나 혹독한가를 우리보다 앞서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그냥 말로는 약속이지만 그게 실제화로 올 때는 아주 혹독한 저주의 모습으로 이게 현실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이것은 빈말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당했던 그 혹독함을 오늘날 신약의 성도들도 동일하게 현실세계 속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어느 정도 혹독하냐?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안식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안식을 두고 아까 제가 이야기했지요. 두 개의 해석이 서로 격돌한다 했지요. 하나는 주님이 보시는 안식과 인간 쪽에서 얻고자 하는 안식이 상충되고 격돌하지요. 부딪치고 있습니다. 늘 우리 몸에서 이게 격돌이 되고 충돌이 됩니다.

그러면 주께서 주시는 안식은 거저주시는 겁니다. 그냥 주는 게 아니고 아예 거저주세요. 성도의 몸이라면 인생이라면 거저주심이 오게 되면 이미 거저주심을 받았다면 들어왔다면 바깥으로 나올 때 거저주심이 왔으면 바깥에 뭐가 나와야 돼요? 거저주심이 나와야 되겠지요. 거저주심을 받은 게 있기 때문에 거저주심이 나와야 되겠지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범사에 감사가 나와야 되겠지요. 코로나 걸려도 고맙고, 자식이 어떻게 되도 고맙고, 범사에 감사가 나와야 된다 이 말입니다.

거저주심이 들어왔을 때는 거저주심이 나오는데 그러나 인간들이 벌이는 안식은 뭐냐 하면 평소에 나의 절대적 존재가 될 때 인간은 안식이라고 이해합니다. 제일 높은 자리에 홀로 있을 때 내려다 볼 때 그걸 안식이라고 해요. 자기가 최고가 되는 겁니다. 약을 잘못 먹었지요. 선악과 약을 먹어서 자기가 최고 되는 겁니다. 이 말, 설명이 필요하겠지요.

피라미드구조에서 사장, 임원들, 밑에 대리부터 아르바이트 학생들까지 쭉 있겠지요. 여기 알바하는 학생과 신입, 대리, 그 다음에 과장, 팀장, 그 다음에 차장, 부장, 임원, 사장 있을 때 각 사람이 보는 선과 악의 기준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층마다 다 달라요. 나는 아르바이트 시급을 한 만원해주시면 안식 얻겠다. 이게 제일 밑바닥이 생각하는 거예요.

알바 밑에 뭐가 있느냐? 자기 엄마가 있는 거예요. 오늘은 네가 좀 일찍 들어왔으면 좋겠다. 이게 엄마의 안식이에요. 엄마의 하루하루 소망이고. 우리 과년한 딸이 밤늦게 잔업까지 해서 택시 타고 들어오지 말고 6시 땡 퇴근해서 일찍 들어왔으면 좋겠다. 이게 엄마의 소원이에요.

아들이 군에 갔을 때 너는 군에 갔으니까 네가 알아서 해라. 이런 엄마, 이런 아들 같으면 듬직하지요. 왜냐하면 아들의 그것이 엄마의 선악체계 밑에 종속됐기 때문에 엄마가 아들 생각보다 더 높기 때문에 엄마와 아들 사이에서 엄마가 더 높기 때문에 아들은 엄마 시키는 대로 마마보이처럼 한 거예요. 군에 안 가고 눈앞에 있을 때는 시키는 대로 했기 때문에 엄마가 자기 기준을 절대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아들이 군에 가서 어쩔 수 없이 아들과 엄마와 떨어져있다면 여러분에게 군에 간 아들이 있고 그렇게 애탄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아들이 배치된 지역에 대대장이 있겠지요. 찾아가지요. 찾아가서 우리 아들 잠은 어떻게 자고 있고 밥은 어떻게 먹는가, 편한데 배치는 받았는가, 하고 압력 넣겠지요. 이거 몇 푼 안 되는데 받으시고. 그러니까 군대라도 치맛바람을 넣을 수밖에 없단 말이죠. 그래야 엄마의 기준이 유지되니까요. 유지되게 되면 엄마는 안식하는 거예요. 마음이 편한 겁니다.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 계층마다 다 다른 거예요. 알바 학생은 일찍 나가면 마음이 편하지만 사장 입장에서는 회사가 운영이 안 되는데 마음 편하겠어요? 안 편하지요. 그러니까 사장님의 안식을 위해서 알바 학생의 안식은 포기돼야 되는 겁니다.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절대적 최고점이 마련돼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건 직책에 대한 문제고요 피라미드 나에 대해서 해봅시다.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70대까지 쭉 올라간다면 10대 아들이 생각하는 안식과 20대 안식이 다 달라요. 10대 애들은 학교에서 시험 안 쳤으면 좋겠다. 그게 안식이죠. 20대는 군에 안 갔으면 좋겠다. 30대 다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다 다를 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뭐냐 하면 이게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이상은 뭐가 성립 안 되느냐 하면 거저주심이 나오질 않는다는 거예요.

거저주심이 나오려면 어떻게 되느냐? 이 모든 절대기준은 모두 다 깡그리 무너져야 되지요. 제가 아까 첫째 시간 마지막에 했지요. 주님이 주신 장벽이 우리를 덮쳐서 우리를 뭉개버리면 그 자체가 뭐냐 하면 여호와의 안식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최고기준으로 봤을 때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거예요. 육이 영에 의해서 무너지는 거예요.

그러면 육은 뭐로 구성돼 있느냐 하면 바로 내 삶에 내가 사는 기준으로 돼있어요. 그 기준이, 내 뜻이 내 뜻대로 안 되고 누구 뜻대로? 주님의 뜻대로 아버지의 뜻대로 될 때 그걸 즐거이 기꺼이 고맙게 여기면서 받아들일 때 주님의 안식이 그 사람 속에 꽉 차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들어오게 돼있어요.

그 안식이 여기 34절에 보면, “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라도 돼있습니다. 계속 진도 나가보겠습니다. 황무함=안식. 신약에 와서 성령이 와서 우리를 덮쳐버리면 우린 졸지에 뭐가 되느냐 하면 황무함이 되겠지요. 황무함, 다른 말로 하면 황당함. 이걸 알기 쉽게 나의 무의미성, 영어로 하면, I am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의 정반대, 내가 뭐가 됐다 할 때 그것을 잘 보여준 사람이 있었어요. 옛날에 연예인 시상식 할 때 장미희란 영화배우가 한 유명한 멘트가 있었습니다. “참 아름다운 밤이에요.” 상을 타는 순간 그 조명 밝기 똑같은 건데 참 아름다운 밤이에요. 기분 좋다 이 말이거든요. 나 이 순간 즐기고 싶어, 그런 뜻이잖아요. 내가 기분 좋으니까 주변이 다 아름다운 밤이에요. 왜? 상을 탔으니까. 그런데 시험에 떨어져보세요. 그게 아름다운 밤인지.

이제 나는 나만의 의미를 가질 때 이것을 아름다운 밤이라 하는데 이것은 바로 아까 피라미드구조에서 한 층계 올라갔다는 뜻이거든요. 내가 대리하다가 과장 되었으니까 그날 밤 참 아름다운 밤이 되겠지요. 그러나 이 자체가 뭉개져야 되는 거예요. 백날해서 사장 돼봐야 아름답지 않아요. 이 세상에 어떤 곳에 가서 뭘 해도 주님의 언약적 권역 밖으로 도망칠 수 없습니다. 못 벗어납니다.

이미 이 세상은 의미 없어요. 따라서 성도가 성령을 통해서 알아야 될 것은 애초부터 의미 없음을 왜 이제야 내가 알았느냐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의미 없었는데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왜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긴가, 이게 대단한가,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 이 말이죠. 그게 후회스럽지요.

이걸 달리 이야기해서 이 땅에 인간에게는 어떠한 심각하거나 진지한 일은 인간에게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어떤 것도. 어항에 있는 물고기가 검찰개혁에 대해서 그렇게 신경 씁니까? 주제넘게. 어항은 오늘도 주인이 사료 주느냐, 안 주느냐 그것만 신경 쓰지 없잖아요. 왜? 자기 나름대로의 안식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의 안식에서 내가 벗어나야 돼요.

이 비슷한 이야기가 마태복음 5장에 나옵니다. 33절에,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네가 맹세할 쨉이 되느냐 이 말이죠.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왜? 하나님은 네가 간여할 데가 아니란 말이죠.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어딜 가도 네 것은 없고 전부 다 주님이 언약을 위해서 마련한 무대인데 네가 주제파악도 안 되고 사적인 개인적인 의미를 거기서 따로 챙기려고 하지 말라.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이것은 메시아지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 머리가 아니고 주님이 키워준 머리란 말이죠.

그럼 이 말 들으면 뭐라 하겠습니까? 그럼 내 것은 어디 있습니까, 하겠지요. 네 것이 없으니까 너는 맹세해도 소용이 없다 이 말입니다. “네 것도 없는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맹세해. 나는 앞으로 이렇게 하겠습니다, 저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맹세하지 마.” “네 것 있나?” “없습니다.” 없으면 입 다물고 거저주시는 대로 받고 살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언약을 이 땅에 이루시는 취지는 뭐냐? 언약을 거저주어서 거저주심의 그 거저가 거저 있는지를 그것만 확인할 뿐이에요. 주님께서는. 내가 무의미함을 안다면 그게 안식이에요. 주님의 안식이 살아 있어요. 내가 의미 없다는 걸.

그럼 의미 없이 인생을 성도가 살려면 성도가 사는 꼴은 어떤 꼴이어야 하는가? 전도서 5장 봅시다. 이 질문 하나하나가 중요한 질문이에요. 그러면 의미 없는 내가 살면 어떻게 사는가? 전도서 5장 구약성경 951페이지 13절부터 보면,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 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 그 재물이 재난을 인하여 패하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 것도 없느니라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 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그렇데 돼있지요.

그래서 18절에,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먹고 마시려하니까 먹고 마실 돈이 있어야 하지, 이렇게 또 따질 것 아니겠습니까, 그죠? 그냥 있는 대로 먹고 마셔. 욕심내지 말고.

여기 다른 구절 가게 되면 같은 전도서에 있는 말씀인데요, 전도서 초반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렇게 돼있어요. 전도서의 어떤 대목에 9장 9절에,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찌어다” 그렇게 돼있어요. 8절에 보게 되면,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 주신 은혜에 대해서 마음껏 누리면서 살라는 쪽으로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여기 9장 7절에 보면,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이렇게 돼있어요.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받는 일은 뭐냐? 밥그릇의 밥을 맛있게 먹는 거예요. 영광 돌린다고 별나게 하는 게 아니고 너무 맛있게 먹으면 살찌니까 곤란하고.


하여튼 맛있게 감사하면서 안 주셔도 되는데 주셔서 감사히 먹겠다고 먹는 거예요. 이게 어렵습니까? 밥 먹을 때 아프리카 아이들까지 걱정하지 마세요.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아프리카 아이들보다 지금 앉아있는 내가 더 궁핍해. 주님께서 이미 우리를 규정을 했잖아요.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무것도 아닌데 왜 맛있는 음식을 주고 포도주를 주고 아내를 주고 이렇게 먹을 걸 주십니까? 거저, 북한말로 고조, 고조, 이것 거저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거저주신 것이 누적이 되어서 내 몸을 이루었고 한 평생을 이뤘다면 평생 자체가 나의 일이 아니고 누구 일이에요? 주의 일이죠. 주님께서 나 좋으라고 주신 게 아니고 주님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서 먹이시고 입히신 거예요. 그러니 하루하루 기쁘고 즐겁게 감사하며 살아라. 이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이러한 말씀이 기초가 전도서에서 뭐냐 하면 너 아무것도 아니야. 허무해, 라는 것을 깔고 즐겁게 살아라가 되거든요. 허무하기 때문에 안 즐거운 일이 없게 하라 이 뜻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짜증내는 이유는 결국 전도서에 의하면 뭡니까? 내가 이 지경으로 살 위인이 아닌데. 맨날 허무 안 하데.

자기 자신을 너무 가치 있게 봐버리게 되면 도대체 그 가치를 유지하려면 얼마나 자기 자신이 조적해야 됩니까?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닌 나를 여기서 억지를 부려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쪽으로 계속 조작하니까 이게 실패로 끝나니까 그 결과는 자살이죠. 그냥 죽는 거예요. 난 이러고는 못 산다. 이런 거예요.

아들 귀하게 키웠는데 아들이 연애해서 시어머니 마음에 하나도 들지 않은 며느리를 데려왔다. 그때 시어머니는 나는 이러고는 못 산다. 내가 눈 감기 전에 나는 너를 내 며느리로 인정 못하겠다. 그러면 이건 누가 손해입니까? 시어머니 지가 손해지요.

그러면 며느리가 복음을 안다면 전도서를 안다면, “어머님, You are nothing.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게 내가 하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죠. 당신은 이 며느리, 저 며느리 골라낼 그런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이 자식 키운다고 동부화재 다니면서 얼마나 고생을 했냐 하는데, 그러니 이건 동부화재가 문제라. 동부화재가 뭐예요, 이러면 이야기가 다 끝난 거예요.

어떤 여자가 우리나라 사슴 치는 농장에 결혼을 했는데 베트남 여자에요. 그 여자가 얼마나 가난한지 자기뿐만 아니고 그 집안 누구도 베트남 글을 몰라요. 그래서 시집에서 베트남 글도 가르쳐주고 초등학교도 입학시켜서 다니게 해서 글을 알게 해준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베트남 여자가 한국말을 알고 글도 알고 저건 병원이구나, 저건 식당이구나. 배고프면 가면 되겠구나. 이걸 알고 난 뒤에 눈물을 흘리면서 하는 이야기가, “내가 어릴 때 글 모르는 게 딴 건 불편한 것 없었는데 친구들이 나를 무시한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노래방에서 자기는 노랠 못 불렀어요. 가사를 알아야 글을 알아야 노래를 부르지요. 무시당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그 베트남 여자가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아무것도 아닌데 주변에 글 아는 자가 등장했어요. 그 순간에 나는 왜 저처럼 되지 못하느냐, 해서 아무것도 아닌 게 갑자기 나는 글을 배워야 되겠다는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다. 바로 이게 인간세상이라면 주님은 반대로 나가요.

소위 똑똑하고 잘 안다는 것을 아무것도 아닌 쪽으로 전부 다 환원시키는 작업을 주께서 하시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 안에 주님이 안식을 주시는 겁니다. 안식을 주는 방법은 주님이 이 땅에서 얻어낸 방법을 그대로 적용을 시켜요.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아버지께 버림받았다. 그 사실을 우리 안에 집어넣어버려요.

나는 성도이기에 아버지께서 버림받고 되찾는 작업이 제 안에서 이루어주옵소서. 성도이기에 마지막 이스라엘이기에 하나님이 진짜 최후로 결정한 참된 이스라엘이기에 오늘 레위기에 나오는 이 버리고 다시 택하는 이 작업이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시켜주는 것을 감사합니다. 그게 바로 감사의 이유가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버리고 황무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이게 내가 원하는 안식이라고 그들에게 딱 보여줄 때 내가 잘났다고 설치는 모든 일이 주님의 안식을 완전히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호작질하는 짓임을 아는 것, 그 아는 순간에 안식이 되는 겁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걸 이렇게 정리합시다.

율법의 기능이 내 속까지 밀치고 들어온다. 율법의 기능이 내 속까지 들이닥치는 거예요. 일본순사가 조선족 가정에 허락도 없이 수색영장도 필요 없이 빠가야로 하면서 호작질하는 것처럼 내 허락 없이 안식을 위한 율법의 기능이 온화한 평안한 내 가정을 쑥 들어와 버리는 거예요. 막무가내로 들어오지요.

그러면 여기서 들어오게 된 들어와야 될 이유가 있어요. 율법은 인간들은 하나의 거울로 봐요. 여러분들이 선팅이 너무나 짙게 된 차 안에서 앉아있을 때 지나가던 어떤 여자 분이 차창을 거울삼아 얼굴 고치고 머리 만질 때 앉아있는 사람은 기가 차지만 지는 그것도 모르고 보지요.

율법 안에 계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요. 그런데 인간은 법을 보면서 내가 이 정도로 지켰나, 안 지켰나, 내가 이 정도 훌륭하나, 안 훌륭하나, 하고 율법을 자기 일방적으로 자기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율법을 활용하는 거예요. 이것을 거울기능이라 해요. 거울기능의 특징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들여다보는 거예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뭐가 없느냐 하면 폭이 없어요. 표면효과기 때문에. 그리고 거울에 비친 이미지는 내가 보여준 것만 되받아올 뿐이에요. 진짜 내 모습은 두께, 폭, 인간성 다 볼 수 있는 거울을 없어요.

그런데 여기에 율법의 완성 또는 율법이 와서, 율법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율법이 살아서 꿈틀거리면서 내가 보고자 하는 내 이미지를 찢어버리고 깨버리고 전혀 다른 이미지가 율법 속에서 튀어나와서 내 안을 공격할 때 이것이 바로 말씀의 살아 있는 기능입니다. 내 잘남을 위해서 보던 성경이 아니라 그 안에서 십자가가 튀어나오는 성경, 주님의 심판과 무서움과 엄위함이 튀어나와서 네가 어딜 함부로 법을 보느냐는 식으로 나를 공격해댈 때 우리는 율법에 의해서 테러당한 거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대나라에 왔을 때 유대사회가 혼란에 빠진 이유가 진짜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신 분이 각자 집에서 율법을 거울로 보는 사람들을 상대하여 진짜 율법의 완성자가 심판과 저주로 내쳐버리니까 그들은 대혼란에 빠진 겁니다. 집에 손거울이 있는데 화장대에 거울이 있는데 그냥 내가 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어느 날 보니까 거기서 척키라는 괴물인형 같은 게 튀어나온다면 또는 머리 풀고 아가씨가 티비 브라운관에서 기어 나온다면 기절초풍하지요.

사실은 성령 받으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나를 잘난 척하려고 본다는 자체가 그걸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고 성령 안에 살아 계시는 원래 성경의 저자,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시는 그 예수님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언급할 때 우리는 내 모습을 볼 자격조차 안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안식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해봅시다. 그러면 영원한 안식이 레위기에서 이야기한 예언이 어디서 끝나느냐? 우리가 안식한다는 게 레위기 26장 34절, 이것이 예언이거든요. 예언의 끝이 어디서 나오는가? 예언의 끝이 70년으로 끝날까요, 아니면 70이레로 끝날까요? 이게 굉장히 어려운 문젠데 70년으로 끝난다는 것은 역대하 36장 21절에 나옵니다. 여기는 예레미야가 예언한 대로 70년으로 끝나요. 70년 끝나면 다시 자기 백성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기원전 605년에 시작해서 포로 잡히고, 첫 번째 포로 잡힐 때에요. 536년, 첫 번째 성전이 부셔지고 다시 세워지는 기간이 몇 년이냐? 70년이에요. BC605~536, 70년 동안 약속 맞춰서 오게 되는 이게 ➀번 경우에요. 70년 만에 끝난다. 현재 유대인들은 이걸 주장하는 거예요. 그러나 다니엘서에선 70년이 아니고 70이레에요. 70 곱하기 7일로 묶어진 것, 7일로 묶어졌으니까 창세기 1장과 2장을 생각하면 되지요.

하나님이 며칠 만에 천지를 창조했습니까? 7일 만에 창조했지요. 7일 만에 끝나고 완성을 했지요. 완성의 본질이 다 구현이 될 때 이 70년은 끝난다. 이게 70이레에요. 묶었으니 풀면 안 됩니다. 70 곱하기 7 해서 490년, 이렇게 계산하면 안 돼요. 이건 묶음을 푸는 거예요. 단위가 일의 단위거든요. 7이 아니고. 7일을 한 단위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7일이 7년이 아니고, 그리고 77년도 아니에요. 7 곱하기 7이 아니란 말이죠. 이것은 바로 완성이니까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도약했던 그 상태가 70이레가 되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70년은 인간이 속해 있는 시간대가 70년이에요. 월, 달, 일년, 이년. 이 비슷한 이야기가 누가복음 4장에 나오는데 희년이 뭐냐 하면 7곱하기 7, 49+1=50년, 이게 희년이거든요. 구약에서. 희년인데 예수님께 지금 내 때가 바로 그때다. 50년 다음에 예수님의 경우엔 51년이라는 게 없어요.

50년 자체가 예수님 안에 쑥 들어가 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인간의 시간을 적용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완료한 시간을 우리한테 적용받게 되는 겁니다.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고 완료되어서 중지된 시간이죠. 멈춰버린 시간이에요. 하루가 천년 같이 천년이 하루같이, 그런 시간대가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70년 동안 안식했으니까 그 다음부터 다시 그 땅에 돌아오면 되지 않겠느냐? 역대하 봅시다. 성경이 예언과 시련을 연결시키는 것은 복잡하긴 하지만 알아야 될 사항이기도 합니다. 역대하 제일 마지막에 36장 21절에 보면,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이렇게 돼있지요.

그리고 난 뒤에 나오는 책이 에스라 나오고 느헤미야 나오지요. 이건 뭐냐? 70년 지나서 이제 성전 지어라, 하고 성전 짓도록 이방나라가 부추겨서 자금 다 대주고 고향에 와서 성전을 짓는데 그 성전은 어떤 성전이냐 하면 허물어져야 될 성전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완성의 때가 아니란 말이에요. 완성의 때가 아닌데 왜 성전을 짓느냐, 완성할 때 다 지으면 되지 왜 짓느냐?

완성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 성전이 허물어졌느냐, 무슨 죄 때문에 허물어져야 했느냐를 그걸 되풀이하는 현상이 나타나면 그게 완성입니다. 쉬운 예로 우리는 뭐로 구원받아요? 십자가로 구원받지요. 십자가라는 것은 내가 지식을 보유하게 되면 그거는 구원이 안 돼요.

예를 들면 제가 지난 수요일에 설교한 건데 어느 숲속의 호수에 물귀신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드렸잖아요. 그러면 물귀신 나온 것을 구경하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그냥 물귀신은 너는 너고 나는 나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물귀신에 같이 묶여서 갑자기 재수 없어서 붙잡혀서 같이 호수 물속으로 들어가 버리면 진짜 물귀신 집안의 가족이 되겠지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그냥 관람용이 아니고 십자가에 묶여서 내가 십자가 속으로 쑥 들어가는 거예요.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그 블랙홀에. 그렇게 되면 내가 지킨다는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내가 밥 먹고 아까 즐기고 기뻐하는 것조차도 뭐가 되느냐? 십자가의 고난이 되는 겁니다. 고난치고는 너무 밥을 많이 먹을 수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웃고 즐기고 아내와 함께 생각하는 것, 전부 다 십자가의 고난이 되는 거예요.

자리가 어디냐? 십자가 안이기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 안에는 내가 지금 몇 살이냐, 몇 년 남았느냐, 그런 것 필요 없어요. 시간이 정지돼있기 때문에. 안식의 완료상태에서 누리고 있는 것을 우리는 증거하는 겁니다. 두 번째 시간할 때 뭐라 했습니까? 거저주심이 우리 몸을 통해서 뭐가 나와야 된다? 고저, 고저, 자꾸 거저주심이 나와야 된단 말이죠.

고구마 삶을 때 젓가락으로 찔려보지요. 저 같은 경우에는 젓가락으로 쑤셔서 관통하면 다 익었고 관통 안 하고 부딪히는 게 있으면 빼고 하거든요. 십자가로 쑤셔서 저쪽으로 젓가락이 나오면 그 사람은 복음 아는 사람이고 성도고, 아니면 분명히 십자가 집어넣었는데, 나 십자가 안다, 이렇게 나오면 그건 다시 빼야 됩니다. 덜 익은 겁니다. 덜 익은 정도가 아니고 진짜 성령 안 받은 사람이죠. 나 십자가 아는 사람인 것을 좀 알아줘, 이런 식으로 나오면 참 곤란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70년을 70이레로 바꿉니다. 바꾸면서 여기서 7+62+1인데 7은 뭐냐 하면 성전을 짓는 거예요. 경남 합천에 가면 뭐가 있느냐 하면 50년대부터 80년대의 영화세트장이 있어요. 제가 여러 번 가봤어요. 일종의 성전 세트에요. 이 세트는 62이레 때 무너져야 돼요. 그러니까 70이레는 뭐냐 하면 왜 이렇게 약속의 땅에 온 이스라엘 민족이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그 땅을 건사하지 못하고 추방돼야 했던가를 되풀이해서 보여주는 그러한 기능이 살아 있으면 그 사람은 어디 속했습니까? 70이레에 속한 사람이죠.

7이레는 성전 허물어졌음. 허물어진 터 위에 40년 짓는 성전 말고 46년 동안 짓는 성전 말고 단 며칠 만에? 사흘 만에 짓는 성전, 그게 1이레에요. 하나님이 함께 있다가 떠나고 다시 하나님이 새로운 방식의 묵시세계에 천국세계에 부합되는 새로운 완성된 성전을 짓는 그 기간이 70년에서 70이레로 바뀌는 과정 속에 이게 필요한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70이레로 오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영을 받은 사람은 뭘 반복하느냐 하면 왜 나는 무너져야 되는가, 그리고 왜 무너지는 것이 그렇게 즐겁고 다행스럽고 이게 기적인가? 그것은 주님의 완료된 성전이 내 안에 작용하기 때문에 바로 내 안이 주님이 만든 마지막 때의 성전이다. 그것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겁니다. 70년, 70이레 이것을 계속 반복하는 거예요.

언젠가 주일설교에서 이걸 설교했잖아요. 직류는 방향이 한 방향이지만 교류는 집과 발전소 하고 전류가 왔다 갔다 한다고요. 60헤르츠 같으면 1초에 120번을 켰다 껐다를 하는 거예요. 파동 때문에. 1초에 켜졌다 꺼졌다를 두 번씩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매일같이 우리의 육신 때문에 이미 구원받았지만 다시 이 십자가가 왜 구원이냐, 능력을 보여주는 십자가 안에서 물귀신 안에 들어가서 늘 반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가 그걸 하라는 말이 아니고 자동이에요. 자동으로 하게 돼있어요. 복음 듣고 돌아서서 또 딴 생각하고 또 성령 오셔서, “됐네, 이 사람아. 욕심 부리지 마. 주제 파악해야지. 또 네 자신의 가치와 잘남과 너의 우수함과 남한테 안 지려는 오기, 그런 쓰레기 또 생겼구나. 그러면 또 쓰레기 비워줄게.” 십자가 죄 용서로 또 해서 역시 십자가 최곱니다. 또 감격의 기쁨의 눈물 흘리다가 돌아서서 그런데 왜 우리 애는 공부를 못합니다. 항상 교류, 방향이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어요. 어떤 인간도.

성령 받은 사도 바울도 자기가 모든 걸 감사할 줄 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육신의 가시, 그것도 그냥 가시가 아니에요. 뺄 수 없는 가시, 장미가시면 빼버리면 그만이죠. 사탄의 가시죠. 악마의 가시가 박혀서 그걸 빼달라고 세 번 기도했는데 주님의 말씀은, “됐네, 이 사람아.” 끝났어요. “그만 됐네, 이 사람아. 네가 약하기 때문에 은혜야. 네가 강하면 은혜가 아니라 자랑이 돼.”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약한 데서 강함이라. 약한 그 자체가 주님의 강함으로 나오도록 주께서 하신 거예요.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쫓겨 갔는데 그 자체가 안식이 되게 하시는 것. 주인공이 내가 주인공일 수 없단 말이죠. 주인공은 애초부터 주님이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자, 36절하고 마치겠습니다. “너희 남은 자에게는 그 대적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으로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 이 말은 뭐냐 하면 이게 분명히 약속의 땅에서 나가라 했는데 안식한다고 했는데 꼭 나는 약속의 땅에 살고 싶어요, 하고 억지로 이 땅을 고집한 자들이 있어요. 자기가 그 땅에 살만한 어떤 자격이라도 된 듯이.

첫째 강의에 제가 이런 이야기했지요. 주님의 권역을 피하려 도망칠 장소는 없다. 약속의 땅을 비우라 했잖아요. 고집스럽게 알박기도 아니고 남은 자들이 있지요. 남은 자들 지가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적들을 보내버립니다. 후다닥 놀래서 벌벌 떨면서 예, 나갈게요, 하고 나간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성도가 있다면 성도 안에 빈 운동장을 항상 유지하라 이 말이죠. 내 것으로 꽉 채우지 말고 나의 잘난 그 옛날 상장, 상장 받긴 받은 적 있어요? 상장이나 개근상 이런 것, 과거에 내 자식 잘 키운 것, 참 이건 아무도 장담 못한다. 자기가 과거에 장사하면서 콩나물 팔아서 애 키웠다는 그런 것 있잖아요. 그런 것 쫌 남겨두지 말란 말입니다.

오늘 제목은 쫌이다. 제발 please, 제발 좀, 그런 것 좀 남겨두지 말고 자기 안에 공백을 두라 이 말이죠. 허공 알지요. 허공 속에, 조용필의 <허공>. 그 허공, 빈자리. 수고하고 무거운 짐 다 거둬내세요. 다 퍼내세요. 껍데기만 갖고 있으면 돼요. 그냥 껍데기만 갖고 빈껍데기 밖에 없음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내 안에 나 없다, 이걸 자랑하란 말이죠.

“아이고, 자식 어떻게 그리 잘 키웠습니까?” “내 안에 자식 키우는 재주 없어요. 주께서 하셨지, 뭐.” 내 안에 내가 없어야 돼요. 참 귀한 말씀인데 돌아서면, 돌아서는 게 문제라. 돌아서면 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내 안의 빈자리에서 또 쓰레기로 꽉 차인, 완전히 치매 할머니만 그런 게 아니라 구청에서 와서 4톤을 걷어내도 다음 며칠 지나면 또 온 동네 쓰레기는 다 있듯이 우리는 쓰레기 모으는 재주가 있어요? 쓰레기 모으는 게 취미입니까? 온갖 쓰레기, 너는 좌파고 나는 우파고 나는 우파쓰레기.

나이 들어보세요. 리모컨 들고 1초에 두 번씩 바뀌어요. 할 일 없이 티비만 드르륵 드르륵, 고장 나서 수리 부르고 또 드르륵 드르륵. 걷어내는 것, 들어올 때는 항상 걷어낼 준비를 하세요. 다 토해낼 준비를 하세요. 그래서 주여 제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주께서 거저주신 주의 것만 있을 뿐입니다, 라는 고백이 있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한테 안 지려고 평생 동안 힘들게 살아가고 있고 남한테 무시 안 당하려고 남한테 기죽지 않으려고 오기와 고집으로 납같이 우리 안에 가득 들어있는 죄악된 것을 성령께서 예수님의 피로 다 걷어내 주시고 예수의 피 용서하심만 가득 들어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